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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10일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제1독서 : 티모 1,1-2.12-14
복 음 : 루카 6,39-42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39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동창 신부의 가족과 함께 식사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식사 한 끼 대접하겠다고 약속을 했었고, 그날이 바로 그 약속을 지키는 날이었습니다.
같이 갔던 식당은 요즘 강화 내에서 인기 있는 장소였습니다.
예약하지 않으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고,
다른 식당과 달리 주 5일 근무를 철저히 지키는 곳이었습니다.
저도 처음 가는 곳이라 기대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그렇게 인상적이지 못했습니다.
가격 대비 훌륭하다고 말하기 힘든 곳 같았습니다.
그런데 동창 신부의 어머니와 그 여동생은 달랐나 봅니다.
식당 명함도 챙기면서 나중에 다시 와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남자가 보는 관점과 여자가 보는 관점이 확실히 구분되는 식당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올 것 같지 않은데, 다른 사람은 다시 오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는 다른 사람을 내 뜻만 내세워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실제로 이런 판단이 커다란 잘못으로 나아갔던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에게는 관대하게, 그러나 남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내세워서
서로의 간격을 더욱 멀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우리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이런 사람을 가리켜 ‘위선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먼저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낸 다음,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내라고 합니다.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자신을 먼저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이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을까요?
자기 성찰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남에 대한 비판만 늘어놓는 사람을 좋아할까요?
자기 성찰을 하는 사람은 겸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남에 대한 비판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는 너그러움을 간직합니다.
이 너그러움에 사람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커다란 존경과 사랑을 전달합니다.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님만큼은 될 수 없을 것이 분명하지만,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분명히 지금보다는 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속 좁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 42)
한상우 바오로 신부
신앙인과
비 신앙인의
차이가 거의 없다.
들보를 빼내는
고통 없이는
새롭게 볼 수 없는
우리들 신앙인의 삶이다.
신앙인은
겉모습이 아닌
진리의
참된 추구자들이다.
철저한
자기점검과 성찰이
필요한 요즈음이다.
언제나
삶의 중심과
삶의 방향을
일깨워주시는 주님이시다.
상식과 양심에서
다시 시작되는
일상의 변화이다.
언제나
바른 삶의 자세를
가르쳐주는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신앙의 정체성을
다시금 되찾아준다.
십자가는
머리와 입이 아닌
뜨거운 가슴으로
우리를 변화시킨다.
그러기에
거기엔
치유가 있고
눈물이 있다.
위선의 가면을
벗어야 십자가를
통하여 제대로
볼 수 있다.
빼내어야
제대로 볼 수 있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
각별한
가을의 선물이다.
스스로 깨우치기를
기다려주시는
벌거벗은 주님이시다.
이제 우리가
위선의 옷을 벗고
참된 사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갈 때이다.
가장
아름다운 실천은
위선과 부정직을
멈추는 실천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한국에 있을 때는 치과에 가서 검진을 받곤 했습니다.
치석제거를 하기도 하고, 잇몸이 아프면 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미국에 와서 2년 동안 치과엘 가지 못했습니다.
치료비 부담도 있고, 불편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는 신부님의 소개로 2년 만에 치과에 가서 치석제거를 하였습니다.
진료를 받기 전에 치과를 운영하는 형제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머니는 강하다.’라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3형제는 열심히 일했고, 고향에 가서 어머니와 함께 살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아직 젊은데 고향에서 편히 살려는 형제들의 이야기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내가 먼저 가서 길을 개척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가방 하나만 들고 미국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마치 한석봉의 어머니가 불을 끄고 어머니는 떡을 썰고, 아들은 글을 쓰게 했던 것 같았습니다.
아들은 가지런히 썰어진 어머니의 떡과 삐뚤어진 자신의 글을 보고
다시금 서예를 연마했고 당대 최고의 서예가가 되었습니다.
60이 넘은 나이에, 영어도 모르는 어머니가 용감하게 미국으로 가서
고생 끝에 자리를 잡고, 아들들을 미국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형제들은 고향을 떠나 미국에서 다시 공부하였고,
말 그대로 큰물에서 지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건축 설계사였던 형제님은 넓은 땅 미국에서 마음껏 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동생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아내는 치과의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1주일에 6일을 일했지만 지금은 3일만 일한다고 합니다.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지내기 위해서 내린 결정이라고 합니다.
돌아보니 모든 것이 감사할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치과의 이름을 ‘땡큐치과’로 정했다고 합니다.
형제님은 치과의 실내장식을 직접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치과는 아늑했고, 대기실에는 자녀들의 사진이 있었습니다.
신앙이 깊은 어머니에게 보답하는 마음으로
성직자와 수도자의 치과치료는 비용을 받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자전거는 폐달을 밞지 않으면 쓰러지기 마련입니다.
앞으로 가기 위해서는 멈추지 않고 폐달을 밞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읽으면 자주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바오로 사도의 심경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리스도는 내 생의 전부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우리의 교육현실을 생각합니다.
성공, 출세, 권력을 향해서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라고 다그칩니다.
사랑, 나눔, 헌신, 봉사에 눈길을 주지 못 하게합니다.
그런 것은 나중에 해도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인생의 깊이를 더해 주는 고전을 읽을 시간도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성당에 가지 않아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기도하고, 성당에 가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말 그대로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는 현실입니다.
참된 스승을 만났던 바오로 사도는 오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우리 주님의 은총이 넘쳐흘렀습니다.”
지금 내가 열심히 올라가는 사다리는
나를 구원해 주는 사다리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자녀들에게 올라가라고 다그치는 그 사다리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사다리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자신을 먼저 성찰하고 살피라고 초대하십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루카 6,39)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는 이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볼 수 있는 사람의 감각과 체험을 통해 사물에 대해 배우면서 생활을 익혀가야 하지요.
이는 비단 육적인 시력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눈먼 이를 비유로 영적 시력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사실, 차라리 육적인 눈의 문제라면 상황은 훨씬 수월할 겁니다.
눈먼 이는 보이지 않는 자신의 한계를 알기에
적어도 타인에게 무턱대고 길을 인도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혹 그렇더라도 스스로 철저히 준비하고 익힌 뒤에야 조심스레 나서겠지요.
문제는 자신이 눈먼 이라는 걸 모른 채 앞장서 타인을 좌지우지하고 싶어 하는 이들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예수님께서 아주 직설적으로 물으십니다. 그런 이를 "위선자"라고 거침없이 부르시면서요.
예수님께서 걱정하시는 이는 육신의 눈이 먼 사람이 아니라,
자기 시야를 꽉 막고 있는 들보 같은 완고함을 간과한 채 스스로 잘 본다고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눈먼 이를 고쳐 주신 일을 두고 유다인들이 못마땅해 하자 하신 말씀입니다.
바야흐로 때가 차서 구원자가 이 세상에 오셨지만, 하느님 백성이 여전히
"듣고 또 들어도 깨치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깨치지 못하는"(이사 6,9 참조)
암흑의 시대에 머물기를 고집하니 참으로 안타까우셨던 겁니다.
제1독서는 눈먼 상태에서 하느님의 개입으로 눈을 뜨게 된 사도 바오로의 고백을 들려 줍니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1티모 1,13)
열심한 바리사이답게 철저히 율법을 수호하던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새로운 길을 적대하며 살기까지 띠고 멸절시키던 사람이었지요.
자기가 믿는 야훼 하느님의 뜻을 예수와 그 추종자들이 훼손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개입하셔서,
영혼의 눈이 뜨이기 위해 잠시 육의 눈이 멀어버리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사도 9,8 참조)
구약의 질서와 율법 체계 안에서 스스로 잘 본다고 자부하던 사울이
이 체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이 눈먼 사람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우리가 잘 알고 있듯 그는 회심하여 주님의 눈으로 보는 사람이 됩니다.
영의 시력이 열리면서 보아도 보지 못하는 기다림의 시대를 떨쳐내고
구원을 마주 보는 은총의 시대로 넘어 들어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자신을 진솔하게 성찰하면서 관대하고 양선한 영의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의 시선을 주님의 시선에 합하여 사람과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면,
우리 마음은 물론, 삶도 많이 달라질 겁니다.
남의 눈에 묻은 티로 불편해하던 때가 언제였나
기억조차 나지 않는 평화가 우리 마음에 그득 들어찰 테니까요.
어쩌면 우리는 알아서 잘 살고 있는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먼저 눈을 떠야 할 겁니다.
오늘도 지치지 않고 말씀으로 눈을 맑고 밝게 헹구어 내며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부모가 눈먼 인도자가 될 가능성이 큰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눈먼 인도자’들을 질책하십니다.
눈먼 인도자들이란 자신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이들의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고 말하는 이들입니다.
들보란 ‘자아’를 뜻합니다.
자아를 보지 못하면서 행동만 잘하려는 사람은 ‘회칠한 무덤’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속은 썩은 시체로 가득한데 겉만 번지르르해서 그 모습을 따르라고 말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남을 심판한다.’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인도자는 남을 심판하는 대신 그 사람 안에서 사랑받지 못해
화가 잔뜩 나 있는 자아를 보게 만듭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스승을 따라야 합니다.
스승 없이는 누구도 성장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의 첫 번째 스승은 부모입니다.
아이들이 저절로 잘 성장할 것으로 믿거나자신을 닮으면 된다고 믿으면 눈먼 인도자입니다.
부모가 눈먼 인도자라면 자녀들은 부모와 같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빨리 올바른 인도자를 만난다면 그런 부모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자녀의 스승이 부모에게만 머무른다면 아무래도 완전해지기는 어렵습니다.
의사 김범석 씨의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에서는
말기 암 환자가 된 한 폭력적인 아버지에 대한 두 딸의 상반된 자세가 나옵니다.
‘혈연이라는 굴레’라는 제목의 글을 보면
우리에게 스승이라는 굴레가 단지 부모에게만 한정된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잘 볼 수 있습니다.
환자는 식도암으로 임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호스피스 상담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 환자는 불평만 늘어놓았습니다.
고집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병원 밥이 너무 싱겁다는 둥, 병실 침대에서 냄새가 난다는 둥,
옆 침상 환자가 시끄럽다는 둥 도저히 이야기를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의사는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자녀는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 딸이 둘 있기는 한데…. 연락하기 좀 그래요. 다들 바빠서….”
이런 식의 식도암 환자들은 대부분 가족과의 관계가 좋지 않다고 합니다.
알코올 중독 수준으로 술을 마셔서 생긴 병일 경우
아내나 자녀에게 좋은 남편, 아버지일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다행히 큰딸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큰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환자는 예상보다 더 나쁜 아버지였습니다.
늘 술을 마셨고 도박으로 돈을 날렸고 술집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가족을 때렸습니다.
어머니는 늘 맞으며 버텼고 딸들과 먹고살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가 벌어온 돈으로 아버지는 다시 술을 마셨고 여자와 놀았고 노름을 했습니다.
이런 일은 끝없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두 자매를 아버지 없는 자식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참고 참았습니다.
20년 가까이 지나 딸들이 성인이 된 뒤 어머니가 이혼을 원했을 때,
아버지는 위자료를 요구하며 끝내 이혼해주지 않았습니다.
여동생은 아버지와 의절한 뒤 일찌감치 독립해서 살았고
집안의 어떤 일에도 엮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폭력을 참기만 하는 어머니도, 그런 부모를 감당해내는 언니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어머니를 돌보는 것은 큰딸의 몫이었고
몇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큰딸도 새 가정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신혼 때도 찾아와 돈을 요구했고
그래서 사위와 크게 싸운 뒤로는 더는 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인연이 무엇인지 여동생은 아버지 장례 때도 절대 오지 않겠다고 했지만
큰딸은 아직 ‘부녀’의 관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렇게 의사 앞에서 한없이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큰딸과 작은딸의 스승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큰딸의 스승은 당연히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를 좋아했기 때문에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싫지만 싫다고 하지 못하고 인연의 굴레에 매여 고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를 닮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버지와 같은 남자를 만나 똑같이 참고 살 가능성이 큽니다. 의사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심지어 현재 결혼 생활도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온 남편은 그녀의 아버지인 환자를 닮아있었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그녀는 그 자체만으로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인생은 자꾸 반복되고 있었다.”
물론 작은딸은 의사가 만나보지 못해서 어떻게 사는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조심스럽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작은딸의 스승은 아버지입니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장례도 오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아마 결혼했어도 가정에서 아버지와 같은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결혼하지 않았어도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용서를 가르친 스승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원하는 삶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승을 찾아 그 스승을 닮아가면서 성장합니다.
자녀를 참 스승이신 그리스도께로 이끌어줄 수 없는 부모를 만났다면
그 자녀들은 두 부모 중 하나를 닮을 확률이 높습니다.
원하지 않아도 닮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로 부모가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빨리 자신보다 더 나은 스승을 사랑할 수 있도록 봉헌하는 일입니다.
참 스승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부모가 아이들의 온전한 스승이 되기 어려운 이유는 부모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키울 때는 아무래도 다른 아이들보다 더 낫게 키우려고 하고
돈 걱정을 하며 그것 때문에 사람을 판단하고 미워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 다를까요?
노후 걱정과 자존심 때문에 자녀가 성공하도록 돕고 싶은 마음과
그래서 가난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성 프란치스코처럼 거지로 사는 것도 좋다는 정도의 수준에 이르지 않는 한
그냥 어쩔 수 없이 세상 걱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세상 걱정하게 만드는 게 자아입니다.
자아는 들보처럼 나의 눈을 가려 눈먼 인도자가 되게 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참 인도자로 따라가는 들보를 끼고 사는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완전한 스승이 되신 분은 예수님과 성모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눈먼 인도자로서의 우리 한계를 직시하고
겸손하게 자녀들이 부모를 닮게 만들기보다는 그리스도를 닮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