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세의 청년 안창호의 애국 연설을 들은 이승훈은 대오각성(大悟覺醒)하여 평생을 애국하는 일에 헌신키로 작심하였습니다. 상투머리를 자르고, 즐기던 술을 끊고, 크리스천이 되기로 다짐하고는 고향인 정주군 오산리 자기 고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이승훈의 열정에 감동된 오산리 주민들은 한 가정도 빠짐없이 예수 믿고 애국하기로 작정하고는 글자 그대로 〈예수마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세운 학교가 오산학교입니다. 오산학교는 그 설립 정신인 겨레를 지키는 애국자를 기른다는 창학 정신(創學精神)이 알려져 전국에서 뜻있는 인재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유명한 순교자 주기철 목사가 오산학교 출신이었습니다. 이광수가 국어 선생이었고 조만식 선생이 교장이었습니다. 조만식 장로는 메이지대학 출신으로 출중한 인격과 경륜을 겸비한 인물이었습니다.
해방 후 조만식 장로는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당수가 되어 소련과 김일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나라를 세우려는 일념으로 38선 이북의 전 지역에 조직을 강화하였습니다. 소련군 대위였던 김일성이 조선민주당의 세력이 강하고 북한 국민들의 지지가 확고한 모습을 보고는 조만식 당수를 찾아와 공산당과 연합하여 정부를 세우자고 설득하였습니다. 그러나 조만식 장로가 김일성의 설득을 따를 리 없었습니다.
그는 확고한 신념으로 김일성에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공산당과는 함께 일할 수 없소이다〉 하고 거부하였습니다. 소련군과 공산당의 압력이 거세게 다가오자 조만식 장로를 아끼는 사람들이 그에게 간곡히 권하였습니다.
〈선생님, 남한으로 피하셔야 합니다. 소련군과 김일성이 당수님을 그냥 두지 아니할 것입니다. 남한으로 피하셔서 남한의 이승만, 김구, 김규식 선생 등과 힘을 합하여 새 나라를 세우는 일을 도모하셔야 합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조만식 당수는 말하였습니다.
〈북한에서 모두 떠나면 이 백성들을 누가 지키겠소. 내가 소련군 손에 죽을 지라도 이 땅을 떠나지 않겠소.〉
그러나 염려하던 바대로 조선민주당 당수 조만식은 밤중에 정체를 모르는 자들에게 끌려간 후로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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