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너에게’
이제 곧 검정 사각모에 가운을 멋지게 차려 입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이냐시오 강당에 앉아 있을 너, 노고산 언덕 곳곳의 추억을 가슴속에 접고 학교라는 보호 구역을 떠나 사회인으로 첫발을 내딛는 너는 지금 내 생애 가장 위대한 시작을 다짐하고 있다. 삶의 한 장을 끝내고 좀 더 넓은 세계로 비상하는 문턱에 서 있는 네 얼굴은 미래에 대한 흥분과 희망으로 환하게 빛난다.
그러나 지금 내가 들어가는 그 세상은 이제껏 책 속에서 보았던 것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곳인지도 모른다. 진리보다는 허위가, 선보다는 악이, 정의보다는 불의가 더 큰 목소리를 내고 이리저리 줄 바꿔 서는 기회주의, 호시탐탐 일확천금 찾아 헤메는 한탕주의, 두 손 놓고 자포자기하는 패배주의, 아직은 이상을 꿈꾸는 너는 길 잃고 방황하게 될지도 모른다.
‘실낙원’을 쓴 밀턴은 ‘얼마나 오래 사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잘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나도 스승으로서 네게 실망스럽지 않도록 ‘잘’ 살았다고는 자신있개 말할 수는 없다.
그래도 삶은, 해답없는 질문이지만 그래도 그 질문의 위엄성과 중요성을 믿기로 하자.‘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말처럼 우리의 삶을 낭비하기에는 너무나 소중하다. 하루하루의 삶은 버겁지만 삶이 주는 기쁨은 인간이 맞닥뜨리는 모든 고통의 역경에 맞설 수 았게 하고, 그것이야말로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 것이다.’ 라고 서머 셋 모옴은 말한다.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쓴 보마르셰는 묻는다. ‘사랑과 평화가 한 가슴 속에 공존할 수 있는가? 청춘이 행복하지만은 않은 것은 이 끔찍한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평화 없는 사랑, 사랑 없는 평화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나는 내가 사랑 없는 평화보다는 평화가 없어도 사랑하는 삶을 선택해주기를 바란다. 새뮤얼 버틀러가 말한 것처럼 ‘살아가는 일은 결국 사랑하는 일’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헨리 제임스는 ‘한껏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라고 말한다. 알베르트 까뮈는 더 나아가서 ‘눈물 날 정도로 혼신을 다해 살아라.’ 고 충고한다, ‘정글북’의 작가 리디야드 키플링은 ‘네가 세상을 보고 미소를 지으면 세상은 너를 보고 함빡 웃음을 짓고, 네가 세상을 보고 찡그리면 세상은 너에게 화를 낼 것이다.’라고 했다. 결국 우리네 모두의 삶은 이리저리 얽혀 있어서, 공존의 아름다움을 추구할 때라야 너의 삶이 더욱 빛나고 의미 있다는 진리도 가슴에 품어라.
그리고 삶이 너무나 힘들다고 생각될 때 나는 고통 속에서도 투혼을 가지고 인내하는 용기, 하나의 목표를 위해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능력과 재능을 발휘해 포기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나의 삶의 방식을 믿는다. 절망으로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걸을 수 있는 용기를 가져라.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쓴 스토우 부인은 ‘어려움이 닥치고 모든 일이 어긋난다고 느낄 때, 이제 1분도 더 견딜 수 없나는 생각이 들 때, 그래도 포기하지 말라. 바로 그때, 바로 그곳에서 다시 기호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우리에게 충고한다.
내 삶의 주인은 너뿐이다. 네 안에 잠자는 거인을 깨울 수 있다. 서강에서 만났던 소중한 만남들, 이곳에서 보았던 너의 하늘, 너의 꿈, 너의 사랑을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하거라. 내가 머무는 동안 너는 내게 젊은 여성의 끝없는 탐색으로 삶에 대한 열정과, 사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가르쳐 주었다. 이제 세상에 나가 너의 젊음으로 낡은 생각들을 뒤엎고 너의 패기로 세상의 잠든 영혼을 깨우고 너의 순수함으로 검을 양심들을 깨끗이 청소하고 너의 사랑으로 외롭고 소외된 마음을을 한껏 보듬어라.
사랑하는 네게 이별을 고할 때다. 너의 승리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너의 아름다운 시작을 온 마음을 다해 축하하며 서강과 함께 내 마음 속에 새겨지고 있는 서의 선생 장영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