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기독교회 안에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는데 한 무리는 예수님의 능력을 추구하고, 다른 한 무리는 예수님의 품성을 추구한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나는 예수처럼 되고 싶다. 라고 말한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 누가 마귀가 되기 원하겠는가? 그러나 슬프게도 어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 안에서 마귀로 변해 가고 있다. 입으로는 나도 예수처럼 되고 싶다. 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마귀가 걸었던 길을 걷고 있다.예수처럼 되고 싶어서 교회에 나왔지만, 실제는 마귀처럼 되어 가는 상황, 바로 이것이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의 모습이다. 왜 이런 일이 교회 안에 생기게 되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먼저, 마귀는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요한계시록 12장 7-9절에는 마귀가 하늘에서 쫓겨나는 장면이 나온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예수 그리스도)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악한 천사)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 (계 12:7-9)
마귀와 악한 천사들이 하늘에서 쫓겨났다고 했다. 그런데 왜 마귀와 악한 천사들은 하늘에서 쫓겨났을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사야 14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마귀)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사 14:12-14)
이 말씀의 앞부분에는 어떻게 하늘에서 쫓겨났으며 어떻게 해서 땅에 떨어졌는가? 라는 질문이 나오고 이어서 그 답이 나온다. 마귀는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하나님)와 비기 려고 하다가 쫓겨나게 되었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나님의 능력과 보좌를 탐하다가 하늘에서 쫓겨난 것이다.
한 가지 매우 흥미 있는 사실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다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처럼 되기 원하다가 하늘에서 쫓겨났던 마귀는 인간을 유혹할 때에도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 고 유혹하였다. 하나님처럼 되는 것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굉장한 유혹거리임이 틀림없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5)
하와는 하나님처럼 선악을 아는 능력을 얻으려고 선악과를 따먹었고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속한 능력과 힘을 구하는 자들은 쫓겨나게 된다. 왜 그럴까? 하나님께서 이기적이기 때문에 능력을 독점하기 원하기 때문일까?
도대체 하나님이 어떤 분이기에 마귀와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했을까?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의 제자 빌립은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하였다.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하나님)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 14:8-9)
예수님은 내가 행동하는 것, 내가 사람들을 대하는 것, 내가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는 것, 내가 고통당하는 병자를 도와주는 것, 내가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바로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다. 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오해받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 주려고 이 땅에 오셨다. 예수께서는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거늘 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예수께서 이 땅에서 보여 주신 것과 같은 분이시다. 그분은 사랑과 봉사와 자기희생의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마귀와 하와가 하나님처럼 사랑하고 하나님처럼 봉사하기를 원하다가 쫓겨났다는 말인가? 물론, 아니다. 그렇다면 마귀가 정말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하와가 원했던 것은 정말 무엇일까? 우리는 마태복음 20장 17-28절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엿볼 수 있다.
17-20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을 심각하게 말씀하시는 그때, 세베대의 아들 인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께 뭔가 청탁을 넣으려고 하는데 차마 자신의 입으로 그 말을 하기에는 창피하니까 어머니를 앞장세우고 와서 청탁하는 것이다.
2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정말 너무하지 않는가? 예수께서는 이제 곧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이라는 비장한 말씀을 하시는데, 장차 자기 아들들에게 가장 높은 자리를 내어 달라는 청탁을 하고 있다니&. 장차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면 우의정과 좌의정 자리를 달라고 미리 손쓰려고 찾아온 것이다. 예수님을 찾아와서 권좌와 권력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2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마시려는 잔은 무엇인가? 십자가 피의 잔이다. 고난의 잔이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따라다니면 고생과 피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두 제자는 권력과 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지난 6천 년 동안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해 온 엇갈린 기대이다.하나님은 항상 인간에게 구원을 위하여 고난의 잔을 마시라고 요구하시는데, 인간은 항상 하나님께 권세와 권능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정치인만 권세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종교인들도 권세를 얻고자 정신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까지 말이다.
23절: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예수께서는 분명히 밝히셨다. 예수님의 목적은 인간에게 권세와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피의 잔을 마시도록 안내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마신 것처럼 말이다.
24절: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이 대화를 듣고 있던 나머지 10명의 제자들이 화가 났다. 왜 화가 났는가? 왜냐하면, 그들도 높은 권좌와 권력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자리에 있던 12제자 모두 권세와 능력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25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모은 다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의 특징을 두 가지로 요약했는데 첫 번째는 다른 사람을 임의로 주관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권세를 부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주장하고 움직이기 원하며, 또한 그런 권세를 얻고 싶어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이 하나님의 교회 안에도 깊이 들어와 있다. 아무리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교회에 다니더라도 다른 사람을 제 뜻대로 주관하려고 하며, 그러한 권세를 얻으려고 은근히, 교묘하게 애쓰는 자들은 이방인이다.
이러한 원칙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서로를 자기 뜻대로 주관하려고 권위를 부리는 자들은 이방인의 정신을 가진 사람이다. 그렇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의 정신은 무엇인가?
26-28절: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의 성품과 생애를 설명하시면서 두 단어, 즉 종, 섬김 을 사용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마셔야 할 피의 잔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섬김을 받기 위해서 섬기러 온 것이다. 그냥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섬기려고 오셨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성품이다. 예수께서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씀하셨으므로 하나님 또한 섬김을 받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죽기까지 내어주며 섬기시는 분이다.그러므로 우리가 나는 예수처럼 되고 싶다. 라고 말할 때는 나는 예수처럼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종이 되고 싶다. 는 뜻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마귀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종이 가져야 하는 성품을 원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힘을 원했던 것이다. 자기희생, 사랑, 봉사, 정직, 순결과 같은 하나님의 성품에는 관심이 없었고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원했던 것이다.
하와도 마찬가지이다.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아 는 능력을 받게 되기를 원했다. 마귀가 하늘에서 반역했을 때에 걸었던 그 길을 하와도 따라 걸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품을 구하는 대신에 하늘의 능력만을 탐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나게 된다. 성품이 아니라 능력을 구하는 것, 바로 이것이 현대 기독교회의 문제이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나는 예수처럼 되고 싶다! 라고 외친다. 왜 그들은 예수처럼 되고 싶어하는가?예수처럼 능력을 행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갖고 계셨던 병 고치는 능력을 자신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들은 방언의 능력을 자신도 갖게 해 달라고 금식하며 기도한다. 그들은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자신도 갖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이것이 그들이 예수처럼 되고 싶다고 말하는 진짜 속내이다. 능력과 힘을 탐하는 정신이 그들 속 깊은 곳에 있는 것이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인간을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누고 있는데, 하나는 기적과 이적을 구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계명과 진리를 추구하고 따르는 사람들이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에 내려지는 짐승의 표 환난 때에 사단을 따르는 무리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고. (계 13:13,14) 마지막 시대에 사단은 기적과 이적을 내세워 사람들을 미혹하고, 하나님께서는 진리와 계명을 통하여 사람들을 모으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현대 기독교회가 가진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의 능력은 탐하면서 그분의 성품은 구하지 않는 것이다. 하늘은 그러한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교회에 다니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늘에 가길 원한다.
불멸의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 성령의 은사를 원한다. 그러나 하늘에 가기 전에 하늘에서 영원토록 하나님 곁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 하늘에서 영원히 살지라도 하나님의 권능과 그분의 진리에 도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하늘의 천사들에게 줄 수 있어야 한다. 성령의 엄청난 능력이 임해도 저 사람은 절대 오만방자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어야 한다.
설교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교회에서 봉사할 때는 놀라운 하늘의 능력이 함께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설교가 끝나고 가르치는 일이 끝나고 교회 봉사가 끝나면 마치 전기 스위치를 내리면 전깃불이 나가는 것처럼 그 능력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왜 그럴까? 그들 속에 종의 성품, 섬기는 자의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능력과 힘을 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끝까지 따라갈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며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결국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은 우리의 품성과 생애가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는 쪽으로 이루어지는데, 대부분 그것은 자극적이거나 감정적이지 않으며 눈에 보이지 않게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서 길을 열어 놓으셨지만, 우리 눈에는 닫혀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실 때에는 미래의 모든 것을 보여 주신 다음에 선택하도록 하지 않으신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시 119:105)라는 말씀처럼 주의 말씀은 내 발 앞을 비춰 주어서 넘어지지 않고 걸어갈 수 있을 만큼만 보여 주신다. 주의 말씀이 내 머리의 등이 된다면 멀리까지 비춰 주겠지만,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기 때문에 한 걸음 한 걸음씩만 비춰 준다. 멀리 있는 것에 대해서는 방향만 제시할 뿐 그곳에서 실제로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가리시고 보여 주지 않으신다.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 길을 걸어야만 볼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성장하고 강해진다.
일상적인 환경 속에서 모든 것이 잘되어 갈 때는 하나님을 만나기 어렵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잘되어 갈 때에는 내가 이루어 놓은 것들을 보면서 자고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붙잡을 것이 없고 기댈 곳이 없는 환경에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 깊이 만나 주시려고 아무것도 붙잡고 의지할 것이 없는 광야로 이끄신다. 편안한 삶 속에서는 전혀 볼 수 없던 것들이 인생의 힘든 광야를 통과하면서 보게 되는데 그때에 내 안에 숨어 있는 야욕과 세상을 향한 야심을 보게 된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나의 영광이 뒤섞여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인생의 광야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고난을 통해 정제되어 간다.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이 엉켜져 있는 삶이 광야 속에서 정결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내 능력의 한계에 부딪혀 절망할 때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열망이 자라나게 된다.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사용하고자 하는 인물들을 인생의 광야로 몰아가셨다. 그곳에서 그들을 만나 주셨고 그곳에서 그들을 훈련하셨다. 왜냐하면, 편안한 안락의자와 따뜻한 아랫목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외면하며 건방진 태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나그네요, 이방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생의 광야로 내몰아 가는데 광야의 주변에는 재물과 풍요의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부와 명예를 누리면서 살고 있다. 그들을 보면서 광야를 통과하는 것이 나그네들이 경험하게 되는 시험이다.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라고 불렸지만 정작 그가 살았던 곳은 복이 없는 광야 땅이었다. 아름답고 복이 있는 땅은 조카 롯에게 주었다. 복을 구하고 그것을 찾아간 롯의 가족은 처참한 운명을 맞이하였지만, 복을 이기심 없이 나누어 주었던 아브라함의 가족은 복을 누리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눈에 보이는 능력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품성을 구하는 자들의 삶이다. 그리스도인은 복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되어 주변 사람들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복의 근원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복을 찾으려고만 한다. 사람들은 돈이 있고 복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려고 한다. 그래서 서울의 강남에 사람들이 모이고 뉴욕의 맨해튼에 사람들이 미어터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장소가 어디인가에는 관심이 없고, 보기 좋고 살기 좋은 곳을 찾으려고 인생 대부분을 보내는 사람들은 결국 행복을 잃어버리고 인생의 광야 속에서 길을 잃게 된다.
우리가 하늘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얻게 되고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을 소유하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다.중요한 것은 내가 어느 곳에 있느냐? 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가? 이다.
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