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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아가면서 건강을 지키고자 이런 저런 취미삼아 운동들 한다.
나는 시골 촌에서 해방 다음 해에 태어났지만 50년대 국민학교시절 부터 운동을 즐겼던 계기가 우리고향 서천군 제헌국회 의원이신 이훈구 박사님 조카되시는 이구복 형님(바로 우리 아랫집)때문였다. 형은 내가 국민학교 4학년때부터 중학시절, 웅변대대회 출전할때마다 원고작성에서부터 지도를해주신 분인데 지금 어디에 살고 계신지?
59년도 국민학교 졸업과 동시 서천중에 입학 4ㆍ19, 5ㆍ16격동의 60년대 초 중학시절엔 형이 서천고교 3년였다.
집에 끼니꺼리도 없는 내가 형을 따라서 이웃 막동리 지나 부엉바위 저수지에서 부터 흘러 내려오는 똘뚝길 따라 달리기랑 형네 마당에 뒹구는 시멘트 비벼 만든 역기랑 감나무아래 양팔 올려놓고 휘젖는 수평(?)을 했으니 알만하리라.
70년대 초 군대 제대 후 부터는 이웃 월기리 서강석 선배따라 처음 등산을 하게 되었다.
후에 군정종식 민주화 대열에 합류, 민주산악회원이 된 후부터는 본격적인 산 사랑 마니아가 되었다.
어느날 함께 산행하던 몇 사람이 내게 "우리도 산악회를 창립하자"는 제의를 하기에 "회원규합 자신 있느냐"
그 날 하산, 귀가즉시 산악회 정관 및 헌장 초안 및 식순 초청장 작성, 창립 발기인대회를 준비했다.
출신지역과 연령 남녀노소 불문, 평소 산행 동호인 및 산에서 오다가다 만나는 사람들과 그들이 데려오는 사람들을 규합, 2001년 3월 18일 도봉산 이웃 사패산 오르는 산자락 송림숲아래 바위터에서 창립발기인대회를 개최 정관 및 산악회 헌장 채택 임원선출에서 초대회장에 내가 추대되어 '우리산악회'를 창립, 매주 일요일 신앙생활 지장 없도록 오후1시에 서울근교 지하철 역에 평균 30여명이 집결, 대여섯시간 산행을하며 월1회정도는 회비를 걷어 지방산행도 했다. 나는 지방산행때마다 방앗간에가서
떡을 해다 차안에서 나눠줬던 추억이 이 나이에 아름답게 想起된다.
'우리산악회'란 이름앞에 정관 수정없이 '멋져'가 붙은 건 내가 평소 건배사 뒤에 건배!란 외침이 아니라 멋져!를 외쳤기 때문. 지금 이 글을 올리는 Daum카페/'멋져 우리산악회'가 회비없고 중단없는 바로 우리산악회였다.
(카페에 지금 입장하셨으니 여기저기 뒤져보셔요)
산악회가 와해된 뒤부터는 거의 20여년 나 혼자 작년 1월 말일까지 격일근로 후 쉬는 날은 귀가 전 산행부터하고 하산해서는 3호선을 타고 일산 마두역에 가서 하차, 버스로 환승 경기 파주지역 거의 다 가서 고양시 서구에 소재한 사설 요양원에서 거동커녕 식사도 말도 못한채 늘 누워만 계시며 요양원 직원이 죽만 떠먹였는데 내가 가는날은 엄니께 내가 떠 먹여드리고 밤늦게 귀가 다음날 새벽 일터로 달리길 4년여동안 격일근로 격일산행 격일 요양원에 다녔다.
(이 글을 쓰는 순간 엄니생각에 가슴 울컥)
만보기 기록에 의하면 내가 작년2월1일 부터 어제1월31일까지 걷고 뛴 발자욱수는 11,720,461보래요.
月 평균 976,705보 하루평균 겨우 32,556보네요.
2017년 6월22일 새벽2시 엄니 하늘 가신 후에도 격일 근로에 격일산행을 하면서 건강하게 살았다. 산행뿐 아니라 근로현장에선 사무실 책상, 짐더미를 집에선 싱크대, 이동간 대기 시간엔 의자짚고 닥치는대로 장애물 짚고 팔 굽혀 펴기를 하루 1만 2천 개씩 하는데 횟수를 기록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때문에 노트를 들고 다니며 1회 30여회 ~50여회를 한 뒤에나, 누구와 얘기하다 보면 아까운 걸 까먹으니까 반드시 바를 正자로 기록했다가 합산을 했다.
☆ 이제 만보기로 돌아가자.
작년 1월 하순 우연히 소지하고 있던 핸드폰 앱 가운데 1년간 내가 몸 움직여 활동한 여러가지 집계가 나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만보측정기'로 그날 그날 밤 0시 자정부터 다음날 자정까지의 발자욱 수자가 합산되어 기록되는 걸 알았다.
1년 전 바로 1월 31일 지나 내일, 2월1일부터는 격일산행을 중단, 본격적으로 걷고 뛰는 걸로 대체, 일터에선 우두커니 서 있는 시간에 제자리 뛰기로 시간을 채웠다.
특히 웬만한 두 세시간 거리는 차를 이용치 않고 도보로, 일터가는 새벽 첫차 전철은 거의 텅빈 상태지만 좌석에 착석포기 배낭이나 들었던 짐을 내려놓고 계속 제자리 뛰고 걷고 뛰고ㆍㆍㆍ 사쁜사쁜 경건하게 조용히 아름답게.
경로석 내 배낭 옆에 앉은 누가 '어지럽다' 고 참견하면 "이 양반아! 늙은이 다리가 저려서 앉아있질 못혀! 다리 건강한 당신 앉을 수 있게 자리 비운 것만도 고맙게 여겨!" 그 후엔 찍소리 못혀.
나 사는 동네 축구장 세 바퀴면 10분 1천보다. 세 시간이면 18,000보죠.
요즘 빌딩관리 일터에선 상일역 집에서 5호선 타고 군자가서 7호선 환승, 고속터미널역 부근 반포권역 일터까지는 19정거장, 그 뒤에 서대문 충정로역 까지는 22정거장, 지금 문정역 까지는 13정거장을, 다음 날 아침 귀가시간엔 여유가 있으니 검단산역 종점까지 5정거장 더 갔다가 되돌아오면 10정거장을 더 뛰는거라.
쉬는 날 어디 가거나 만날사람과 약속장소에 갈 때도 소요시간 대충 짐작 걸어가는거라.
자! ㅡ 작년 2월1일부터 오늘 1월31일 까지 총 누계, 1일 평균, 한 달 평균 집계 펼쳐봅시다. 그날 그날 꺼 입력되어 사진으로 나오니까 빼거나 더하거나 수정을 못한다.
■ 놀라운 건 열심히 뛰다가 잠시 쉬려고 의자에 앉으려니 웬걸?
조금 전에 핸드폰을 드려다보고 다시 몸에 지참치않으채 그대로 뛰었으니 몇 천 개가 그냥 허비(?)된거다.
무척 분하고 나 자신이 괘씸함을 떨치기 쉽지않다.
대낮에 지금 이렇게 글 쓰고 있음은 1년만이다. 뛰어야는데 어림없다.
횟수를 줄이지 않으면 더 늙으면 다리무릎 연골이 닳아서 걷지를 못한다니 줄일란다.
하루 8만보 7만보가 아니라 3만보로 줄일란다.
특히 전국순악질여사연맹투쟁분과위원장 인 마누라의 엄명이기 때문이다.
"그만 혀, 연골 말라 비틀어지면 요양원도 못가. 누가 손 붙들고 다닐껴? 나는 자기 손ㆍ발톱 정리는 해줘도 손 붙들고 다니는 것 어림도 없어"
● 過猶不及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子貢問師與商也孰賢. 子曰, 師也過, 商也不及. 曰, 然則師愈與. 子曰, 過猶不及)
어제 2022년 1월30일 06시 집 출발 ㅡ 일터에서 자정 직전까지 80,253보
2022년 1월 한달 것 1,409,000보
2021년 12월 1,134,000보
21년 11월 921,613보
21년 10월 1,144,000보
21년 9월 1,144,000보
21년8월 1,285,000보
7월 1.093,000보
6월 799,642보
5월 747,635보
4월 735, 221보
3월 707,297보
첫 달 2월 460,053보
작년1월28일
작년1월27일
[우리산악회 헌장] 發起趣旨文
우리는 山새들 노래 소리와 산골짜기 물 흐름소리를 사랑한다.
우리는 山이 품어내는 공기, 山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들이 발산하는 향기를 사랑한다.
山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장엄한 자태와 겸손한 자세에서 우리의 체력과 성품을 교정하고자 함이다.
山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을 토대로 山 사람들의 사랑과 의리를 단련하고자 함이다.
우리는 정상을 오르며 나를 사랑하고 산을 사랑하고 자연과 사람을 사랑하고 질서를 사랑하는 사랑의 전도사가 되고자 [우리산악회]로 뭉쳤다.
2001년 3월 18일
[우리산악회] 창립발기인일동
카페 소개 : 2001년3월 18일 도봉산에서 출범, 매주일요일 11시에 모여 서울근교 산행을 단 1회도 중단없이 건강 및
친목도모를 기본으로 하고있는 회비없는 전천후 산악회입니다.
건강, 친목, 사회,문화 등 공간으로 관심있는 모든 분들의 쉼터로서 역활을 다 하겠습니다.
좋은 자료가 있으시면 모든 회원이 공유 할 수 있도록 실어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2001년 3월 이재갑 드림
아래 글은 일산에 사는 여동생이 엄니를 모시다가 치매가 오면서부터 감당키 어려우니까 엄니를 요양원에 입원시킨 것이다. 오늘 동생이 내가보낸 이 글을 읽고 쓴 댓글.
오빠 글에 너무 욕지꺼리도 많고 남들이 읽을때 이해할 수 없는 글들이 많으리라는생각이들어.
오빠가 조금 절제, 자제해야한다는 생각이들거든. 글구 오빠는 엄마모신 곳이 어딘지알기 때문에 엄마한테자주 갔겠지만 난 십년이나 치매로 엄청고생하면서 모셨음에도갈 수 없음이 안타까웠어.기저귀 갈 때마다, 목욕시킬 때마다 위암 수술하고 수술부위가터질 것같음에 모두들 걱정하면서 요양원에 모셔야한다는 말을 거절하고 누구에게도 내 엄마 내가 모시는데 아무소리 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결국현대적 고려장을 해야만한 것이 평생 후회가되어 너무 힘들었던일로 엄마생각을 할 수 없었는데 이제 조금씩 보고싶어져서 가보고 싶어도 갈 수없잖아 속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