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 마카베오기 상권의 말씀 2,15-29
그 무렵
15 배교를 강요하는 임금의 관리들이 모데인에서도 제물을 바치게 하려고 그 성읍으로 갔다.
16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이 그 관리들 편에 가담하였지만 마타티아스와 그 아들들은 한데 뭉쳤다.
17 그러자 임금의 관리들이 마타티아스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이 성읍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존경을 받는 큰사람이며 아들들과 형제들에게도 지지를 받고 있소.
18 모든 민족들과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처럼, 당신도 앞장서서 왕명을 따르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 아들들은 임금님의 벗이 될 뿐만 아니라, 은과 금과 많은 선물로 부귀를 누릴 것이오.”
19 그러나 마타티아스는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임금의 왕국에 사는 모든 민족들이 그에게 복종하여,
저마다 자기 조상들의 종교를 버리고 그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하더라도,
20 나와 내 아들들과 형제들은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따를 것이오.
21 우리가 율법과 규정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소.
22 우리는 임금의 말을 따르지도 않고 우리의 종교에서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겠소.”
23 그가 이 말을 마쳤을 때, 어떤 유다 남자가 나오더니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왕명에 따라 모데인 제단 위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려고 하였다.
24 그것을 본 마타티아스는 열정이 타오르고 심장이 떨리고 의분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달려가 제단 위에서 그자를 쳐 죽였다.
25 그때에 그는 제물을 바치라고 강요하는 임금의 신하도 죽이고 제단도 헐어 버렸다.
26 이렇게 그는 전에 피느하스가 살루의 아들 지므리에게 한 것처럼, 율법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27 그러고 나서 마타티아스는 그 성읍에서 “율법에 대한 열정이 뜨겁고 계약을 지지하는 이는 모두 나를 따라나서시오.”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28 그리고 그와 그의 아들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성읍에 남겨 둔 채 산으로 달아났다.
29 그때에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로 내려가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9,41-44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42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43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44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루카 19,41)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마치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범죄를 두고 울었던 것처럼(1열왕 8,11), 예레미아가 유다의 유배를 두고 세 번이나 울었던 것처럼(예레 9,1;13,17;14,17) 우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두고 전에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루카 13,34)하시고 탄식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또한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리아 앞에서도 우신 적이 있습니다(요한 11,35).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우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식을 올리셨습니다.”
(히브 5,7)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우는 사람들!”
(마태 5,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루카 19,42) 하고 탄식하시며, 당신께서 우시는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루카 19,44)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지 못함에 대해 우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간다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에 가슴이 미어지셨습니다.
그토록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지만, 그들은 ‘평화를 가져다주는 당신’과 ‘당신이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파괴에 대해서 세 번씩이나 예고(루카 19,43-44; 21,20-24; 23,28-31)하시고, 그것을 종말을 예시하는 역사적 심판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예수님의 울음과 말씀은 단순한 탄식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적 경고임과 동시에, 회개의 결단 촉구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당신의 ‘눈물’로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도 세상을 보고 울 줄을 알고, 아파할 줄을 알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으라는 말씀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2013년 ‘람페두사 난민 방문 미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함께 슬퍼하는 울음과 연민의 경험을 상실한 사회에서 살아갑니다.
무관심의 세계화는 우리에게서 우는 능력을 빼앗아갔습니다.
... 누가 울고 있습니까?
누가 오늘 이 세상에서 울고 있습니까?”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당신의 뜻을 외면하여, 또 다시 당신을 울리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드리고, 당신의 눈에 웃음을 꽃피워 드리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루카 19,44)
주님!
오늘 당신의 뜻을 알아듣고 당신을 울리지 않게 하소서!
세상을 보고 울 줄을 알고 아파할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의 고통에 함께 슬퍼하고 함께 울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이 찾아오신 때를 알게 하시고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평화를 이루게 하시고 평화를 가져다주는 당신을 알게 하소서!
당신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드리고 당신의 눈에 웃음을 꽃피워 드리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선택적 무지>
오늘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십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이 얼마 가지 않아 파괴될 텐데 그것을 모르고 천하태평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모름을 꼬집으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이 모름을 묵상하며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제가 잘 아는 분이 당신 아들을 한번 만나달라고 부탁합니다.
자기 아들이 술과 마약과 게임 중독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한번 만나달라는 것이었고, 그래서 간신히 시간을 내어 방문했는데 그분의 아들은 언제 오라고 했냐며 저를 박대합니다.
그때 제가 겸손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런 그가 밉거나 그에게 화가 나지 않을 것이고, 오늘 주님처럼 그를 보고서 애처로워할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주님은 그 당시 평화의 길을 모르는 예루살렘이 애처롭고, 평화의 길을 알려주려 오신 당신을 몰라보는 예루살렘이 애처롭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직도 평화의 길을 모르고,
아직도 평화를 가르쳐주신 예수님이 주님임을 거부합니다.
공존하려고 하지 않고,
공동선을 추구하지 않고,
형제를 적으로 만듭니다.
지금의 전쟁은 하마스가 미사일 공격을 함으로써 시작되었지만 그들이 왜 공격했겠습니까?
공존하고자 했는데도 그랬겠습니까?
사실은 팔레스타인이 이미 오랫동안 살고 있던 곳에 이스라엘이 들어가 나라를 세우면서 분쟁의 씨앗이 심어진 것이기에, 정의로운 족속이라면 그곳에 들어가 살게 된 것이 미안해야 정상이며, 같이 사는 길을 찾았어야 했는데 몰아내려 하고 박해하였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하느님의 선민이라면 공동선을 추구하고, 하느님의 선을 나눴어야 했는데,
잘못된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기에 하느님의 선을 독점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의 유산을 형제들이 골고루 나눠 가져야 하는데.
형이라는 자가 부모의 유산을 다 차지하려고 하는 것과 같지요.
이들의 이런 잘못된 의식은 예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슬기롭고 충성스러운 집사여야 하고,
도조를 잘 내는 소작인들이어야 하며,
미나를 잘 바치는 종들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나무라고,
그래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될 거라고 예수께서 나무라자
오히려 ‘저자가 상속자다.’하며 하느님 아들마저 죽이려 하고 있지요.
이 예수가 또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고 그 외에는 모두가 형제들이라고 하자,
다시 말해서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권력자나 힘없는 자나, 이스라엘 사람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한 아버지의 형제들이라고 하자,
이들은 그런 예수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며 죽이려 하고 있지요.
아무튼 그들은 주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데, 제 생각에 그 무지는 선택적 무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알고 싶지 않은 무지입니다.
그리고 알고 싶지 않은 것은 하느님 아들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알면 인정해야 하고, 인정하면 따라야 하는데, 그러면 자기들의 기득권을 다 내려놔야 하기에 모르는 채 살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도 선택적 무지의 잘못을 많이 범합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채 살려는 무지 말입니다.
또한 모르고 살면 편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선택된 무지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눈물을 닦아드리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비시는 분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며 청한다고 하지만 그분은 우리 모두의 구원을 바라고 계시며 그 범주에서 벗어날 것을 염려해 우리를 위해 빌고 계십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면서도 당신을 그렇게 만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뜻 안에 머물지 않고 있으니,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십니다.
예루살렘 도성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아프셨습니다.
왜냐하면 회개의 길을 걸어야 할 사람들, 평화를 갈망해야 할 사람들이 그 본연의 것에는 관심이 없고,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 평화의 길을 걸었으면 좋으련만 그들의 완고한 마음은 자신의 삶을 돌이킬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멸망의 길을 자초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완고함 때문에 우십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소리에 우십니다.
평화를 말하면서도 정작 평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도 다스리지 못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자기 잇속을 차리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자니 눈물이 납니다.
이기심으로 가득 차서 주님을 생각할 틈이 없으니 참된 평화는 영영 멀기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질만능주의, 권력남용으로 인한 정치적 분열과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약자들과의 대화의 단절 등 곳곳을 바라보시며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참된 평화를 갈망하며 마음의 무질서를 바로 세워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해 주신다.”는 약속을 믿는 이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마음의 고요를 누립니다.
시련과 어려움이 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누가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구애 없이 주님의 뜻을 행하고 그것을 기뻐합니다.
그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주님의 참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 평화를 일찍 알았더라면 그렇게 사사건건 마음의 혼돈을 가져오지는 않았을 텐데 ….
주님께 대한 믿음은 모든 것을 이겨내게 하고 또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미움은 미움을 낳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되고 마침내 구원을 갈망하며 구원을 살게 됩니다.
주님의 눈물을 씻게 됩니다.
참으로 올바르게 주님을 믿는 이에게는 참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에서 평화를 갈망합니다.
재물이나 명예, 건강, 외모, 자식 등이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전력투구하며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영원하지 않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합니다.
결국 그것이 참 평화를 줄 수는 없습니다.
참 평화를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주님만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 주시고, 그것을 믿는 이는 그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오늘은 믿음으로 주님의 눈물을 씻겨드리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주님의 눈에서 눈물을 그치게 해드리고 웃음꽃이 피게 할 수 있는 새 삶이 지금 여기서 시작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과연 누군가 때문에 눈물 흘린 적이 있는지 돌아봅니다>
피정에 오시는 분들 중에 다양한 사연을 안고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면담을 하시다가 말문이 막히십니다.
손수건을 꺼내 드십니다.
그로 인해 뚝뚝 눈물을 떨구십니다.
누군가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는 것, 가슴 아프기도 하지만, 그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존경스럽기도 하고 사랑스럽습니다.
저는 과연 누군가 때문에 눈물 흘린 적이 있는지 돌아봅니다.
사랑과 열정이 식은 제 오늘의 냉랭한 삶에 가슴을 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우리 때문에 자주 우셨습니다.
오늘 사랑하는 예루살렘 도성을 바라보시며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고색창연한 아름다운 도시 예루살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랑 예루살렘, 온갖 지혜와 은총의 보고인 예루살렘, 그 사랑스런 도시를 바라보며 감탄하고 환호성을 터트려야 마땅할 텐데, 예수님께서는 왜 우셨을까요?
원인은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겉은 호화찬란하고 그럴 듯 해보였지만 속으로는 부패와 타락으로 곪아 터져가는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돌아서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끝끝내 우상숭배와 배신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자식들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세상 모든 부모들의 한결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많이 빗나간 자녀, 맛이 간 자녀, 생명의 길이 아니라 죽음의 길로 접어드는 자녀가 있다면 부모 입장에서 어떻게 처신하겠습니까?
정말 그 길이 아닌데, 정말 가지 말아야 할 길인데도 불구하고 계속 가고 있다면 부모 입장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처음에는 불러 앉혀놓고 차근차근 설득도 시도해 볼 것입니다.
그게 안 먹혀들면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언성도 높일 것입니다.
완력도 사용할 것입니다.
갖은 수단을 총동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수단들이 전혀 먹혀들지 않을 때, 어떤 부모는 그 자녀 앞에 눈물로 호소할 것입니다.
제발 돌아오라고, 제발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부모의 마음으로 당신의 아리따운 딸 예루살렘을 향해 눈물 흘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들과 온 세상이 지금 자신들의 목전에 들이닥친 이 시간의 중차대한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가슴 아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육화강생하시고 그들 사이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지금 바로 이 시간이 구원의 때이며 은총의 시기라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함을 슬퍼하십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메시아께서 카이사르처럼 자신들에게 세속적인 힘과 권세를 부여해줄 것을 바랐었지 실제적인 메시아 본질적인 메시아의 도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세상의 왕처럼 화려한 모습으로 인간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지만 정작 참 메시아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겸손하고 가난한 얼굴로 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돌아서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 아무리 눈물로 호소해도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 사람들, 머지않아 영원할 것 같던 성채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며, 더 이상 도성 안에서는 찬미가가 울려 퍼지지 않을 것이며, 그 대신 비탄과 통곡 소리, 칼부림이 난무할 것임을 예견하신 예수님이셨기에 그리도 슬피 우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울고 계십니다.
우리의 배신과 타락으로 인해, 우리의 절벽같이 완고한 마음으로 인해 슬피 우십니다.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끝까지 애타는 하느님의 마음을 저버리는 예루살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행하기는커녕 언제나 반대하고 거부하는 예루살렘의 최후를 내다보시던 예수님이셨기에 그리도 슬피 우셨던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우시다.>
오늘 복음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예루살렘이라는 특정 도시의 멸망을 예고하시는 말씀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회개하지 않고, 멸망을 향해서만 가고 있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이고, 멸망을 당하기 전에(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라고 호소하시는 말씀입니다.
끝까지 고집을 부리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면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것에 대해서 혹시라도 “당신의 무능력과 무기력함을 안타까워하신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예수님은 참 하느님이신 분이며 참 사람이신 분”이라는 신앙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참 하느님이신 분’이 무기력한 모습으로 우신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긴 한데,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강제로 시켜서 억지로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또 구원받기 싫다는 인간을 강제로 붙잡아서 하느님 나라로 끌고 들어간다면, 그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회개는 우리가 스스로 뉘우쳐서 해야 하는 일이고, 구원받는 일도 우리가 스스로 원하고 노력해야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면서 우신 것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구원이 아닌 멸망 쪽으로만 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심정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심정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루카 15,20)
비유를 보면,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고 할 때에도 아무 말 없이 재산을 나누어 준 것으로, 또 작은아들이 그 재산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날 때에도 아무 말 없이 보내 준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지만 멀리 떠나려는 아들을 억지로 붙잡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재산을 허비하면서 방종한 생활을 하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모든 것을 탕진한 뒤에 곤궁에 허덕일 때에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아들을 억지로 데려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몹시 안타까워하면서, 그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작은아들이 스스로 정신을 차리고 돌아오기를 날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비유에는 작은아들이 너무 배가 고파서 정신을 차린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 상황이라면 아버지의 사랑을, 또 아버지의 심정을 깨닫고 나서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작은아들이 돌아왔을 때,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났다고 아버지가 크게 기뻐한 것은(루카 15,32), 그 아들을 기다리는 동안에 크게 슬퍼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아버지의 그 심정이 바로 예수님의 심정입니다.
옛날의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멸망은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나의(우리의) 삶은 어떤가?” 라고 반성하는 일이 중요할 뿐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나의(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기뻐하실까? 아니면 슬퍼하면서 우실까?
지금 나는(우리는) 주님의 심정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허무하게 무너져버릴 바벨탑이나 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실 지금 인간 세상을 보면, 끊임없이 벌어지는 전쟁과 테러, 인권 유린, 독재, 종교 탄압 등 때문에 주님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멸망’은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일이 아니라 인간들이 자초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오늘 너도” 라는 말씀은 “오늘이라도 네가”로 해석됩니다.
우리에게 ‘오늘’이라는 시간은 주님께서 회개하라고 주신 마지막 기회입니다.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은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실행해야 한다.”입니다.
회개하면서, 주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곧 구원과 평화를 얻는 방법입니다.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는 “너희는 왜 눈을 감고 있느냐?”입니다.
인간들이 ‘구원의 길’을 못 보는 것이 아니라 안 보는 것입니다.
43절과 44절은 심판과 멸망의 무서움을 묘사한 말씀입니다.
그런 무서운 일을 당하기 전에 빨리 회개하라는 호소입니다.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아니면 모두 먼지처럼 사라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라고 인간들이 믿고 있는 업적들, 건축물들, 예술품들도 절대로 영원하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주님이신 분의 허락 없이는.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는 “복음이 선포된 때”이고,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는 “거부했기 때문이다.”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 평화의 전사 - 평화사랑, 평화훈련, 평화습관>
진리의 기쁨입니다.
진리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이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깨끗하게 합니다.
자유롭게 합니다.
평화롭게 합니다.
부요하게 합니다.
행복하게 합니다.
영원하게 합니다.
세세대대로 온누리가 평화롭기를 비는 마음에 날마다 기상하자마자 집무실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바치는 만세육창기도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수도원 만세!"
이어지는 고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합니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평화의 전사이다."
여전히 반복되는 역사입니다.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기가 이리도 힘든가 봅니다.
인류역사와 더불어 시작된 무지의 어리석음에 기인한 참혹한 전쟁입니다.
누구나 전쟁없는, 평화를 꿈꾸지만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는 전쟁입니다.
“삶은 평화다”가 아닌 “삶은 전쟁이다” 함이 맞을 것입니다.
살아간다는 생존 자체가 전쟁입니다.
어제 발표된 교황님의 비디오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전쟁의 고통을 겪고 있다.
2차대전이 끝난 이후 오늘까지 전쟁들은 세계 많은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전쟁들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우리는 크게 느끼지 못하지만, 오늘 여전히 바로 가까이에서 우리 모두 응답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바로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틴과 이스라엘의 성지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이 너무 고통스럽다.
너무 고통스럽다.
모두 한 하느님을 믿는 형제들 백성이 아닌가.
이들 형제 백성들은 평화롭게 살 권리를 갖고 있다.”
요지의 말씀입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같은 심정의 교황님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우십니다.
라자로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셨던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며 우십니다.
복음에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말마디는 한번도 안나오는데 이렇게 우셨다는 적나라한 표현은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예수님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오시면 세상 곳곳에서 전개되는 비극적 전쟁과 불행에 여전히 우실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복음만 아니라 오늘 제1독서 마카베오기 상권도 전쟁 이야기입니다.
배교를 강요하는 안티오코스 임금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선 마타티아스의 결연한 의지입니다.
“나와 내 아이들들과 형제들은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따를 것이오.
우리가 율법과 규정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소.
우리는 임금의 말을 따르지도 않고 우리의 종교에서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겠소.”
마침내 마타티아스는 제물을 바치라고 강요하는 임금의 신하를 죽이고 제단도 허문 다음 그 아들들과 지지하는 이들을 이끌고 산으로 달아나 자리잡고,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에 자리잡으니 이제 본격적인 독립전쟁이 전개되는 양상입니다.
마치 일제치하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폭력도 불사했던 선조들을 생각하면 섣불리 평화의 잣대로 판단하기가 참 어렵고 복잡한 상황입니다.
바로 이런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의 오늘 복음의 예루살렘 상황입니다.
반복되는 예루살렘의 불행이요 오늘도 여전히 계속되는 현실입니다.
언제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철이나 평화 공존을 누릴지 참 전망하기 힘든 인간 존재들입니다.
후대에 루카 복음사가는 70년대 로마제국에 의해 초토화된 예루살렘을 묵상하며 이 복음서를 썼을 것입니다.
다음 예수님의 말씀은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를 향합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없이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평화의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평화의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것입니다.
수도원이야말로 환대의 집이자 평화의 집입니다.
무지의 눈이 열릴 때 바로 거기 평화의 주님이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의 평화입니다.
바로 이 주님의 평화가 목말라 부단히 수도원을 찾아 성전에서의 공동전례기도와 미사에 참석하는 이들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주님의 갈망도 우리의 소원도 전 인류의 평화입니다.
값싼 평화는 없습니다.
평화는 감정이나 기분이나 감상이 아닙니다.
참으로 깨어 지속적인 평화의 선택이요, 평화의 사랑이요, 평화의 공부요. 평화의 노력이요, 평화의 훈련이요, 평화의 습관입니다.
평생공부가 평화요 우리 믿는 이들은 주님의 평화의 전사로 평생 평화의 여정을 살아갑니다.
참으로 온 인류의 으뜸가치가 공존공생의 평화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 역시 참 좋은 평화의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하느님 역시 평화의 하느님이십니다.
시편 화답송 첫절이 평화로 빛나는 참 아름다운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느님, 주 하느님이 말씀하시네.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 온 땅을 부르시네.
더없이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느님은 찬란히 빛나시네.”
(시편 50,1-2)
이런 하느님을 잊었기에 무지로 인해 하느님을 믿는 형제들이 부끄럽게도 끊임없이 전쟁을 합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우리 삶의 자리가 평화의 땅, 영적 시온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의 평화로 무장시키시어 당신 평화의 전사, 평화의 사도로 세상 영적전쟁터에 파견하십니다.
어제 성녀 체칠리아 축일에 써놓은 “겨울 배나무 예찬”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어쩜
저리도
담담할 수 있나
초연할 수 있나
만추(晩秋)의 땅에서는
하늘 냄새가 난다
그 크고 탐스러운 배열매들
모두
사랑의 선물로 내놓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봐주지 않아도
묵묵히
침묵중에
말없이 책임을 다한후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무념(無念), 무심(無心), 무욕(無慾)의
겨울 텅빈 사랑의 배나무들
참 평화롭다
놀랍다
감동스럽다
부끄럽다
너야말로
내 겸손의 스승, 평화의 스승이구나
조용한 중에 들려오는 배나무들의 고백,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17,10)"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의 평화'를 추구하라고 이르십니다.
"오늘 네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루카 19,42)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십니다.
안타까움으로 애가 타시는 듯합니다.
하느님의 도성이며 평화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정작 평화에 대해 무지하다니요...
지금 이스라엘은 진정한 평화를 위해 나아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향해 활짝 열린 계시가 예루살렘의 눈에는 아직 봉인되어 있는 셈입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루카 19,44)
바로 직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지요.
사람들은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했지만, 예수님을 진정한 평화의 왕으로 알아본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권력과 세도에 흑심을 품은 제자들은 자리 경쟁에 골몰하고 군중은 정치적 메시아를 꿈꾸었지요.
그리고 종교 기득권자들은 자리를 보전하려 음모를 꾸밉니다.
하느님께서 오셨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 관념 안에 새겨진 하느님 상이 각자의 야망과 욕망을 반영하는 탓이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난한 이와 약자, 고아와 과부, 병든 이와 소외된 이의 보호자임을 알게 되면 그분에게서 등을 돌릴 것입니다.
힘과 권력, 성공과 재물 등 그들이 바라는 무사 무탈 풍요 안위의 평화와 결을 달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루카 19,43)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입을 통해 기원후 70년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여 파괴한 실제 역사를 예견합니다.
세상이 보장하는 평화에 취해 칼을 주러 오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그분 백성은 실제로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제1독서는 다섯 아들과 함께 독립 항쟁을 시작한 마타티아스를 소개합니다.
"당신도 앞장서서 왕명을 따르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 아들들은 임금님의 벗이 될 뿐만 아니라, 은과 금과 많은 선물로 부귀를 누릴 것이오."
(1마카 2,18)
배교를 강요하는 관리들이 마타티아스를 회유합니다.
그가 성읍의 지도자이고 동족의 존경을 받는 큰 사람이어서 그의 배교가 적잖은 파급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임금의 측근이 되고 세속의 재물까지 누리는 삶은 안전하고 풍요롭기까지 할 겁니다.
그야말로 세상이 주는 평화에 길들여지는 삶이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안에서는 하느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 것으로 이미 충분하고 흡족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필요 없으니까요.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로 내려갔다.'
(1마카 2,29)
세상이 주는 평화를 거부한 이들은 광야로 떠납니다.
광야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삶의 결핍과 가난을 껴안는 장소이고 기회입니다.
하느님께 신의를 지키기 위해 광야에 자리를 잡은 이들은 목숨을 걸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 안으로 들어갑니다.
주님의 평화를 지키는 삶은 종종 세상의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이름과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을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내놓고 영육의 가난을 떠안은 이들은 이미 하느님과 닿아 있기에 누구도 그 평화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나의 평화는 어디에서 오는지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평화의 길을 헛짚고 헤매일 때 슬피 우십니다.
세상이 주는 풍요와 안위에 취해 진정한 평화가 던지는 도전을 외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영혼이 무뎌지지 않도록 마음을 성실히 벼리고 닦아나가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항상 벗님과 함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주최한 세계 주교 시노드의 1차 회기가 끝났습니다.
교황님의 요청에 따라서 시노드는 2024년까지 계속 된다고 합니다.
시노드는 교회가 처한 여러 현안에 대해서 지역별, 대륙별, 보편교회의 차원에서 심도 있는 논의를 하였습니다.
시노드는 ‘교회’에 대한 건강 검진과 비슷합니다.
건강한 교회에게는 ‘건강검진’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다. 아픈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픈 사람을 위해서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로운 계명인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에는 사랑과 믿음 그리고 희망이 넘쳐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교회를 찾고, 거기에서 위로를 얻을 것입니다.
그런 교회에서 가정은 ‘작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신앙은 가정에서 키워지고, 그런 가정에서는 자연스럽게 ‘성직자와 수도자’가 탄생할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문화와 역사를 선도하고, 시대의 징표를 드러낼 것입니다.
병든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됫박으로 빛을 가리는 교회입니다.
권위와 독선이라는 됫박으로 빛을 가리는 교회입니다.
교만과 욕망이라는 됫박으로 빛을 가리는 교회입니다.
맛을 잃어버려 거리에 버려지는 교회입니다.
기도의 맛을 잃어버린 교회는 그저 건물일 뿐입니다.
나눔의 맛을 잃어버린 교회는 권력의 수단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새로운 계명을 지키지 않는 교회입니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헐벗고, 감옥에 갇힌 이를 외면하는 교회는 사랑이 없는 교회입니다.
강도를 당해서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따뜻한 사랑의 손을 내밀지 않는 교회는 사랑이 없는 교회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외면하는 교회입니다.
십자가는 교회의 첨탑에 상징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나의 삶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병든 교회는 마치 철지난 바닷가처럼 쓸쓸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병든 교회에서는 ‘믿음, 희망, 사랑’의 꽃이 피지 못할 것입니다.
병든 교회에서는 가족이 함께 미사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봉사하고, 함께 성서를 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가정에서는 ‘성직자와 수도자’가 탄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문화와 역사를 선도하지 못할 것입니다.
시대의 징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시노드의 진단 결과 ‘성직주의’가 있었습니다.
성직주의에 대한 좋은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제직의 목적과 지향은 복음 선포 사명에 있다.
사제가 복음 선포라는 사명을 망각하고 사제의 존재적 지위에 초점을 맞추고 위계적 서열에 집착하면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사제는 미사를 집전한다.
집전자로서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변화와 쇄신의 지름길이다.
반복되는 직무에 마음과 정성을 기울이는 일은 쉽지 않다.
자칫 영혼 없이 습관적으로 미사를 거행할 위험이 많다.
하루의 일과에 지친 몸과 마음의 상태에서도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을 위해 강론을 정성껏 준비하고, 그들을 위해 대신 기도하고 축복하는 마음과 태도로 미사를 정성 들여 거행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사제는 거룩해질 것이다.
사제의 변화와 쇄신은 미사를 거행하는 사제의 마음과 태도에 달려있다.
사제는 무엇보다 매개자(Mediator)다.
신학적 의미의 ‘중재자’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리는 존재이며,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존재여야 한다는 의미다.
사실 현실의 사제는 인정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기 쉽다.
늘 본당 공동체의 중심으로 살아와서, 모든 시선과 관심이 자신에게 쏟아지기를 원하는 태도가 몸에 배었다.
솔직히 고백하면, 사제들 간의 갈등 역시 인정 투쟁에서 빚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제는 중심이 되기보다 변방에서 연결하는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현실의 교회 구조와 성직자 문화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같아 조금 슬프다.
목적과 지향을 기억하고, 미사에 정성을 기울이고, 중심이 아니라 연결하는 삶을 살아갈 때 사제는 자신을 변화시키고 교회의 변화와 쇄신을 가져오는 촉매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변화와 쇄신을 위해서 사제의 변화와 쇄신은 다른 어떤 일보다 더 중요하고 절실하다.
사제의 변화와 쇄신을 향한 길은 여전히 멀다.
세상과 환경이 강요하기 전에 우리 사제들이 변화와 쇄신의 길을 먼저 시작할 수는 없을까.”
좋은 성직자, 건강한 성직자가 있습니다.
나쁜 성직자, 병든 성직자도 있습니다.
성직주의는 교회의 전통과 관습으로 2000년을 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직주의에 문제가 있다면 개선하고 새로운 방안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지혜를 모아 내년에 폐막이 되는 세계 주교 시노드에서 건강한 교회를 위한 다양한 처방전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암 걸린 사람이 다리 잘린 사람을 만났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다행이다. 다리가 있어서.”
다리 잘린 사람이 암 걸린 사람을 만났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다행이다. 암이 아니라서.”
각자 다행이어서 참 다행이다.
(박미경, ‘생각이 달라도 괜찮아.’)
작가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모두가 ‘다행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닐까요?
그런데 ‘다행이다’라는 말보다, ‘희망이 없어, 끝장이야.’ 등의 부정적인 말을 쏟아낼 때가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다행이다’라고 말하는 이는 주변 사람을 주의깊게 바라보고, 나의 환경을 소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등의 긍정적인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행복할까요?
희망이 없다고, 절망적이라면서 고개를 숙이고 땅바닥만 바라봐야 할까요?
아니면 ‘다행이다, 감사하다’를 외치면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환하게 웃어야 할까요?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면서, “오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한 거룩한 도성을 보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참 평화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하지 못하고,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멈추지 않는 이스라엘에 대한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그런 안타까움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희망을 보지 않고 절망과 좌절로 고개를 숙이고만 있다면, 그런 모습에서 평화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다행이다, 감사하다고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평화의 주님, 희망의 주님, 사랑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기쁘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