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선(善)은 가장 좋은 선물이다.
2026년 10월 14일
법희(法喜)
생활 속에서 나는 자주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가장 귀중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었음에도 때로는 다른 사람의 눈에는 꼭 가장 좋다고 생각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발견했다.
나 자신에게도 이러한 일이 나타난 적이 있다. 남이 내게 준 것은 그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었고, 나 역시 그가 자신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에게 주었음을 알고 있지만, 오히려 곤혹스럽거나 정신적으로 부담이 되었다.
나는 때때로, 나 역시 유사한 상황이 발생한 적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내가 손님을 모임에 청했을 때, 나자주 차 한 봉지를 가져가서 차를 우려 모두가 마시게 했는데,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여러 번 거친 후 나는 경험을 총괄해 냈는데, 여러 사람이 자신이 마시고 싶은 것을 스스로 주문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으며, 이렇게 하면 비교적 마음이 가뿐하다.
생활 속의 몇몇 작은 일들을 떠올려 보니 역시 이러하였는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꼭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어울릴 때 자연스러움에 따라야 하며, 일반적으로 자신의 취향대로 강요하면 정반대의 결과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
(옮긴이주 ㅡ 초식동물에게 고기를 주거나 육식동물에게 풀을 주거나, 열성체질인 사람에게 인삼을 먹으라고 주는 것이 꼭 좋은 일은 아니다. 자녀의 진로나 혼사문제 등에 부모가 억지로 개입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도 이러하다. 다른 사람이 도움이 필요함을 확인했을 때 적절한 도움을 주는 것이 비로소 좋다. 다른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 때 무조건 달려가 그로 하여금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만드는 것이 꼭 좋은 일은 아니다.
마치 두 사람이 다툴 때 옆에 있는 사람이 이치를 따져 판정해 주다가, 결국 잘 풀리지 않아 다투는 사람과 말리는 사람이 서로 싸우게 되어 오히려 번뇌만 더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언제나 다른 사람을 선(善)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어렵다. 우리는 미혹 중에서 수련하며, 최대한 속인 상태에 부합하여 수련하므로, 모두가 함께 있을 때 상대방에게 번거로움을 만들어 주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매우 훌륭한 것이며, 상호 신뢰가 가장 소중한 것이다.
어떤 일을 어떻게 할지 논의할 때 함부로 단언(斷言)하지 않고, 모두의 지혜를 더하고 합쳐서 잘 배합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
비록 자신이 옳다고 생각할지라도 인내심을 갖고 다른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아야 하며, 어쩌면 더 좋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최근에 나는 나의 마음이 안정되었고, 주변의 일도 순조로워졌으며, 자신도 피곤하지 않게 되었음을 느끼는데, 사람과 어울림에 있어 선(善)은 가장 좋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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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선(纯善)
2003년 12월 16일
글 / 귀진(歸真)
순수한 선(纯善), 그것은 관념을 지니지 않은 자연스러움의 표출이며, 본성의 표현이다.
순수한 선(纯善)은 아름답지도 부드럽지도 않고, 강요를 하는 것이 아니고, 틀이 없고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고려가 없다.
순수한 선(纯善)은 물질과 정신의 화목한 통일이다.
순수한 선(纯善)은 포용과 이해의 일체이며, 만사만물에 대한 소통이다.
지순(至純), 지선(至善) 그것이 바로 返本歸眞의 과정이다.
부동한 물질, 부동한 생명에는 부동한 표준이 존재한다.
마치 강철은 도자기가 녹이 쓸지 않음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도자기 또한 강철의 단단함을 영원히 체험할 수 없다. 그것은 물질의 구성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한 사람이 자신의 관념을 지니고 다른 사람을 가늠한다면 영원히 관용할 수 없고, 영원히 자신의 관념에 의해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눈에 거슬리고 마음에 거슬리게 느껴져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두개의 서로 다른 생명이고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마땅히 다른 사람을 존중해야 하는데 표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야만이 비로소 바다와 같은 마음의 용량이 있게 되며, 비로소 다른 사람의 어리석음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다.
자신의 표준으로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지 말아야 하는바, 그렇게 하면 진실을 잃어 영원할 수 없는데 그것은 생명에는 자신의 특색이 있기 때문이다.
선(善)이 선할 수 있음은 선(善)을 행하는 사람이 자신이 선(善)을 행하고 있음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옮긴이주 - 이를 無爲, 무주상보시라고 말한다.)
선(善)을 위하여 善을 행할 때는 명예, 이익, 애정(名利情) 등을 추구하는 목적성을 지니고 있어 순수하지 못하다. 때문에 진실한 선(眞善)이라고 부를 수 없다.
이와 같이 善을 위하여 善을 행할 때(옮긴이 주 - 이를 有爲라고 말한다.)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심지어 다른 사람을 해치게 된다.
고대글자 중의 선(善)은 한마리의 양(羊)과 풀(草) 한포기였다. 양에게 푸른 풀을 주는 것이 비로소 善을 위한 것인바, 자신의 표준으로 가늠하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양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특징과 접수능력을 충분하게 고려하고 善을 행하여야 비로소 선과(善果)를 맺을 수 있다.
생명이 마음을 닦아 우주의 특성(眞, 善, 忍)에 동화하면 저도 모르게 지선지순(至善至纯)에 도달할 수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