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하루
(2016. 5. 26. 목.)
1. 서론
시편 90편에 모세는 “사람의 년수가 70이요 강건해야 80이라도 그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지나가니 날아가나이다.”라고 120세 수를 다하고 죽음을 앞둔 모세가 흘러온 인생여정을 살펴보며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영원성에 비해서 인생은 잠시 잠간 자다가 가는 한 경점에 불과한 인생임을 뇌이며 마지막으로 남은 민족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날들을 계수하면서 살 수 있는 지혜를 주십사”고 간구 드리는 마지막 기도이다.
그렇다, 生과 死의 특별한 하루를 경험하며 현 66년이라는 인생을 살아오며 세상출세와 욕구, 그리고 여치인생을 살아온 나로서는 이젠 좀 다른 삶, 믿음의 삶, 봉사와 헌신의 삶, 가족과 이웃을 위한 삶, 보람 있는 삶을 살아서 주님께 영광 돌리는 <자기부인과 자기십자가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2. 낚시하러가다
매주 월, 화, 수요일은 500여명이 오전 11시부터 오후4시까지 찬양, 기도, 말씀 등으로의 자기갱신의 영적훈련이다. 육적인 자기중심의 옛사람을 벗고 영적인 새사람으로의 탈바꿈의 꾸준한 훈련이다. 선교단체를 떠나 목회함을 포함해서 12년째이다. 나는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성경말씀의 진리임과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이 삶의 기준임을 절감하며 갖은 역경과 핍박, 고난을 인내하면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는 말씀대로 주님 안에서 주님영광위하여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
집회시간이외에는 알바와 휴식, 취미생활 등 자유를 누린다.
나는 알바 없는 날은 취미생활로 낚시를 즐긴다. 잡는 재미와 이웃과 함께 먹고, 나눔을 즐긴다. 90년에 대학전임 때의 박사학위와 목사안수를 어렵게 끝내고는 심취한 취미가 낚시였다.
한동안은 멀리하다가 지금은 즐기는 편이다. 밤을 지새우며 지켜봐야하는 일반낚시보다, 멀리 던져서 큰 고기 잡고, 편안하게 낚시할 수 있는 릴(Rill)-낚시를 즐긴다.
남들보다 어복은 많은 것 같다. 가까운 평택 진위면의 모 저수지나 냇가에서 남들이 잘 안가는 나의 포인트가 있다. 낚시 갈 때마다 대물잉어 한두 마리에 월척붕어 한두 마리를 잡는다. 빈손으로 올 때가 거의 없다, 낚시를 던져놓고, 전기장치하고 야전침대에 1인용텐트를 치고 잠자다가 잉어 등 고기가 물면 전기장치에서 잠을 깨우는 사이렌소리에 고기를 잡아낸다.
그동안도 수십 마리는 잡았다. 교회나 이웃의 몸보신용으로, 경로잔치용 등으로 함께 나누는 보람을 가진다.
어제 저녁도 비번이라 10시경에도 낚시터에 왔어 새벽 2시경에 대물잉어 한 마리를 수확하고 새벽에 철수하여 수원의 연화장화장터 숙모님 장례식장을 향했다.
3. 작은엄마(숙모)의 장례식에 가다
오늘 오전 7시에 수원 연화장화장터에서 유일한 숙모님의 장례식이 있어서 일지기 승용차로 수원으로 향했다.
82세의 고인이 되신 숙모님의 삶은 그야말로 <여자의 일생>이였다. 남편인 작은아버지(석수호)는 60여세에 돌아가셨는데 늘 멀리서 떨어져 살아서 어릴 때부터 가끔 본 작은 아버지의 모습은 가난에, 술 즐기시며, 가족박대와 게으름 등 부정적인 기억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일생을 함께 하며 그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5남매(3남2녀)를 낳아 키우시며 일생을 갖은 역경을 헤치고 살아오신 숙모님의 삶은 어느 여인도 이겨내지 못할 인고의 삶이였다. 그야말로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이었다
유일한 친족인 시누이인 나의 고모들에게도 인간다운 취급을 받지 못하였다. 자녀들 5남매도 거의 무학으로 이혼, 상처로 재혼, 교통사고, 실직 등등의 갖은 역경을 당함을 아픔으로 바라보며 수습해야했다.
5남매가 역경과 고난 중에도 엄마에 대한 효도와 남매간의 우정은 돈독하였다. 특히 5남매 중 둘째 아들인 강석에게 유독히 보람을 가지시며 늘 “잘해준다“고 자랑하셨다. 강석이는 학교는 집안 형편상 많이 다니진 못했지만 어릴 때부터 명석하여 홀로 고군분투하며 중소기업 창업 등등으로 재정적인 뒤 바침을 잘하면서 우리집안의 대소사에 빠짐없이 쫓아다니며 엄마에 대한 효도와 집안의 우애를 힘썬 고마운 사촌 동생이다.
내가 집안의 장손이라지만 교회에 직분을 가지며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지 않으니까 모든 제사를 강석이가 담당하고 있어서 가끔 명절 때 가볼 뿐이다.
집안 어른격인 숙모와 연세가 비슷한 고모님 두분은 늘 고생하시는 숙모에 대한 빈정거림에, 돌아가셨다고 연락을 드림에도 “5남매 자녀들을 봐서라도 그냥 계시면 되느냐?‘고 함에도 전혀 요동을 않으셨다.
내게 대한 숙모님은 고마운 모습이다. 고생가운데도 1990년에 교수재직시의 대구 파크호텔(현, 인터불고)에서의 신진수이사장님이 배려해주신 ‘법학박사학위취득 및 목사안수축하연“에 큰딸 영순이 랑 참석하셨고 2년 전에도 불편한 몸으로 대구에서의 나의 아들 민국이의 결혼식에도 강석이와 영순이랑 오셔서 축하해주셨다.
어려운 가운데도 5남매(3남2녀)를 두셨는데 손자, 손녀들이 15명이다. 수원 화장터에서 장례식을 가짐에 사위 며느리 등 상복 입은 모습들에 그래도 든든함이 보였다. 모든 장례절차를 마치고 떠나기 전에 버스에 올라서 장손으로서 인사말을 했다 “장손노릇 못해서 미안하다고 앞으로 작은 집안이지만 잘 지내고 꼭 연락하라”고 인사말을 하고 자서전인 <하늘아, 땅아, 바다야, 파도야,>의 책을 모두에게 한권씩 나누어 주었다.
살아생전 잘해드리지 못함이 죄송하고 남은 가족, 집안들에게라도 장손으로서 관심을 많이 가져야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4. 근로장려금 신청하러가다
돌아오는 길에 수원 동세무서에 들렀다. 근로장려금을 지급하니 신청하라는 공문이 있었기에 오는 길에 세무서를 들러서 근로장려금 신청을 하였는데 9월 달에 49만원이 지급될 예정이란다. 금액의 다소를 떠나서 고마운 정책이다.
5. 텃밭에 가다
오는 길에 화성 동탄의 텃밭에 들러서 작업을 하므로 신선한 기분 이었다
올해 초 3월에 (알바로 경비하는 회사담장 밖의) 공터에 텃밭을 개간했었다.
폐허 같은 돌무더기에다 잡초가 무성하여 도로에 접하여서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므로 추잡한 환경이었다. 30여 평되는 텃밭을 어려운 작업을 거쳐서 개간하여 퇴비와 비료를 시비하고 비닐을 덮고 상추, 꼬추, 가지, 토마도, 케일, 근대, 고구마, 들깨 등을 심었다.
비가 많이 오며는 물이 고이는 등 좋지 않는 환경이지만 수확하여 유기농으로 자라는 재미와 수시로 수확하여 즐겁게 먹기도 하며, 며칠 전 교회 70세 이상 어르신들 경로잔치에도 유용하게 활용하고, 자라고 수확해서 먹고, 나누는 재미가 삶에 활력소를 주었다.
6. 홀아비 박 목수 집을 가다
이어서 오후 늦게 용인시 남사면의 100만평의 대형 송전저수지 아래에 목공소를 하는 박모 양동생을 찾았다. 3년 전에 낚시하다 만난 10살 아래의 박 사장은 홀아비로 [니가 만들어가!]라는 특이한 간판을 걸고는 전원주택의 원두막이나 놀이기구, 식탁 등을 다양하게 만들어 전시하며 팔고 있는데 자동차도로변이여서 손님들이 많이 찾는 편이다, 젊을 때는 교사도하고, 건장하였는데, 그러나 장남으로 귀하게 자라서 그런지 아들 하나두고는 이혼을 당한 후에는 그 충격으로 충주댐에서 고기잡이로 칩거하기도하며 술을 즐기면서 이웃들과 쉽게 시비와 다툼으로 일관하며 자기관리가 부족한 편이다.
나보고 “형님”이라고 하면서도, 그를 돕고 찾는 나에게도 막말로 실수 할 때가 자주 있었는데 대다수 이런 행패에 비난하고 떠나버린다. 늘 외톨이로 술을 친구 삼아 지낸다.
나는 천하보다 귀한 그 영혼을 보면서 변함없이 방문하고 김치 등 반찬 등을 나누기도하였다. 나에 대한 신뢰가 큰 것 같다. 선물한 <자서전>을 목공소 책상위에 두고는 오는 손님들에게 “형님”이라며 소개하곤 한다. 수시로 전화하여 “형님, 우울증이 심하니 좀 와달라고 청 한다” 오늘은 특별한 봉사를 성심껏 해주며 심란한 마음을 달랬다.
① 텃밭작업
목공소 뒤편에 언덕 공터를 정리하여 상추, 꼬추, 케일, 들깨, 토마도 등을 심어서 먹을거리에 도움 되도록 하였는데 갈 때마다 내가 돌봐야한다.
② 밥을 하다
박사장은 술을 즐기며 식사를 소홀히 하는 편이라 건강이 걱정되어서 밥을 지어주었다.
③ 방과 식당청소를 하다
홀로 살며 신발신고 들어가는, 방이나 부엌이 엉망이다, 던져진 음식담긴 비닐봉지에선 구더기가 보였다. 구역질이 났지만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대청소를 했다. 힘든 작업이었지만 방과 부엌의 설거지 등등 말끔하게 청소하고 정리해주었다.
7. 근무처로 가다
격일로 저녁 8시부터 익일 8시까지 알바로 경비업무를 1년 넘어 하고 있다. 이전엔 알바로 주로 식당청소를 하였으나 야간에 주방청소의 3D의 어려움도 있었으나 인간적인 <갑질>과 하청업자의 불법과 부도덕한 급여착취, 위험한 염산세재 액 사용 등으로의 화상 등을 경험하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취약한 임시직과 알바직의 현장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주님의 은혜로 2015년 4월부터 집에서 가까운 10분 거리의 동탄의 환경 좋은 자동차 엔진개발연구회사에 쉽고, 편한, 시간 많은 현 회사의 경비를 허락하셔서 업무에 충실하면서, 틈틈이 노트북을 두드리며 자서전 소재 수필 30여 편 이상을 <울릉문학회>에 올리는 등으로, 금년 1월13일 오산 컨벤션 홀에서 270 Page의 [하늘아, 땅아, 바다야, 파도야!]의 자서전을 보람 있게 출판기념식을 갖기도 하였다.
자진하여 정원의 제초작업 등 봉사 때마다 대표회장님을 만나게 됨도 은혜였다.
8. 끝맺음
어언 나도 인생 70을 바라보는 황혼 이라는게 믿기지 않는다.
6.25사변으로 부모 잃음의 사연부터해서 어느 누구의 인생보다도 이야기꺼리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젊어서는 꿈을 먹고살고, 늙어서는 추억을 먹고 산다” 고 하였는데 돌이켜보면 추억거리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추억을 돌아보며 “남은 인생의 하루하루 삶을 <사람답게, 보람 있고 멋지게, 의롭게, 즐겁고 기쁘게,> 열심히 살자! 특히, 늙고, 병들고, 가난하고 외로운 어른들을 잘 섬기자“고 다짐, 다짐한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도 오직 주님의 사랑과, 축복, 은혜뿐임을 감사, 찬양, 영광 돌릴 뿐입니다.
(1990년 9월 29일 전임교수때 대구인터불고호텔에서의 박사학위취득과 목사안수축하연을 마치고--오른쪽이 숙모님이다)


(텃밭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