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건 이슬람은 개종을 강요하지는 않았기에 이웃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는 기독교 국가로 남았고, 보스니아의 경우 오스만 투르크가 물러간 뒤에도 여전히 알라를 섬긴다. 그리고 이 차이는 사실상 인종적으로 같다고 해도 무방한 발칸 반도 사람들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만들어 놓는다.
누더기같은 나라 유고슬라비아를 몸으로 꿰맸던 티토라는 존재가 사라진 후 연방 안의 갈등은 심해졌고, 1992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독립을 선언한다. 이것은 끔찍한 내전의 시작이었다. 보스니아에 살던 세르비아계는 즉각 무기를 들었고, 당연하게도 세르비아는 이에 개입했다. 내전이 진행되던 중 1995년 7월 11일 오늘 나토군이 안전 지역으로 설정, 피난민들이 대거 몰려 있던 스레브레니차에서 끔찍한 대학살이 일어난다. 사건의 주범은 보스니아 내부의 세르비아계 공화국인 스르프스카 군 사령관 믈라디치. 네덜란드군 150명이 경비를 맡고 있었지만 4만명이 넘는 믈라디치 군의 학살을 저지하지 못했다.
학살의 이유는 "적의 예비병력을 없앤다"는 것. 그 간단한 이유에 따라 스레브레니차에 피해 살던 8천명의 보스니아인들이 학살당했다. 시신을 불도저로 밀어서 매장할만큼 그 수가 많았다고 한다. 믈라디치는 학살이 일어나던 날 카메라 앞에서 무슬림 소년에게 초콜릿을 건네는 자애로운 모습을 연출한다. 어린이들의 천진한 미소를 자신의 악세사리로 삼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한 독재자와 학살자들의 특징이다. 이때 여덟살이었던 소년은 나이를 묻는 믈라디치에게 좀 어른스럽게 보이고자 열 두 살로 나이를 올려 말했다. 그건 죽음을 부를 수도 있는 거짓말이었다. 14살 아이도 머리에 총을 맞아 죽어가는 일이 흔했던 것이다.
세르비아 의회는 이 사건이 계속 EU 가입 등에 발목을 잡자 작년 3월 31일 스레브레니차 학살에 용서를 구하고 세르비아가 이 사태를 막기 위해 더욱 노력했어야 한다는 결의안을 가결했다. 그러나 끝내 '학살'이라는 단어를 삽입하지는 않았다. 찬성은 겨우 정족수를 채우는 데에 불과했다. 또 하나 세르비아의 행보에 걸림돌이 되었던 학살자 믈라디치. 그는 96년 전범재판소 기소 이후 도피하여 숨어 지내다가 바로 올해 5월 26일 세르비아 정부에 의해 체포됐다. 그로부터 초콜릿을 받아먹었던 소년은 스물 세 살이 됐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와 삼촌들은 1995년 7월 11일 모조리 학살됐다.
스레브레니차는 2차 대전 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최악의 학살극이었다. 물론 유럽에서라는 단서가 붙는다. 대륙을 넘어서면 사실 스레브레니차는 명함을 내밀지 못할 것이다. 당장 우리의 보도연맹학살에 비해 본들 스레브레니차는 새발의 피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