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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잠언의 말씀 31,10-13.19-20.30-31
10 훌륭한 아내를 누가 얻으리오?
그 가치는 산호보다 높다.
11 남편은 그를 마음으로 신뢰하고 소득이 모자라지 않는다.
12 그 아내는 한평생 남편에게 해 끼치는 일 없이 잘해 준다.
13 양모와 아마를 구해다가 제 손으로 즐거이 일한다.
19 한 손으로는 물레질하고 다른 손으로는 실을 잣는다.
20 가난한 이에게 손을 펼치고 불쌍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준다.
30 우아함은 거짓이고 아름다움은 헛것이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칭송을 받는다.
31 그 손이 거둔 결실을 그에게 돌리고 그가 한 일을 성문에서 칭송하여라.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말씀 5,1-6
1 형제 여러분,
그 시간과 그 때에 관해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습니다.
2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3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 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4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5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6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5,14-3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4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15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16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17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그렇게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18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
19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20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가 나아가서 다섯 탈렌트를 더 바치며,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1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22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나아가서, ‘주인님, 저에게 두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24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5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26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27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28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29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30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세계 가난한 이를 위한 날>
오늘은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2016년에 선포하신 '세계 가난한 이를 위한 날'입니다.
교종께서는 '자비의 희년'을 폐막하시면서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가난한 이들, 약한 이들,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힌 이들에게 손을 내밀도록 부르심을 받았음을 밝히시면서, '이날'의 제정을 강력히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연중 제33주일을 '가난한 이를 위한 날'로 정하시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사랑합시다'라는 제목으로 담화문을 발표하셨습니다.
이 담화문에서 교종께서는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라는 “요한 사도의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책무”임을 밝히고, “모든 이는 연대와 형제애의 구체적 징표로써 가난한 이들에게 마음을 열고 나눔을 실천하도록 초대”받았음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특별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일이 ‘우리의 책무’임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제1독서는 잠언의 마지막 부분으로, 주인을 위해 헌시하며, 가난한 이에게 손을 펼치고, 불쌍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주는 훌륭한 아내의 모습을 통해 지혜로운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제2독서는 주님의 날이 도둑처럼 덮치지 않도록 빛의 자녀로서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도록 촉구합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탈렌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먼 길을 떠나면서 자신의 종들에게 어마어마한 돈(1 탈렌트는 6천 데나리온이고, 1 데나리온은 하루 일당. 오늘날 하루 일당을 10 만원으로 잡으면 약 6 억원)을 맡기고 떠납니다.
이는 종들에 대한 주인의 ‘믿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믿음의 표시인 이 탈렌트는 주인의 ‘선물’임과 동시에 그에 따른 ‘과업’(소명)이기도 합니다.
선물은 잘 보관하라고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잘 활용하고 베풀라고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장하고 꽃피워 열매를 맺어야 하는 ‘소명’(과업)도 함께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십자가가 질 수 있는 능력과 함께 주어지듯이, 탈렌트(선물)도 열매 맺기에 충분하게 '능력에 따라'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와서 셈을 할 때는 그 선물을 잘 활용한 첫째와 둘째 종을 “착하고 충성스런 종”이라, 탈렌트를 땅에 묻어두었던 셋째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착하다는 것, 악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여기서 ‘착하다’는 것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에게서 알 수 있듯이, 주인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이요, ‘악하다’는 것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주인의 선물을 땅에 묻어버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신뢰냐?’ 아니면 ‘선물을 받은 자신의 신변 안전이냐?’ 에 달린 문제입니다.
그러니 ‘착하다’는 것은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믿음이요 희망이요 사랑일 뿐 아니라, 자신을 ‘먼저’ 믿어주신 분께 대한 감사요 봉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충성스런 태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반면에 ‘악하다’는 것은 주인을 불신하고 판단할 뿐만 아니라, 주인은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도 않는 데서 모으는 무서운 분, 곧 자신의 것을 빼앗아 가는 착취자로 여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게으른 태도’를 가지게 되고 만 것입니다.
결국 성실한 종과 게으른 종의 차이는 그 재산을 얼마나 불렸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주었던 신뢰와 사랑을 그들이 얼마나 큰 신뢰와 성실함으로 보답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물에 대한 태도는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태도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주인은 첫째와 둘째 종에게 말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 25,21.23)
반면에 셋째 종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마태 25,26-28)
그야말로 믿음은 믿음을 낳고, 불신은 불신을 낳게 됩니다.
사실 은총의 선물은 능력에 따라 항상 충만히 주어지지만, 우리는 그 은총을 주는 대로 다 받지 못하고 비워진 만큼, 곧 나누어 비워진 만큼 받게 됩니다.
반면에 움켜쥐고 있으면 움켜쥔 것마저도 잃게 됩니다.
사실 그 선물은 애시 당초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탈렌트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선물을 받은 이가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믿음’에 달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믿으셨고, 믿으셨기에 능력에 따라 충분한 선물(은총)을 주셨고, 그 선물을 통해 하늘나라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그 선물은 주신 분의 뜻에 따라 사용될 때에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는 하늘나라를 차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첫째는 ‘은총’ 곧 하느님의 사랑, 먼저 주신 사랑이요, 둘째는 은총에 따른 ‘소명에 충실함’, 곧 은총을 열매 맺기 위해 믿음과 사랑으로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일’ 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은총의 열매를 맺을 힘도, 십자가를 질 힘도 함께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 둘은 이미 하느님의 은총이요, 우리에게 월계관을 씌워주기 위한 주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마태 25,15)
주님!
당신은 신랑이 신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듯 제게 탈렌트를 맡기셨습니다.
당신의 신뢰를 신뢰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진정, 그 크신 당신의 사랑을 제 안에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선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인생 결산>
오늘 연주 제33주일은 연중시기 마지막 주일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연중 마지막 주일이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연중 제33주일의 주제도 ‘인생 결산’, ‘인생 최종 결산’이라고 함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도 이렇게 얘기합니다.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인생 결산을 할 때 우리는 일생을 잘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는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60세 환갑 되던 해에 마침 사제 서품 30주년이 되어 1차 인생 결산과 사제생활 결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의 결산은 ‘60년을 참 열심히 살았지만, 잘 산 것은 아니었다.’였습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반성을 한 셈입니다.
잘못된 길을 갔다면 열심히 간 것이 오히려 잘못이니 말입니다.
예를 들어 출세의 길을 열심히 갔다면,
그래서 천국의 길을 열심히 가지 않았다면,
하느님의 산은 오르지 않고 인간의 산을 열심히 올랐다면,
멀리 간 길은 돌아오고 높이 올랐던 산은 내려와야겠지요.
그리고 뒤처진 만큼 더 열심히 가고 더 열심히 오르기 시작해야겠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인생을 결산할 때 잘했다고 칭찬받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하고,
그런 다음 그 삶을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겠지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어떤 삶입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은 행복한 삶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으며 불행하기를 바라고 낳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하도록 창조하셨고, 자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바람보다 우리가 더 행복하길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세상의 잠깐 행복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행복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도 바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다시 묻게 됩니다.
무엇이 우리를 과연 행복하게 하는 것인지.
사실 훌륭한 가르침이 많지만, 대부분 불행하지 않게 하는 법을 얘기할 뿐, 진정한 행복의 길을 제시하지 못하는데, 주님께서 그 길을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사랑의 삶입니다.
사랑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벌어야 할 것이 실은 달란트(돈)가 아니라 사랑이고,
일을 열심히 해야 할 것이 아니라 사랑을 뜨겁게 해야 할 것입니다.
사는 동안 우리는 물론 욕심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행하지 않게 하는 소극적인 길일 뿐입니다.
우리를 참으로 행복하게 하는 적극적인 길은 사랑이고
주님과 이웃을 모두 사랑하는 더 적극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조금(한 달란트) 주시고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모진 분으로 여기지 않고,
모든 것을 주시고 우리 행복을 바라시는 사랑의 하느님으로 믿고 사랑해야 합니다.
어제 성무일도 낮 기도의 마침 기도로 오늘 나눔을 마치겠습니다.
“영원한 사랑에 불타는 빛이신 주님,
우리도 사랑으로 불타게 하시어, 만유 위에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위하여 같은 사랑으로 형제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소중한 탈렌트는 사랑입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존중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이용하지 않고 이기적인 마음을 절제할 줄 압니다.
상대의 삶과 생명을 거룩하게 여깁니다.
각자의 능력을 존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알맞은 탈렌트를 주셨습니다.
각자의 능력대로 주셨다는 것은 우리 모두 서로 다른 고유한 인격적, 신앙적 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이에 합당하게 그 맡은 자리에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탈렌트, 곧 재능을 더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탈렌트를 각자의 그릇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족함이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모두가 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결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최선을 다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더 많은 것을 받지 못하였다고 아쉬워합니다.
때때로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만큼의 알맞은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고 투덜댑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면 될 것을 스스로 비교하여 놓고는 비참함을 맛보기도 합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남과 비교하면 비참하거나 교만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 받은 탈렌트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닮았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느님의 속성이 사랑이라면 우리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능력, 탈렌트를 가지고 각자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나라건설을 위해 잘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성공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소명”(성 마더 데레사).을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하늘 나라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사람과 두 탈렌트를 받은 사람, 그리고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중 둘은 자기에게 주어진 탈렌트를 최선을 다하여 잘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것을 땅에 묻어 두고 말았습니다.
각자의 능력대로 주었으니 할 수 있는 만큼 활용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탈렌트를 주었을 때는 그에 상응하는 기대가 있었을 터인데 그 바람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행동은 게을렀고 결실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더더욱 처음부터 주인의 동기를 오해하고 하고 있었습니다.
더 벌지 못한 것에 대해 잘못하였다고 고백하면 될 것을 오히려 뻔뻔스럽게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마태 25,24) 하고 주인을 비난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구제 불능입니다.
주인님에 대해서 올바로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내 안에 가둬놓은 ‘안다는 것이 병’이었습니다.
섣불리 알면 아는 것이 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허락하신 각자의 탈렌트를 최대한 활용하기를 바라십니다.
각자는 자기가 받은 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결실을 얻어야 합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긴다.’는 말씀은 보살펴 지키지 않으면 결국 잃어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뻔히 잃을 것을 알면 어떻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작은 일에 성실하면 큰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 성실하지 못한 사람에게 큰일을 맡으면 그야말로 큰일을 내고 맙니다.
매사에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역량에 따라 귀한 열매를 맺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것을 받은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실 것이며, 적게 받은 사람에게서는 적은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꼭 정해진 일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무엇인가 더 풍요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충실하게 관리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증가시킬 소명을 받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한 탈렌트는 받은 개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한 과정이 중요합니다.
결과는 따라옵니다.
가치있는 것은 상이 아니라 노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 25,21)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삶의 자리에서 자기 몫에 충실함으로써 주님과의 기쁨을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탈렌트가 어떤 것이든 개의치 않습니다.
또한 많고 적고는 물론 크고 작음에도 상관치 않고 그저 최선을 다해 유용하게 쓸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쓸 뿐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천상 하늘이 열립니다.
우리는 "오랜 연마를 통해서만 달인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도 일종의 투자다>
사제가 되어 보니 저에게 돈을 달라고 찾아오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가능한 액수라면 일단 줍니다.
그러면 대부분은 처음에는 한 번만 도와 달라고 하고, 그다음은 마지막이라고 하다가, 결국엔 계속 달라고 하고 그 액수는 점점 커집니다.
그러다 결국엔 재정적인 부담도 되고 내가 호구가 되는 느낌도 들고 심지어 돈을 갈취 당하는 기분마저 듭니다.
그럴 때라도 사랑은 주는 거니까 계속 주어야 할까요?
그들은 아마도 사랑은 한없이 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이 확장되다 보면 하느님의 사랑도 오해하게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지옥’의 존재도 부정하게 됩니다.
하느님이 무한한 사랑인데 인간을 만들어 놓고 어떻게 지옥에 보내느냐는 것입니다.
자녀가 잘못했다고 불구덩이에 집어넣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도 일종의 ‘투자’입니다.
투자는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지속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탈렌트의 비유입니다.
주인은 하인들에게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탈렌트를 맡기고 떠납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하인은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고, 두 탈렌트를 받은 하인은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그러나 한 텔렌트를 받은 하인은 주인이 무자비하다고 여겨 무서워서 그 돈을 땅에 묻어 놓고 불리지 않았습니다.
불리지 않은 종의 운명은 그 한 탈렌트를 열 탈렌트를 가진 종에게 빼앗기고 영원한 불 속으로 추방 당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주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주고 그 열매를 살핍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존재에게는 그동안 주던 사랑마저 거두어 들입니다.
쓸데없이 자기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사랑을 줍니다.
그런데 이것도 투자입니다.
자녀가 자신들처럼 자녀를 낳고 키울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자녀는 부모가 주는 사랑에 감사하여 그렇게 성장합니다.
그러나 감사하지 못하는 자녀도 있습니다.
그런 자녀는 심지어 부모의 돈을 훔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부모가 준 은총은 그에게 저주가 된 것입니다.
그를 도둑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받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이들만이 그 은총이 구원의 은혜가 됩니다.
1994년 5월 서울 삼성동 고급 주택에서 불이 나서 부부가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한약 유통업을 하며 그 부부는 200억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들 박한상 군이 유산을 노리고 부모를 무참히 살해하고 방화로 위장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유학 중에 많은 돈을 유흥과 도박으로 날리자 부모가 돈을 주기를 거부하였고 그래서 그러한 일을 벌인 것입니다.
그동안 그 아이에게 무분별하게 주었던 돈이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지옥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루카복음 13,6-9절엔 포도밭에 심어진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 비유가 나옵니다.
포도밭에 한 그루 무화과나무가 있었는데 삼 년 동안이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것을 베어버리라고 하였으나, 종은 1년만 더 가꾸고 거름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래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버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자신만 특별하다고 여기는 바리사이를 상징합니다.
오늘 한 탈렌트를 받은 종입니다.
불만을 가진다는 말은 자신은 더 받아야 하는 특별한 존재라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가 받은 것에 감사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니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위해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심어 그것은 당신께 되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감사하지 못하면 결국 열매 맺지 못하여 하느님 사랑의 투자가 멈추게 될 것이기 때문에 마련한 장치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불만을 자아내는 뱀의 말에 솔깃하여 그 소출의 십분의 일도 바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고 결국 에덴에 살 자격을 잃게 되었습니다.
얼굴에 모반이 있어 부모에게 버려졌지만, 결국 끝까지 감사를 찾아내 기쁘게 살아가는 김희아 씨는 자신의 두 딸에게도 감사를 가르칩니다.
딸들은 남들보다 외모가 못난 엄마를 보면서도 “엄마는 엄마가 없어서 참 불쌍하다!”라고 하며 엄마 없이 산 엄마를 불쌍하게 여깁니다.
이때 부모는 자녀에게 목숨까지도 내어 놓습니다.
자녀가 본인이 투자한 대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주가 아니라 은혜로 만들기 위해 무조건 받은 것에 감사의 피를 뿌려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면 이 세상에서부터 에덴동산에 살게 되지만, 불만을 품으면 뱀의 소굴로 들어가게 됩니다.
주님 사랑의 투자에 수익을 내지 못하는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서 내게 부여해주신 탈렌트는 무엇입니까?>
어려운 경제적 여건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묵묵히 기업을 운영해나가고 계시는 기업인들을 알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탁월한 경영 능력과 불굴의 노력과 헌신으로 이익을 창출해서, 몇십명 몇백명의 직원과 가족의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주시니,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기업을 경영하기가 너무나 힘겹답니다.
외교와 경제는 언제나 함께 간다는 것, 말 한 마디 실수로 인해 수많은 기업이 큰 타격을 입는다는 것은 상식인데, 진중하지 못한 발언들로 인한 심각한 타격은 고스란히 기업인들의 몫이랍니다.
차라리 다 접고 빠져나오고 싶다고들 하십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당부드립니다.
정말 애국자이십니다.
그 많은 직원들, 가족들 생각하면, 힘드셔도 조금 더 버티셔야 합니다.
지금 하고 계시는 일, 저희 사제나 수도자들 몇 십명 하는 일보다 훨씬 더 큰 일을 하고 계십니다.
지금 하느님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탈렌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걸맞은 선물, 곧 탈렌트를 부여하셨습니다.
탈렌트를 선물하신 이유는?
그 탈렌트를 잘 사용해서 자신을 성장시키고, 그로 인해 공동체에 기여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며, 최종적으로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라고 탈렌트를 선물하셨습니다.
오늘 제게 부여하신 탈렌트는 과연 무엇인가 묵상해봅니다.
우리 각자에게 부여하신 탈렌트는 각양각색입니다.
내게 주어지지 않은 남의 탈렌트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내게 없는 것을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에 감사하며, 어떻게 하면 그 소중한 탈렌트를 잘 계발하고 극대화 시켜서 이웃과 공동체와 하느님을 위해 선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탁월한 경제 관념을 선물로 주셔서 막대한 부를 창출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탈렌트가 아니라 따뜻한 연민의 마음을 선물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부신 연기 능력이나 가창 능력을 선물로 주시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꼼꼼한 손재주를 선물로 주십니다.
오늘 하루 주님께서 내게 부여해주신 탈렌트가 무엇인지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그 탈렌트를 공동선을 위해 얼마나 계발하고 성장시키고 공유하였는지 깊이 성찰해보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탈렌트의 비유>
‘탈렌트’는 ‘재능’을 뜻합니다.
그 재능은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재능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건설에 참여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재능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그 재능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탈렌트를 ‘성령의 은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 안에서 믿음이, 어떤 이에게는 그 한 성령 안에서 병을 고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
(1코린 12,7-9.11.29)
우리는 세속의 사회적 불평등을, 즉 빈부 차이, 교육 여건과 환경의 차이, 주거 여건과 환경의 차이, 정치적 여건과 환경의 차이 등을 ‘탈렌트의 차이’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런 사회적 불평등은 분명히 악이고, 그것을 방치하는 것은 명백하게 ‘죄’입니다.
사회의 ‘악’을 모두 ‘탈렌트의 차이’ 라고 생각하는 것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하느님께서 주신 복’이라고 착각했던 바리사이들과 같은 사고방식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탈렌트의 차이’는 그런 불평등이 아니라, 바오로 사도가 설명한 것처럼 ‘은사의 차이’이고 ‘직분의 차이’입니다.
따라서 더 좋거나 덜 좋은 것이 없고, 더 높거나 낮은 것이 없습니다.
다섯 탈렌트가 가장 좋은 것도 아니고, 두 탈렌트와 한 탈렌트가 덜 좋은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노력’입니다.
다섯 탈렌트와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는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한 탈렌트를 받은 이가 그 돈을 땅에 숨겼다는 것은 아무것도 안 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하다가 실패한 것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만일에 한 탈렌트를 받은 이가 그 돈으로 투자를 했다가 원금까지 잃어버렸다면?
주인은 그를 꾸짖지 않고, 위로하고 격려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좀 더 실감나게 표현하려면,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돈을 땅에 숨기고, 두 탈렌트와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그 돈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애를 쓴 것으로 재구성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한 죄’의 대표적인 예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입니다(루카 10,31-32).
강도당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가버린 그 두 사람은 사랑을 실천해야 할 상황에서 ‘아무것도 안 한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성직자라는 자신들의 직분을 더럽혔고, 그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을 모독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냐고 헤로데가 물었을 때, 그들은 미카서 5장 1절을 인용하면서 ‘베들레헴’이라고 곧바로 대답했습니다(마태 2,4-6).
동방박사들을 통해서 메시아가 태어나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태어나신 곳이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성경 지식도, 또 그들의 직분도 모두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주인이 첫째 종과 둘째 종에게 한 말을 보면 똑같은 말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 25,21.23)
똑같은 말을 했다는 것은 결과보다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맡긴 일을 잘한 것에 대한 ‘상’으로 ‘많은 일’을 맡긴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작은 일’은 지상에서의 신앙생활로, ‘많은 일’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는 일로 해석됩니다.
따라서 주인이 맡기겠다는 ‘많은 일’은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일”입니다.
29절의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라는 말은 주님께서 주신 은총에 합당하게, 또 충실하게 응답하는 사람은 더 큰 은총을 받겠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받은 은총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30절의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라는 말은 산상설교에 있는 ‘소금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마태 5,13).
아무것도 안 하는 신앙인은 하느님께도, 사람들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아무 쓸모없는 존재가 될 뿐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참 행복한 삶 - 사랑하라, 깨어 있어라, 책임을 다하라>
화답송 후렴이 정신을 맑게 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시편 128,1ㄱㄴ)
오늘은 제7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주님의 산상설교 중 맨처음 참행복선언이 생각납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루카 6,20)
참행복은 온전히 하느님 중심의 삶에 있음을 봅니다.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라.”
(토빗4,7)
세계 가난한 이의 날, 프란치스코 교황은 위 성서 말씀을 주제로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이어 “우리는 허울뿐인 안녕을 지키려는 무관심과 빤한 핑계를 떨쳐버리고 모든 가난한 이와 모든 형태의 가난을 알아보라는 부름을 받는다.”며 가난한 이들과 연대를 요청했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자선에 직접 참여하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참 행복한 삶!
누구나의 소망일 것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참행복 역시 선택입니다.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의 뜻대로 살 때, 참행복입니다.
오늘 연중 제33주일, 주님을 선택해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여러분들은 참행복한 사람들입니다.
1. 길은 어디에?
많은 이들이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2. 빛은 어디에?
많은 이들이 빛을 잃고 어둠속에 방황하고 있습니다.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3. 진리는 어디에?
많은 이들이 진리를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4. 희망은, 꿈은 어디에?
많은 이들이 희망을, 꿈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길을 잃을 때, 빛을 잃을 때, 진리를 잃을 때, 희망을, 꿈을 잃을 때, 어둠속에 빠져들고 죄를 짓기 마련이며, 사회든 사람이든 병들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궁극의 길이자 빛이자 진리이자 희망이신, 꿈이신 주님 중심의 삶을 살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의 참행복한 삶입니다.
오늘은 '참 행복한 삶'에 대한 구체적 방법을 소개해 드립니다.
첫째, 주님을 사랑하라!
한결같이, 끊임없이, 열렬히, 항구히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행복의 우선적 조건입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수록 정체성 또렷한 삶이요, 주님 안에 날로 깊어지는 믿음의 뿌리와 더불어 늘 푸르른 희망입니다.
주님을 진정 사랑할 때 이웃들,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잠언이 칭송하는 훌륭한 아내가 이런 주님 사랑의 모범입니다.
“훌륭한 아내를 누가 얻으리오?
그 가치는 산호보다 높다.
남편은 그를 마음으로 신뢰하고, 소득이 모자라지 않는다.
그 아내는 한평생 남편에게, 해 끼치는 일 없이 잘해 준다.
한 손으로는 물레질하고, 다른 손으로는 실을 잣는다.
가난한 이에게 손을 펼치고, 불쌍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준다.
우아함은 거짓이고 아름다움은 헛것이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칭송을 얻는다.”
이런 아내들로, 어머니들로, 여인들로 가득한 사회라면 얼마나 맑고 밝고 생기차고 향기롭겠는지요!
참으로 주님을 경외하고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이들을 상징하는, 참행복한 훌륭한 여인들입니다.
“우아함은 거짓이고 아름다움은 헛것이지만, 주님을 경외함은 영원하다.”는 말씀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고 싶습니다.
둘째, 깨어 있어라!
막연히 깨어 있을 때 오래 못갑니다.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는 주님을 기다릴 때 저절로 깨어 있게 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을 기다릴 때, 주님께 희망을 둘 때 비로소 깨어 있게 됩니다.
사랑할 때 잠들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깨어 있음은 사랑이요 생명이요 빛입니다.
깨어 있음은 겸손이요 지혜입니다.
깨어 있어야 유혹에 빠지지 않고 죄도 짓지 않습니다.
깨어 있을 때 비로소 깨끗한 마음에 이어지는 깨달음의 은총들입니다.
주님의 날이 밤도둑처럼 올 때에도 주님을 사랑하는 이는 깨어 있다 주님을 맞이합니다.
우리를 격려하시는 다음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용기백배하게 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참으로 주님을, 이웃을, 나를 사랑할 때 깨어 있게 되고 빛의 자녀로, 낮의 자녀로 살 수 있습니다.
사랑의 훈련과 습관, 그리고 깨어 있음의 훈련과 습관과 더불어 주님의 참 행복한 삶의 선물입니다.
셋째, 책임을 다하라!
주님께 주어진, 맡겨진 책임을, 본분을 다할 때 비로소 참행복의 구원의 삶입니다.
책임과 본분을 다하는 사랑이요 믿음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깨어 있는 이들이 바로 이런 책임을, 본분을 다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을 살 때 주님과의 축복된 만남입니다.
오늘 비유는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언젠가의 하늘 나라가 아니라 주어진 능력에 따라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오늘 지금 여기서 실현되는 하늘 나라의 꿈입니다.
바로 오늘 능력에 따라 최선을 다함으로 좋은 성과를 올린 다섯 탈렌트, 두 탈랜트 받은 이들이 그 모범입니다.
그러니 이웃과 비교할 것도, 경쟁할 것도, 이웃을 부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맡겨진 그 이상, 그 이하도 요구하거나 바라지 않습니다.
받은 능력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그러니 경쟁 대상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입니다.
부단히 자기를 일깨워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자아초월의 삶이 절실합니다.
이래야 공동체 형제들간 상호 평화로운 공존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다섯 탈렌트 받아 다섯 탈렌드 남긴 이나, 두 탈렌트 받아 두 탈렌트 남긴 이나 주인은 똑같이 기뻐하시며 칭찬하십니다.
주인이 상징하는 바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바 삶의 '업적의 양'이 아니라 '삶의 충실도', '삶의 순도(純度)'입니다.
5/5나 2/2나 삶의 충실도는 똑같이 1입니다.
이 둘은 주님을 사랑했기에 주님을 알았고 자기를 알았던 겸손하고 지혜로웠으며 깨어 자기의 책임을 다했지만, 한 탈렌트 받은 이는 참으로 안타깝게도 주님을 너무나 몰라 오해했고 무책임하고 태만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깨어 살지도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 저자에게서 그 한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스스로의 무지의 태만으로 자초한, 스스로 선택한 화요 재앙이요 심판이니 누구를 탓합니까!
영적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라는, 깨어 살라는, 제 책임을 다하라는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하늘나라 비유입니다.
삶은, 행복은 선택입니다.
주님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적극적 삶의 선택과 노력이요, 깨어 사는 적극적 삶의 선택과 노력이요, 자기 책임을 다하는 적극적 삶의 선택과 노력입니다.
이렇게 선택하고 노력하여 습관화할 때 오늘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하늘 나라의 참 행복이요 축제인생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1. 주님을 사랑하며, 2. 깨어 각자 주어진 삶의 제자리, 꽃자리에서, 3. 제 책임을 다하며 하늘 나라의 참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운동 경기 중에 좋아하는 종목은 ‘야구’입니다.
어려서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창립되면서 자연스럽게 야구팬이 되었습니다.
저는 고향이 전라도라서 광주가 연고인 ‘해태 타이거즈’의 팬이 되었습니다.
제가 응원하던 해태는 한국시리즈 9승을 올리는 명문구단이 되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야구선수가 많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던 선수는 ‘이종범’ 선수였습니다.
1번 타자인 이종범 선수는 ‘공격, 수비, 주루’의 3박자를 고루 갖춘 선수였습니다.
공격은 잘 하지만 수비가 불안하면 좋은 선수가 될 수 없습니다.
수비는 잘하는데 공격을 못하면 팀을 승리로 이끌 수 없습니다.
루상에서 달리기를 잘하면 본인도 살아남을 확률이 높을 뿐만 아니라 상대팀의 실수를 유발할 수 있기에 달리기를 잘하는 선수는 팀을 위한 공헌도가 높습니다.
이종범 선수는 유격수가 전문이지만 팀이 위기에 처하면 포수도 하였고, 외야수도 하였습니다.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유능한 선수였습니다.
예능에도 재주가 있어서 방송에도 몇 번 출연하였습니다.
이종범 선수의 아들도 야구선수가 되었다니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미국에서 지낸지 5년이 되어갑니다.
한국어는 물론 영어와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신부님들은 교구에서 환영합니다.
한국어만 해서는 미국 공동체에 적응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미국 교구에서도 한국에서 사제를 파견할 때는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제를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저는 신문사에 있어서 영어로 미사할 기회가 많지 않지만 영어 미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는 하고 있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 신심단체인 꾸르실료와 ME 프로그램을 수료하였습니다.
꾸르실료는 1992년에 받았고, ME는 2005년에 받았습니다.
꾸르실료에서 강의를 하였고, 차수 지도신부도 하였습니다.
ME 발표 신부도 하였고, 한국에서 ME 대표 신부도 하였습니다.
미국에 오면서 자연스럽게 ME 대표 신부를 하였고, 지금은 꾸르실료 지도신부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경험이 있기에 신심단체에서 지도신부와 대표신부를 부탁하였고, 저도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하였습니다.
ME 대표신부를 하면서 팬데믹 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줌으로 하는 강의를 할 때면 ME 식구들이 도움을 주었습니다.
ME 대표 신부는 자연스럽게 다음 신부님에게 넘겨주었고, 지금은 꾸르실료 지도신부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월에 미 동북부 남성 제42차 꾸르실료에 지도신부로 함께 했습니다.
3박 4일의 교육은 제게도 큰 감동이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성당의 주일미사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어느덧 4년이 되어갑니다
. 제가 도움을 주는 것도 있지만 저 또한 공동체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 또한 감사할 일입니다.
제가 신문사의 일만 했다면 그것도 좋았을 것입니다.
신문사의 일만 했다면 지금보다는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문사의 일만 했다면 팬데믹의 어려움을 이겨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신문사의 일만 했다면 외롭고 따분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다른 일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고, 힘을 주셨습니다.
ME, 꾸르실료, 부르클린 한인 성당의 일을 함께 했기 때문에 저는 팬데믹의 시간도 큰 어려움 없이 보낼 수 있었습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가진 시간과 마음을 나눌 수 있었기에 저는 미국에서의 생활을 더욱 즐겁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제 추억의 창고에도 많은 것들이 채워졌습니다.
ME와 더불어 주말 체험을 했고, 피정을 했고, 가을 소풍도 다녀왔고, LA로 총회를 다녀왔습니다.
꾸르실료 교육을 통해서 미지근한 신앙이 뜨거운 신앙으로 변화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는 눈물을 보았습니다.
‘이상, 순종, 사랑’의 정신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와 함께 하면서 물고기는 물속에 있어야 살 수 있듯이 사제는 신자들과 함께 있어야 된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탈렌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종이 열심히 일해서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말씀을 뉴욕에 살면서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신문사의 일, ME의 일, 꾸르실료의 일,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의 일은 주님께서 제게 맡겨 주신 탈렌트라고 생각합니다.
제게 주어진 일을 거절하지 않고, 열심히 했으니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 LA 성 프란치스코 한인 성당에 신문홍보를 왔습니다.
여러분들이 신문구독을 해 주신다면, 신문을 위해서 후원을 해 주신다면 지난주에 예수님께서 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신랑을 맞이할 수 있는 ‘기름’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신문 구독을 해 주신다면, 신문을 위해서 후원을 해 주신다면 여러분들은 모두 주어진 탈렌트를 하느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더 큰 은총과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주어진 일이 있다면 충실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일을 마친 후에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하루살이’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루살이의 수명은 얼마나 될까요?
대부분 하루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로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런데 실제로는 여덟 시간 정도밖에 못 산다고 합니다.
이제 이 하루살이가 차에 치여서 태어난 지 4시간 만에 죽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마 다른 하루살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너무 안 됐어. 이렇게 젊은데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하다니….”
그러나 인간이 보기에 4시간이나 8시간이나 그다지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생각의 지평을 조금만 넓혀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하루살이를 바라보는 시선을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말입니다.
무한대의 시간 속에 계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10년이나 100년이나 별 차이를 느끼시지 못할 것 같습니다.
또 하나를 생각해 보지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능의 차이는 어떤 것 같습니까?
어떤 사람은 많은 능력이 있고, 어떤 사람은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우리이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앞에서 그 능력의 차이가 대단할까요?
우리의 생명도 또 우리의 재능도, 여기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 역시 하느님 앞에서는 별것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보다는 우리에게 주신 생명, 재능, 재산 등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받은 것보다는 받지 못한 것만을 바라보면서 불평불만 속에 계속해서 머무르고 있고, 쉽게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기도 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게으른 주님의 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탈렌트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탈렌트를 주고서 주인은 여행을 떠납니다.
그리고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합니다.
다섯 탈렌트 받은 사람은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고, 두 탈렌트 받은 사람은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그러나 한 탈렌트 받은 사람은 주인이 두려워서 그냥 땅에 숨겨둔 뒤에 한 탈렌트만 가지고 오지요.
한 탈렌트 받은 사람의 입장이 틀린 것 같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또 겨우 한 탈렌트만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탈렌트는 당시 노동자가 6,000일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자그마치 16년 반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큰돈입니다.
따라서 본인이 의지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일을 충분히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건강하지 않아서, 재능이 부족해서, 돈이 없어서… 라는 할 수 없는 이유를 이야기하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그 이유가 먹히지 않고 쓸모없는 종이라면서 어둠 속에 내던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하느님의 일은 과연 무엇입니까?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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