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문에 대한 기억은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인 것 같다. 이른 새벽 `신문이오.' 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 안으로 던져진 신문을 아버지께 가져다 드리는 일은 내 담당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나를 무릎에 앉히시고 신문을 펼쳐 드시고는 `쯧쯧,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런 나쁜 사람들.' `그래. 이런 사람이 나와야지.' 하시며 혀를 차기도 하시고 무릎을 치기도 하셨다. 이렇게 나는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신문을 접했고, 또 아버지께서 다 보신 신문을 더듬더듬 읽으며 세상에 대한 다양한 소식들을 접하면서 한글뿐 아니라 漢字(한자)를 익혔고, 더 나아가 글쓰기의 기본을 터득할 수 있었다. 또한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나쁜 사람'은 절대 되지 않겠다 다짐했고, `이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신문과 함께 성장하며 세상을 보는 눈과 사고의 깊이도 넓힐 수 있었다.
아침 6시, 어김없이 현관 밖에 놓여 있는 신문을 들여와 펼치기 시작한다. 하루의 시작이다. 나의 신문 읽기는 1면부터 빠짐없이 꼼꼼히 읽는 것이다.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필요한(?) 부분엔 밑줄을 긋고 스크랩도 한다. 이런 나를 보고 아내는 손가락만 움직이면 필요한 소식과 정보를 다 접할 수 있는 세상에 웬 청승이냐고 핀잔이다. 하지만 난 이런 시간을 즐기며, 수고로움도 기꺼이 감수한다. 내가 인쇄매체를 통한 신문 읽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전자매체를 통해 읽는 것이 `읽기'라기보다 `보기'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감을 통한 읽기를 즐긴다.
아침 일찍 배달되는 新聞(신문)은 미처 달아나지 못한 잉크 향으로 밤새 마비된 내 후각을 깨우고, 한 면 한 면 펼칠 때마다 나는 소리와 촉감은 보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대부분의 현대인들(특히 청소년들)은 신문을 그저 `보기'만 할 뿐이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통해 알고 싶고 필요한 소식만 뽑아 볼 수 있으니 굳이 시간을 들여가며 읽을 필요가 없어진 것일까? 아침마다 교문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맞이하다 보면 스마트폰 속에 얼굴을 묻어 버리고 인사조차 생략해 버리는 학생들을 종종 보게 된다. 이런 학생들에게 신문 읽기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면 거창하게 人性敎育(인성교육)을 들먹이지 않아도 되리라.
내일도 난 신문을 펼쳐 들고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