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충렬사
충렬사는 강화도와 통영 등 전국에 대여섯 곳 있지만 부산 충렬사는 성역화 때 전기를 공급하느라 충렬사 공사 관계자들과 머리를 맞댄 인연으로 쉽게 잊히지 않는다. 봄이 한창 무르익던 지난 오월 말, 부산 안락동 충렬사를 들어섰을 때 경내는 온통 꽃동산으로 변해 있었다. 수목원이나 시민공원 같은 느낌도 안겨주었고 조금 보탠다면 세계 유수의 공원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풍광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처럼 빼어난 풍광을 만드는데 나도 일조했다는 자부심을 가져볼 만한데 이곳에 지하철이 생기고도 격조했다는 생각에 스스로도 위축되는 걸 어찌할 수 없었다.
1970년대 중후반엔 나라 전체가 한창 도약하는 열기로 용틀임했었다. 그때 항구도시 부산도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동란 때의 판자촌과 수원지 둑이 무너져 생긴 이재민을 집단 이주시키고 남천동 쪽은 바다 일부를 매립하여 거대한 아파트단지가 조성되었다. 그때 새로 짓는 주택이나 아파트에 전력량계를 조달하는 업무로 난 눈코 뜰 사이 없었다. 그 무렵 충렬사 정화사업도 벌어졌고 이곳 전기공사를 맡은 업체를 감독하느라 난 땀을 흘렸다. 전기공사는 미관을 위해 그때까지 별로 많지 않았던 전선과 기기 일체를 땅속에 묻는 공법으로 이루어졌고 공사기간도 촉박했었다.
충렬사에 대통령께서 특별히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들었지만 담당관이 공사 진척상황을 청와대에 일일보고 한다는 말은 믿기지 않았다. 감독관은 혹시 공사가 잘못되면 자기가 다친다고 생각했던지 눈에 불을 켜고 관련기관 사람들을 볶아댔다. 감독관이 부르면 내가 달려가기 쉬웠던 것은 현장이 몸담은 직장과 불과 1km 거리였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감독관과 얼굴이 익고는 나도 한 마디씩 대꾸를 했다. 그는 토목과 건축을 비롯한 전체 공정을 관리하느라 힘들었겠지만 내가 이유를 달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꼭 “너 한번 죽어 볼래?”라고 간담 서늘해지는 말을 뱉았다.
반세기 세월에 가까운 지금은 정화사업을 기념해 대통령이 심은 주목나무만 유독 잎이 누렇게 변하고 가지도 듬성듬성 잘려나가 수목원처럼 잘 가꾼 전체 조경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 나무 밑바닥에 설치한 대리석 명판도 날카로운 도구로 흠집을 낸 것처럼 많이 훼손되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연전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대통령 묘에 쇠말뚝을 촘촘하게 박았지만 그 범인을 잡았다는 말은 들어보질 못했다. 오로지 북조선에 머리를 조아리는 불순 세력들은 대통령이 이룬 경제발전 혜택을 고스란히 누려왔음에도 고마움이 아닌 배은망덕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심장병어린이 십오륙 명을 데리고 충렬사를 찾은 나이 지긋한 수녀를 처음 만난 건 정화사업 후 10여 년이 흘렀을 때다. 후원회 멤버였던 아내가 나의 직장이 가까운 걸 알고 점심시간에 불러주었던 것이다. 수도자는 자신의 무릎관절도 성치 않으면서 애들이 칭얼대면 무조건 업어주고 있었다. 뒤에 들으니 그는 미국까지도 환자를 데리고 가서 수술을 시켰고 이런 사실을 안 S식품에서 적극적으로 요양원을 돕는다는 소문도 들렸다. 은퇴한 5공 대통령이 그의 심복부하 두셋을 달고 요양원에 나타났을 때 난 가톨릭신문사 요청으로 원장수녀 방에서 S식품 회장까지 네 분을 취재했었다.
정화사업 후 꾸준히 조경에 정성을 쏟았을 충렬사는 이제 빼어난 풍광이 널리 알려져 부산에서 손꼽히는 명소로 발돋움했다. 부산 충렬사는 그 역사가 안락서원에서 시작된다. 안락서원은 1605년 동래부사 충렬공 송상현을 모시기 위하여 송공사를 세운 것이 시초였다. 뒷날 송공사를 충렬사라고 사액하고 부산 첨사 충장공 정발을 함께 모셨다. 이후 1652년 동래부사 윤문거가 송상현의 학행과 충절을 높이고 선비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다 하여 충렬사를 내산 밑 안락리로 옮기고 강당과 동재, 서재를 지어 안락서원이라 하였다. 지명으로선 드문 ‘안락’이 서원이나 충렬사를 만든 것 같기도 했다.
1709년 동래 부사 권이진은 송상현과 정발이 순절할 때 함께 사절한 사람들을 모시기 위해 읍성 안에 있는 충렬사의 옛터에 별사를 세웠다. 그리고 조정에 알린 후 양산군수 조영규 동래교수 노개방 등을 모셨다. 임진왜란 때의 충신열사를 모셨기 때문에 뒷날 흥선대원군이 단행한 서원철폐 때도 헐리지 않고 내려오다가 1977년 정부의 충렬사 성역화 방침에 따라 경역을 확장하여 사당과 기념관 등 건물을 새로 짓고 그 보존과 관리에 힘쓰게 되었다. 안락서원은 창건 이래 몇 백 년 동안 지방민을 교화하여 충군 애국사상을 고취해왔으니 정부가 성역화 사업에 왜 정성을 쏟았는지 알만했다.
이곳 충렬사 문화관광해설사를 지낸 C교수는 경내에 설치한 안내문 판넬의 오류를 가슴 아파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연도를 잘못 표기했거나 영문 안내문 철자 오류처럼 가벼운 것도 있고 송상현 공 양녀를 애첩으로 엉뚱하게 쓰면서 성씨마저 빼먹은 실수도 있었다. 그는 경내의 잘 생긴 소나무 4그루를 가리키면서 백송인데 사람들이 자꾸 홍송으로 부른다고 안타까워했다.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구내와 창경궁 내 백송이 떠올라 색깔을 비교해보니 이곳 백송은 색깔이 애매했다. 홍송과 백송 중간쯤으로 보이는 색상으로 4그루가 약간씩 차이를 보여 호기심 많은 사람들은 서로 내기라도 벌일 것 같았다.
충렬사 본전은 부산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선열을 모신 사당으로 전사한 23인과 동래읍성 부산진성 다대진성 및 부산포해전에서 전사한 무명용사 위패 4위와 의병 62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수위에 동래부사 송상현, 부산진첨사 정발, 다대진첨사 윤흥신의 3신위 그리고 배위에 16신위, 종위에 70신위 등 모두 89신위가 봉안되어 있다.
의열각義烈閣은 일본군에 항거하다 순국한 의녀들을 모신 사당으로 동래읍성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기왓장을 던지면서 싸운 이름 없는 두 의녀와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 공과 부산첨사 정발 장군을 따라 순절한 한금섬과 애향 두 열녀 등 모두 4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소중당昭崒堂은 일본군과 싸우다가 순국한 선열의 호국 애족정신을 후세의 사표로 삼기 위해 1652년 교육도장으로 건립한 강당이다. ‘소줄당’이라는 당호는 한유韓愈의 이제송夷齊頌에 나오는 ‘소호일월 부족위명, 줄호태산 부족위고 昭乎日月 不足爲明, 崒乎泰山 不足爲高’의 머리글자를 딴 것으로 임진왜란 때 희생된 선열의 충절은 일월보다도 밝고 태산보다도 높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기념관엔 임진왜란 당시 전황을 살필 수 있는 기록화와 선열의 유품, 문서, 책자 등 102점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송상현 명언비는 일본군이 동래읍성을 에워싸고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거든 길을 내어달라”고 했을 때 송상현은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어주기는 어렵다戰死易假道難”라고 답하여 결전의지를 분명히 했다.
임란 동래 24공신 공적비는 왜란 당시 동래지역 출신으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순절한 선무원종공신 녹권에 등재된 공신 가운데 일본군을 토벌하는 데 큰 공이 있는 24별전공신의 공적비로, 1988년 5월 14일 제막되었다.
1978년 5월 충렬사 정화를 마치고 세운 비문을 그대로 붙인다. '왜적이 바다를 건너 침략해왔던 1592년 4월 13일은 우리 민족으로서는 천추에 잊지 못할 통한의 날이 된다. 고려조에 몽골군이 우리나라를 침략했고 그 뒤 조선왕조 대에는 청군이 침략해 왔던 적이 있으나 임진왜란의 불행은 이들 외침보다 몇 갑절 더 뼈저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경제정책의 빈곤 위에 당쟁으로 국론이 통일되지 못했고 그로 인해 국방이 부실해 있었던 까닭에 더욱 큰 희생을 당해야 했던 사실을 상기한다면 적에 대한 적개심과 아울러 우리 스스로에 대한 회한이 동시에 통감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맨 먼저 왜적의 침공을 받은 부산지방의 성주와 백성들은 일치단결 최후까지 싸워 그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 부산이 없으면 동래가 없고 동래가 없으면 나라 전체가 어찌될지 모를 사정을 누구보다도 절감한 동래부사 송상현과 부산 첨사 정발 다대 첨사 윤홍신은 적을 맞아 싸운 첫날에 각각 장렬한 전사를 했고 뜻을 같이한 양산군수 조영규 교수 노개방 교생 문덕겸 등도 저마다 맡은 자리에서 용전분투 끝에 옥쇄했다. 일신의 아픔이 나라의 편안에 승화되는 드높음을 몸으로서 통감하지 않고서야 어찌 군관민 남녀노소 모두 하나 되어 목숨을 바칠 수 있었으며 7년 전쟁에 동래 수영에서 일어난 수많은 의병봉기가 이들의 순절하고 높은 뜻과 어찌 무관하였겠는가. 적의 피신하라는 권유에도 응함이 없이 마지막 나라에 하직하는 북향요배를 하고 부친에게 글을 남겨 나라의 위급 앞엔 태산 같은 부모의 은혜도 뒤로 돌리지 않을 수 없음을 표한 뒤 태연자약하게 죽음에 나아간 송상현의 늠름한 태도 그대로 대의의 무거움 앞엔 개인의 목숨이 홍모 같이 가벼운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희박한 곳에 나라의 번영을 생각할 수 없고 국가 안보사상이 미약한 곳에 국가의 태평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진리일진데 이곳에 충렬사를 세워 순절 선열들을 추모해왔음은 다름 아닌 이들 선열들의 충절을 만고에 기리려는 것이었거니와 이번에 박정희 대통령의 분부로 문화공보부와 부산시가 경역을 크게 중수 확장하여 정화사업을 완수한 뜻도 선열들의 충절을 국민의 호국정신으로 받들어 총화단결로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고 민족중흥의 역사적 대업을 이룩하려함에 있는 것이니 이제 우리는 선열의 영령에 부끄러움 없게 그 막중한 은혜를 충성으로 서 갚고 후손을 만대 반석 위에 안주케 할 책임을 다하기 위해 우리 모두 가슴에 손을 얹어 멸사봉공 살신성인할 것을 굳게 맹세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