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이터재로 오르는 눈길>
지리산 둘레길 #10 위태 - 하동호
* 15.0Km / 누적거리 131.2Km
* 2013.01.12. 토요일 / 6시간 소요
* 위태(상촌) → 지네재 → 오율마을 → 궁항마을 → 양이터재 → 본촌(나본)마을 → 하동호 → 평촌마을 →화월마을
<지네재 초입>
<위태 마을 농가의 메주 풍경>
금년 들어 첫길 나선다. 새벽 6시 길동무와 88올림픽 도로에 들어선다. 그동안 길을 가지 못한 이유가 많았다. 눈이 와서, 너무 추워서, 연말이어서, 직장 일이 바빠서 가고 싶던 길을 참았다. 또 눈길 가려면 길동무에게 멋진 스패츠와 등산화를 마련해 주고 싶었다. 2월 말까지 지리산 둘레길 정비기간이므로 아무리 길이지만 좀 쉬게 해주어야 복원되겠지(?)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번 주말은 이런저런 이유들이 다 소용없었다. 너무 걷고 싶어서였다. 지금까지 걷던 운동화 차림으로 그냥 길을 나섰다. 눈이 쌓여 있으면 어쩌나 하는 염려도 조금은 되었으나 그냥 가고 싶었다.
<2월 말까지 둘레길 정비기간>
<상수리나무당산이 입석, 지금도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함양 분기점에서 통영 쪽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단성에서 10코스 출발 지점인 위태를 찾아 들어간다. 단성에서 위태로 가는 길에 이리저리 헤매느라 9시가 넘어서야 목적지에 도착한다. 젊은 시절부터 무던히도 산으로만 돌아다닌 사람이 마을 하나 못 찾아간다고 투덜거리는 길동무에게 시달리며 차량을 운전하다 땅에 발을 내려디디니 내 세상에 온 것 같은 해방감이 밀려온다.
<오늘의 출발 기점>
우리는 다시 좋은 사이가 되어 안마을의 상수리 당산나무 옆을 지난다. 느티나무나 팽나무, 은행나무 등의 당산나무는 보았으나 상수리나무를 모시고 제를 지내는 곳은 처음 본다. 나무 밑둥 앞에 놓인 지석이 눈에 들어온다. 짐승 모양 같기도 하고, 신체의 일부 같기도 하다. 이 마을에서는 신령스런 장소로 여기는 것 같아 나도 사진만 찍고 조용히 지나친다.
<위태 마을길, 상수리당산나무가 보인다.>
지네재 초반부터 눈이 쌓여 있다. 앞서간 둘레꾼들이 쌓인 눈을 다져놓아 운동화 차림으로도 걷기에 별 불편이 없다. 가파른 오르막길에선 다져놓은 눈길이 미끄러워 차라리 부담스럽다. 다져지지 않은 부분의 눈을 밟으며 재를 오른다. 걷다가 도중에 뒤돌아보니 위태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마을 뒤 갈치재 너머에는 우리가 지난 번에 걸어온 산청군의 유점 마을이 흰 눈에 덮여 있을 것이다. 오늘부터는 하동 땅을 걷고 있다.
<지네재 고개에 다 왔다.>
눈 쌓인 지네재를 넘어서니 포근한 숲길이 이어진다. 조금 내려서니 금방 오율마을이다. 마을 끝에서 다시 오른 쪽으로 가파른 고갯길을 조금 오르니 이내 눈없는 솔숲 능선길이 이어진다. 눈길에서 힘들어 하던 길동무는 맨 땅을 걸으며 연신 ‘좋다! 좋다’를 연발한다. 평화로운 산행! 겨울 소나무 숲길!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로 길을 줄여 나아간다. 조그만 계곡만 나타나도 엎드려 한 모금 씩 목을 축인다. 겨울 지리산 이름 모를 계곡 물 맛! 걷다가 또 한 모금! 얼음 한 조각 들고 가며 먹어대는 겨울 둘레길! 카~아! 시원한 맛!
<지네재에서 오율마을로 내려가는 길>
궁항 마을 포장도로를 가로 질러 개울을 건넌다. 양이터재로 오르는 눈덮힌 포장도로가 햇빛에 빛나고 있다. 그 눈길과 겨울 산 능선의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병풍처럼 감싸고 서 있는 하얀 구릉 풍경이 시원하고 포근하다. 길동무가 눈길을 오르는 모습이 멀어져 간다. 부지런히 길을 간다. 함께 가야지. 다투고 싸우더라도(?) 함께 가야지. 길동무란 원래 그런 거니까! 이 눈길이 계속되는 한 우리 두 사람 다툴 일은 없겠다. 추운 겨울 이리도 좋은 눈길을 걸으며 다투는 남자와 여자도 있을까?
<궁항에서 양이터재로 향하는 눈길>
우리는 길을 걸으며 사이좋게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첫 걸음은 같이 시작하지만 가끔 앞뒤로 알맞게 거리를 두고 걷는다. 동무가 앞장서서 걸으면 나는 뒤로 처져서 걸으며 배경과 길동무를 함께 버무려 사진을 찍기도 하고 나 혼자만의 재미있고 내밀한 상상을 하면서 길을 간다. 그도 시들하면 그냥 무심하게 걷기도 한다. 그러다가 내가 앞서가면 길동무가 뒤로 쳐진다.
<오율에서 궁항가는 길>
나는 주로 오르막길, 길을 잃고 헤맬 때, 가야할 길이 너무 멀어 서둘러야 할 때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앞장을 서게 된다. 반대로 길동무는 내리막길, 목표지점이 명확할 때, 분위기가 멋진 길에서 신명을 발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나팔만 있으면 영낙없는 개선장군처럼. 서로가 편한 거리만큼 앞서거니 뒤서거니 떨어져 걷다가 그저 그런 평탄하고 무난한 보통의 길을 만나면 누구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함께 걸으며 우린 하나가 된다. 두런두런 주고받는 얘기도 따라 붙는다.
<오율에서 궁항가는 눈없는 길>
우린 그렇게 순천에서 서울까지 457Km를 걸었고 이어서 경기도 포천까지 걸어 나갔다. 무등산 둘레길 51.8Km를 걸었다. 이 지리산 둘레길이 끝나면, 제주 올레길을 걸을 것이다. 그리고 홍천에서 속초, 고성, 다시 동해안을 타고 부산, 이어서 남해안을 따라 순천까지 걷고 싶다. 그리고 그 힘으로 스페인의 산티아고길 800Km도 함께 걷고 싶다. 희망이다.
<눈길 위의 둘레꾼 발자국>
양이터재에 올라선다. 길동무는 통나무룰 반으로 쪼갠 의자에 누워 요가 동작으로 고관절과 무릎관절을 풀어준다. 걷다가 힘들 때 효과적인 일명 ‘제기차기’ 아사나(요가동작)이다. 누워 하늘을 보고 양 무릎을 굽혀 번갈아 빈 제기를 차는 것이다. 무릎 관절을 앞뒤로만 움직이다가 잠시라도 좌우로 풀어주면 다시 걷는데 훨씬 편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한 것이다. 그 다음은 정해진 물구나무 서기. 사진 찍는 나. 그리고 도로를 벗어나 계곡길을 내려간다.
<물구나무 서기>
얼음 사이를 흐르는 계곡물이 우리 발길을 자꾸 붙든다. 나뭇가지 앙상한 겨울길에 오늘 따라 시린 계곡물이 우리, 아니 내 마음에 도랑을 내고 졸졸 흘러든다. 찍어봐야 그냥 물인데 나는 맑은 물, 바위틈에서 흘러 떨어지는 물줄기를 카메라에 담는다. 내 카메라에 담긴 이 눈 시리고 마음 시린 물줄기는 하동호를 거쳐 섬진강으로 흘러갈 터이다.
<눈시리고 마음시린 계곡 겨울 물>
조금 전 걸어 넘어온 양이터재 정상 저쪽의 빗방울은 몇 발짝 차이로 낙동강물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 인생길도 사소한 생각과 행동의 차이로 종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먼 길로 흘러갈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계곡길이 끝나고 다시 신작로가 나온다. 앞이 확 트인다. 하동호가 설핏 보이더니 큰 산 하나가 떠억 버티고 서 있다.
<하동호 풍경>
마을로 내려가는 시멘트 포장길, 시원한 하동호와 그 건너 산자락 풍광에 마음이 화악 열린다. 본촌마을에 이르니 댐 쪽으로 흐르는 능선이 하동호를 길게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호수 쪽 도로변에서 푸르게 겨울을 지켜내는 대나무 숲이 호수 풍경과 잘 어우러져 있다. 휴게소에는 하얀 천막 구조물이 호수 풍경과 섞여서 약간 이국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배낭에 음식이 있었다면 쉬면서 뭘 좀 먹었을 텐데 우리 둘의 배낭은 오늘 따라 텅 비어 있다.
<멋진 본촌마을 하동호 휴게소의 구조물>
호수 왼쪽 끝에 높이, 멀리, 희미하게 서 있는 저 봉우리, 댐관리사무소 뒤 칠성봉이다. 우린 갑자기 그 산에 올라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정상에 서면 지리산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오고, 하동호 주변 경관을 모두 조망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지리산 명봉이 하고많은데, 왜 하필 나는 오늘 처음 만난 저 칠성봉에 오르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까?
<산산산, 그림움>
산은 그리움이다. 내게 있어서는 늘 먼 산을 바라보는 일이 그리워하는 일이었다. 앞산부터 차근차근 뒤로 갈수록 희미해지면서 그리움은 더해간다. 산의 모습이 첩첩 멀어질수록 마음은 점점 간절해진다. 멀리 보면서 그리워하는 마음과 시도 때도 없이 걷고 싶은 이 마음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 청춘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아득한 시간들이 모두 그리움이었다. 내가 그리워 한 대상이 알맞은 거리에 있었던 먼 산들이었으니 불쑥불쑥 찾아 들어갔던 산길들이 내 인생길이었던 셈이다. 저 앞서가는 길동무는 그런 날 동반하며 염려하고 사랑하며 지켜준 수호○○가 아니었을까? 내 상념이 너무 지나쳤을까?
<하동호 댐 저 멀리 칠성봉>
우린 꽃피는 봄 어느 날, 혹은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날에 칠성봉 900미터 정상에 한 번 오르자고 뜻을 모은다. 마음을 그리 합해놓고도 우리는 그 약속 곧 흩날려버리고 호수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댐 둑길을 걸어 청암체육공원을 지난다. 평촌마을을 거쳐 화월마을 시내버스 승강장에서 오늘 길을 마무리 한다. 하동읍에 도착, 둘레길 안내센터에 들러본다. 아담하게 지은 사무실은 닫혀있었다. 둘레길 정비기간이어서 그런가 보다. 위태로 가는 4시 반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터미널 건너 편 장터에서 맛본 숭어회, 재첩국, 시레기국 맛은 일품이었다.
<칠성봉 등산 안내도>
<하동호 풍경, 멀리 높은 봉우리가 칠성봉이다.>
애초에 하동에서 하룻밤 묵고, 내일 11코스를 하려 했으나 피곤한 맘에 벌써 집이 그리워진다. 하동, 구례, 압록, 곡성을 지나 광주에 이르니 밤 8시 이다. 다음은 화월에서 삼화실까지 6.1Km만 남았다. 오늘 예정된 코스를 넘어 3.2Km를 더 걸었기 때문이다. 늘어나는 도보 마일리지가 내 지리산 둘레길 통장에 쌓여 간다. 행복하다.
<아침, 덕산에서 바라본 구름에 싸인 천왕봉> 다음까페 <마음의 고향, 후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