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4. 11. 2. 토요일.
<월간 국보문학카페> '국보 소설방'에 '꽃삽 이월성' 님의 중편소설이 올라왔다.
도알이
내 댓글을 '세상사는 이야기방'에 대신 올려서 내 글감으로 삼는다.
댓글 :
소설 고맙습니다.
저는 1949년 1월 말에 충남 보령 바다 근처 산골 아래에서 태어났기에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터진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대전에서 사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급히 피난하려고 고향에 내려왔고, 시골에 있는 가족을 데리고 배 타고서 충남 외연도 섬으로 피난 가려고 했다가 떠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후 전개되는 인민군 세상....
저희 시골 동네에서도 북한 인민군 편을 든 사람들 빨갱이(주로 머슴, 가난한 사람, 영리한 사람)이 제법 있었으며, 북한 인민군이 철수한 뒤... 보령경찰서에서는 마을에서 날뛰었던 이들 빨갱이들을 잡아서 보령경찰서에 가두고, 얼마 뒤 대천 해변가에서 집단 총살했다고 합니다. 제법 많은 빨갱이들을 처형했다고 합니다.
* 충남 서천군에서는 인민군 편을 든 주민들이 무척이나 많았다고 합니다.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되는군요.
1950년 6월28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열린 결혼식장에 신랑 도인이와 신부 명옥이가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입고 연단에 서 있고
교회 밖에서는 마치 웨딩마치라도 되는 듯 지축을 울리는 북괴군 탱크소리가 “꾸르릉 쿵쿵 꾸르릉 쿵쿵” 하고 교회 전체가 흔들 거렸다.
국군들은 북괴군 탱크를 보고 혼비백산 해 도망치고 한강다리는 탱크가 들어오기 하루 전 27일에 이미 폭파 하여 끊겨 있었다. 북괴군 탱크는 탱크 포 한 방 쏘지도 않고 파도가 밀쳐 들어오듯 자연스럽게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서울시내로 굴러 들어왔다. 결혼식장은 말이 결혼식장이지 두 사람만이 예복을 차려 입고 서서 결혼을 서약하는 쓸쓸한 자리였다. 하객도 없고 주례도 없었다. 인기척이라면 피난 보따리를 이고 메고 설치는 사람들의 행렬이 오는 사람과 가는 사람으로 혼잡을 이루었다. 되돌아오는 사람은 한강 다리가 끊겨서 되돌아오고 가는 사람은 한강 다리가 끊긴 것을 까맣게 모르거나 피난가기를 포기한 사람들로 혼잡을 이루었다.
“도인씨 전부 피난을 가더라도 우리 둘은 백년가약을 맺읍시다.”
신부의 해맑은 눈이 빤짝이며 애절하게 도인이를 올려다보았다.
소설을 읽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전쟁이 터진 4일째인 6. 28.에 결혼을 했다고요?
피난을 가지 않고 둘이서?
※ 결혼식장 업자/종사자들은 피난 안 갔나요?
1950. 6. 25. 새벽 4시에 남침한 한국전쟁.
27일 오후 2시에 국방부 장관 신성모가 한강을 건넜다.
경기도 문산과 파주쪽에서 밀고내려온 북한군은 수색 쪽으로 다가서면서 그 중 일부가 김포를 향하여 한강을 넘어올 채비를 갖추었다. 당시 육군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북한군의 전차가 시내로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를 폭파하도록 명령하였고, 육군공병학교의 작업조는 28일 오전 2시 30분 경 3개의 철교와 1개의 인도교를 폭파하였다.
이 때 북한강파출소와 중지도에는 공병경계분대와 헌병대가 배치되어 교통을 통제하고 있었으나, 이들의 신호를 무시한 채 달려내려오던 수십대의 차량들이 대파되고 수많은 인파가 파편과 폭음 속에 사상을 입는 가운데 폭파현장은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너무 일찍, 북한군이 도착하기 7시간 정도 전에, 한강다리를 폭파함으르써 피난 못간 105만 서울 시민 중에 56만 명이 부역혐의로 고초를 겪게 되었다.
1950년 6월28일 새벽, 서울에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피란길에 나선 서울 시민들은 깜깜한 어둠을 뚫고 용산과 노량진을 잇는 한강 인도교로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6·25전쟁 무렵 한강에는 단선 철교 하나와 복선 철교 두 개, 그리고 한강 인도교와 광진교 등 다리가 모두 5개 있었다. 그중 인도교는 서울 시민이 도심에서 한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피란민 4000여 명과 피란 도구를 실은 소달구지, 군인 차가 뒤엉켜 한 발짝 떼기도 힘들던 새벽 2시30분 무렵, 천지를 흔드는 굉음과 함께 불기둥이 치솟았다. 인도교가 두 동강 나고 그 위에 있던 사람과 차들이 산산이 흩어지며 시커먼 강물 속으로 떨어졌다.
이승만과 군 수뇌부가 북한군의 도강 위험 요소를 미리 없애겠다며 TNT 3600파운드로 인도교를 폭파한 것이다. 현장은 얼마나 참혹했을까.
처참하게 부서진 한강 인도교. 한강다리를 걷너던 피난민이 이 폭발로 숱하게 죽고 다쳤다.
다리를 폭파했던 최창식대령은 훗날 총살당해서 죽었다(만28살).
폭파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빗발치는 국내외 비난 여론에 직면했다.
이승만과 군부는 책임을 모면하고자 당시 상부의 폭파 명령을 수행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 한 사람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워 ‘이적죄’로 총살했다.
[출처] 1950년 6월 28일 02:30 한강 인도표 폭파 / 9.21. 공병감 최창식 대령 총살
최창식대령( 1921년 ~ 1950년 9월 21일)은 고작 28살에 총살당했다!
그럼 도망친 이승만이는 뻔뻔스럽게도 ..... ?!
이승만 대통령이 한강다리로 도망친 뒤 그 다음날인 1950. 6. 28. 새벽 2시 28분에 국군은 한강대교(인도교)를 폭파하였다.
폭파로 50여 대의 차량이 부서지고 500~800명이 희생되었다.
사흘 전인 6월 25일 새벽 4시에 시작된 한국전쟁 70시간 30여 분 만이었다.
폭파 장면을 목격한 미 군사고문단은 50여 대의 차량이 파괴되고, 500~800명의 인명이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방송 전인 27일 새벽 4시에 이미 서울을 떠나 공식적인 ‘피난민 제1호’였다.
25일 밤 9시에 신성모 국방부 장관과 함께 이승만을 만난 무초 대사는 수도 서울에 최대한 대통령이 머물러야 함을 주장했으나 이승만은 전선에서 멀어지는 ‘안전’을 선택했다.
이승만은 이날 새벽에 각료나 국회의장, 대법원장 등에도 알리지 않은 채 경무대를 빠져나와 서울역에서 특별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달아났다.
대구에 도착했으나 ‘지나치게 멀리 왔다’는 지적에 따라 열차를 돌려 대전에서 내렸다.
6월 25일의 정부 포고문. 군경을 신뢰하고 외출을 삼가라고 적혀 있다.
특별담화는 충남지사 관사에 여장을 푼 이승만이 녹음해 이를 방송으로 송출한 것이었다.
이 방송을 듣고 피난길에 나서려던 서울시민들은 짐을 풀고 도로 주저앉았다.
거짓말쟁이......
위 소설은 얼마 뒤인 1966년대를 언급한다.
'.... 1966년에는 은행에 입출금은 사람이 가서 통장에서 입출금하거나 당좌 수표나 어음을 발행 했었다. 예금은 사람이 은행에 가야 예금을 할 수 있고 돈을 찾을 수도 있었다. ....'
소설은 얼마 뒤에는 방송통신대학에 다니는 이야기로 전개되고, A4용지 즉 컴퓨터를 이용하는 시대로 자꾸 발전하는군요.'
* 방송통신대학 :
1972년 3월에 개교한 한국방송통신대학을 전신으로 한다.
1993년 지금의 교명인 한국방송통신대학교로 명칭을 변경했다.
소설 정말로 고맙습니다.
찬찬히 읽어야겠습니다.
사진은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용서해 주실 게다.
사진에 마우스를 대고 누르면 사진이 크게보인다.
2024. 11. 2. 토요일.
우남 이승만 무덤은 서울 동직구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다.
내 눈에는 이 지역 일대가 훤하게 보인다.
나는 한번도 이 무덤 앞에 서서 고개를 숙여 묵염한 적이 없다.
나와는 달리 지금도 고개를 숙여서 묵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천천히 보완할 예정.
지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