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자로 한글의 우수성을 간파한 항일 구국의 근세 실학자 해학海鶴 이기李沂를 만나다.
어제 김제 성덕면에서 ”유학자로 한글의 우수성을 간파한 항일 구국의 근세 실학자 해학海鶴 이기李沂를 만나다.“ 라는 토크쇼를 진행했다.
송일섭 선생이 국가유산청에서 진행하는 <고택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한말의 유학자인 매천 황현과 영제 이건창, 석정 이정직 등의 문우들과 구국운동을 펼쳤던 해학 이기,
김제 만경에서 태어난 이기는 대한제국기 대한자강회를 조직하고, 언론을 통해 국권수호와 제도개혁에 힘쓴 애국계몽운동가이다. 1848년(헌종 14)에 태어나 1909년(순종 2)에 사망한 그의 이름은 기沂, 자는 백증伯曾. 해학海鶴은 그의 호다. 독학으로 학문을 성취하였으며 성리학의 한계를 인식하고 실학사상을 기초로 신학문을 수용하였다. 일제가 강요하는 황무지 개척권의 부당성과 그에 대한 대책을 제시하였으며 옛 영토인 서북 간도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05년에 해학은 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가서 일본의 한국 침략을 규탄하고자 하였는데, 일본공사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나인영 오기호 등과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천황을 직접 만나서 담판을 지으려 하였지만 가능하지 않자 일본의 주요인사들과 천황에게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려는 뜻을 접고 양국이 함께 번영하길 바란다”는 뜻을 담은 서한을 보냈다.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 뒤 첫 번째로 을사오적을 주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07년에 동지들과 함께 자신회를 조직한 뒤 첫 번째 거사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을 처치하고자 하였는데 약간의 부상을 입히는 정도로 실패로 돌아갔다.
해학은 그 사건의 주모자로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고종의 특사로 풀려났다. 그 뒤 장자연 윤효정등과함께 대한자강회를 조직하고 1907년에는 호남학회를 조직한 뒤 글로써 어두운 시국을 염려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양하고자 하였다.
1909년 7월 13일 서울의 한 여관에서 식음을 전폐한 지 10여 일이 지난 뒤 한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나이 63세였고, 저서로는 『해학유서』가 있다.
해학 이기와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
조선 후기 서울에 영제 이건창과 김택영, 매천 황현을 삼대 천재라고 불렀다면 호남에는 해학 이기, 석정 이정직, 매천 황현을 호남의 3재라고 불렀다.
스승이 없이 독학으로 공부한 해학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나이 16세에 향시에 나아가면서부터였다. 해학의 학문 세계는 부안에서 <반계수록>을 지은 반계 유형원과 실학의 대가인 다산 정약용에게서 비롯되었다.
해학의 문재가 널리 퍼지면서 당대의 명사들과 교분이 두터웠는데, 김제 출신의 석정 이정직, 운정 최보열, 구례의 매천 황현, 소금 왕사천, 소천 왕사찬 형제와 교분이 두터웠는데, 해학과 석정, 이정직과 매천 황현은 호남의 삼재三才라고 일컬어졌다. 그들은 시문만 아니라 어지러운 시국과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상까지 상통하는 사이였다.
해학과 뜻을 같이하는 문우로 활동했던 조선 말기의 천재 영제 이건창은 이기의 문장을 두고 ”해학의 문장은 비단결과 같다.“ 고 하였고, ”매천 황현은 <제이해학문祭李海鶴文>에서 “해학은 하늘이 낸 재목으로 웅매초려雄邁超麗한 기질에 혼기변박魂奇辨博한 문식文識을 가졌다. 그의 학문은 국광을 높이면서도 백성을 비호하는 데 있다.” 고 하였다.
김제 출신으로 뜻을 같이했던 석정 이정직은 해학의 문장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내 요사이 백중의 글 쓰는 것을 보면 더욱 변박기려辨博奇麗하여 오직 뜻 가는 대로 씌되 범상치 아니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얼핏 보아도 놀라울 정도이며, 백중의 글에는 아름다운 빛을 풍기고 있다. 해학의 문장은 마치 꽃부리와 같고, 곡식의 알맹이와 같이 온유하고 전아한 것이 당나라 때의 명문장가인 유자후柳子厚의 문맥과도 같아서 나의 문장으로선 미칠 수가 없다.”
해학은 “사람이 학문을 하는 목적은 사람다운 일을 하기 위함”이라고 하면서, “사람이 배운다는 것은 문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학이학문(學而學文)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집에서 재래식 학문을 배우는 것보다는 학교에 나아가 깨우치기 쉬운 국문으로 알아야 할 지식을 배우라“는 것으로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한글을 통한 교육을 할 것을 시사하였다.
한글 창제를 한 세종대왕을 높게 평가하고 한글을 배워야 한다고 강변한 해학
해학 자신이 한문학에 있어서 높은 경지에 도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글로 한문 관용의 누습과 폐습을 타파하여야 한다고 한 것이다.
세계적으로 한글의 우수성을 깨달아서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한글을 제 2 외국어로 배우고 있고,
나 역시 어려서부터 한글을 좋아하여 ”활자중독증>에 걸려서 책만 읽다가 전업 작가가 되면서 세종대왕이 창시한 한글로 문자를 조립하면서 살아가는 <문자조립공>으로 밥을 해결하고 아이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세종대왕을 높이 평가하는데, 해학도 나와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
“세종대왕은 기자 이후 제 1의 성인이다. 한문의 폐해가 오늘날같이 될 것을 미리 짐작하여 한글, 즉 <훈민정음>을 제정하셨다.”라고 찬탄한 뒤에 <일부도피론>에서 “한글 사용은 세종 이후에 그 뜻을 받들지 못하고 지금에도 국한잡용國漢雜用을 하고 있다.”고 개탄을 금치 못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쳬결 되자 국내의 모든 저항운동은 국권회복의 방향으로 전환되었는데, 해학은 교육의 목적을 인간이 생활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지식을 배우는 지육知育에 있음을 강조하였고, 지식이란 가정에 있어서나 국가에 있어서나 사물에 있어서 항상 사용하는 것들을 배워 아는 것이라고 보았다.
“우리나라는 오백 년에 걸쳐 문을 숭상한 까닭에 어찌 교육이 없고 학문이 없다고 반박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갑오년에 개혁이 후 인재를 선택하지 않고 뇌물의 여하로 사람을 뽑아 결국 경서經書나 읽고 독서에 열중한 사람은 암혈岩穴속에서 늙어 죽고 마는 사람이 많았다.” 해학 이기의 <해학유서>에 실린 글이다.
해학이 일본에 건너가기 위하여 삭발을 하고 양복을 입을 때에 쓴 글을 보자.
”가는 눈 섞인 눈썹, 이것이 전날의 이기였다. 그런데 머리가 깎이고 양복을 입으니, 전날의 이기가 아니로다. 이제 시비를 논하기보다는 현금 천하의 대세를 보기로 하자. 60 노옹이 만리 타국에 가는 것이 어찌 즐겁겠는가?“
그런 글을 남기고 나인영 오기호 등과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천황을 직접 만나서 담판을 지으려 하였지만 가능하지 않자, 일본의 주요인사들과 천황에게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려는 뜻을 접고 양국이 함께 번영하길 바란다”는 뜻을 담은 서한을 보냈다. 이 얼마나 무모한 도전인가? 마치 돈키호테를 연상시킨다.
“맺을 수 없는 사랑을 하고.
견딜 수 없는 아픔을 견디며.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이룰 수 없는 꿈을 꾸자.“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 실린 글과 같이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살다 간 사람이 해학 이기가 아니었을까?
2026년 4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