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의 주인공 해인사
1967년 지리산이 대한민국의 첫 번째 국립공원 이후 마지막인 태백산 국립공원까지 총 22개의 국립공원이 탄생하였다. 국립공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깨끗한 자연과 아름다운 풍경이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자연이 주제가 아닌 사적형 국립공원도 존재한다. 두 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경주 국립공원은 신라의 중요한 유적들을 여덟 개 지구로 나뉘어 관리하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불국사와 석굴암, 경주역사유적지구 또한 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국립공원
나머지 21개 국립공원 중 3개의 해상 (다도해해상・한려해상・태안해안)과 1개의 반도 (변산반도)를 제외하면 17개가 산악형 국립공원이다. 가야산 국립공원 또한 가야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내륙의 산악지역이 포함되어 있는 국립공원이다. 그럼에도 가야산 국립공원은 다른 산악형 국립공원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국립공원을 찾는 이 중 대다수가 가야산을 오르지 않고 해인사만 방문하는 사람들이며, 사찰의 이름이 국립공원의 이름보다 유명하다는 사실이 그 차이다. 국립공원의 사찰 중 해인사의 명성에 버금가는 사찰은 경주 국립공원의 불국사 외에는 전무할 정도로 가야산에서 해인사의 존재는 엄청나다.
가야산 국립공원의 홍류동 계곡
가야산 국립공원에 다시 찾아가게 된 건 삼보사찰 (三寶寺刹) 중 법보 (法寶) 사찰인 해인사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해인사 장경판전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였다. 지난 번에 가야산 꼭대기까지 올라가느라 해인사를 눈으로 훑고 지나갔기에 아쉬운 마음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주제인 대장경세계문화축전이 열리고 있었기에 해인사에 머물면서 우리 선조들의 슬기로움을 몸소 느껴보고자 했다. 템플스테이를 통해 가야산 산자락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바로 옆에 두고 쉴 수 있다니!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초가을에 다시 한 번 가야산을 방문하게 되었다.
국립공원 이야기 6 - 숱한 화마를 벗어난 장경판전
해인사 장경판전은 고려 시대 몽골의 침입을 불법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제작된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서고이다. 팔만대장경은 고려 후기인 1237년부터 1248년까지 제작되었으나, 이를 보관할 서고가 따로 없어 강화도 서문 밖 선원사에 보관하였다.
장경판전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
팔만대장경이 해인사로 옮겨진 건 조선 초였다. 장경판전의 정확한 건립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선 세조 3년 (1457)에 건축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숭유억불이었던 조선시대에 불교 유물인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건물을 지을 수 있었던 건 불교에 심취해있던 세조가 왕으로 등극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조는 해인사에 있던 대장경 50부를 책으로 간행해 전국의 사찰에 나눠주는 사업을 추진해 장경판전을 크게 증축하였다. 장경판전의 기와에 성종 19년 (1488)에 해당하는 홍치원년(弘治元年)이 쓰여 있는 것으로 볼 때 현재 장경판전의 모습이 완성된 건 15세기 세조~성종대로 추정하고 있다.
장경판전의 과학적 설계가 드러난 창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해인사의 다른 전각들이 숱한 화재로 피해를 보았지만 장경판전만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오히려 장경판전 역사상 최대의 위기였던 건 외적의 침입이 아닌 한민족끼리의 싸움 때문이었다. 지리산 일대 빨치산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받은 대한민국 공군은 해인사 또한 폭격 목표로 삼았다. 이를 알게 된 김영환 공군 대령은 폭격을 금지하고 기관총으로 적을 위협하는 정도로 항명을 해 즉결처분의 위기에 처했지만 결과적으로 장경판전을 구할 수 있었다. 이후 김영환 대령의 형인 김정렬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장경판전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즉결 처분은 모면했다.
이후 1995년에 해인사 장경판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팔만대장경이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면서 김영환 대령은 2010년에 그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훈장 중 최고등급인 금관문화훈장을 받을 수 있었다. 6・25 전쟁이 끝난 뒤 김영환 대령은 준장으로 진급했으나, 1954년 3월 5일에 행사 참석차 강릉으로 비행기를 몰고 가던 중 악천후로 인해 동해시 인근 상공에서 비행기가 추락함으로써 순직하였다. 김영환 준장은 현재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제1묘역에 안장되어 있으며, 해인사 또한 그의 공로를 적은 안내문을 세우고 그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해인사를 느끼기 위해 템플스테이에 참여하다
지난 번에 가야산을 방문할 때는 합천 터미널로 가는 실수를 범하는 바람에 생각보다 많은 돈을 썼다. 이번엔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대구에서 볼 일을 보고 서부터미널에서 해인사로 향하는 직행 버스를 탔다. 대구에서 출발한 버스는 경북 고령과 합천 야로면・가야면을 지나 해인사로 향하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타고 올라간다. 합천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시간은 약간 더 들지만 버스 간격을 생각하면 대구에서 출발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
합천군 가야면의 대장경 테마파크
두 번째 해인사를 방문할 당시 계절은 초가을로 대장경 세계문화축전이 열릴 때였다. 아직 단풍이 물들기엔 이른 시기라 홍류동 계곡은 초록빛이 가득했기에 가야산 소리길을 걸으며 해인사를 오를 필요는 없어보였다. 대신 세계문화축전에 어떤 행사가 열리는 지 구경하고 해인사로 가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우리 선조들이 남긴 위대한 기록들을 볼 수 있다
대장경 세계문화축전이 열리는 대장경 테마파크는 팔만대장경의 위대함을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채롭게 보여주기 위해 건설된 공원이다. 팔만대장경을 전시하고 있는 대장경천년관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뛰어난 인쇄술을 보여주는 기록문화관이 있으며,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해인사의 장경판전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을 가까이서 보지 못 해 아쉬웠던 사람들은 대장경 테마파크에 가서 세계기록유산을 눈 앞에서 볼 수 있다.
대장경 세계문화축전은 전시 행사 외에도 다양한 공연과 행사를 열고 있다. 엄청난 크기의 종이 위에 달마대사를 그리는 행사를 비롯해 주제 공연인 대장경 오디세이 공연 등 재미있는 볼 거리들이 많다. 축제 기간 동안 테마파크는 각양각색의 불등으로 꾸며지며, 소리길을 따라 걸으며 옛날 해인사를 찾던 조상들의 기분을 느껴보는 행사도 준비되어 있다.
해인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 외에도 숱하게 많은 국보와 보물을 소장하고 있다. 현재 해인사가 소장한 국보만 4점, 보물은 19점에 달한다. 목록을 살펴보면 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 목판 외에도 다양한 불교 우물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해인사 성보박물관에 가면 국보와 보물을 눈 앞에서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해인사가 남긴 수많은 유물과 달리 현재 남아있는 해인사 전각은 비교적 최근에 지어져 불국사나 부석사에서 느낄 수 있는 고즈넉함은 없다. 해인사로 들어서면 대적광전 뒤편으로 보이는 장경판전이 그 존재감을 당당하게 뽐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단청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는 건물들 뒤편으로 가면 장경판전으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을 만날 수 있다. 숭례문 방화 사건 이후로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기도 했던 장경판전 관람은 사찰의 사정에 따라 불가능할 수도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해인사를 한 바퀴 둘러보고 템플스테이 사무소에 가서 등록을 마쳤다. 선선한 날씨의 주말이라 그런지 나뿐 아니라 서른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템플스테이에 참여했다.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은 사찰이 가진 특성마다 다르기 마련이다. 서울의 길상사는 명상, 경주의 골굴사는 선무도가 주제다. 해인사는 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이 주제일 수밖에 없다. 템플스테이에 참여하면 스님과 함께 장경판전을 둘러볼 수 있다. 장경판전 내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을 접하면 겉보기에는 단순한 형태의 장경판전이 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수밖에 없었는지 알 수 있다.
해인사의 저녁예불과 새벽예불에 참여하고 108배를 하며 불자는 아니지만 부처님의 세계를 몸소 느낄 수 있었다. 밤 9시에 취침해 새벽 3시에 일어나는 일정이 고될 수 있지만 우리 몸이 해독작용을 하는 시간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에 피곤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세상의 모든 번뇌를 떨친 채 가야산의 쾌적한 공기를 마시며 해인사에 묵은 하루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할 정도다.
템플스테이에 참여한 사람들과 함께 둘러 본 장경판전
산에 오르기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가야산 국립공원은 한 번쯤 방문할 가치가 있는 곳이다.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에서 감명을 받은 이라면 해인사에 들러 또 다른 형태의 위대한 문화유산을 접할 수 있다. 가야산 (伽倻山)이라는 이름은 불교에서 사용하는 범어 (梵語)에서 가지고 온 데다, 해인사라는 명찰까지 갖추고 있으니 경주 못지 않은 불교의 성지라 할 수 있다. 경주하면 불국사와 석굴암부터 떠오르는 것처럼, 가야산하면 해인사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해인사가 곧 가야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