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인들의 매정한 무관심으로
얼어죽은걸로 나오는 성냥팔이 소녀
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심한 뒷 설정이 있는데
때는 산업혁명 당시
성냥공장은 많은 아동 노동자
특히 어린 여공들을 값이 싸다는 이유로 많이 고용을 하였는데
문제는 당시 성냥은 백린으로 만들어지고 있었음
당시 안전 장치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장시간 저런 환경에서 근무를 하면 화학 중독 현상이 나타났는데
몸이 망가지고 얼굴이 무너지기 시작함
이리 되면 고용주들은 그 여공을 해고를 하는데
해고할때 퇴직금 대신 성냥을 한 보따리 주고 내쫒는데
그리 쫒겨난 소녀들은 한끼를 때우기 위해 저
성냥을 팔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됨
그리고 그러한 소녀는 이미 외모가 무너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다른 생계 수단을 구할 방법도 없음
한마디로 당시 런던 거리는 저런 성냥팔이 소녀로 넘쳐나던 시대였고
성냥팔이 소녀는 동화라기 보다 당시 잔혹한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고발 소설에 가까웠음
산업혁명 초기에 발명된 성냥은 백린으로 만들어져서 성냥을 코트 주머니에 넣어뒀다가 코트 태워먹고 화상 입은 사고가 많았고, 당시 성냥공장에서 일하던 많은 직원들은 백린의 독성에 인해 인악(Phossy jaw)이라는 끔찍한 병으로 죽어갔다. 인악은 턱뼈의 인산칼슘이 인과 반응해 턱뼈가 괴사하는 질병이다.
처음엔 치통 정도로 시작했지만 치료를 위해 이빨을 뽑다 보면 이빨이 박혀 있던 턱뼈 조각까지 같이 뽑혀 나오는 끔찍한 일이 발생하기까지 했다. 또한 이렇게 뽑힌 턱뼈 조각은 백린에 심하게 오염되어 어둠 속에서 빛까지 났다고 한다.이후 턱뼈의 괴사가 진행되며 턱이 뭉개지고 살까지 곪아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고름이 입 속과 턱 군데군데서 줄줄 흘러나온다.
턱이 박살이 나니 제대로 된 섭식생활이 불가능해지고 패혈증 등 감염에도 취약해지며, 인이 턱뼈를 넘어 두개골까지 침식하기에 인악에 걸린 사람은 대단히 느리고 고통스럽게 죽게 된다. 이렇게 백린의 무서운 반응성과 독성 때문에 현재 백린성냥의 제조 및 판매, 사용은 산업안전보건법에 의해 금지되어 있다.
성냥팔이 소녀는 안델센이 매우 순한 맛으로 정화했다. 실제 배경이 됐던 산업혁명(1706~1820) 때 런던에 수많은 성냥 공장은 인건비가 아주 싸다는 이유로 어린 여공들을 고용했다. 문제는 당시 성냥은 백린(조명탄 원료)으로 만들어 어린 여공들은 화학 중독에 쉽게 노출됐다. 얼굴이 짓이겨지면 바로 해고했다. 이때 성냥을 한 보따리 주고 내쫒았는데 당시 런던 거리는 성냥을 팔던 소녀들로 넘쳐났다. '성냥팔이 소녀'는 안델센이 이런 사회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쓴 사회고발 동화다.
.... 라는 요지의 카드뉴스를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봤다. 놀라운 이야기이긴 한데 사실관계가 몇 가지 맞지 않는 부분이 있고 좀더 깊이 들여다볼 여지가 있어서 생각을 정리해봤다.
. 우선 안델센의 '성냥팔이 소녀'는 1845년에 출판된 소설이다. 이 연도가 왜 중요하냐면 최초의 대규모 성냥제조업체라고 할 수 있는 'Bryant & May'가 만들어진게 1843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공장이 대규모로 노동자를 고용하기 시작한 게 1850년대, 경쟁업체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 본격적인 제조업 영역으로 편입된게 1800년대 후반의 일이다. 즉, 시기상으로 보자면 안델센의 소설에 등장하는 소녀가 공장에서 일했을 리도, 공장에서 퇴직금으로 성냥을 받아나왔을 리도 없는 것이다.
. 이야기에서 언급된 백린은 '인' 가운데 하얀 것이다. '인'은 영어로 'phosphorus'라고 하는데 언급된 것처럼 기형을 유발하는 유독성 물질이다. 주로 턱뼈가 변형되었기 때문에 이런 기형 증상은 약품명을 따서 'phossy jaw'라고 불리웠다. ‘Jaw’는 ‘턱’이라는 뜻이다. 영화 ‘죠스(Jaws)’에서 ‘죠스’는 날카로운 이빨이 늘어서 있는 거대한 턱을 지닌 백상아리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 통계에 따르면 1897년 기준으로 4,152명의 노동자가 25개의 성냥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이중 23개 회사에서 백린을 사용했다. 이중 백린과 관련된 공정에서 일하던 사람은 남성 245명, 여성 1,276명으로 확실히 여성이 많긴 하다. 비교적 큰 힘이 필요하지 않은 단순 작업이 많아서 임금이 쌌던 여성들이 많이 고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고용된 사람들은 모두 만 14세 이상의 사람들이고 2/3은 19세 이상의 성인이어서 성냥팔이 '소녀'의 경우에 맞는 사람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여성들에게 이 질병이 없었다는게 아니라 10대 초반으로 묘사되는 안델센 동화의 모델이 이 사람들이 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뜻이다.
. 백린 관련 산업재해에서 오히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과정에서 회사가 기형이 된 노동자 한 명을 해고하자 여성 노동자들이 일제히 단결해서 파업투쟁을 벌였던 1888년의 ‘Matchgirls' Strike’ 사건이다. 첨부한 사진이 파업 당시 참여한 여성들의 모습인데 가운데 세 명의 사진을 보면 입가에 백린중독으로 인한 변형이 시작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이들은 해고된 여성이 처한 가혹한 현실이 자신들에게도 조만간 닥칠 미래라는 점에 공감했기 때문에 노동 운동이 백안시되던 당시 상황에도 불구하고 힘을 합쳐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와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글은 '도대체 성냥팔이 소녀는 왜 다른 물건이 아닌 성냥을 팔고 있었던 것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만든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안델센 동화를 찬찬히 읽어보면 이 소녀는 크리스마스에 맨발로 슬리퍼만 신고 나왔다가 그조차도 잃어버려 눈길 위를 맨발로 다닐 정도로 가난한 소녀라는 것이 핵심이다. 성냥은 '퇴직금'이 아니라(산업재해로 장애를 얻은 노동자를 내쫓는 냉혈 기업주가 성냥이든 뭐든 '퇴직금'을 챙겨줄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아버지가 강제로 소녀에게 떠맡긴 것이고 만약 다 팔고 들어가지 않으면 '아버지에게 두드려맞을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 즉, ‘성냥팔이 소녀’는 노동현실을 고발한 동화라기보다는 아동학대를 일상적으로 하는 폭력부모에게 착취당하는 가난한 아이의 가련한 삶을 안델센 특유의 탐미주의적 태도로 묘사한 소설인 것이다. 이 짧은 동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어느모로 보나 '사회고발'의 분위기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어떻게 하면 상황을 더 슬프고 애잔하게 보일까 최선을 다해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가는 안델센의 집요한 상황묘사가 병 안에 갇힌 개구리를 핀셋으로 계속 찔러대는 아이의 그것처럼 잔인하게 느껴진다. 가정폭력과 아동학대가 ‘사회적 문제’로 인식되지 않던 시절이라선지 이 아이가 처한 극단적인 상황에 대한 사회적 책임, 폭력 아버지의 문제점에 대한 얘기는 전혀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 마치 그것이 '아이가 스스로 감당해야 할 당연한 현실'인 것처럼 여겨질 정도다.
. 정말 안타까운 것은 이게 실화였다는 것이다. 안델센은 신문 한귀퉁이에서 크리스마스에 길거리에서 성냥을 팔다가 얼어죽은 소녀의 이야기를 읽고 이 소설을 구상했다. 당시엔 이런 비극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오자. 왜 소녀는 성냥을 판 것인가?
. 유럽이 세계를 '문명'과 '야만'으로 가르고 해가 지지않는 대영제국이 빅토리아기를 맞아 지구상의 주인으로 떠오르는 자신들을 '정복과 계몽의 소임을 타고난 문명인'으로 위치지우면서 사회의 어두운 부분들을 개선하거나 혹은 적어도 눈에 보이지 않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래야 자신들이 ‘문명’의 편에 서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야만’을 비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여전히 비참한 사회현실을 '개선'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이들은 엘리자베스 구빈법이나 페이비언 사회주의와 같은 실질적인 대책을 이끌어내려 애썼으나 이건 돈도 많이 들고 효과도 즉각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나온 어이없는 규제가 구걸행위 금지규정이었다. 눈앞에서 구걸하는 꼴을 보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도 없는 것이 된다는 '눈가리고 아웅'에 가까운 법이었다.
. 믿기지 않지만 지금도 여러 나라의 법에 남아있는 이 조항 때문에 1800년대 초반 극빈층은 구걸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이들을 불쌍히 여겨 적선을 하려는 사람도 벌금 등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피해가기 위해 '판매를 가장한 구걸'을 하는 수단으로 쓰였던 것이 가장 값이 싸고 시간이 지나도 상하지 않는 성냥이었다. 즉, '성냥팔이 소녀'는 사실상 '구걸하는 소녀'였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바로 얼마 전까지도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혹은 지금도 종종) 껌이나 수세미를 파는 분들, 지하철에서 볼펜을 파는 분들과 다르지 않은 일인 것이다.
. 차라리 안델센이 정말 '사회고발 소설'을 썼더라면 좋았을텐데 싶다. 앞뒤 사정을 알고나면 이 소설에서 유난히 가슴을 후벼파며 날카롭게 빛나는 그의 문장들이 더더욱 섬뜩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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