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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 34,11-12.15-17
1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12 자기 가축이 흩어진 양 떼 가운데에 있을 때, 목자가 그 가축을 보살피듯, 나도 내 양 떼를 보살피겠다.
캄캄한 구름의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해 내겠다.
15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16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그러나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
17 너희 나의 양 떼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의 시비를 가리겠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15,20-26.28
형제 여러분,
20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21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23 그러나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께 속한 이들입니다.
24 그러고는 종말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리실 것입니다.
25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26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
28 그러나 아드님께서도 모든 것이 당신께 굴복할 때에는, 당신께 모든 것을 굴복시켜 주신 분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5,31-4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1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32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33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37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41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43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44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45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46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오늘은 전례력으로 연중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는 이날을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지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왜 왕이며, 어떤 왕일까요?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전례는 ‘예수님의 다스림’을 세상 권력의 다스림과는 분리시킵니다.
곧 세 개의 독서는 ‘돌봄과 사랑’, ‘죽음을 쳐부숨과 살림’, 그리고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왕권’을 그리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에제케엘 예언자가 예고한 ‘왕이신 목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줍니다.”
(에제 34,16)
곧 양떼를 먹이시고 보살피시며, 공정으로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의 시비를 가리십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 맏물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재림 때에 모든 죽은 이들을 살리시고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드릴 것’(1코린 15,24)임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복음은 마지막 때의 심판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는 우리에게 마지막 때를 대비하게 해주는 동시에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우쳐줍니다.
김준엽 시인의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이란 시가 떠오릅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어 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가벼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얼른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가족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부끄러움이 없느냐'고 나에게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반갑게 대답하기 위해
나는 지금 가족의 좋은 일원이 되도록
내 할 일을 다 하면서 가족을 사랑하고
부모님께 순종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물어 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나는 힘주어 대답하기 위해
지금 이웃에 관심을 가지고
좋은 사회인으로 살아가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내 마음 밭에서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어 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자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겠습니다.
이 시를 쓴 시인은 중증 뇌성마비 환자입니다.
이 시가 손가락 하나조차도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한 참담한 현실 속에서 입에 펜을 물고 쓴 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내용이 더욱 절절해집니다.
이 시에는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그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을 하겠습니다.”라고 반복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나는 ~을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결론처럼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이는 마지막 때 우리가 맞이할 '심판'의 기준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그것은 기도나 신비 체험이나 관상이 아니라, 기적이나 예배나 성사나 봉사가 아니라, 오직 ‘사랑의 실천’임을 밝혀줍니다.
이를 한스 폰 우르 발타살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받는 기준은 ‘그가 얼마나 종교적 체험을 했느냐?’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느님과 이웃을 얼마나 많이 사랑했느냐?’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심판'에서도, 처벌을 받은 ‘왼편’의 사람들은 무슨 큰 범죄나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이 아니라, 단지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사랑에 소극적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곧 사랑하지 않고 자비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사랑을 실천했는가?’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 25,40)
주님께서는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당신의 ‘형제’라고 부르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해준 것이 바로 당신에게 해준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작은이를 사랑하는 것은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 됩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마태 25,40)
주님!
어느 누구에게나 무관심하지 않게 하소서.
어느 누구든지 하잖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나에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가 존귀하기에 귀중하게 여길 줄 알게 하소서.
결코 당신의 선물을 보잘 것 없이 여기지는 말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여기애인, 여주 애인하는 우리>
그제는 아침에 일어나니 방금 꾼 꿈 때문에 기분이 나빴습니다.
악몽까지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기분을 아주 더럽게 했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선교 협동조합 일이 훌륭하다며 치하하는 차원에서 대통령이 저를 현재 용산이 아닌 청와대로 식사 초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에 종교 지도자 초청 때 수도자 협의회 회장 자격으로 초대되어 청와대에서 그 양반과 식사한 적이 있는데, 그 격식 차리고 경직된 분위기 때문에 다시는 이런 식사하지 않겠다고 할 때의 느낌이 꿈에서 재현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저는 ‘내가 그까짓 치하에 감격할 줄 알았냐?’라며 끈질긴 초대를 거절하다가 꿈을 깼는데,
꿈을 잘 꾸지 않는 제가, 혹 꾸더라도 생각나지 않는 제가 그 꿈이 생생히 기억나 기분이 무척 나빴습니다.
사실 저는 정치를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관심도 적지 않으면서도 정치인들을 나쁜 놈들이라며 많이 무시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그러는 가장 큰 이유가 저의 독선적인 교만 때문이지만, 복음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그들을 판단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아 모든 민족을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이 심판의 대상에 정치인들과 권력자들이라고 예외가 없고 오히려 더 혹독합니다.
세상에서 떵떵거리던 사람들이 오히려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는 의미입니다.
왕 중의 왕이신 주님의 뜻을 세상의 왕들이 받들어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며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을 받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해 어떻게 하시는지 그것을 따라 하는 것이고,
그것은 가난하고 병들고 감옥에 갇히고 헐벗은 이를 형제로 대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찬가처럼 권세가 있는 자는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는 끌어올리시는 주님의 그 사랑과 정의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님의 뜻을 받들어야 하는 것은
세상의 왕들 뿐 아니고 우리도 그래야 하고, 이 축일을 지내는 더 큰 이유도 실은 이것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믿고 주님을 왕으로 받들겠다고 하는 우리는,
더더욱 주님의 뜻을 받들어 이 세상에서 왕직을 수행해야 하겠지요.
그리스도교를 믿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예언직과 사제직과 함께 왕직을 수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할 때의 바로 그 왕직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당신을 왕으로 세우려고 할 때 오히려 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그리스도 왕 축일을 우리가 지내는 것도 당연히 주님께서 원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원한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주님을 왕으로 받들겠다고 교회 안팎으로 선포하는 것이요.
우리 왕이신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왕직을 수행하겠다는 결심을 봉헌키 위함입니다.
세상 왕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지만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모범을 보여주신 것처럼 서로 발을 씻어주고,
서로 여기애인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여주애인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여기애인( 如己愛人)이 나처럼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뜻이라면
여주애인(如主愛人)이란 주님처럼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가난한 이가 바로 당신이고,
가난한 이에게 해준 것이 바로 당신에게 한 것이라는 가르치신 바지요.
이 가르침을 명심하고 이 가르침대로 살기로 결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최후 심판의 기준은 사랑이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세상의 끝 날에 있을 심판을 미리 준비하도록 안배하시며 마침내 영원한 생명, 구원을 주십니다.
천상의 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일상 안에서 시험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은 시험이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실력을 점검하고 발휘할 기회가 됩니다.
그러나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두려움을 갖게 마련입니다.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최후 심판을 맞이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최후 심판은 개인적으로는 죽음이라는 이 지상 삶의 마감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천상의 길을 걷기 위해 세상의 험한 곳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심판의 기준을 알려 주셨기에 그 기준에 따라 준비하면 그날이 기다려지고 기대가 됩니다.
그러나 준비하지 못하면 두려움과 공포 속에 그날을 맞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는 심판이 이어지듯이”(히브리 9,27)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몸으로 한 일에 따라 갚음을 받게 됩니다.”
(2고린 5,10)
“심판 날에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저마다 한 일도 명백해질 것입니다.
그날은 불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저마다 한 일이 어떤 것인지 그 불이 가려낼 것입니다.”
(1고린 3,13)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쏟아집니다.”
(로마 2,6-8)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5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하고 단호한 선언이자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약속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심판대 앞에서의 판결 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0.4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굶주린 사람들, 병든 이, 감옥에 갇힌 이들, 헐벗은 이들 등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어떻게 했느냐가 심판의 잣대입니다.
그들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복음의 선포와 고통을 받는 이웃에 대한 자비와 사랑의 실천이 심판의 기준입니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지만, 하느님의 판결은 명확합니다.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흑이냐 백이냐 둘 중의 하나입니다.
어중간은 없습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심판의 기준을 안 만큼 그에 걸맞은 삶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답을 알려주었는데도 준비하지 않고 엉뚱하게 하느님을 원망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구둣방을 하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자기는 살만큼 살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간절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죽기 전에 꼭 예수님을 한 번 뵙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기도했습니다.
열심히 기도한 덕분인지 예수님이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너무너무 기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가 내일 너를 찾아갈 테니 그리 알아라.” 하셨어요.
할아버지는 너무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어요.
이른 아침부터 쓸고 닦고 부산하게 예수님 맞을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눈이 빠지게 기다렸어요.
그런데 하루가 다 가도록 오신다던 예수님은 오지 않고 거지가 동량 나왔고,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도 지나가고, 굶주린 어린아이도 문밖에 쪼그리고 앉아있었고 몇몇 손님이 다녀갔어요.
기다리다 지친 할아버지는 ‘그러면 그렇지, 나같은 보잘것없는 노인에게 오실 리가 있나? 개꿈이었나 보네.’ 하며 실망했어요.
그날 밤 지쳐 잠이 들었는데 예수님이 또 나타나신 거예요.
예수님을 보자 할아버지가 대뜸 소리를 질렀어요.
‘오신다고 해 놓으시곤 왜 오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도 거짓말하십니까?’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러셨어요.
“무슨 소리냐?
내가 오늘 세 번이나 너를 찾았는데.
한번은 거지의 모습으로, 한번은 소경의 모습으로, 한번은 굶주린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말이다.”
사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를 스쳐 지나가지 말고 관심과 사랑으로 만나시길 바랍니다.
베푸는 삶, 사랑의 삶이 심판의 잣대임을 잊지 말고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만나게 되는 모든 이는 나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깨어 사랑을 실천할 때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보내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
사랑하는 사람은 종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종말은 파멸이 아니라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지막 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과 희망으로 기다립니다.
희망의 기다림이 있는 만큼 삶의 자리에서 모두를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우선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자신을 가지고 심판 날을 맞을 수 있습니다(1요한 4,16-17).
사랑에 사랑을 더하는 가운데 주님과 하나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왕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고(요한 1,14)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습니다.
당신을 낮추어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섬김의 본을 보여주시고(요한 13,15 ), 겸손과 봉사의 왕이 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시며(요한 13,34) 사랑의 새 계명을 주셨고,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면서도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카 23,34)하고 기도하시며 용서의 왕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 심지어 목숨까지 내놓으시며 우리를 위한 사랑에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야말로 사랑의 왕이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사랑의 왕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인간은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 없다>
오늘 복음은 우리 각자가 받게 될 ‘심판’을 상기시킵니다.
심판은 함께 살 부류끼리 묶는 것을 의미합니다.
함께 살 것들의 차이는 바로 사랑의 수준에 의해 결정됩니다.
모기와 인간을 묶어 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왕이요 심판관으로서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양은 굶주린 이를 먹여 주고 헐벗은 이를 입혀주었으며 병든 이를 찾아준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선행’을 많이 쌓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기준이 선행의 행위라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십계명을 잘 지키면 선행을 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중에 염소로 분류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 없이 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행위는 다 죄입니다.”(로마 14,23)라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은 행위가 아니라 ‘본성’에 의해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약 어떤 아버지가 불 속에 있는 아이를 구하러 뛰어들었다면 그것은 사랑이 많아서일까요?
기억상실증에 걸려 불 속에 있는 아이가 자기 아이인 줄 모른다면 그래도 뛰어들까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정체성은 믿음의 결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8)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갈라 3,10)라고 합니다.
믿음이 있다면 우리가 물 위도 걸을 수 있는 존재요, 죽어도 부활하는 존재임을 알고 그리스도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영화 <엑스 마키나>(2015)는 한 인간이 로봇과 사랑에 빠져 자신과 같은 인간을 배신할 수 있다는 줄거리를 가집니다.
유능한 프로그래머 ‘칼렙’은 ‘네이든’의 비밀 연구소로 초대받습니다.
그곳에서 네이든이 창조한 매혹적인 A.I. ‘에이바’에 유혹받습니다.
칼렙은 에이바를 불쌍히 여기게 되고 오히려 비인간적인 네이든을 싫어합니다.
에이바가 해체 위기에 놓이자 칼렙은 네이든을 배신하고 에이바를 풀어줍니다.
이 과정에서 네이든은 에이바에 의해 살해 당합니다.
만약 아기와 개, 두 대상 중에 자신과 평생 살 대상을 선택하라면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요?
주님은 행위가 아니라 ‘본성’으로 심판하십니다.
칼렙처럼 행동만으로 심판하려다가는 사람처럼 똑똑한 개를 선택하고 아기를 버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차가 브레이크 고장으로 달려오는데 여러분의 반려동물과 한 범죄자가 그 차에 치이기 직전 하나만 구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둘 중 누구를 구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선택에 따라 여러분이 어느 무리와 살 자격이 있는 지가 결정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반면 인간은 모든 개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강형욱 조련사는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인간은 왜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 없을까요?
같은 인간끼리는 같은 욕망을 추구하여 ‘경쟁’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는 잘만 조련하면 모두 좋은 개를 만들 수 있어 모든 개에게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려면 사랑하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더 높은 존재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라고 하십니다.
이때문에 아기가 동료 아기들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경쟁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잘 드러나는 책이 『꽃들에게 희망을』입니다.
애벌레끼리는 경쟁합니다.
하지만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모든 애벌레 안에서 나비의 가능성을 봅니다.
그래서 모든 애벌레에게 자비를 가질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믿음은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정체성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모든 인간을 사랑하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으면 모든 인간을 자비의 눈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적어도 모든 인간을 불쌍히 여길 수는 있게 됩니다.
야곱이 이사악 앞에서 자신이 에사우라고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정체성의 변화만이 우리가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보내주신 이 은혜를 이해하십니까?
놀라고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795항)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자리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체험>
오늘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인류의 구세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그냥 왕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요, 왕 중의 왕임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무소불위의 힘으로 군림하거나 섬김을 받고 권세를 누리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작고 가난한 사람들 앞에 허리를 숙이는 섬김과 봉사의 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섬김과 봉사의 왕으로 오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쥐꼬리만한 권력이라도 손에 쥐게 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자신의 본분을 상실하고 군림하고 거들먹거리는 세상의 통치자들을 향해 그게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자신들이 손에 쥔 권력은 잠시라는 것을 망각하고, 남용하거나 오용할 때, 언젠가 치러야 할 대가는 참혹하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나는 권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니 나와는 무관한 축일이네, 하고 무시할 일이 아닙니다.
교회 전례력으로 마지막을 향해 가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부여해주신 탈렌트와 역량과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성찰해 볼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조만간 우리 각자가 직면하게 될 신앙 여정의 종착점인 죽음, 곧 새로운 시작, 영원 속으로 들어가는 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볼 일입니다.
지금 내가 몸 담고 있는 이 자리에서 확연한 진리, 곧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이 큰 결핍에도 불구하고 나를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불변의 진리를 나는 진실로 믿고 있는가?
위대한 우리의 성인성녀들께서 목전에 다가온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거기 있었습니다.
그들은 살아생전, 그 진리,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하신다는 진리를 백 퍼센트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살아있는 지금 나를 극진히 사랑하고 계신다면,
언젠가 맞이할 우리의 죽음과 심판 때, 그런 태도를 바꾸실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이 자리에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충만히 현존하고 계심을 굳게 믿는다면,
언제나, 항상, 그리고 영원히, 궁극적으로도 하느님과 함께 있음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구원이요 영원한 생명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자리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체험은 언젠가 맞이하게 될 또 다른 국면에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연결될 것이며,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세상의 작은 것을 무시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 가르침에 따르면, 오늘 우리가 별것 아니라고 여기는 작은 사랑의 실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작은 친절과 봉사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 엄청난 것입니다.
무료 급식소에서 정기적으로 행하는 작은 봉사, 주말에 한번 소년원이나 교도소 천주교반에 이루어지는 작은 봉사가 우리의 구원, 그리고 영원한 생명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거룩하고 깊은 믿음이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울리는 종과 같이 허망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오늘 지닌 신앙이 아무리 고고하고 수고한 것이라 할지라도 허리를 깊이 숙이고 겸손하게 작은 사람들에게 봉사하지 않을 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작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거부와 배척은 곧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에 대한 거부와 배척임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최후의 심판>
‘종말의 날’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이고, 온 세상의 왕으로서, 또 심판관으로서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요한 5,22)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요한 10,30) 예수님의 심판은 곧 하느님의 심판입니다.
여기서 ‘모든 민족들’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들’입니다.
인류 전체가 심판의 대상입니다.
그렇지만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신앙인들’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한 심판이지만, 마태오복음 25장에 있는 이야기는 심판의 전체 상황이 아니라 일부 상황, 즉 신앙인들에 대한 심판 상황 이야기입니다.
악인들에 대한 심판은 따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요한 5,29)
32절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라는 말씀과 33절의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라는 말씀은 누가 양인지, 또 누가 염소인지 심사하는 일은 이미 끝났고, 최종 선고만 남은 상황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최후의 심판 날’은 무죄와 유죄를 조사하거나 심사하는 날이 아니라 최종 선고를 하는 날이라는 것인데, 그러면 ‘심리(審理)’ 과정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진행되는 것일까?
주님의 법정이고, 주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니까 세속의 법정에서 하는 것과 같은 심리 과정이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최후의 심판’은 주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니, 실제로 어떻게 진행될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최종 선고를 내리시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 자기의 운명을 선택한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바리사이들이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라고, 즉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루카 17,20-21).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은 종말과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말의 시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나의 삶’은 ‘최후의 심판’의 과정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과 행동과 생각들 하나하나가 심판 날의 최종 선고에 직결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삶 속에서 하는 선택들은 최후의 심판 날의 최종 선고에 대한 선택이 됩니다.
‘양들’에게 ‘구원 선고’가 내리는 것은 단순히 ‘불우이웃 돕기’를 잘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들의 ‘삶 전체’가 주님의 뜻에 합당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작은 이들’에 대한 사랑 실천을 잘했다는 것은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서 ‘하느님의 뜻 실행’을 잘했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사랑 실천만 잘하면 믿음이 없거나 부족해도 상관없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믿음’과 ‘사랑’이 모두 중요합니다.
사랑 없는 믿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1코린 13,2).
그처럼 믿음 없는 사랑도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 3,18)
그런데 ‘믿음 없는 사랑’이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이(마태 5,46) ‘믿음 없는 사랑’의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랑은 사랑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최후의 심판’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의인들에게는 ‘위로와 격려’가 되고, 죄인들에게는 회개하라고 타이르는 말씀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요한 3,17).
지금 잘하고 있다면 ‘끝까지’ 변함없이 잘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무엇인가 부족한 점이 있다면 늦기 전에 회개하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심판을 안 받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으려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같은 말 같지만 완전히 다른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심판이 무서워서 억지로 하는 생활이 아니라, 주님께서 ‘창조 때부터 준비해 놓으신’(34절)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행복을 향해서 나아가는 ‘기쁨 가득한’ 생활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사랑하고 섬깁시다 - “하루하루, 날마다, 늘, 끝까지. 한결같이, 평생을”>
오늘이 흡사 모든 보물을 다 품고 있는 주님의 살아 있는 보물창고 같습니다.
오늘은 연중 마지막 33주일이자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자 “제38차 세계 젊은이의 날”이며 성서주간이 시작되는 첫날입니다.
세계 젊은이의 날을 맞이하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께서는 “희망 속에 기뻐하십시오.”(로마 12,12)라는 주제로 참 멋지고 풍부한 담화도 발표했습니다.
참으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은 희망과 기쁨의 왕이시며 이런 주님을 잘 알고 사랑하기 위해 성서공부는 필수입니다.
이번 성서주간에는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독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이런 그리스도왕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하루하루 날마다 늘 평생 한결같이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거기가 바로 하늘 나라이고 살아 있는 보물창고입니다.
바로 여기 요셉 수도원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바로 어제 생전처음 수도원에 피정 왔다 떠난 개신교 자매님에게 수도원은 “살아 있는 보물창고” 같다며 내년 달력을 선물했는데 이에 감격하여 “보물창고”라는 시를 보내왔습니다.
“그곳에 가면 나무 한 그루 있지
날아드는 새들 따스하게 맞아주고 편히 머물도록 품어주는
늘 거기에 서있는 나무 한 그루있지
나무가 주는 푸르름과 싱그러움
열매와 그늘 사그락 잎사귀 소리마져도 모두 보물이지
늘 한 영혼 기다려주는 나무 한 그루
바로 모든 이의 보물창고”
-2023.11.25. 프란치스코 수사님의 말씀 듣고 염혜영-
더불어 생각나는 26년전 “사랑이란 이런 것”이란 자작시였습니다.
“나무는 넉넉한 품
언제나 거기 있어 날아 오는 새들
모두 안아 들이는
넉넉한 품
새들은 나무에 자취를 남기지 않고
나무는 새들이 집착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런 것”
-1997.3
한 그루의 나무가 상징하는 바 보물창고 같은 수도원이요 제가 소망하는 수도자의 삶입니다.
어제 그 자매에게 “하늘과 산”이라는 시집과 “겨울 나무 예찬”과 더불어 “시가 찾아 왔네!” 이라는 시도 선물했습니다.
“시가 찾아왔네!”라는 시 전문도 그리스도왕 대축일 선물로 나눕니다.
그대로 일편단심 사랑해온 그리스도왕께 드리는 헌시獻詩입니다.
“詩가 찾아 왔네!
나를
은총처럼 사랑하는 詩가
가슴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詩가
나 외로울 때, 그리울 때, 기다릴 때 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참 반가운 손님, 참 기쁜 선물, 참 좋은 연인, 참 좋은 친구인 詩
늘 詩를 생각하며 詩와 함께 살아왔고 살고있고 살것이라네
詩덕분에 하루하루 날마다 늘 평생 한결같이 살아왔네
詩없이 이 삭막한 광야여정 무슨 맛, 무슨 기쁨, 무슨 재미로 살 것인가
눈이 열리니 온통 詩인 천국이라네
세상에 나보다 평화롭고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이 없을 것이네
나 언제나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행복한 하늘 나라의 삶이라네”
주님을 사랑하듯 시를, 삶을 사랑해 왔기에 시는 주님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하겠습니다.
참으로 혼란스럽기가 그리스도왕이 제정되던 1925년 때와도 흡사한 작금의 세계입니다.
1925년 그때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얼마후로 극단적 민족주의와 세속주의로 인해 세상이 중심을 잃고 암흑의 혼돈중에 있던 암울한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교황 비오 11세가 세상의 빛이자 생명이요 희망이자 기쁨이신 그리스도를 온 누리의 중심이자 왕으로 선포하는 대축일을 제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중심을 잃고 혼돈중에 방황하다 마침내 1239년 세계 제2차 대전의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1939.9.1.부터 시작되 전쟁은 1945.9.2.까지 무려 만 6년 동안에 세계는 폐허가 됩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난지 78년이지만 여전히 계속 반복되는 전쟁이요 오늘 역시 세계는 중심을 잃고 혼돈중인 참 위태한 상황으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왕님을 더욱 필요로 하는 절체절명의 절박하고 긴박한 상황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방금 힘차게 부른 화답송 후렴은 얼마나 든든하고 따뜻한 위로가 되는지요!
하루 종일 끊임없이 목이 터져라 노래 부르고 싶은 시편 성구입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왕님은 이처럼, 우리를 끝까지 언제나 돌보고 섬기는 착한목자입니다.
결코 폭압적으로 위압적으로 통치하고 다스리는 독재자 임금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전례기도시 아름답고 감격적인 말마디들도 우리를 기쁨으로 뛰놀게 합니다.
우리 여기 수도자들은 다음 장엄한 초대송 후렴 고백으로 대축일을 활짝 열었습니다.
초대송; “왕중의 왕이신 그리스도께, 어서와 조배드리세.”
이어지는 찬미가와 시편 두 개의 후렴 노래 역시 참 고무적이었습니다.
찬미가; “예수님 놀라우신 임금이시여, 우리의 위대하온 승리자시여
말로다 표현못한 감미이시여 온전히 갈망할 수 있는 임이여”
후렴1; “보라, 떠오르는 태양이라 일컬어지는 분을
그는 옥좌에 앉아 다스리시며 모든 민족에게 평화를 전하리라”
후렴2; “만왕의 왕, 군주의 군주이신 예수께 영광과 주권이 세세에 있으소서”
세상이, 우리 삶이 이처럼 혼란스럽고 복잡한 것은, 두렵고 불안한 것은 삶의 중심이 분명치 않거나 없기 때문입니다.
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나 “빛나라” 하늘나라를 살 수 있는 길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한결같이 사랑하며 섬기며 사는 길뿐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소개하는 그리스도왕의 모습이 우리에게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아드님께서는 모든 것이 당신께 굴복할 때에는, 당신께 모든 것을 굴복시켜 주신 분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충실한 종이자 일꾼인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 참 은혜롭습니다.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새롭게 명명하면서, 천상교회와 지상교회 모두를 다스리는 그리스도왕의 축일을 최고 등급의 대축일로 격상했고, 이어 교회 전례력으로 마지막 주일인 연중 제33주일에 배치함으로 이날 모든 것을 정리하도록 했습니다.
참 좋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고 섬기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착한목자 그리스도왕이시며, 우리 역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참으로 사랑하고 섬긴다면 그분의 뜻을 자발적 기쁨으로 기꺼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최후심판을 통해 착한목자 우리 주 그리스도왕의 마음이 환히 드러납니다.
바로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자가 소개한 착한목자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이십니다.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사랑하고 섬깁니까?
주님은 곤궁중에 있는 이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이며 최후심판의 잣대임을 분명히 합니다.
주님은 참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듯, 구체적으로 곤궁중에 있는,
“1.굶주린 이들,
2.목마른 이들,
3.나그네들,
4.헐벗은 이들,
5.병든 이들,
6.감옥에 갇힌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실천을 거론하시며
바로 이것이 최후심판의 잣대임을 분명히 못박습니다.
심판의 잣대는 결코 자폐적 자기만족의 전례생활도, 관상생활도 아닙니다.
이건 분명한 착각의 엉뚱한 짝사랑입니다.
구체적 이웃 사랑의 실천에서 오는 삶의 절실함이나 절박함이 증발된 전례나 관상은, 알맹이가 빠진 껍데기만의 참으로 부끄럽고 헛되고 공허한 위선적 신성모독 행위이겠습니다.
전례나 관상의 진위는 반드시 어떤 형태든 구체적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검증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이 참으로 역겨워하는 것은 이런 사랑의 결핍된 위선적 거짓 관상, 거짓 거룩함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의 최후심판 예화는 기존의 제반 종교를 심판하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
과연 나는 오른쪽의 구원받은 양들입니까? 혹은 버림 받은 왼쪽의 염소들입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모든 인류가 예수님의 한가족입니다.
인종, 종교, 문화, 언어, 국적, 남녀노소에 관계 없이 가장 작은 이들 모두를 내 형제들이라 하며 작은 이들 하나하나와 당신을 동일시 하는 주님이십니다.
참 놀랍고 충격적입니다.
이런 가난한 주님의 형제들인 주님을 무관심하게 지나쳐 버린 일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니 주변 모두가, 특히 가장 작은 이들 모두가 주님의 살아 있는 성체요, “주님의 얼굴”인 것입니다.
미사를 통해 만나는 주님뿐 아니라 가장 작은 이들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는 우리들입니다.
후자가 빠진 전자의 미사뿐이라면 반쪽의 미사뿐일 것입니다.
미사전례를 통해 그리고 가장 작은 이들에 대한 사랑 실천을 통해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미사의 완성이요 온전한 미사라 할 수 있습니다.
영
원한 벌이나 영원한 생명 역시 우리의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추호도 온 누리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을 탓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할 때 마다 이 진리와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마태 25,46)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고찰하게 해 줍니다.
전례력으로 올해의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임금이신 주님이 누구신지 고루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마태 25,32)
복음 말씀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하는 분이심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 아드님께 심판의 권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이 오면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 나아온 이들을 바라보시고 그들이 살아온 대로 그들의 자리를 정해 주실 것입니다.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 해 주지 않은 것"
(마태 25,40/45)
예수님은 가장 작은 이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시지요.
그들에게 연민과 자비로 베푼 것이 바로 당신께 해 준 것이고, 무관심과 멸시로 외면한 것은 바로 당신을 소외시킨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심판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지상에서 어느 처지의 삶을 살아가건,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해 준 것과 해 주지 않은 것이 기준이 됩니다.
과부의 헌금 일화에서 보았듯이 희사의 많고 적음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
(마태 25,37.44)
예수님의 심판 앞에서 우리는 이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그런데 두 부류의 질문 어조는 상이하겠지요.
아낌없이 내어주면서 준 것을 바로 잊어버리고 또다시 새로운 나눔의 기회를 찾는 이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칭찬과 축복이 어리둥절해서 이렇게 여쭐 것이고, 자신과 가족의 안위와 사치를 당연한듯 누리며 주변에 누가 힘든지 외면하고 산 이들은 항변하듯 따질 것입니다.
당신이 언제 내 눈앞에 나타나셨느냐고, 당신이라고 밝혔으면 내가 정말 잘해드렸을 거라고 말이지요.
진정한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으니, 주님께서 가난한 이들 안에 당신을 감추시는 것이야말로 신의 한수일 겁니다.
신앙과 사랑의 옥석은 여기서 갈리지요.
제1독서 대목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과 자애가 넘치는 착한 목자이심을 보여 줍니다.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에제 34,15)
당신께서 몸소, 친히 우리를 돌본다고 하십니다.
사실 주님은 우리 대신 살림을 살아주는 분이십니다.
먹이고 입히고 키우는 분, 생명을 더 풍요롭게 살리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런 주님의 사랑을 믿지 못해 의탁을 거두고, 아등바등 진을 다 빼가며 헛손질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화답송)
시편 저자는 착한 목자 품안에서 사랑받으며 살아가는 양의 마음을 노래합니다.
탐욕은 아쉬움밖에 모르고, 감사는 아쉬움을 모릅니다.
목자를 신뢰하고 온전히 의탁하는 양에게는 감사뿐이니 아쉬움이 없지요.
각자 느끼는 아쉬움의 정도는 영혼의 상태와 신앙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겁니다.
제2독서에서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대속자입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1코린 15,20)
예수님은 하느님이시지만,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 죽음을 받아 안으셨습니다.
그분의 속량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고 구원을 받았지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1코린 15,22)
주님을 믿는 우리는 육신의 죽음을 끝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겪는 고통과 슬픔 역시 동 트기 직전의 어둠으로 여겨 쉬이 절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공로로 우리 모두가 영원한 생명이 보장받았음을 믿고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은 이런 분이십니다.
사랑 빼고는 그분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걸 오늘의 말씀들이 보여주고 계시지요.
사랑의 임금이신 예수님 안에서 사랑이 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 사랑이 필요한 이들이 도처에서 우리의 눈길과 마음길과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구원을 위해 주님께서 펼쳐 주신 선물일 겁니다.
가난한 이들이 우리를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한다고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말씀하셨지요.
언젠가 사랑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사랑이신 분과 기쁘게 해후하고 하나 될 수 있도록, 우리, 사랑의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
주님을 닮아 사랑이 되어가시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교회의 전례는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연중 마지막 주일로 정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대림시기가 시작되며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2023년을 돌아보며 이런 질문을 해 보고 싶습니다.
“2023년 한 해가가 저물어갑니다.
여러분 살림살이는 좀 좋아지셨습니까?
원하는 일들은 잘 이루어지셨습니까?
신앙의 열매는 많이 맺었습니까?”
제게 2023년은 ‘성지순례’로 시작한 1년이었습니다.
1월에는 이스라엘과 과달루페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2월에는 LA 라파엘 성당 신문홍보를 다녀왔습니다.
3월에는 토론토 예수성심 성당 신문홍보를 다녀왔습니다.
4월에는 이스라엘 요르단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5월에는 그리스 터키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6월에는 이탈리아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7월에는 쿠르즈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8월에는 LA 아그네스 성당 신문홍보를 다녀왔습니다.
9월에는 뉴욕에 머물렀습니다.
10월에는 한국 성지순례와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11월에는 LA 프란치스코 성당 신문홍보를 다녀왔습니다.
시편 23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시편 23장에서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주님께서 저를 이끌어 주시어 먼 길 무탈하게 잘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감사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신학생 때입니다.
기숙사에서 공동생활하고, 함께 기도하고, 미사 봉헌하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한 학기에 두 번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것이 있습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입니다.
강론 없는 미사는 언제든지 좋아하는 것처럼 시험 없는 신학교생활은 천국과 같습니다.
하지만 강론 없는 미사는 없는 것처럼 시험 없는 신학교생활도 없습니다.
중간고사를 마치면 학사대표가 ‘노란봉투’를 나누어 주곤 합니다.
노란봉투는 월급봉투가 아니고, 성적이 70점 미만인 학생들에게 주는 ‘경고편지’입니다.
기말고사에서 성적을 올리지 못하면 과목낙제가 되고 2과목 이상이 되면 유급을 하게 됩니다.
감사하게도 노란봉투를 받아본 적은 없지만 늘 경계선상에 있었습니다.
신학생들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했던 신부님이 있습니다.
교회사를 가르치셨던 신부님입니다.
신부님께서는 함께 농구를 하셨고, 언제나 따뜻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신학생들이 신부님을 좋아했던 가장 큰 이유는 ‘시험문제’를 미리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신학생들이 꼭 알아야 할 문제를 5개 정도 알려 주셨습니다.
그 중에서 3개가 시험문제로 출제되었습니다.
복불복(福不福)으로 찍어서 공부만 하지 않으면 신부님께서는 좋은 점수를 주셨습니다.
저도 신부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본당에서 ‘대림, 사순’ 문제 풀이를 할 때면 미리 100문제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 25문제를 출제하였습니다.
교우들이 100문제를 열심히 풀면 모두가 100점을 맞을 수 있도록 답도 친절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시험의 목적이 성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험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교우들이 교리를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시험문제를 미리 알려 주십니다.
신학생들이 좋아하고 존경했던 신부님처럼 예수님께서도 친절하게 알려주십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만이 풀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금수저로 태어난 사람만이 풀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체력이 엄청 좋은 사람만이 풀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풀 수 있는 문제입니다.
빈부귀천 구별 없이 누구나 풀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런 걸 두고 ‘땅 짚고 헤엄치기, 식은 죽 먹기, 누워서 떡먹기’라고 합니다.
시험문제는 있는데 제한 시간도 없습니다.
몇 번해야 한다는 기준도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시험문제입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예수님께서는 친절하게도 문제의 답도 알려 주셨습니다.
이것이 문제의 답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우리가 어려운 이웃에게 손을 내밀 수만 있다면,
우리가 절망 중에 있는 이웃에게 따뜻한 위로를 줄 수만 있다면,
우리가 슬퍼하는 이웃의 슬픔을 함께 공감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잘못한 이웃을 용서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모두 예수님께 이런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느 아이가 심각한 병에 걸렸습니다.
글쎄 전신마비가 오는 병이었지요.
아이는 점점 화를 냈고, 자신의 힘듦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병원에서 치료했지만, 호전되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이도 또 그 부모도 지쳐만 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이가 말합니다.
친구가 병문안을 왔는데, 프랑스 루르드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해줬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 멀리 루르드까지 갔는데, 만약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아이가 더 크게 실망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얼마 뒤, 그래도 아이가 간절하게 원하니 루르드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아주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글쎄 아이가 엄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엄마, 저 대신 저쪽에 앉아 있는 저 아이를 낫게 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저보다 훨씬 더 많이 아프고 고통스럽게 보이잖아요.”
이제까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지 않았던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루르드에 와서 처음으로 남을 위해 기도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기심’이라는 병이 치유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이때부터 자신의 병을 받아들였습니다.
진짜 기적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인간적인 측면에서 자기를 아프게 하는 모든 병이 치유되어야 기적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아픔을 받아들이고 동시에 남의 아픔에 함께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야 말로 진짜 기적이었습니다.
이로써 주님의 뜻을 찾을 수 있었고,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인 오늘입니다.
전례력의 끝을 장식하는 오늘 복음 말씀은 주님께서 세상 마지막 날에 오시어 이루시게 될 최후의 심판에 관하여 선포합니다.
왕으로 오신 주님을 맞이하는 우리의 모습에 대해서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의인’인 양과 ‘저주받은 자’로 불리는 염소라는 두 부류로 나눠지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분류는 하느님께 직접 행한 우리의 모습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는 것이 바로 당신에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을까요?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드린다는 것은 불가능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고, 그래서 부족한 것이 전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잘 보여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드릴 것이 전혀 없으니 결국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이유가 하나도 없게 됩니다.
여기서 그분의 사랑이 이뤄집니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는 것을 당신에게 한 것으로 여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나만을 바라보고, 세속적인 기준만을 내세우면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 오히려 닫히고 맙니다.
이웃 하나에게도 소홀하지 않는 사랑의 마음만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게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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