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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17일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제1독서 : 1티모 6,2ㄹ-12
복 음 : 루카 8,1-3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2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3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나라에서 강의를 제일 잘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래서 사람들이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이곳을 찾아간다고 합니다.
어디에 계시기에 그럴까요?
정답은 유튜브라고 합니다. 실제로 이 유튜브 안에는 많은 자료가 있습니다.
강의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도 어떤 자료를 찾다가 어떤 분의 강의를 보게 되었는데 너무나 훌륭한 강의였습니다.
이 훌륭한 강의를 그것도 공짜로 봐도 되나 싶더군요.
작년부터 계속된 코로나 팬데믹으로 비대면이 강조되는 시기에
유튜브를 활용해 강의하는 것은 접근성도 좋고
비용도 무료라는 점에서 소비자에게는 큰 이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유튜브의 지식은 잘 전달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식을 요리해서 숟가락으로 떠서 먹여주는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이를 보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지루하면
건너뛰기를 하면서 제대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듣는 것도 본인의 노력이 있을 때 그 가치는 더해집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자신의 노력 없이 많은 것을 얻기만 바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는 주님을 따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인가를 해주시는 주님만을 원하지,
나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나의 노력이 없으면, 주님의 사랑과 은총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곁에 누가 있었는지를 오늘 복음은 전해줍니다.
열두 제자 외에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많은 여성이 예수님 곁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성차별이 대단했습니다. 여성을 사람으로 생각하지도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유명한 스승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남자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많은 여성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차별하지 않는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당신의 열두 제자를 부를 때처럼
여성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께 의지하려 하였고, 예수님과 함께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요?
제자가 되기를 바라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제외하고
그냥 주님으로부터 받기만 하려는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 3)
한상우 바오로 신부
상생과 협력으로
이 가을은
열매를 맺는다.
주님께서 주신
열매의 시간이다.
마음을 바꾸는
은총의 계절이다.
물질은
나눌수록
더더욱 풍요롭다.
행복과 기쁨은
주님께 있다.
우리자신이
행복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오래갈 수 없다.
시중드는 삶이란
자아를 벗어나
주님 안에서
성장하는
열매의 삶이다.
나눔은
열매가 되고
봉사는
기도가 된다.
값지고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배우게 된다.
함께하는 삶이
나눔의 삶이며
봉사의 삶이다.
삶의 보람은
주님의 일에 협력하는
우리들 봉사에 있다.
나눔과 보람은
봉사의 은총이다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랑의 가치이다.
사랑은
하느님의 일을
함께하는 실천이다.
또한
사랑은
하느님의
준엄하신 명령이다.
사랑은
시중드는 정성으로
주님께 내어드리는
우리들 마음이다.
마음을 만나고
이마음을
하느님께 올려놓는
마음의 만남이다.
마음의 열매를
맺어야 할
신앙의 시간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요즘 신문사의 성모상 앞에 피어난 코스모스를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하얗고, 빨간 코스모스들이 바람에 춤을 춥니다.
작년까지는 화단에 잡초만 있었습니다. 올해는 코스모스 모종을 얻어다 심었습니다.
지난봄에 물을 주면서 작은 모종이 언제 자라나 조바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코스모스가 제 어깨만큼 자랐습니다.
잘 자라준 코스모스가 고맙고 대견합니다.
유모차를 모는 아이의 아빠가 코스모스를 아이에게 보여줍니다.
늦은 여름을 지나 코스모스 하나 피었을 뿐인데 신문사의 앞이 환해졌습니다.
성모님도 빙긋이 웃는 것 같습니다.
지중해의 도시 알제를 보고 시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알제는 해가 비칠 때면 사랑에 떨고 밤이면 사랑에 혼절한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코스모스의 가녀린 꽃잎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속에서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느낄 수 있다.’
농사를 시작한 수녀님에게 농부이신 할아버지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수녀님 고추만 보지 말고, 야콘도 보세요.’
수녀님은 밭에 고추와 야콘을 심었습니다.
고추를 수확할 마음에 야콘에 관심을 덜 가졌습니다.
할아버지는 야콘이 풀이 죽어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고 야콘에게도 관심을 가졌더니 야콘이 싱싱해졌다고 합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신문사 앞마당에는 코스모스와 채소를 심었습니다.
가지, 고추, 옥수수, 토마토가 잘 자랐습니다.
사실 뒷마당에도 상추와 미나리를 심었습니다. 호박도 심었습니다.
그런데 앞마당의 채소보다 뒷마당의 채소는 덜 자랐습니다.
그늘이라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의 관심은 앞마당의 채소에 있었습니다.
내년에는 뒷마당의 채소들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정성껏 물을 주려합니다.
그늘에 자라는 아이들이니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오늘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합니다.
돈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인내, 겸손, 온유, 나눔, 희생,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이는 세상의 어떤 보험도 줄 수 없는 확실한 이야기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이 말씀을 따라서 살았고,
우리는 세상을 떠난 신앙인들이 천상에서 영원히 살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천국에서 성인들이 우리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이것이 가톨릭의 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많은 여인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시중을 들고,
자신들의 재산을 기꺼이 내어 놓았습니다.
그 여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세상을 따르는 것 보다, 훨씬 좋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보험을 들은 사람들은 보험회사가 망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혜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희망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역시 우리들의 신앙, 우리들의 교회가
더욱 발전하고 성장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 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이들이 피해야 할 것들에 대해 일러 주십니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루카 8,1)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들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루카 8,2)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루카 8,3)
복음은 예수님의 선교 여행에 함께 동반한 이들을 나열합니다.
열두 제자는 물론 영육의 고통에서 해방된 여인들,
그리고 또 다른 여인들이 예수님 곁을 지켰습니다.
열두 제자가 그리 뛰어난 면면을 지닌 엘리트들이 아니었던 것처럼
여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아니었으면 여전히 악령과 병고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경우도 적지 않았지요.
그들에게 예수님은 참으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구원자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3)
이 "재산"이라는 표현에는 물질적인 재물은 물론
비물질적인 봉사와 헌신, 지지도 포함되었으리라 보입니다.
공동체를 이루어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다보면
먹거리뿐만 아니라 심리적 영적 에너지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기꺼이 자신이 가진 것을 내놓는 이들은
신앙과 신심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신심으로 제 뱃속을 채우려는 이들을 경계하라고 티모테오에게 이릅니다.
"그들은 신심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자들입니다."(1티모 6,5)
사도는 다른 교리를 가르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논쟁만 일삼는 이들을 통해 교회 안에 분쟁과 알력이 번져 가는 것을 우려합니다.
그들은 신심을 이득의 수단으로 여겨, 왜곡한 진리와 가르침으로 자기 잇속을 챙깁니다.
"물론 자족할 줄 알면 신심은 큰 이득입니다. ...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1티모 6,8)
"자족"은 신심이나 소명, 직분에서 이득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 속에서 예수님 곁에 머무르며 활동을 돕던 이들이 그러했지요.
행여 은총 지위를 수단으로 이득을 탐하고 챙기는,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욕망으로 병든 이들에게
사도 바오로는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라고 일침을 놓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러한 것들을 피하십시오.
그 대신에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1티모 6,11)
주님 곁에 머무르는 이들이 가야할 길은 명료합니다.
그들이 바라고 추구해야 하는 덕목 역시 헷갈릴 일이 없이 분명하지요.
이러한 귀하고 아름답고 소중한 덕들은 악의 뿌리인 재물욕과 병립할 수 없습니다.
병립하는 것처럼 남에게 보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위선임을 자신도 알고 주님도 아시지요.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1티모 6,12)
사도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소박한 재물에 만족하면서
주님의 일에 일조하는 모든 선한 이들을 독려합니다.
세상 걱정과 본능적 탐욕을 떨쳐버리고, 이득을 바라지 않으며
순수한 사랑으로 헌신하는 삶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어렵기에
늘 주님의 은총과 도움을 간청하는 기도가 동반되어야 하지요.
주님으로 만족하며 그분께 의탁하는 삶은 하늘 나라의 신비가 허락된 "철부지"들의 특권입니다.
세속의 눈에는 무능하고 미련해 보일지라도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 "참 행복"의 길이지요.
주님 곁을 지키며 자족과 감사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하늘 나라를 소유한 진복자, 참으로 행복한 이들이랍니다!
오늘 저희 프란치스칸들은 사부 성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을 지냅니다.
예수님이 겪으신 십자가의 사랑과 고통을 그대로 체험하고 싶어한 성인처럼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구원의 도구로 사랑하게 되길 소망합니다.
여성 봉사자는 사제의 오른팔인가, 그리스도의 왼팔인가?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1.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신다.
2.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3. 여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이런 구조로 볼 때 예수님의 협조자는 제자들이고,
제자들의 협조자는 여성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성들이 차별을 받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왜 여성들은 사제가 될 수 없고 수녀님으로서 사제의 협조자 역할만 해야 할까요?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잘못일까요?
그래서 일각에서는 여성 사제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안타깝지만 이미 논의가 끝난 이야기입니다.
사제는 교회의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대리하기에 여성이 사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시대적 상황이 그래서 당시는 여성이 사제가 될 수 없었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처럼 여성도 당당히 제자들과 함께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협조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공회는 여성 사제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성체를 나누어 줄 때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대리해야 하는 사람이 여성일 때는
신자로서는 아무래도 헛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의 협조자들인 여성도 여성이기에 맡은 역할은 다르지만,
남성과 같은 영광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정말 교회에서는 수녀님들이 사제들처럼 영광을 받을까요?
아무래도 사제들이 영명축일 같은 행사는 더 크게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제들은 어쩌면 신자들이 주는 영광을 피상적으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자녀들과 더 가까워
자녀들의 감사를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직접 받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수녀님의 묵상글입니다. 함께 나눕니다.
“그 전 본당에서 작년 겨울 소임 이동을 준비하고 떠나기 직전에 좀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평소에 열심히 기도하시는 할머니가 계셨는데 초에 대한 집착이 있으셔서
지난해에도 다 쓴 제대 초를 대부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제대회에 봉헌금을 내고 짧아진 제대 초들을 택시를 동원하여 받아 가십니다.
그런데 잘은 모르겠지만 신자분들이 이 할머니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열심히 기도하시고 초에 대해 그렇게 오래전부터 집요한 애착을 두고 있어선지
그분들 사이에서는 약간 무시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할머니의 그런 모습과 주위 분들의 그런 태도에
별 신경 안 쓰고 그냥 편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른 곳으로 소임을 떠난다고 하니
할머니께서 저를 조용한 곳으로 잠깐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따라갔는데 저보고 의자에 앉으라고 하셔서
저는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것 같아 같이 의자에 앉자고 말씀드리니
굳이 일단 의자에 앉아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의자에 앉으니 할머니께서 갑자기 맨바닥에 엎드려 제게 절을 하시는 거예요.
저는 너무 놀라 당황했는데 절을 하시면서 저에게
'수녀님, 저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저는 할머니의 절을 받고 제가 갑자기 딴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면서 할머니가 저를 꼭 껴안으시며 죽을 때까지 저를 못 잊을 거라고 하셨어요.
할머니는 자식들 데리고 제가 떠나는 부임지로
꼭 한번 찾아가겠다고 하시면서 손을 못 놓으셨어요.
저는 그날 밤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큰 표징을 본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할머니가 마치 하느님과 같이 느껴지면서 그 할머니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저에게 2년 동안 이 본당에서 그래도 헛되이 살지 않았고
위로와 사랑을 주신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이런 체험이 또한 그저 평범하고 약한 이들 안에도
역시 숨어 계신 하느님의 존재와 역사하심을 체험하는
소중한 신앙 체험으로 제 마음에 간직되고 있습니다.”
여성이 가진 어머니의 모성과 사랑을 남성은 쫓을 수 없습니다.
여성들은 성당에서 이런 역할을 합니다.
사제들이 하지 못하는 역할이 있는 것입니다.
여성이 사제가 되려는 것이 여성의 권위를 향상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여성의 권위를 더 높이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교회에서 점점 여성의 역할이 줄어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특히 수녀님이 줄어들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성모회도 사라지는 곳이 많고 자모회도
예전만큼 힘이 있는 단체가 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성당에 갔을 때 수녀님이 안 계신 성당은
왠지 좀 삭막한 것 같다고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사실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오늘 복음의 여성들과 비견할 복자품에 오른 분이 계시는데
‘강완숙 골룸바’입니다.
이 분은 ‘한국 천주교 초대 여성회장’이셨습니다.
이분의 역할은 그분이 숨겨주셨던 주문모 신부님 못지않았습니다.
강완숙 골룸바는 서첩의 자녀로 태어나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오라버니들의 어깨너머로 글공부를 하였으나,
오라버니들보다 더 뛰어난 학식으로 영특한 여성이 되었습니다.
순천에서 아내와 자녀가 있었던 사람과 혼인하여 시모와 전처 자녀를 성실히 키웠습니다.
처음에는 불교에 입문하여 열심히 불경을 공부했으나
그에 충족하지 못하고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차에 서학을 알게 되어 심취하게 됩니다.
남편은 박해가 심해지자 자신의 아내가 천주교를 가까이함을 알고
배교하기를 바랐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니 집에서 내쫓다시피 합니다.
그래서 강완숙 골롬바는 시어머니와 아들과 함께 한양으로 이사합니다.
얼마나 어르신을 잘 모셨으면 시모와 전처소생인 아들까지 같이 한양으로 상경했을까요?
이때 중국에서 선교사로 오신 주문모 신부님을 모시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주 신부를 찾고 있을 때라 시모께서 아실까 봐
광에 모시고 대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3개월 정도 지내다 골룸바는 단식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3일을 굶으니 시모님께 왜 식음을 전폐했는지를 물으시고 마음의 병으로 그렇다 말하니,
시모가 여러 사정을 물으며 당신도 같이 식음을 전폐하고 2일이 흘렀다고 합니다.
총 5일을 금식하신 복녀는 그제야 자신의 사정을 시모님께 아뢰었었고
시모님께서 그러한 마음의 병은 걱정하지 말라 하시며
주문모 신부님을 댁으로 모시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렇게 주문모 신부는 골룸바 집에서 6년간 사목합니다.
주 신부 입국 당시 겨우 4,000명에 불과했던 신자 수는 5년 만에 1만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는데,
특히 그중에서도 골룸바의 활약으로 여신도의 수가 절대다수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총회장으로서 주위 아낙네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정부는 주 신부의 체포에 혈안이 되었고
골룸바는 주 신부를 피신시켜 체포를 면하게 하였습니다.
주 신부 체포에 혈안이 된 포도청에서는 갖은 고문으로
강완숙에게 주 신부의 행방을 다그쳤으나, 함구하여 밝히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기로 인해서 수많은 신자가 심한 고통을 받고 있음을
가슴 아파한 주 신부가 자수하여 처형당하자,
이를 옥중에서 전해들은 강완숙은 자기 옷을 찢어서
그동안 주신부가 조선에서 활동한 경과를 적어 후세에 남기고자 하였지만
이것을 전해 받은 어느 여 교우의 부주의로 말미암아 그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모진 형벌인 주뢰(周牢)를 여섯 번이나 받으면서도 끝까지 굽히지 않으므로 형리들도,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라고 감탄하였습니다.
이렇듯 옥중에서 갖은 고난을 겪은 지 만 3개월만인 그해 7월 2일,
형장인 서소문 밖으로 나가는 길에서도 강완숙은
다른 4명의 여 교우들을 격려하고 주님의 영광을 노래하였습니다.
즐거운 낯빛으로 제일 먼저 목숨을 바치니, 그때 나이 41세였습니다.
이러함에 누가 강완숙 골룸바 복자가
주 신부보다 뒤처지는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 신부가 해야 할 역할이 있었고 강완숙 골룸바가 해야 할 역할이 있었습니다.
골룸바가 없었다면 주 신부는 머물 곳이 없고 사목할 곳도 없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 성별의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다만 성별에 따른 역할만 다를 뿐입니다.
주문모 신부도 자신을 고문하는 이들에게 ‘신’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모세도 다시 이집트로 돌아갈 때 자신 대신 말해줄 사람이 없다면
들어가지 않겠다고 끝까지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론을 붙여주셨습니다.
이 아론의 역할이 여성의 역할입니다.
남자가 여자가 아니면 자녀를 낳을 수 없고, 예수님은 교회가 아니면 복음을 전할 수 없듯,
사제들도 여성의 도움이 없다면 어쩌면 무용지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오른팔이 사도들이었다면 왼팔은 여성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하느님의 오른손이 그리스도요, 왼손이 성령이셨던 것과 같습니다.
여성들이 사제의 오른팔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성 제자들과 여성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오른팔과 왼팔이었습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줄어든다는 말은
가정에서 어머니의 역할이 줄어든다는 말과 같습니다. 교회가 잘 될 수가 없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