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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에서 배움터지킴이로 일하는 K 씨가 있다. 나이가 일흔이 넘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아침 일찍 출근하여 학교 주변을 정리하기 위해 빗자루를 집어 든다. 그리고는 이곳저곳을 쓸기 시작한다, 행여나 아이들이 다칠까 봐 안전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운동장의 돌멩이를 줍는가 하면 놀이 시설들도 하나하나 점검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K 씨의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아이들에게 먼저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아버지가 자신들을 향해 허리를 굽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긴 나머지, 처음에는 K 씨를 일부러 피해 다녔다고 한다. K 씨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해 주기 위함이었지만, 아이들로서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K 씨는 아이들과 거리를 좁히기 위해 메모장에 아이들의 성향을 파악한 후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데없이 이름을 불렀다.
`상우야, 오늘도 학교에 가장 먼저 왔구나` 이렇게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것이 나중에는 전교생의 절반에 가까운 학생들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과의 거리는 서서히 좁혀졌다. 심지어 먼저 이름을 알려주면서 불러 달라고 떼쓰는 아이도 있었다. 같이 공도 차고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는 태권도 품세도 가르치며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갔다. 특히, 공기놀이는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초등학생들의 인기 놀이 중 하나였는데, K 씨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함께 즐겼다고 한다.
K 씨도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삶의 역경을 조곤조곤 밟고 온 사람이다.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지금까지 버텨 준 그것만으로 충분히 존경받아 마땅하다. 언젠가는 이 아이들도 험난한 세상에서 수많은 난관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아이들이 더는 자라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어려서부터 즐겨 불었던 하모니카를 꺼내어 아이들 앞에서 연주했다. 이 순간만큼은 그도 어린아이다. 서로의 순수함이 통해서일까? 엔카 음악에 익숙지 않지만,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이제 선생님보다 K 씨를 더욱 따른다. 그만큼 K 씨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어느 날 K 씨는 교통정리를 하는 동안 다리가 불편하여 병원을 찾으니, 협착증 진단을 받았다. 서 있기도 불편해서 이제는 배움터지킴이로 근무하는 것은 무리였다. 눈만 감으면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라 잠을 설쳤다. `제 이름이 뭐예요?`라며 해맑게 웃던 다운이, 오랜 시간 끝에 겨우 마음을 열어 준 채은이, 공을 차면 수문장을 맡아 달라는 건우 등 세상의 간사함과 거짓을 모르는 아이들은 오히려 K 씨가 잃어버렸던 때 묻지 않은 감수성을 되찾게 해 준 스승이었다.
며칠 후 K 씨는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학교를 찾았다. 교장실은 예나 지금이나 반듯한 나무 탁자가 가운데에 놓여있었다. 교장의 자리에 이르기까지의 노력과 지혜, 그리고 오랜 교직 생활을 엿볼 수 있는 탁자이다. 누군가는 이 탁자에서 교장 선생님과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을 것이다. 교장 선생님은 혼자 업무를 보는 중이었다. 건강상 이유로 배움터지킴이를 그만둔다고 이유를 말하니 고개를 반쯤 들고 `네 그래요`라며 별말 않는다.
K 씨는 2년이 넘게 배움터지킴이로 근무하면서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허리를 숙여왔다. 존중받는 아이가 점잖아진다는 걸, K 씨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에는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묵묵히 맡은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새벽에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서 도로를 정리하는 청소원, 따뜻한 아침 식사를 건네는 조리사, 복잡한 주차 문제를 해결하는 주차원 등, 이분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불편을 겪었을까? 사회적인 지위가 높고 낮음을 떠나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K 씨를 떠나보내는 아이들은 울먹거렸다. 다운이는 `가지 마세요`라고 말하며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K 씨로부터 존중을 배운 아이들은 미래 사회를 아름답게 이끌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