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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커피] (6) 다윗의 볶은 곡물이 커피인 이유
사람을 구하기 위해 바친 ‘귀한 선물’
커피가 ‘진심 어린 선물’이란 의미를 갖게 된 사연 역시 성경에 담겨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에서 야곱의 불콩죽으로 이어지는 창세기는 커피의 각성 효과와 에너지 증진 효과를 비유로 들려주는 대목이 있다.
구약 성경 연대표에 비춰볼 때, 기원전 21세기에서 기원전 17세기에 걸친 세 족장(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시대를 지나 여호수아를 시작으로 한 역사의 시대가 펼쳐진다. 마태오 복음을 따라 예수의 족보를 따져 보면, 27대조(루카 복음은 42대조) 할아버지가 다윗이다. 다윗의 삶을 전하는 사무엘기 상권 25장 18절에 커피가 ‘볶은 곡물’로 등장한다.
볶은 곡물을 커피로 풀이한 인물은 독일 킬대학교 윤리철학 교수이자 언어학자인 조지 파스치우스(George Paschius, 1661~1707)였다. 그는 1700년 라이프치히에서 출간한 라틴어 논문 「고대 이후의 새로운 발견」에서 “다윗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아비가일이 선물한 볶은 곡물 다섯 스아는 커피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라틴어 표준 성경인 「불가타」(Vulgata) 와 히브리어 원본의 표현을 분석해 볶은 곡물은 불에 의해 볶거나 말린 곡물을 뜻하는 것임을 밝혀냈다.
미국 언론인이자 「올 어바웃 커피(All about coffee)」의 저자인 윌리엄 우커스는 다윗보다 1000년가량 앞선 시대에 묘사된 ‘야곱의 불콩죽’이 커피일 수 있다는 에티엔 뒤몽(Etienne Dumont, 1759~1829)의 견해와 볶은 곡물이 커피라는 관점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아비가일의 ‘볶은 곡물’(한국 주교회의 발행 「성경」은 ‘볶은 밀’로 옮김)은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간절함이 밴 선물이었다는 점에서 일반 곡물과는 가치가 다르게 비쳐진다. 당시 상황은 급박했다. 다윗이 사울의 시기를 받아 쫓기는 신세가 돼 나발에게 식량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화가 치민 다윗은 400~600명의 무리를 이끌고 나발을 칠 기세였다.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이 발 빠르게 나서 ‘빵 이백 덩이, 술 두 부대, 요리한 양 다섯 마리, 볶은 곡물 다섯 스아, 건포도 백 뭉치, 말린 무화과 과자 이백 개를 여러 나귀에 싣고 다윗을 찾아가 바쳤다.(1사무 25,18 참조)
스아는 요즘으로 치면 쌀 4되 분량이다. 1되가 1.6kg 정도이니 다섯 스아는 32kg에 달한다. 이를 단순히 ‘밀’로 보기에는 다윗이 거느린 무리의 규모와 비교할 때 그 양이 부족하다. 아비가일이 인색하게 식량을 바칠 상황이 아니었다. 32kg을 커피로 본다면 넉넉하고도 더욱 귀한 선물이 된다.
볶은 곡물이 느닷없이 커피로 해석된 것도 아니다. 다윗의 증조할머니 룻이 다윗의 증조부 보아즈를 만난 과정을 소개한 구약 성경 룻기(2,14)에도 커피가 볶은 곡물로 묘사된다고 에티엔 뒤몽은 주장했다. 이 구절에서 보아즈는 굶주린 룻에게 빵을 주어 식초에 찍어 배불리 먹게 한 뒤 ‘볶은 곡물’을 내어준다. 굶주린 자에서 배를 채울 빵, 그리고 에너지까지 북돋울 수 있는 커피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선물이다.
다윗은 사울에 이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에 올랐지만, 훗날 예수님께로 이어지는 왕가를 연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이야기 속에 커피가 거론되는 것은 정색하고 진위를 따질 일이 아니다. 300여 년 전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조지 파스치우스가 대학 캠퍼스에서 급속히 퍼지며 인기를 끌던 커피를 ‘볶은 곡물’로 언급함으로써 많은 젊은이로 하여금 성경을 펴보게 했는지를 상상하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진실이란 종종 그 자체보다는 쓰임새가 중요하다.
[사유하는 커피] (7) 시바의 여왕, 커피로 솔로몬을 홀리다
부부의 연 맺게 해준 사랑의 묘약
‘독서광’으로 소문난 미국의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가 1813년 정치적 경쟁자이던 토머스 제퍼슨에게 보낸 크리스마스 편지에서 성경의 잠재력을 은유했다. 그는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책이다. 세상의 모든 도서관보다 더 많이 나의 철학을 담고 있다”고 적었다. 자신의 풍부한 지식을 은근히 뽐내면서도 성경에 대한 경외심을 드러냈다.
한 권의 성경에 담긴 콘텐츠가 수만 권의 책을 능가하는 것이 놀랍다. 그 비결을 비유와 상징이라는 표현법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성경의 한 구절은 다양한 추정과 해석을 자극하며 여러 갈래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런 스토리텔링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 중 하나가 기원전 540년경에 쓰인 열왕기 상권 10장이다. 에티오피아 남부와 예멘에 걸쳐 형성됐던 것으로 보이는 시바(Sheba)지역을 지배하던 여왕이 솔로몬 왕을 알현한 사연이 그려진다. 시바의 여왕은 유다교의 경전, 쿠란(이슬람 경전), 에티오피아 역사서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1959년에는 율 브리너와 지나 롤로브리지다 주연의 영화 ‘솔로몬과 시바’로도 개봉돼 유명세를 탔다.
시바의 여왕은 오랫동안 가상 인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에티오피아의 악숨에서 고대도시 유적이 발굴돼 유네스코로부터 1980년 세계유산에 선정되면서 성경의 묘사는 역사가 됐다. 시바의 여왕은 마케다(Makeda)라는 구체적인 이름을 얻었으며, 재담꾼들의 공상쯤으로 여기던 온갖 이야기들이 사실일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열왕기가 다룬 내용은 싱겁게 보이기도 한다.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을 시험하기 위해 까다로운 문제를 들고 예루살렘을 찾았다. 솔로몬이 모든 문제를 막힘없이 풀어내자, 여왕은 그를 찬미하며 엄청난 향료와 보석을 선물했다. 이에 솔로몬도 여왕이 청하는 모든 것을 내어준다는 게 전부이다.
반면 구전으로 전해지는 것들은 그야말로 엄청나다. 에티오피아 건국 신화의 토대가 열왕기이다. 솔로몬은 여왕의 미모에 매료돼 묘책을 썼다. 자신의 허락 없이 행동하면 모든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고 제안해 허락을 받았다. 솔로몬은 저녁 식사에 향신료를 많이 넣도록 하고 잠자는 여왕을 몰래 지켜봤다. 여왕이 목이 말라 잠결에 물을 마시는 찰나에 나타나 자신의 허락 없이 물을 마셨으니 청을 들어줘야 한다고 우겼다. 그날 밤 둘 사이에 남자아이가 잉태됐는데, 그가 에티오피아의 초대 황제인 메넬리크(Menelik) 1세이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솔로몬의 피가 흐른다고 자랑하기를 좋아한다.
여왕 측 사람들의 목격담은 이와 다르다. 자신의 땅을 공격하려는 솔로몬을 달래기 위해 먼저 계책을 꾸몄다. 여왕이 매혹적인 커피의 향미를 이용해 솔로몬을 유혹해 아들을 회임했다는 것이 골자이다. 이로 인해 커피는 ‘인류 최초의 최음제’라는 타이틀을 갖게 됐다. 카페인은 실제 신경전달물질과 화학구조가 유사해 뇌에 직접 작용하는 향정신성 물질이다. 다윗과 솔로몬 부자가 각각 아비게일과 시바의 여왕에게 커피를 선물 받고 부부의 연을 맺는 장면은 커피 애호가들에게 사진처럼 선명하게 그려진다.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에게 바쳤을 에티오피아 에어룸(Heirloom) 내추럴 커피를 한 잔 놓고 ‘성경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해 생각한다. 성경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방식으로 역사가 되고, 현실이 되어 주는 게 아닌 듯하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말씀’(Logos)은 커피를 쓰고 오신다.
[사유하는 커피] (8) 커피가 곧 기도인 이유 ‘부나 칼라’
커피의 향기 바치고 건강·행복 기원
커피를 마시는 때가 명상을 넘어 기도를 드리는 시간이 되는 사연을 커피 애호가로서 이렇게 풀이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과 시바의 마케다 여왕 사이에 태어난 메넬리크 1세가 세운 ‘아라비카 커피의 고향’ 에티오피아. 기원전 10세기 건국 초기부터 하느님을 섬기는 나라이다. 현재 콥트 정교회에서 분파된 에티오피아 정교회 신자가 44%, 개신교도가 19%를 차지한다. 기원후 7세기에 형성된 이슬람교의 무슬림이 어느새 34%까지 불어났다. 에티오피아인들은 자신들에게 솔로몬의 피가 흐른다고 자랑한다.
마케다가 커피의 향기로 솔로몬을 유혹해 메넬리크를 잉태했다는 건국 신화가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은 악숨의 왕궁터 발굴뿐만 아니라 커피 음용의 초기 문화에도 묻어 있다. 일반적으로 에티오피아에서 가장 오래된 커피 의식은 ‘분나 마프라트(Bunna Maffrate)’ 또는 ‘카리오몬(Kariomon)’으로 알려져 있다. 커피 열매에서 씨앗만을 골라내 볶아 가루로 만든 뒤 물에 끓이면서 카르다몬이나 정향 등 향신료를 넣어 마시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커피 열매를 통째로 동물 기름과 섞어 졸여내듯 끓여 마시는 방법이 있다. 에티오피아에서 가장 많은 종족인 오로모(Oromo)족은 지금도 ‘부나 칼라(Buna Qalaa)’라고 부르는 커피 의식을 치른다. ‘커피를 살육한다’는 뜻이다. 이들에게 커피를 마시는 것은 사육제인 셈이다. 오로모족은 부나 칼라를 하면서 “커피의 향기를 신에게 드리니 부족 모두에게 건강과 행복을 내려 달라”고 읊조린다. 그들은 커피나무는 하느님의 눈물에서 생겨났다고 믿는다.
스튜어트 리 앨런은 「악마의 잔: 커피로 짚어 본 세계의 역사」에 오로모족의 신혼부부가 치르는 첫날밤 의식 ‘분칼레(Bunqalle)’에 대해 상세하게 적었다. 분(Bun)은 커피를, 칼레(Qalle)는 제물 의식을 뜻한다. 부부가 입으로 커피 열매를 벗기고 나눠 씹는 의식인데, 커피는 이 순간 신에게 올리는 희생 제물이 된다.
에티오피아의 여타 부족들은 대부분 고기를 제물로 바치는 데, 오로모족은 커피로 이를 대신했다. 오로모족은 지금도 주술사의 무덤에 커피나무를 심는 풍습이 있다. 에너지를 넘치게 하는 커피나무의 신통함이 신과 인간을 연결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제사장은 입으로 커피 열매의 껍질을 벗기며 중얼거린다. 이는 짐승을 도살하고 머리를 베어내는 행위를 대신한다. 의식이 끝나면 커피의 생두를 나누어 씹음으로써 각성을 체험하는데, 카페인 덕분에 깨어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을 신이 영적인 권능을 부여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제물을 올리는 것은 유다의 전통이고, 사육제는 사순절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오로모족의 커피 의식은 가톨릭(Catholic)과 연결된다. 솔로몬의 피가 흐르는 에티오피아인들은 원죄를 용서받으려 구약 시대에 희생 제물을 바쳤으며, 분명 번제도 올렸을 것이다. 신약 시대에 들어서 커피의 소중함을 깨우친 오로모족은 자신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기꺼이 하느님께 바쳤다. 오로모족의 절반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사육제-사순절-파스카의 신비 체험으로 이어지는 참회와 경축 의식을 치르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축제를 준비하는 사순절을 ‘부나 칼라’로 맞이한 오로모족의 신앙심이 부나 칼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것이 커피 애호가에게 ‘커피가 곧 기도’인 이유다.
[사유하는 커피] (9) 섭리 깨는 행동이 ‘양식’을 ‘독’으로 만든다
약이 되게 할 것인가, 독이 되게 할 것인가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치가 있다. 이 명제는 과연 옳은 것일까?
“주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주님의 뜻에 따라 만물이 생겨나고 창조되었습니다”(묵시 4,11)라는 성경 말씀에서 어렵지 않게 답을 얻을 수 있다. 창조론을 부정한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고까지 역설했으니, 종교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하긴 힘들겠다.
하지만 당장 코로나19를 끄집어내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 주님의 뜻인가?”라고 묻는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코로나19를 생명체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해서 이견이 있지만, 어쨌든 존재하는 모든 것에 좋은 의미를 부여할 순 없을 듯 보인다. 국내에서만 매년 25명가량이 산행 중 야생 독초를 채취해 먹고 목숨을 잃고 있다. 자연은 인류에게 선물이 아니란 말인가?
독성으로 치자면, 커피나무도 뒤지지 않는다. 식물의 독성분은 대부분 알칼로이드인데, 카페인(Caffeine)이 그중 하나다. 알칼로이드는 ‘~인(~ine)’으로 끝나는 물질들로 질소를 포함하고 있다. 모르핀, 니코틴, 퀴닌, 에메틴, 아코니틴 등 알칼로이드는 중추신경에 작용함으로써 일정 농도 이상이라면 포유동물에 치명적이다. 남아프리카에 자생하는 지프바르(gifblaar)는 잎사귀 2~3장만으로 양 1마리의 생명을 앗아간다. 소크라테스가 마신 독배는 독성분이 있는 당근을 달여 만든 즙이었다고 전해진다.
알칼로이드는 동시에 인류에게 축복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 1억 2500만 명 이상이 커피에 의지해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잠을 쫓고 피로를 잊기 위해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까지 따지면 전 세계 성인 인구의 절반가량이 카페인을 요긴하게 활용하고 있다. 커피나무의 형제들을 보면 유독식물과 약용식물을 가르는 기준이 모호해진다.
진화론에 따르면, 커피나무는 1400만 년 전 카메룬의 치자나무에서 분화해 커피의 본성을 갖게 됐다. 치자나무의 껍질에 들어 있는 퀴닌 역시 독성이 강한데, 말라리아 특효약으로 개발되면서 인류의 생명을 구하는 약용식물로 대접받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식용을 금지한 리우토근은 에메틴 성분 덕분에 아메바성 이질 치료제로 사용되면서 수많은 목숨을 구하고 있다. 커피의 성분들은 치매와 암 치료에 유용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처럼 치자나무에서 갈라진 커피나무의 가족(科)들은 독이면서 약으로 존재한다. 하나의 나무가 환경에 따라 새로운 특성을 획득하거나 다양하게 분화하는 것을 진화의 방향이라고 진화론자들은 설명한다.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먹는 주체와 방식이 이 식물들을 진화시키는 동력이 됐을 수도 있다.
창조론의 견해는 이와 다르다. 모든 식물은 천지 창조 사흘째 날 생겼다. 창세기 때 식물의 모든 다양성은 완성됐으며, 인류의 요구와 쓰임에 따라 존재가 확인될 뿐이다. “구글에서 검색되지 않으면 있어도 있는 게 아니다”는 풍자와 맥락이 유사하다. 커피나무와 인류의 관계는 창세기 1장 29절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는 말씀에 설정돼 있다. 그런데 왜 종종 ‘양식’이 ‘독’으로 작용할까?
한 잔의 커피를 앞에 두고, “주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은 인류의 행동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진화에 의해 생겨난 게 아니다. 박쥐들이 사는 자연의 세계를 깨뜨리면서 인류에게 옮겨졌고, 생존하기 위해 돌연변이를 통해 저항하고 있을 뿐이다. 섭리를 깨는 행동이 양식을 독으로 만든다.
하느님은 본디 악한 것을 창조하지 않으시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가치를 찾아야 한다.
[사유하는 커피] (10) 그리스도인의 음료인가, 무슬림의 음료인가
인류는 본래 하나였기에
솔로몬 혈통을 잇는 에티오피아 그리스도인들의 커피가 어떻게 예멘 무슬림의 음료가 됐을까? 커피가 이질적인 두 종교 사이를 넘나든 사연은 역설적으로 양측의 동질감을 되새기게 한다.
홍해를 사이에 두고 종교뿐 아니라 지리적으로 갈라져 있는 에티오피아와 예멘은 솔로몬 시대인 기원전 955년부터 840여 년간 ‘시바(Sheba)’로 불리는 한 왕국이었다. 시바의 전성기는 잡신을 숭배하던 여왕 마케다가 솔로몬을 찾아가 유다교를 받아들임으로써 꽃피었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는 칼 야스퍼스가 제창한 ‘축의 시대(Axial age)’이기도 했다. 세계의 주요 종교와 사상이 일제히 등장한 이때 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에 걸쳐 왕국을 형성한 시바에도 마침내 유일신을 따르는 움직임이 일었다. 유다 지역에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동정녀에게서 메시아의 탄생과 하느님의 구원 약속을 설파했다. 그즈음 아랍인도 등장한다. 당시 아라비아반도의 끝 부분에 거대한 무리가 살고 있었음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이룩한 수메르인들이 기록으로 남겼다.
예멘에 둥지를 튼 아랍인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들은 유다인들과 다른 사람들이 아니었다. 아랍인은 셈어족(Semitic languages)을 사용했다. 함, 야펫과 함께 창세기에 등장하는 노아의 세 아들 중 한 명인 셈의 후손들이라는 이야기이다. 아라비아반도에 살던 셈족의 일부가 기원전 3500년경 북상해 나일 강 인근에 살던 함족(아프리카인의 조상)과 어우러지면서 이집트인이 되었다. 기원전 3000년경 아라비아 사막을 횡단해 메소포타미아로 진출한 셈족의 한 분파가 바빌로니아인의 조상이 되었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또 기원전 2500년경 팔레스타인에서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이란 고원에 이르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정착한 셈족은 아무르인이 됐으며, 레바논과 시리아 등 지중해 동부 연안으로 이동한 무리는 페니키아인으로 정착했다. 셈족의 이동은 계속되었다. 기원전 1400년경에는 시리아 남부 지역에 거처를 정한 무리가 아람인(Aram)을 형성했고, 시리아 남부와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한 분파는 유다인의 조상이 되었다.
민족들이 보이지만 뿌리를 찾아 올라가 종교로 묶으면 손가락으로 꼽힐 정도로 단순하게 정렬된다. 종교는 민족을 분열시키는 게 아니라 통합시키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가톨릭, 개신교, 유다교, 콥트교, 이슬람교는 셈으로 모이고, 그의 아버지 노아를 통해 9대를 올라가 아담에 닿는다. 천지 창조의 순간이다. 인류는 하나였다.
이런 배경을 알고도 커피가 그리스도인들의 문화인지, 무슬림의 문화인지를 따지는 소리는 잡음처럼 들린다. 에덴의 동산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메소포타미아와 레반트, 동아프리카 일대는 인류 문명의 근원지이자 유일신 사상과 그리스도교가 탄생해 왕성하게 퍼진 곳이다.
근원을 찾아가며 인류가 갈등을 치유하고 동질감을 회복하는데 성경보다 좋은 게 없겠지만, 커피 인문학에도 기대를 걸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선악과, 다윗, 솔로몬을 거쳐 마호메트, 십자군 전쟁, 오스만 투르크, 클레멘스 8세 교황, 베니스 상인, 청교도 혁명, 프랑스 혁명, 예수회의 라틴 지역 선교 활동, 미국의 건국으로 이어지는 커피 역사의 파노라마는 성경의 장면, 그리고 선교의 역사와 오버랩 되는 비율이 꽤 높다.
매일 성경은 읽지 않아도 커피는 하루도 거르지 않는 세태에서, ‘말씀’을 커피가 걸어온 길에서 더듬어내는 것은 진실에 이르는 또 다른 길이 되지 않을까. 커피가 특정 종교와 민족의 전유물이 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인류가 다양한 방식으로 분열되기 전부터 우리 곁을 지켰기 때문이다. 인류가 본래 하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깜빡깜빡 잊고 살아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