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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뜨랑제의 태평양 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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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서평 해롤드 G. 할 무어 장군과 이아드랑 전투
Jose Rizal 추천 0 조회 913 11.07.19 11:37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해롤드 G. 할 무어 장군과 이아드랑 전투

 

우리는 적에 맞서 적진에 들어간다. 귀관들을 무사히 데려오겠다는 약속은 해줄 수 없다.

귀관들과 전지전능한 하나님께 이것은 맹세한다. 우리가 전투에 투입되면 내가 맨 먼저

적진을 밟을 것이고 맨 마지막에 적진에서 나올 것이며 단 한 명도 내 뒤에 남겨두지 않

겠다. 우린 살아서든 죽어서든 다 같이 고국에 돌아올 것이다.

- 베트남전 파병 전 부하들에게 한 약속 -

 

 

군사적 천재가 갖추어야 할 요소를 구비한 장군
마틴 밴 크레벨트는 <전쟁에서의 지휘>라는 책에서 전쟁지휘의 역사는 확실성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1990년대는 크레벨트가 관찰한 바와 같이 국방개혁의 후원하에 지휘관들에게 적절한 결심을 가능하게 하고, 정밀타격을 가능하게 하며, 심지어 적의 대응까지도 예측하는 압도적인 전장지식을 달성하게 할 주도적인 조치가 강구되었다.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바와 같이 전투의 불확실성과 복잡성은 거의 200년 전에 지휘관들이 가졌던 것처럼 군사적 천재성을 구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클라우제비츠는 전투를 둘러싼 불확실성의 안개를 꿰뚫어 볼 군사적 천재의 구성요소인 지성, 용기, 결단력을 지휘관들이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3가지 특성을 효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지휘관들에게 전투의 예측불가 상황에 직면하였을 때 적응력을 구비하게 해준다.


해롤드 무어 중장은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군사적 천재의 특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중령 시절인 1965년 11월 14~16일 사이 미군 역사상 가장 많은 화젯거리를 던져준 전투이자 전쟁을 변화시킨 전투로 불리는 ‘이아드랑 전투’에서 우수한 전투지휘력을 보여주었다.


이아드랑 계곡에 있는 착륙지대 엑스레이에서 영웅적인 전투를 수행한 미 1기병사단 7연대 1대대의 업적은 무어 장군과 조셉 갤러웨이의 전쟁담을 기록한 <우리는 한때 젊은 군인이었다(We were soldiers once… and young)>라는 책으로 발간되었고 ‘위 워 솔저스’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되었는데, 엄청난 규모의 단호한 적과 맞닥뜨린 지휘관이 전투의 불확실성을 어떻게 극복해 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 전투에서 1대대는 79명의 전우를 잃고 북베트남군 600명 이상을 격멸하였다. 무어의 전투 지휘를 위한 준비, 특히 전장환경을 평가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며 비판적 추론을 통해 전투의 전 단계를 조명하여 자기 스스로 결론을 도출하는 역량은 전투의 본질을 지휘관이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는 클라우제비츠의 주장과 일치하고 있다. 지성, 용기, 결단력을 구비한 무어의 평생에 걸친 직업군인으로서의 준비는 그가 지휘한 대대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하였다.


적응성 있는 지휘자로서 무어의 업적은 뛰어나다. 나중에 그는 월남에서 대단히 우수하게 여단을 지휘하였으며 성공적으로 작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쟁 후에 한국에서 7사단장으로 근무하였고 캘리포니아 소재 포트 오르드 사령관으로서 효율성 있고 군기가 엄정한 부대를 만들어 정평이 났다. 군인으로서 마지막 직책은 육군성 인사담당 참모차장으로 미래의 장교와 병사들을 고무시킨 위대한 스승으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의 영향력은 미군들에게 세대를 거쳐 확산되고 있다. 토니 나달은 무어 장군의 성실성과 직업정신, 가족을 위한 헌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진지한 관심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그는 무어장군이 자기 삶의 역할 모델이라고 말하였다. 부하였던 어니 사비지(Ernie Savage)는 무어 장군을 인간적이며 도덕적, 정신적 용기를 지닌 인물이라고 말하였다.


 

해롤드 무어 장군은 누구인가?
그는 1922년 2월 13일 켄터키 주 바드스타운(Bardstown)에서 보험 세일즈와 집짓는 일을 하는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하였기에 자식들에게 교육을 통해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도록 강조하였다. 무어는 초?중?고교를 가톨릭 계열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한다는 강한 종교적 신념을 갖고 자랐으며 이것은 일생동안 그의 생활의 토대가 되었다. 그가 체계적인 제도권 교육을 받은 것이라곤 성 요셉학교와 단
기간의 보이스카우트 교육뿐이었다.


리더십에 관하여 그에게 가장 큰 인상을 준 책은 보이스카우트 행동지침서였다. 15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그에게 미 육사를 지망하도록 권장하였다. 이후 그의 목표는 사관학교에 가는 것이었으나 입학허가를 받기가그렇게 녹녹하지가 않았다. 1940년, 17세 소년 무어가 미 육사를 가기 위한 지명권을 얻기 위해 한 행동을 보면 이미 결단성과 적응성을 보여주고 있다. 고향 켄터키보다 워싱턴D.C.로 가는 것이 지명권 획득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고 무어는 워싱턴 소재 상원 도서 창고에 직업을 알아보았다. 일주일에 30달러의 주급을 받고 허리가 휠만큼 중노동을 견뎌낸 것도 미 육사를 가기 위한 인고의 시간이었다. 2년 후 켄터키 주 하원의원 에드워드 크릴(Edward w. Creal)이 무어에게 사관학교 지명권을 주었는데 미 육사가 아닌 해군사관학교 입학을 위한 지명권이었다. 하지만 무어는 포기를 하지 않고 하원의원에게 대안을 제시했는데 만약 해사를 지망하는 미 육사 지명자가 있다면 자신을 미 육사 지명자로 변경시켜 줄 수 있는지 의원에게 물었다.


그리고 10일 후, 아무 면식이 없던 조지아 주 하원의원으로부터 마침내 미 육사 지명권을 받아낸 무어는 미 육사에 입학하였다. 끈기와 창조적 사고를 통하여 무어는 자기 목표에 도달하는 길을 찾아낸 것이다. 미 육사 생활은 할 무어에게 도전적인 삶을 살게 하였으나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그가 수학과목에 취약하다는 점이었다. 당시만 해도 미 육사는 핵심교육 과목이 공학 분야에 치중되어 있었다. 자신의 약점이 수학임을 간파하고 그는 커트라인을 넘기 위해 이를 악물고 공부하였다. 그는 플래시를 밝히거나 화장실에서 공부하기도 했는데 한 인터뷰에서 40와트의 전구 불빛이 얼마나 고마운지 알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일 18시 30분에 성당 미사에 참석하였고, 이것은 일생을 통해 그가 경건한 삶을 유지한 바탕이 되었다.

 

미 육사 졸업 후 무어는 용병술을 배우기 위한 모든 기회를 활용하면서 군인과 지휘자로서 지성을 연마하기 위한 노력
을 계속하였다. 작전 업무 외에도 그의 경력은 전문 직업군인에 관해 독서하고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다양한 직책수행을 통해 그는 미래전에 대한 작전개념을 개발하였고, 미 육사에서 전술을 가르쳤으며, 미 지휘참모대학을 이수한 후 미 해군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그는 전문 직업군인으로서 구비해야 할 요소를 일찍이 인식하였다. 즉 전문 직업 영역은 너무나 독특한 분야로서 간혹 자주 사용할 수 있다 할지라도 평생에 걸쳐 한번 사용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영역임을 잘 간파하고 군사사(史)에 매력을 느껴 군사사의 폭과 깊이와 맥락을 이해하는 공부에 열중했다. 무어는 동료장교들에게 군사사 연구를 추천하고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전쟁이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 전투의 결과를 어떻게 평가하여 세부적으로 연구해야 하는지를 생각하였다.


그는 연구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손에 책과 지도를 들고 전쟁터를 방문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베트남에 도착한 이후 버나드 폴이 쓴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군의 실패를 설명한 책인 <기쁨이 없는 거리(Street without joy)>를 읽고서 무어는 대대 주임원사 바실 플럼리와 함께 1954년 6월 베트남군이 매복하여 프랑스군 100기동부대를 격파한 안케와 플레이쿠 서쪽 19번 도로를 찾아 답사하였다. 전장을 방문한 후 그의 대대가 곧 직면하게 될 적을 과소평가하지 않을 것을 언명하였다.


수십 년 후 이아드랑 계곡 전투를 회상하면서 무어는 조기에 준비해야 하는 중요성을 간파하였는데, 자신은 웨스트포인트와 한국전쟁 경험, 전투에서의 리더십 연구를 통해 배운 것을 이아드랑 계곡 전투에서 그대로 행동화하였다고 말한 바 있다. 군사사 연구를 통해 무어는 자신의 경험과 제한사항을 다양한 맥락 속에서 가치를 평가하고 그리하여 변화에 더 잘 적응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에서 그가 경험한 정적인 방어작전은 주로 전쟁의 정치적 맥락과 장기 휴전협상의 결과임을 인식하였다. 한국전쟁 후 무어는 미 육사에서 보병전술을 가르쳤다. 이때 걸프전의 영웅 노먼 슈와츠코프도
그로부터 전술을 배웠으며, 보병병과를 선택한 것도 그의 영향 때문이었다. 무어는 미 공수부대 일원으로 150여 회의 측정 점프를 하였고 국방성에서 공중기동병과 장교로서 유일한 존재로 근무하였다. 여기서 무어는 월남전에서 실제 적용하게 될 미래전에 관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개발하였다.


1964년 가을, 무어는 조지아 포트 베닝에 주둔한 7기병 1대대의 지휘권을 인수하였다. 대대는 캐롤라이나에서 공중기동 시험에 뛰어난 공적을 이루었고, 캐롤라이나 연습 후 육군 참모총장은 무어에게 공중기동 전술을 가르치라는 지시를 하였다. 무어는 일찍이 전술연구에 몰입해 있었기에 미 육군 내에서 가장 혁신적인 장교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아드랑(Ia Drang) 전투 개요
이아드랑 전투를 간략하게 분석해보면 무어가 적의 화력하에서 어떻게 대대를 준비시켰는지 그리고 무어의 군사적 천재성 즉 그의 지성, 용기, 결단력이 전투의 긴박성 속에서 어떻게 발휘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1965년 11월 12일 작전 부사단장 리처드 놀즈(Richard Knowles) 준장은 무어부대를 방문하여 캄보디아 국경 근처의 이아드랑 계곡에서의 대대급 규모의 작전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언급하였다. 무어와 그의 참모들은 즉각 작전지역의 도상연구를 시작하였다. 무어는 만약 최악의 시나리오가 전개될 때 전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포함하여 마음속으로 ‘만약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끝없는 연상을 하였다. 그는 상황을 평가하고 결심을 내리기 위하여 전방으로 나가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무어는 착륙지점에 제일 먼저 발을 디딘 군인이었다.


11월 13일 오후 5시 무어는 준비명령을 접수했다. 대대는 작전 준비에 필요한 병력을 강화하여 즉각 응답하였다. 5시간 내 대대는 모든 필요한 준비를 완료하였다. 한편 무어와 그의 참모는 전투 계획초안을 수립하였고 공중수색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무어가 직접 수색을 하여 포병 포대를 보조진지로 이동케 하였다. 무어는 착륙지점 X-ray를 선정한 후 지휘소로 복귀하였다. 그는 착륙을 오전 10시 30분에 시작한다는 구두 명령을 간략하게 하달하였다.


무어는 이처럼 대대가 수행하는 대규모 작전이 중대급 작전과 차이가 있을 것으로 인식하였다. 단기간에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는 데 효과적으로 적응하는 능력은 포트 베닝과 캐롤라이나 주에서 강도 있게 수행한 공중기동 훈련의 결과였다. 대대 장교들과 부사관들은 어떻게 준비하고 싸워야 하는지를 잘 알았다. 장문의 서식명령은 불필요하였다. 전투가 전개되자 무어는 전투를 분석하고 이어서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다른 중요한 결심을 하였다. 그는 착륙지대가 방어해야 할 중요지형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A중대장 나달 대위에게 ‘최초계획은 버려라. 대신에 서쪽으로 수색하여 나달중대는 공격하는 적을 저지할 방어진지를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나달은 무어 중령의 적과 접촉을 위해 B중대를 파견할 초기결심
과 A중대를 방어진지로 전개시켜 건전한 판단에 의한 합동공격을 한다는 다음결심을 생각하였다. 무어가 B중대의 1개 소대가 절단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즉각적인 구출작전 노력을 해야 할 유혹을 참았다. 헤런 대위는 만약 무어가 중대의 나머지를 공세적 구출작전에 축차적으로 투입한다면 착륙지대는 유린되고 대대의 통합성이 위협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무어가 전방에 위치한 것과, 불확실한 조건하에서 결심을 하는 그의 능력은 대대의 생존에 긴요한 요소였다. 나달의 A중대 병사들은 그들이 방어진지를 점령하자마자 무지막지한 적과 접촉하게 되었다. 작전장교 딜런은 헬기 공중지휘소에 위치했는데 무어가 수립한 그의 초기결심을 공중에서 식별할 수 있는 어떠한 요소도 알 수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다음 날 2일 동안 그는 적의 행동을 예측하는 일련의 결심을 하였다. 한국전쟁의 경험에 비추어 무어는 적이 약점을 파악했을 것으로 보고 그가 믿고 있는 방어진지를 강화하였다. 그는 결정적인 시간과 장소에 포병 화력과 항공화력을 퍼부었다. 전투 다음 날 아침 그는 적의 단호한 공격을 격퇴시키기 위한 중요한 시간과 장소에 예비대를 운용하였다.


무어의 경우처럼 상황에 적응성 있는 지휘관은 아무리 절망적이거나 기묘한 상황이 전개되더라도 이길 수 있다는 결단력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리고 행동과 목소리의 톤, 무선통신, 대면 상황, 외모와 얼굴표정, 그리고 눈 모양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 주어야 한다. 지휘관은 냉정하고 침착하며 차분해야 한다. 공포감은 금물이며 소음, 먼지, 연막, 폭발음, 부상자의 신음소리, 자기 주위에 죽어있는 사망자를 보고도 겁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모두 정상적인 것이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적극적인 결과에 대해 확실하지 못한 증거나 힌트를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다시 한 번 귀관의 머릿속과 부하들의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할 원칙은 삼진을 당해도 귀관은 결코 아웃이 안 된다는 원칙이다. 어떠한 상황도 당신에게 유리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하나 이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지휘관은 대안을 식별하고 적응하도록 단호해야 한다”라고 그는 말했다.


무어는 훈련과 완고한 결단력, 집요함, 의지가 전투의 전세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지휘관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전투는 이미 졌다는 말을 새기고 있었다. 전투가 소강상태가 되면 무어는 방어지대 내부를 걸어 다니며 모든 병사들과 눈을 마주치고 그들의 사기를 올리며 그들의 결의와 각오를 고취시켰다.


무어는 전투에 직접 관여하고 싶은 욕구와 다음 행동을 예측하고 분명하게 사고할 필요성 사이에서 균형을 적절히 취하였다. 예를 들어 그는 숲속 깊숙이 B중대를 이동시키는 데 대하여 명확히 자기 입장을 말하고는 자신이 소총수 역할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의 작전 장교는 전투를 관리했는데 필요시에는 무어가 개입하였다. 무어가 지휘를 위한 준비와 대대를 준비시킨 것은 이아드랑 전투에서 부대가 승리하는 데 필요한 주요 핵심요소였다. 그의 병사들과 지휘자들은 전투의 두려움과 혼란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적응성, 신뢰, 용기와 결단력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훈련 시에 했던 대로 병사들은 사망한 전우들의 책임을 대신 떠맡았다. 예를 들어 B중대의 고립된 소대는 소대장에서 소대 선임부사관, 분대장, 마지막에는 어니 사비지 상병에게까지 지휘책임이 승계되었다. 11월의 3일간, 특별한 영웅적 행동과 리더십 면에서 다른 사례들이 무수하게 많았다.


무어는 지성, 용기, 결단력에 내재된 적응성을 보여주었는데 그 외에도 그는 부하를 사랑하는 또 다른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전투 간 침착하고 냉정을 유지했지만 무어는 전투가 끝난 후 부하들에 대해 깊은 존경과 애정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는 죽은 부하를 결코 뒤에 남겨두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였고 그 약속을 잘 지켰다. 그와 부인 쥴리는 전투에서 사망한 부하들의 가족을 위로하고 최선을 다하여 보살폈다. 무어는 종군기자 조 갤러웨이와 함께 이아드랑 전투에서 스러져간 용감한 부하들의 명예를 고양하였고, 이것은 <우리는 한때 젊은 군인이었다>라는 책에서 잘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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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7.19 21:10

    첫댓글 영화는 고증 빼면 영 별로였죠. 전쟁영화 특유의 클리셰가 난무했던 작품으로 기억합니다.

  • 작성자 11.07.20 09:17

    저도 내용보다는 OST가 더욱 인상에 남았어요~빵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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