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4. 11. 1. 금요일.
하늘이 흐리고, 은근히 추워서 나는 하루내내 아파트 안에서만 머물렀다.
뭐라도 해야 하기에 컴퓨터를 켜서 국제뉴스나 읽었다.
1.
2024. 2. 26. 자 국제뉴스를 보았다.
우크라이나 침공이 이후 스웨덴, '32번째 NATO(나토 · 북대서양 조약기구) 가입'…‘러시아 포위망’ 완성
신청 1년 9개월 만에 헝가리 비준
위 서구라파 지도를 보면 우크라이나는 지금껏 나토에 가입하지 않았다.
지극히 최근에서야 가입을 신청, 가입했다.
위 지도를 보면 우크라이나 북쪽, 동쪽에서는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우크라이나 - 러시아 간의 전쟁은 2022. 2. 24.부터 시작했다.
결언한다.
앞으로 우크라이나는 위 인접국가들인 나토회원국의 지원을 받으면 어느 정도껏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해석된다.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는 극동에 치우친, 지금도 휴전상태인 대한민국에 대해서 그 어떤 군사적 지원을 요청해서는 안 된다라고 본다.
북한이 우크라이나 - 러시아 간의 전쟁에서 러시아를 위해서 병사와 무기를 지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북한이 지원했거나 말았거나를 우리나라는 관계하지 않았으면 싶다.
만약에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군사무기 등을 지원한다면 러시아 등으로부터 반발이 없을까?
자칫 미움을 받으면 엉뚱하게도 '한반도에서 참혹한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다'라고 군사전문가들이 우려한다.
*냅두다 : '내버려두다'의 전라도 방언.
2.
나는 요즘 '전쟁문학'에 관심을 두었다.
내 나이 만75살. 늙어서 등허리가 활처럼 굽혀졌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소설가 한승원의 딸 한강이 2024년도 10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며 뉴스에 떴다.
내 큰딸이 한강 소설책 3종류를 구입해서 친정아버지인 나한테 선물했다.
나는 한강의 소설책 가운데 한국전쟁, 광주사태 등을 읽다가는 그만 두었다.
1970년 11월생인 한강은 과거의 역사를 직접 보지도 듣지도 못했고, 고작 남의 이야기나 듣고서 상상으로 소설 썼다라고 여겨졌다.
하기사 소설은 거짓 가짜 등으로 꾸며낸 허구의 창작품이다!
나 역시 그렇다. 1949년 1월 생인 나는 해방 전후의 혼탁한 국내 좌우분열, 1950년 6월의 한국전쟁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내가 직접 체험하지도 못한 세상이다.
소설 가운데 1979. 10. 26.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 1979. 12·12 전두환 군사구테타, 1980년 5월 17일의 비상계엄령에 반발하여 다음날 발생한 <5·18광주사태> 등에 관해서는 나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조금은 알고, 조금은 이해해서, 조금은 말할 것 같다. 하지만 입 꾹 다문다. 당시에 나는 만30살 이상의 나이였고, 서울 용산구 삼각지 어떤 기관에서 근무했기에 시대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2024. 11. 2. 토요일.
지료 수집 중
- 대구 10·1 사건(大邱 10·1 事件)
1946년 10월 1일에 미군정하의 대구에서 발발, 이후 남한 전역으로 확산된 일련의 사건을 지칭한다. 역사적 관점에 따라 10월 인민항쟁,10·1사건, 영남 소요, 10월 폭동 등으로 불린다.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10월 인민항쟁,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영남 소요, 10월 폭동으로 부르며, 중립적인 입장에서는 10·1사태로 부른다. 조선공산당의 선동 및 주도를 주장하는 시각에서는 10월 폭동으로 부르기도 한다. 과거에는 10월 폭동, 영남 소요, 10월 항쟁의 용어가 혼용되었으며, 공식적으로는 보다 중립적인 10·1사건이라는 지칭을 사용한다.
- 1946년 대구 폭동 : 1946년 10월 24일 덕수궁 한미공동회담에 참석한 수도경찰청 수도국장 최능진은 "대구폭동은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에 의한 불행한 사건이다.
- 대구항쟁 :
이곳은 일명 "가창골 학살사건"이라고 불리며, 이 사건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이었던 대구 10월 항쟁사건,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등에 연루된 사상범과 단순절도범, 국민보도연맹원 등 약 1만여명 정도가 학살이 된 사건.
그 이전에 포스팅했던 경산의 코발트광산 사건 등과는 달리 희생자들의 뼛조각 하나도 찾지 못한 학살의 현장이며 그 이유로는 거대한 가창댐 건설로에 따른 지형의 변화로 인하여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 그 원인으로 추정된다.
[출처] 『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가창에 위치한 대구 민중항쟁 기념탑|작성자 시나브로
- 제주 4 · 3 폭동 :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광복 이후 미군정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일어난 소요를, 군경이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 제주도에서는 미 군정 경비대와 경찰, 우익 청년단체가 단독 선거 반대운동을 과잉 진압하면서 수만 명의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것이 제주 4·3 사건이다.
이는 정부 수립 이후인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으로 이어졌다.
4·3 사건으로 제주도에서는 5·10 총선거를 치르지 못하고 1년 뒤 재선거를 실시해야 했다.
* 1947. 3.1. 3.1절 행사에 어린 아이가 경찰의 말 발굽에 치여서 사망. 경찰이 사과하지 않았다. 제주도민이 경찰관서에 가서 항의.경찰은 사과하지 않고 총을 쏴서 시위군중을 사살.
*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3.1절)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진압과정을 시작으로 1954년 9월 21일까지 8년간 제주도에서 발생한 소요 및 남로당의 지휘를 받는 빨치산 조직을 소탕하기 위한 진압 과정에서 제주도민들들 중 무고히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김달삼 등 350여 명은 한라산 정상과 주요 고지에 봉화(烽火)가 오르는 것을 신호로 제주도 내 경찰지서 24곳 중 12곳, 우익 인사 집, 우익 청년 단체 등을 일제히 공격했다. 이번에도 폭력 투쟁의 명분은 단선·단정 반대, 통일 조국 수립 그리고 완전한 민족의 해방이었다.
* 미군정이 통치하던 1947년 3월 1일, 제주북국민학교에 남로당, 민주주의민족전선, 민주주의청년동맹, 부녀동맹, 인민위원회에서 동원한 17,000명의 군중과 기타 군중 8,000명 등 총 3만 명의 군중이 모여들어 3.1절 기념식을 열면서 모여들었다.
3.1절 기념식은 빌미였고, 주최측은 김일성과 연계하며 그들이 유리한 쪽으로 움직여 가고 있었다.
- 여수·순천 10· 19 사건( 1948 10.19. ). 여수에 주둔 중인 조선국방경대 소속의 반란
1948년 10월 전라남도 여수시에 주둔 중이었던 14연대 군인들이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 반란을 일으킨 사건. 반란군은 여수를 점령한 뒤 순천으로 이동했으며 이후 전라남도 일대를 점령했다.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한 뒤, 5개 연대를 투입해 여순 지역 탈환에 성공했다. 진압 과정 중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당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반대 세력에 대한 무제한적인 탄압을 제도화해 강력한 반공 국가를 구축하게 되었다.
- 보도연맹학살사건 : 1949년 4월 정부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 중순경까지 국민보도연맹원이 군인과 경찰, 우익청년단원에 의해 연행된 후 집단학살된 것은 정부가 전향을 목적으로 결성한 조직에서 소속 국민을 책임지지 못하고 오히려 살해한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었다.
- 1949. 12. 24. 경북 문경 양민 학살 사건 (* 지리산 빨치산 토벌 사건)
경북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에서 공비토벌 중 양민학살
1950. 6 · 25. 한국전쟁을 전후로 지리산 빨치산 토벌 사건, 1953년 9. 빨치산 총수격인 이현상(남부군 총사려완을 사살.. 이북으로 넘어가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의 난동
- 1950. 7. 26. 노근리 사건. 충북 노근리에서 미군은 양민 200명 살상.
- 전남 함평 11사단 사건( 1950. 11. ~ 51. 1.) 1950년 11월부터 1951년 1월 사이에 전라남도 함평군 일대에서 공비 토벌을 위해 주둔했던 국군 제11사단 소속 20연대 2대대 5중대가 민간인을 집단으로 총살한 사건.
1950년 12월 2일 5중대는 공비들의 습격을 받아 2명의 전사자를 냈고, 이에 대한 보복 공격의 성격을 띤 이른바 '견벽청야'(堅壁淸野)작전, 즉 공비와 주민을 구별하지 않고 해당 지역을 소멸시키는 작전을 폈다.
양민학살은 1950년 12월 6일경부터 시작되었다.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장교와 동촌마을에 진입한 군인들이 주민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80여 가구를 모두 불태운 것으로 시작된 양민학살은 12월 7일 월야면 월악리와 월야리를 거쳐 12월 9일 월야면 외치리로 이어졌다.
학살은 1951년 1월 중순까지 이어졌고, 마지막은 1951년 1월 14일 나산면 우치리 소재마을로 알려졌다. 이곳에서 5중대 군인들은 10여 명의 주민을 총살했다. 1951년 1월 15일 나사면 면장 등의 항의로 중단된 양민학살은 5중대의 중대장이 교체된 1월 23일 이후로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 거창 양민 학살 : 1951년 2월 10일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서 국군이 마을 주민을 집단학살한 사건. 6·25 전쟁 중에 공비 토벌작전 중이던 제11사단 9연대 군인들이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무고한 신원면 주민 570여 명을 다이너마이트와 총살로 학살했다. 1951년 국회에서는 ‘거창사건의 비합법적인 형행’을 규탄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여 관련자들을 처벌했으나, 이승만 정권에 의해 특별사면 되었다.
- 국방방위군 사건 :
국민방위군 사건은 1950년과 1951년에, 즉 6.25 전쟁 중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가 강제징집한 국민방위군 수만 명이 국회, 정부 및 군 고위층의 예산 횡령 및 뇌물 범죄 탓에 보급을 받지 못하여 그대로 희생된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대 최악의 군수비리 사건이자 국가 폭력이다.
동사자 약 9만에서 12만여 명
한국전쟁 중 1951년 1월 1·4 후퇴 때 제2국민병으로 편성된 국민방위군 고위 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하여 착복함으로써 12월~2월사이에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이들 가운데 아사자, 동사자가 약 9만에서 12만여 명에 이르렀던 사건.
남노당사건 발생 원인 :
1946년 1월 25일, 미군정은 농가 인구 한 사람당 67.5kg의 쌀만 남기고 나머지 수확물은 모두 공출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어 7월부터 군정 당국은 길거리에서까지 식량 사찰을 실시한다.
해방을 안겨주며 구원의 신처럼 나타난 미군에 대한 환상은 이런 일로 점차 깨지게 된다. 농민을 비롯한 기층 민중 사이에서는 미군정의 미곡 징수 정책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그러나 9월에 접어들어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은 미곡 수집에 단호한 태도로 나서겠다고 공식 선포한다. 이로써 식량 수집원들의 강제 사찰과 징수가 농촌에서 강행된다.
* 최윤환인 내가 기억하는 1970년대 초에도 쌀 공출은 거의 강제적이었다.
농가마다 활당된 쌀을 가마니에 넣어서 구루마/달구지, 리어커에 실어서 읍내 농협창고 앞까지 가져 갔다. 강압적인 시대상이었다. 하물며 해방 전후의 쌀 공출은 오죽이나 심각했으랴 싶다.
8·15 해방 후 지주와 소작인, 양반과 상민들, 친일파와 독립운동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좌우 정치세력 간의 대립이 중층적으로 겹쳐 발생했던 폭력적 갈등은 6·25 북한의 남침으로 마치 화약고에 불이 붙은 것처럼 전국에서 상호 살육으로 비화했다.
전쟁의 방아쇠는 북한이 당겼으나, 위기에 몰려 후퇴해야 했던 이승만 정부의 군과 경찰은 ‘내부의 적’이 두려워 남하하면서 전국의 모든 동네에 살고 있던 좌익 혐의자나 요주의 인물들을 싹 잡아다 죽였다.
그 뒤 맥아더의 인천 상륙 이후 군과 경찰과 우익 청년조직은 인민군 치하에서 부역했다고 의심되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또다시 무참하게 학살했다.
한국전쟁 당시 충남 보령군 양민학살 자료 :
⋆ 참고문헌(보도연맹 등 일련의 사건, 일제시대, 해방전후, 한국전쟁......)
1) 황의호,「1950년 주산전투에 관하여」『보령문화』14집,보령문화연구회 2005.
2) 이선행,「국민보도연맹원 학살사건에 대하여」『보령문화』14집,보령문화연구회 2005.
3) 최철한․황의호「내가 겪은 6⋅25(이향우)」『보령문화』7집,보령문화연구회 1998.
⋆ 참고문헌 : 현대의 역사 자료
1) 1991,『보령군지』
2) 1995,『대천시지』
3) 황의천,「만세보령의 의미와 유래에 대한 고찰」『보령문화』15집.2006
* 위 황의호, 황의천은 보령시 웅천읍 구룡리 화망 출신.
황의호, 황의천은 사촌형제.
글 쓰다 보니 밤 00 : 15이다.
자고 난 뒤 나중에 보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