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광주사태시 남파되었던 북한 대남연락소 요원 증언(요약)
5.18광주사태 당시 ‘복면부대’의 실체는 남파된 북한군특전사들이었다.
북한 대남연락소 임무를 받고 남파되었던 간첩 ‘손성모’
1980년대초 남파되어 잠복중이던 손성모(실명)는 5.18광주사태 당시 침투했던 북한군 특전사들의 길 안내자로 활약하였다.
손은 1981년 경상북도 문경시에서 체포되어 1999년까지 수감되어 있다가 김대중정부의 특사(☞ 간첩공모죄)로 석방되었고, 2000년 ‘6.15남북공동성명’ 이후 비전향장기수로 다른 장기수들과 함께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 1980.5월 광주사태 현장에 침투했던 전 북한 조선노동당 중앙당 연락소 전투원의 증언(요약)
* 5.18광주사태 참가자인 김명국(가명)이 증언하는 북한조선인민군 부대의 명칭과 사건 연월일, 참가자 이름 등은 모두 사실임. 다만 본인의 요구에 따라 당사자의 이름은 가명으로 밝힘.
o 증언자 약력
- 김명국/1961년생/함경북도 회령시 ㅇㅇㅇ리
- 1977.8.26일 평양시 순안구역 대서리 북한대남연락소(112 훈련소) 아동훈련소에 입대
- 1년후인 1978.10월경 평양시 서포구역 대양리에 있는 중앙당 연락소(1010군부대)
2처 전투정찰 부대에 입대
- 1980.5.19일 전라남도 광주시로 남파
- 1980.5.27일 북한으로 철수
- 1980.10.30일 북한 태천교도지도국(특전사)군관학교 입대후 2003년까지 북한군
특전사 교관(중좌)으로 복무. 훈련중 심한 부상으로 제대 후 2006년 중국 밀무역사건
으로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에 체포 직전 가족과 함께 탈북
o 5.18광주사태 당시 남파 김명국(가명. 북한군 특전사) 증언 내용
- 1977.8.26일 고등중학교(16) 때 평양시 순안구역 구서리 중앙당 대남 연락소에 입대. 명칭은 112훈련소(아동훈련소). 1년 넘게 훈련을 받다가 평양시 서포구역 대양리에 있는 조선 노동당 중앙당 연락소(일명 대남 연락소) 2처 전투정찰에 배치
- 1980.5.19일 야외 훈련중 상급 명령으로 철수. 그날 오후 4시 경대양리에서 50명의 전투인원이 북한에서 만든 갱생지프차로 출발. 저녁 9시 황해남도 장연군 장산곶 북한대남연락소 기지에서 경에 배를 타고 출발
* 증언자가 속한 조성원 명단
. 조장: 리상국(23)/군사칭호: 중위/고향: 함경남도 함주군
. 부조장: 한광호(22)/군사칭호: 소위/고향: 모름
. 기타 조원들 이름: 김일룡(21), 최길산(20), 황보석(21), 한철수(21)
- “270명이 남파되었다가 거의 다 죽고 살아 돌아온 사람이 70명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파견대장 문제심(북한 중앙당 대남 연락소 소장)이 발언하였다.”, “남파될 때 배 한 척에 50여명씩 타고 남한에 내려왔다.”, “아니야, 우리 떠날 때는 대장이랑 함께 50명이 떠나고 나머지 사람들은 우리 보다 먼저 떠난 것 같아.”(?)
- 증언자의 조는 12명(☞ 상기 ‘조성원 명단’하고 어떤 차이인지 불명)
- “직속부대에는 3개조가 있었는데 증언자조가 12명이고, 3조는 15명, 나머지 사람들은 16정찰에서 배속된 남한 전문가 들이었다.”
- 남파침투선 제원
“선장: 20m/외형: 일반 고기잡이 배/엔진: 추진기가 4개 달린 배/최고 속도: 시속70km 이상이다.”
- “우리가 탓 던 배는 일반 남한의 고기 배와 꼭 같아. 길이가 20m쯤 되었을 거야. 여느 때는 일반 배처럼 고기잡이를 하는데 추진기가 4개 달린 배야. 상황이 발생하면 추진기 4개가 다 가동하는데 비행기처럼 속도가 빠르고 자체 폭파하게 되여 있어.”, “21일 밤 2시경 전라남도 광주시 앞바다로 잠입하였다. 남쪽의 길 안내자 사람 몇 명이 대장한테 와서 자기들이 남한에서 이룩한 성과 부분을 보고하였다. 내용은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였다는 것과 함께 트럭, 장갑차들을 노획하였다.”는 내용이었다.
- “2일간 광주 근처 야산에서 잠복해 있으면서 북한과 무선연락으로 교신하였고 광주봉기의 추이사태를 살피며 차후 행동방향등 작전계획 수립. 23일부터 파견대장 문제심은 3일 동안 광주시 도심에 있는 봉기군 지휘부에서 남파된 북한군 특전사부대 지휘하였다.” 증언자는 파견대장의 신변호위 임무를 수행하였음.
* 1980.5.27일 새벽 북한으로 철수 시작
- “아침 6시경 철수 중 산 중턱에서 국군 특전사들과 전투중 3명 사살. 5.30일 날 새벽에 증언자의 일행이 문경고개 근처에서 행군 할 때 부조장이 여자애에게 발각되자 죽여 땅에 묻어 버렸다.”
- “6.4일 휴전선에 도착한 때가 저녁11시경. 휴전선 지뢰밭과 철조망은 정찰국 성원들이 앞서나가면서 해제. 휴전선을 넘어서 보니 6.5일 아침9시경이었는데 지역을 알아보니 북한 강원도 판교군 지하리 북한군 포사격장에 들어갔다 포탄에 맞아 2명 즉사 본인은 다리에 부상당함.”
- “광주봉기의 북한군 침투 총화는 6.15일 김일성과 김정일의 직접적인 참석하에 평양에서 하였음. 남한에 침투되었다 귀환한 군인과 전사한 군인 모두에게는 ‘공화국영웅’ 칭호 수여. 분견대장 2명은 조선인민군 교도지도국(특수전 사령부)작전부에 승급 배치. 김일성은 소좌급인 분견대장들에게는 대좌(☞ 중좌, 상좌 두 계급을 뛰어넘었다는 얘기 ?)의 군사칭호를 수여하였음. 조장들은 7명이 살아 돌아왔는데 각 군단부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상위(☞ 우리 중위와 대위 중간)급 군사칭호를 상좌(☞ 우리 중령과 대령 사이)로 승격시켜 배속하였음.”(☞ 이해 불가)
- “조선인민군 1010군부대 전투원 김명국은 1980.5월 전투공로로 하여 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음. 같은 전투공로로 하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기훈장1급, 자기 목숨을 바쳐 지휘관을 보위한 공로로 국기훈장1급 수여받았음.(국기훈장 2개면 공화국영웅칭호와 맞먹는 대우) 태천군관학교(북한군 특수전 사령부 군관학교)에 입학. 2003년까지 북한군 특수전 부대에서 지휘관으로 복무했음.”
- “대남연락소 내부 규정에는 전우가 죽으면 흔적을 없애려고 땅에다 묻어 버림. 마지막 남는 사람은 붙잡히게 되면 자폭하게 되여 있어.
만약 전우가 부상당해 대오의 행군에 지장을 준다고 생각되면 죽여서 땅에 묻어 묻어버림. 옷 속에 여러가지 유형의 작은 물체를 항상 가지고 다니는데 고성능 폭약 3kg이 터지는 위력과 맞먹는다.”
- “광주 사태가 진압되면서 우리 부대는 모두 갈라졌는데 혹시 남한의 산속이나 도시속에 숨어 있다가 훗날 북으로 들어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남한에 이미 알고 있던 조직선과 연계하여 해외로 탈출했을 수 있고 현재 신분을 세탁하여 남한에 잠복하여 간첩임무를 수행하며 살고 있을 수도 있다.”
- “2006.7월 남한에 입국(가족과 함께 북한 탈출)하여 북한 ‘대성공사’(☞ 특수부대 위장명칭)에서 5. 18당시 남파되었던 사실을 증언하였다. 대성공사 담당자는 김명국에게 남한사회에 나가 5.18광주사태에 북한군으로 남파되었던 사실을 절대 공개하지 말 것을 강요하였다. (2006년 탈북. 2006년 대한민국에 입국. 현재 서울 수도권 일대에서 살고 있음.)
- 1980.5월에 남파되었던 북한군특전사의 임무
첫째, “5.18광주봉기를 주동적으로 끌고 나가며 봉기자들인 남한 민주세력과 진압세력인 국군사이에 쐐기를 박고 불신을 조장하여 서로 분열시키고 이간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증언
둘째, “광주봉기를 폭동으로 발전시켜 남한전역에 확대시킴으로써 전국적인 폭동이 일어날 경우 북한군의 남침계획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증언
“북한군 남파 특전사는 시민봉기군과 국군으로 가장하였다. 시민군으로 가장한 북한특전사는 국군에게 총질을 하였고 국군으로 가장한 북한특전사는 시민군에게 총격을 가하여 서로가 사상자를 발생시켜 서로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이간책동을 하였다.
특히 국군으로 가장한 북한특전사는 광주봉기군의 심경과 감정을 폭발시킬 목적으로 시민군과 부녀자들을 비롯한 일반시민들을 무참히 살해하여 광주폭동을 이끌어 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교도소 습격, 무기고 탈취, 경찰서 습격, 장갑차 로획 등 일반인들은 상상도 못하는 특수 훈련을 받은 정규군만이 할 수 있는 군사행동을 함으로서 무장폭동을 유발시키는 군사작전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다.“
▲ 비전향 장기수 손성모(실명實名) 자료
o 김대중 정부시절 비전향장기수 북송. 거의 모두가 30년~40년의 옥고를 치룬 사람들 가운데 유독 단 한사람만은 17년이라는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손성모. 남자 당시 나이 67세. 학력관계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 거의 대부분의 비전향장기수들은 한국전쟁시기 남한에서 전투하다가 체포된 사람들인데 손성모는 달랐다.
나이로 보나 학력으로 보나 도무지 한국전쟁참가자가 될 수 없었다.
전국적으로 간부학습반에서 손성모의 투쟁업적에 대해 2003년 북한 당 기관지 ‘노동신문’ 2면에 ‘나는 김일성 종합대학 졸업생이다.’라는 제목을 달고 글이 실린 적이 있다.
o 내용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해 1980년 광주봉기 때 북에서 파견되어 적국에서 싸우던 중 변절자의 밀고로 여기 저기 피해 지내거나 산속에서 몇 달 동안 숨어서 활동하다 놈들에게 체포되게 되자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해 목숨 바칠 비장한 결심을 하고 칼로 목의 대동맥을 끊어 자살을 시도했으나 공교롭게도 죽음이 쉽게 이루어 지지 않자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고 ‘비 전향 장기수’로 17년간을 감옥에서 투쟁했다고 씌어 있다. 당, 법 간부학습반에서 “손성모동지의 투쟁업적을 따라 배우자!”라는 주제의 내용으로 문답식 학습경연과 궐기모임까지 진행되었다.
o 남한정부의 손성모에 대해 소개한 자료
손성모(孫聖模, 1929년 ~ )는 대한민국의 비전향 장기수이다. 전라북도 부안군 출생으로 가난한 가정의 막내로 태어난데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면서 교육 기회를 제대로 제공받지 못했다. 일찍부터 머슴살이를 하는 등 노동자로 일하면서 고학을 하여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서울대학교 학생으로 재학 중이었다. 개전 사흘만인 6월 28일에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며칠 후 인민의용군으로 지원하여 참전하였다. 이를 계기로 월북한 뒤, 1957년에 제대. 제대 후에는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를 졸업하고 함흥시에서 대학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1980년대 초반에 전라남도 해안을 통해 공작원으로 남파된 뒤 승려로 위장하여 활동하다가, 1981.2월에 경상북도 문경시에서 체포되었다. 간첩 수사 기관에서 장기간 조사를 받았으며, 1987.6월 항쟁 성공 후에야 정식으로 구속 수감했는 바, 손성모는 법정에서 간첩 혐의를 부인하고 통일사업을 위해 내려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전향을 거부함으로써 비전향 장기수가 되었다. 총 수감 기간은 만 19년이 조금 못 되어, 비전향 장기수 가운데서는 비교적 짧은 편이다. 수감 생활 후반기에는 신광수와 함께 최후의 비전향 장기수 2인으로 알려져 인권단체가 석방 운동을 벌였고
1999년 연말에 김대중 정부의 특사로 광주교도소에서 가석방되었다.
출옥 후에는 서울 관악구에서 다른 출소 장기수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였다.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에 의해 북으로 송환되고 ‘조국통일상’을 수여받았다. 송환 후 북에 정착하여 2004년 ‘화선 당세포’라는 시를 발표하는 등 조선작가동맹 소속 시인으로 활동하였다.
첫댓글 그렇군....
맞어 난 이럴줄알았어 전두환욕할것도아니네 내가고등학교졸업하고였는데 도저히 일반시만들이 할수있는일을 저지러는모습이. 이제진실이밝혀져야됩니다
광주사람들은 이런것을 알고나 있는지....
전두환 각하는 남자중의 남자입니다.
http://blog.daum.net/sionvoice/137348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