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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얼마전 독일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업무를 마치고, 사장님과 함께 출장지 인근의 쾰른 대성당을 들릴 기회가 있었습니다. 성당 내부를 보며, 종교에 관계없이 어떤 경건한 마음도 들고 좋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관람을 마치고 성당 바깥으로 나올 때 였습니다. 성당 문 앞에는 걸인이 앉아있었고, 저는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어 유로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유로 지폐를 그 분께 건네지 못했습니다.
1) 경험상 적선을 하는 경우에도, 걸인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 쥐어진 돈을 바탕으로 스스로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제가 추구한 선(善)이 과연 진정한 선이 맞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2) 또한 제가 행한 선이 만약 뜻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 (e.g. 적선을 받은 걸인이 본인의 경험을 동료들에게 말하며, 다수가 성당에 몰려들어 성당 주변의 질서와 치안을 해치게 될 가능성), 도리어 악(惡) 혹은 악업을 쌓는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3) 심지어는 유로지폐를 잡기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는 것을 그 분이 보았다면, 결국 아무것도 적선하지 않는 저를 보며 실망하는 그 또한 제가 쌓은 작은 업이 아니었는가 하는 마음의 먹먹함이 있습니다.
만약 동일한 혹은 유사한 상황이 제 삶에서 다시금 재현된다면, 불교의 가르침에서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답변입니다.
서구의 이슬람사원이나 가톨릭의 옛 성당들의 웅장한 모습을 보면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종교적 이념의 형상화를 위해서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동원되어 건립한 걸작들입니다.
한편,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 간의 싸움으로 독일인구의 1/3을 사라지게 했다는 30년 전쟁(1618년~1648년), 근 200년 동안 지속되다가 서구의 패배로 끝난 십자군 전쟁(11세기 말-13세기 말), 오늘도 해외 뉴스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투 등, 서구에서 일어난 거의 모든 전쟁의 근원에 이런 서구 종교(셈족의 종교)가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 참으로 아이러니컬합니다. 종교 성인의 가르침 대부분은 본질적으로 '선(善)'하겠지만 종교가 조직화 되고, 제도화 되고, 집단화 되면 그 근본 가르침과 상반된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질문에서 "성당 문 앞에는 걸인이 앉아있었고, 저는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어 유로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유로 지폐를 그 분께 건네지 못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세 가지 의문을 제시하셨습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사람이 행동을 할 때, 그 동인(動因)은 이성(理性)이 아니라 감성(感性)이라는 점입니다. "이성은 감성의 시녀"라는 격언도 있습니다. 즉, 자신의 감성을 합리화 하기 위해서 이성이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성적 사유를 통해서 결론을 내린 후 어떤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감성과 그로 인한 행동을 합리화 하기 위해서 작동하는 것이 이성이란 것입니다.
질문에서 '생각의 나무'님께서 1), 2), 3)으로 번호를 붙여서 제시하신 의문 모두 '이성적 사유'입니다. 성당을 나오는 순간이 아니라, 평소에 가졌던 이성적 사유, 또는 적선을 하지 않은 채 떠나버린 후 자신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에 대해 반성하면서 떠오른 이성적 사유일 겁니다.
어찌 되었든, 결론은 '생각의 나무'님께서 성당 앞 걸인에게 적선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 순간에 적선하고픈 감성이 작동하지 않았고,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서 "불교의 가르침에서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물으셨는데, 제가 독일 그 성당 앞의 그 걸인이나 구걸의 상황을 목격하지 않았기에, '바로 그 일'에 대해서 어떤 지침을 말씀드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든 자를 치료해 주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는 종교가 아니라, 국가가 해야 할 일입니다. 과거 전 인류가 가난에 찌들었을 때는 주변에 굶는 사람도 많았고, 병이 들어도 치료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국가도 이들을 다 감당하지 못했기에, 종교단체에서 이들을 거두었습니다. 가톨릭의 경우, 소설 로빈훗에서 보듯이 원래 권력지향적인 종교였는데, 프랑스혁명 때 성당에 돌을 던지는 민중들을 보고서, 위기를 느끼고 대오각성하여 '가난한 자에 대한 적선'과 '타종교에 대한 관용'을 기치로 내걸고 변혁을 시도합니다(예수회 중심의 변혁). 그 후 200년이 지나면서 지금 우리가 보는 가톨릭교단의 '정의롭고 자비로운' 모습으로 성숙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을 보면, 어디에도 의지할 것이 없을 때 "집도 절도 없다."고 합니다. 이를 거꾸로 해석하면, 집이 없는 사람은 절에서 받아주었다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경우도 부모 없는 어린아이, 자식 없는 노인 등 외로운 이들을 모두 절에서 거두었습니다. 다만 '고아원'이나 '양로원' 같은 간판만 달지 않았을 뿐이지, 과거 우리나라의 사찰은 '티 안 내는 고아원, 양로원'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이와 다릅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독일의 경우도 사회보장제도가 갖추어져 있기에, 사찰이나 성당이나 교회 등 종교시설에서 거두지 않아도, 사회 제도적으로 이들 약자를 보살피는 시설이 있습니다. 따라서 '구걸'이나 '적선'이라고 해도, 지금의 사회에서는 그 겉모습만 적선이나 구걸일 뿐이고, 실제는 다양한 의미의 행위일 수 있습니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갖추어져 있어도 이를 몰라서 종교시설 앞에서 구걸을 하는 분들도 적지 않을 겁니다. 또, 흔치 않겠지만, 구걸의 시늉을 하여 쉽게 돈을 모아서 의식주를 해결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또는 사회복지시설의 제도적 구속이 싫어서 구걸을 통해 돈을 모아 최소한의 물질적 필요를 충당하면서 자유로운 삶을 사는 분도 있을 겁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실제로 생계가 막연하고 의식주에 곤란을 겪기에 구걸하는 분들이 대부분일 겁니다.
슬퍼도 울고, 기뻐도 울고, 외로워도 울고, 너무 행복에 겨워도 울 수 있듯이 울음에 실체가 없습니다. 울음이 울음이 아닙니다. 또 기뻐도 웃지만, 비웃음도 있고, 냉소도 있고, 간지러워도 웃고, 기가 막힌일을 당해도 너털웃음이 나오듯이 웃음이 웃음이 아닙니다. 웃음에도 실체가 없습니다. 모든 곳이 우주이기에 우주가 우주가 아니고, 모든 것에 길이 있기에 길이 길이 아니며, 모든 것이 물질이기에(유물론) 물질이 물질이 아니며, 모든 것이 마음이기에(일체유심조) 마음이 마음이 아닙니다.
김성철 저, <화엄경을 머금은 법성게의 보배구슬>, pp.142-157 참조.
이와 마찬가지로 엄밀히 보면 구걸이 구걸이 아니고, 적선이 적선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구걸이 있고, 여러 가지 적선이 있습니다. 진짜 구걸도 있고 가짜 구걸도 있으며, 진짜 적선도 있고 가짜 적선도 있습니다.
상대방의 구걸이 진정한 구걸인지 아니면 까짜 구걸인지, 그리고 걸인이 속한 나라에 사회보장제도가 철저히 되어 있는지 아닌지는 내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적선, 즉 보시인데 그 때의 내 마음이 어떠한지(순수한지 아닌지) 판별하여 보시 여부를 결정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지침은 대승불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용수 스님의 제자인 아리야제바 스님이 저술한 <백론(百論)>에 실려 있습니다. <백론>에서는 보시, 즉 베풂을 '청정하지 못한 베풂'과 '청정한 베풂'의 둘로 나누는데, 원문과 번역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外曰】 何等名不淨施.
【반대론자】 무엇을 청정하지 못한 보시라고 부르느냐?
【內曰】 爲報施是不淨. 如市易故(修妬路). 報有二種. 現報後報. 現報者. 名稱敬愛等. 後報者. 後世富貴等是名不淨施. 所以者何. 還欲得故. 譬如賈客遠到他方. 雖持雜物. 多所饒益. 然非憐愍衆生. 以自求利故. 是業不淨. 布施求報. 亦復如是.
【중관논사】 23. 어떤 과보를 얻기 위한 보시가 청정하지 못한 것인데 이는 시장에서의 거래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수뜨라, 經). [보시에 대한] 과보에는 두 가지가 있다. 지금 받는 과보(現報)와 나중에 받는 과보(後報)이다. 지금 받는 과보는 칭찬받거나 존경받거나 사랑받는 것을 말한다. 나중에 받는 과보는 후세에 부귀를 누리는 것 등을 말한다. 이[런 것들을 위한 보시]를 청정하지 못한 보시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보답으로 무엇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다른 지역으로 멀리 간 장사꾼이 비록 갖가지 물건을 가지고 가서 그 지역 사람들에게 많은 이득을 주기는 하지만, 이는 그 사람들을 가엽게 여겨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행동을 청정한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어떤 과보를 받기 위해 보시를 하는 것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外曰】 何等名淨施.
【반대론자】 그러면 무엇을 청정한 보시라고 부르느냐?
【內曰】 若人愛敬利益他故. 不求今世後世報. 如衆菩薩及諸上人. 行淸淨施. 是名淨施.
【중관논사】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공경하여 이익을 주고자 하기에 현세나 내세의 과보를 바라지 않고, 마치 온갖 보살들과 상지인(上智人)들[이 행하는 것]과 같이, 청정한 보시를 행하게 된다. 이를 청정한 보시라고 말한다.
김성철 역, <백론/십이문론>(경서원 간, 1999년)에서
다시 정리하면,
'청정하지 못한 베풂(더러운 베풂)'은 '보답을 바라는 보시'로 다음과 같습니다. * 칭찬 받기 위한 보시 * 존경 받기 위한 보시 * 사랑 받기 위한 보시 * 나중에 부귀를 누리는 등의 과보를 받기 위한 보시 이는 장사꾼이 물건을 팔아서 이득을 주지만, 자신도 이익을 얻는 것과 같은 '시장에서의 거래'와 같은 보시라고 합니다. '청정한 베풂(깨끗한 베풂)'은 다음과 같습니다. *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공경하여 이익을 주고자 하기에 현세나 내세의 과보를 바라지 않고 행하는 보시 |
누군가가 구걸할 때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나의 마음뿐입니다. 구걸하는 사람의 속 마음이나 그가 속한 나라의 사회보장제도의 효율성 등은 내가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위에서 인용한 <백론>의 가르침을 거울로 삼아서 내 마음을 살펴 보아서 누군가가 구걸할 때 적선 여부를 결정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
첫댓글 정말 현답입니다. 감사합니다. 법광합장.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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