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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어린시절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추억을 함께 했던 애증의 두 레전드 축구선수 호마리우와 호나우두를 소개하려고 글을 적습니다. 적다보니 생각보다 길게 되었네요. 국가대표시절 위주로 적었습니다.
호마리우와 호나우두의 추억
먼저, 두 선수의 콤비 시절 영상입니다. (득점, 어시스트가 오직 두 선수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❶ ‘악마의 재능’ 호마리우, 그 첫 번째 간택 (1993 ~ 1994)
93년 브라질은 월드컵을 앞두고 남미예선에서 탈락 위기에 처하자 기이한 행동들과 제 멋대로인 성격으로 그동안 외면했었던 호마리우를 대표팀으로 불러 들입니다. 이미 PSV에서 수차례 리그 우승과 리그 득점왕, 챔스 득점왕을 차지하며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위상을 떨치던 호마리우를 다시 불러 들인 것입니다. 이 단신 공격수는 월드컵 출전 유무의 기로에 놓인 경기인 남미예선 우루과이전을 앞두고 자신이 두골을 넣고 2-0으로 승리를 거두겠다고 호언장담을 합니다. 결과는 그의 말대로 두골을 넣어 2-0 으로 승리하였고 94월드컵 본선에 진출하게 됩니다.
94월드컵에서 호마리우(94월드컵 5골)는 당시 영혼의 투톱이라 불렸지만 그라운드 밖에선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던 베베토(94월드컵 3골)와 함께 최고의 공격력을 선보이며 결승에 올라 또 다른 스타 플레이어 로베르토 바지오가 이끄는 이탈리아와 만나게 됩니다.
이 직전 경기까지 수비수들을 농락하던 호마리우였지만 결승전에선 노장임에도 여전히 당대 최고의 수비수로 평가받던 이탈리아의 프랑코 바레시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골을 넣지 못한 두 나라는 승부차기에 들어갑니다. 그래도 하늘은 호마리우를 선택했던 것일까요? 두 번째 키커로 나선 호마리우는 침착하게 골을 성공시켰고, 당시 라이벌이었던 로베르토 바지오는 공을 골대 밖 하늘로 차버렸습니다.
호마리우의 월드컵 대활약으로 그는 24년만에 브라질을 정상에 올려놓은 주역으로 추앙받았고, 대회 MVP와 함께 소속팀 FC바르셀로나에서의 리그 우승, 득점왕 등 클럽활약을 포함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주인공 호마리우와 조연 베베토에 가려졌지만 3년뒤에 이루어질 호마리우와 함께 세계 최강의 황금 투톱이라 칭하여졌던 또 다른 멤버 18세의 호나우두 역시 94월드컵 우승 멤버로 기쁨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단, 호마리우, 베베토의 존재로 본선에서 한경기도 출전하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❷ 호나우두, 새로운 ‘축구 황제’로 (1995 ~ 1997)
94년 호마리우의 업적으로 축구계가 시끌시끌할 때 정작 본인은 돌연 유럽 커리어를 마감할 것이라고 선언을 하게 됩니다.(97년 잠깐 프리메라리그 발렌시아로 복귀하긴 했습니다.) 유럽에서 더 이상 이룰 것이 없고, 특히 향수병에 걸려있던 그는 플라멩고와 거대계약을 맺고 고국 브라질로 돌아와 버립니다. 그의 나이 고작 28세로 완전한 전성기였죠. 하지만 비록 유럽은 아니었지만 브라질 리그를 초토화시키며 매해 득점왕 행진을 이어 갑니다. 브라질에서만 활약했음에도 95년에는 올해의 선수 4위를 기록하기도 했죠.
이렇게 호마리우가 브라질로 돌아와 활약하는 동안 유럽은 또 다른 위대한 브라질리언 축구선수에 열광하게 되는데요. 그가 바로 94월드컵 우승멤버 중 18세 풋내기였던 호나우두였습니다. 공교롭게도 펠레의 은퇴일과 생일이 같았던 호나우두는 매우 뛰어난 운동능력과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테크닉을 지녔고 화려한 플레이를 연일 보여주며 새로운 ‘축구황제’라 불리우게 됩니다. 이미 호마리우의 조언으로 PSV에서 수차례 득점왕을 차지하며 그 가치를 증명한 그는 파죽지세로 96년 바르셀로나에서 34골으로 역대 프리메라리그 최고 득점을 갈아치우며 득점왕을 차지, 세계를 뜨겁게 열광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아쉬운 것은 그의 커리어에 있어 리그 우승하고는 참 인연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 인터밀란으로 이적하면서도 그 특유의 화려한 플레이와 득점력은 줄지 않았고, 그 결과 96년에 이어 97년 2년 연속으로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2년 연속 수상은 올해의 선수상 역사가 그리 오래 되진 않았지만 최초로 있었던 일이지요. 하지만 이 인터밀란으로의 이적이 결과론적으로는 그의 최악의 선택이 되어 버립니다.
❸ 드디어 만난 ‘천재’와 ‘황제’ (1997 ~ 1998)
94미국 월드컵 이후 95년에서 97년 사이 브라질에서 그리고 유럽에서 각각 대활약을 한 두 선수는 97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동시에 그라운드를 밟게 됩니다.
탁월한 위치선정, 타이밍을 뺏는 자유자재의 슛 테크닉, 옵 사이드 트랩을 쉽게 파괴시키는 특출난 능력, 게다가 훌륭한 패싱능력과 플레이 메이킹 능력까지 겸비한 좁은 공간의 ‘킬러’ 호마리우와 100m를 10초대에 주파하는 스피드, 폭발적인 가속도에 더한 왕성한 활동력, 현란한 풋워크, 그리고 완벽한 바디 밸런스를 통해 파생되는 힘까지 겸비했던 넓은 공간의 ‘괴물’ 호나우두는 서로 경쟁을 하듯이 많은 골들과 어시스트를 양산해 냅니다.
두 선수의 호흡은 금상첨화였고 97년에 있었던 국가 대항전인 97 FIFA 컨페더레이션 컵과 97Copa 아메리카에서 우승, 나란히 대회 득점왕을 한번씩 기록하며 상대팀들을 공포에 떨게 하기 충분했죠. 둘은 '세계 최고의 투톱', ‘황금 투톱’, ‘영혼의 투톱’이라 불렸습니다.
18경기 14승 2무 2패, 54득점, 호나우두 15득점, 호마리우 17득점
1997년 2월 폴란드와의 친선 경기에서 처음으로 발을 맞춰 투톱으로 출장한 이래 1998년 4월 아르헨티나와의 경기까지 두 선수가 함께 출장해서 거둔 기록입니다. 브라질 대표팀은 정확하게 경기당 3득점, R(Romario)-R(Ronaldo) 투톱은 경기당 1.7 의 높은 득점률을 보이며 브라질 대표팀의 연승행진을 이끌었습니다.
당시 브라질 대표팀은 전형적인 4-2-2-2 를 무기로 굉장한 공격 축구를 구사했습니다. PK 선방의 1인자, 90년대 브라질 대표 최고의 골키퍼였던 타파렐이 골문을 든든히 지키고 호베르투 카를로스-아우다이르-곤살베스-카푸의 포백에 전설같은 캡틴 둥가와 마우루 시우바가 지킨 중원, 좌측에 데니우손, 자우밍야, 우측에 레오나르두, 주닝유 파울리스타가 포진해 든든한 미드필드진에 이어 최전선에 호나우두와 호마리우의 투톱이라는 꽉찬 포진은 상대팀들을 주눅들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R-R 투톱이 가동된 기간 무득점 경기는 겨우 단 한번 (아르헨티나 0-1 패) 뿐이었으며 1득점 밖에 하지 못한 경기도 겨우 두 차례에 지나지 않았고 (프랑스 1-1, 잉글랜드 1-0) 서로 두 골 씩 합작 한경기 (칠레 4-0), 서로 해트트릭을 기록한 경기 (호주 6-0) 등 쉽게 볼 수 없는 진기한 기록들을 양산해냈습니다.
❹ 98프랑스 월드컵의 악재. 호마리우의 부상, 호나우두의 시련 (1998)
98월드컵을 앞두고 매체들은 연일 누가 이 대회의 주인일까에 초점을 맞추곤 했는데요. MVP, 득점왕 예상순위 1, 2위에 호나우두, 호마리우가 나란히 거론되며, 당시 날아다니던 다른 우승 후보 나라의 특급 공격수들 바티스투타, 시어러, 베르캄프 같은 선수들에게 굴욕아닌 굴욕을 주었습니다.
98년 월드컵을 앞두고 호마리우는 “98월드컵은 나와 호나우두의 대회가 될 것이다.” 라고 다시 호언장담을 했는데요. 아마 호마리우의 장담이 처음으로 빗겨간 사건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98년 월드컵 최종 엔트리를 앞두고 호마리우가 불의의 장딴지 부상을 당해 엔트리에서 제외된 것입니다. 당시 호마리우는 간절히 98월드컵 참가를 희망했고, 8강전 부터는 경기에 뛸 수도 있다고 예측되었으나 평소 불화가 있었던 당시 브라질 대표팀 감독 자갈로가 외면한 것이라는 추측이 많았습니다.
어쨋든 그의 부재속에 호나우두(98월드컵 4골)의 투톱 파트너로 노익장을 과시하며 투혼을 보여준 베베토(98월드컵 3골)가 버티고 있었지만 호마리우의 존재까지 대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온갖 견제를 당하던 호나우두의 입에서 아래 기사내용과 같은 말까지 나왔다고 하니 그에게 있어 호마리우의 부상이 얼마나 힘든 싸움을 홀로 부담하게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결국 결승전 스타팅 멤버 리스트에 오르락 내리락할 정도의 컨디션 난조를 낳았고 브라질 팀과 더불어 본인도 무기력한 경기력을 보여주며 개최국 프랑스에게 3-0이라는 큰 스코어 차로 패배하게 됩니다. 호나우두 개인은 대회 MVP를 수상했지만 이와 같은 패배의 결과에 대한 비난의 화살은 당시 대표팀 최고 선수였던 자신에게 향했고, 특히 브라질 언론은 94년에 월드컵을 들어 올린 호마리우를 언급하며 “호마리우가 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라는 내용으로 감독과 호나우두를 혹평하였습니다. 또한 무기력한 브라질의 결승전 해설을 맡고 있던 호마리우는 억울함에 TV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❺ 호나우두에게 찾아온 연이은 악재 (1999 ~ 2000)
98년에 닥친 두 선수의 시련은 지나갔지만, 99년 세대교체라는 명목으로 이미 33세의 노장이던 호마리우는 대표팀 엔트리에서 볼 수 없게 됩니다. 새로 부임된 룩셈부르고 감독은 호나우두를 필두로 아모로조와 히바우두 등을 중용하며 99Copa 아메리카 대회를 우승시켰고 호나우두는 대회 MVP와 득점왕 모두를 차지합니다. 이렇게 다시 맑은 하늘만 볼 것 같은 호나우두였지만 곧 먹구름이 다가오니... 그토록 괴롭혔던 인터밀란에서의 발목 부상입니다. 개인적으로 위험한 테클이 난무하고, 수비가 유독 거칠었던 그 당시의 세리아-A에 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고 아쉬운 마음을 가져봅니다.
99년에 찾아온 이 큰 부상으로 호나우두는 재활에 전념했고, 다음해인 2000년 오랜 공백 끝에 복귀했지만 그라운드 위에 오른지 3분 만에 다시 같은 부위에 부상을 당하며 쓰러짐으로써 매체의 온갖 혹평을 받아야 했고 악몽과 같은 기약없는 재활의 나날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반면, 호마리우는 그와 ‘영혼의 앙숙’이라 불릴만한 에드문드가 이끄는 바스코 다 가마에 합류하여 리그 MVP 및 득점왕을 차지함은 물론 세계 클럽 선수권 대회마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등을 격파하며 대회 득점왕을 차지, 여전히 건재함을 세계에 각인시켰습니다. 이시기 호마리우는 34세의 노장이었지만 운동능력만 줄어들었을 뿐 골에 대한 감각과 축구실력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❻ 호마리우, 그 두 번째 간택 (2000 ~ 2001)
호나우두의 부상으로 대표팀의 얼굴을 잃어버린 브라질은 둥가 이후 계속해서 훌륭히 주장을 맡아왔던 카푸의 리더쉽을 신뢰하며, 새로운 에이스로 대두된 히바우두와 떠오르는 신성이었던 호나우지뉴를 공격의 주축으로 내세워 팀을 새롭게 개편합니다. 하지만 당시 2002년 월드컵 남미예선을 초토화하던 아르헨티나와는 달리 브라질은 약팀에게 여러차례 잡히는 등 쉽게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4, 5위를 오락가락하며 예선 탈락의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요. 계속된 위기 속에 당시 대표팀 에이스였던 히바우두는 감독에게 이 난관을 극복할 해결자로 노장 호마리우를 추천하였고, 화장실 그림 사건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룩셈부르고 감독이었지만 긴급한 위기의 상황을 인지하고 결국 그를 다시 불러들이게 됩니다.
호마리우는 93년에 이어 월드컵을 앞두고 처한 위기의 상황에서 다시 한번 해결사로 간택된 것입니다. 호마리우는 기대에 부응하며 복귀 첫경기인 볼리비아와의 경기에서 헤트트릭을 기록했고 다음 경기인 베네주엘라 전에서는 무려 4골을 기록했으며, 3번째 경기인 페루전에도 골을 기록하여 3경기만에 8골을 넣어, 단숨에 남미예선 득점 1위에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브라질이 2002년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게 되는 주역이 된 것입니다. 특히 2000년은 호마리우의 제 2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해로 올해의 남미선수에 선정되기도 하였고, 이 노장 선수의 활약은 당시 패닉상태였던 FC 바르셀로나와 인터 밀란이 그의 영입을 심각하게 고려할 정도의 이슈였습니다. (호마리우란 이름이 우리 나라 스포츠 뉴스에도 자주 등장했었죠.) 그리고 재활 중인 호나우두는 선배 호마리우의 활약을 해설자의 입장으로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❼ 환영받은 호나우두, 외면받은 호마리우 (2002)
새로운 감독인 뚝심있고, 견고한 스콜라리 감독은 호마리우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카푸가 지녔던 주장완장을 호마리우에게 넘겨 주었으며, 공식석상에서 호마리우를 두둔하는 등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를 중심으로 하는 기존 팀 체제를 이어갈 것을 밝힙니다. 하지만 이러한 스콜라리의 신뢰를 져버린 것은 오히려 호마리우였고 이는 2002년 월드컵 엔트리 제외로까지 이어집니다.
호마리우가 스콜라리의 신뢰를 잃은 일화는 대표팀 소집을 눈수술을 이유로 거절하게 되었는데 알고보니 자신이 원하는 축제 참여를 위한 거짓말(다른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임이 밝혀졌던 것입니다. 크게 분노한 스콜라리는 "위대한 선수라고 하더라도 팀 분위기를 해치는 선수는 필요없다."라며 호마리우를 향해 직접적으로 앞으로 대표팀 차출은 두번다시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브라질 대통령 그리고 수많은 브라질 국민들이 호마리우의 대표팀 복귀를 부탁했고, 호마리우 본인 역시 눈물로 호소하며 기자회견을 열었지만 결국 재고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부상에서 복귀한 호나우두가 좋은 활약을 보여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호마리우는 대표팀 복귀실패를 두고 그의 복귀에 대해 별 언급을 하지 않았던 호나우두에게 섭섭한 마음을 보이기도 했는데요. 어찌되었건 스콜라리는 호마리우 없이 호나우두, 히바우두를 주축으로 브라질에게 5번째 월드컵을 선물합니다. 부상에서 회복한 호나우두는 예전의 왕성한 활동량을 줄이고 타겟형 스트라이커로의 성공적인 변신을 이뤄냈는데요. 대회 MVP는 차지하지 못했지만 8골(독일과의 결승전 2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오르고, 이와 같은 활약으로 2002년 개인 세 번째 올해의 선수에 선정이 됩니다. 이 위대한 업적을 이룬 그의 나이는 겨우 26세였습니다.
❽ 2006독일 월드컵을 앞둔 두 레전드. 그리고 그 이후 (2003 ~ 2011)
호나우두는 2002년의 최고의 활약을 이어가며 2003년 레알 마드리드에서 지네딘 지단등의 또 다른 전설들과 함께 염원하던 리그 우승을 이뤄냅니다. 그 이듬해인 2004년엔 어린시절의 FC바르셀로나가 아닌 다른팀에서 다시한번 프리메라리그 득점왕을 차지하는 업적을 달성하지요.
반면, 2001년 이후 조용했던 호마리우가 다시 기사 일면에 실리는 사건이 발생하는데요. 바스코 다 가마에서 뛰던 그가 2005년 39세의 나이로 리그 득점왕(23골)에 오른 것입니다. 이는 전 세계 리그에서 역사상 한번도 없었던 역대 최고령 리그 득점왕으로 당시 득점 2위인 카를로스 테베즈와는 2골차의 박빙의 승부였죠. 이 업적으로 2006년 월드컵에 호마리우의 대표팀 복귀 붐이 잠시 불기도 했지만 이는 이미 축구선수로서는 할아버지가 된 이 노장 선수에겐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2006월드컵에서 여전히 주전 스트라이커였던 호나우두는 갑상선 문제로 몸이 비대해지며 활동량이 급격히 줄은 상태였지만 여전한 골감각과 테크닉으로 자신의 월드컵 커리어에 3골을 보태었고 총 15골이라는 역대 월드컵 최다 골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호나우두와 당시 초호화멤버로 평가받던 브라질은 98월드컵의 재탕처럼 프랑스에게 8강에서 잡히며 암흑기에 들어갑니다.
2006년 이후, 호나우두는 이적팀 AC 밀란에서 부진했다는 평가를 들었지만 선수생활 말년에 고국 코린티안스로 복귀해 2011년 은퇴할때까지 마지막 불꽃을 태웠으며, 당시 커리어 1000골을 눈앞에 뒀던 호마리우는 이후 미국리그에 진출해 득점왕을 차지하는 등 여러 리그를 전전했고 마지막 1000골은 자신의 데뷔 팀 바스코 다 가마에서 이루고 2009년 은퇴하였습니다.
현재 네이마르와 같은 좋은 선수들이 활약하고 있지만 펠레-호마리우-호나우두를 잇는 대형스트라이커의 명맥은 사실상 끊어진 상황이라고 봅니다.
호마리우, 호나우두라는 세계 축구사에 큰 족적을 남긴 두 별은 각 각 월드컵과 클럽 경력에 축구 선수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렸지만, 서로가 엇갈려간 98, 2002 두 번의 월드컵에 둘이 함께 하길 바란 팬들과 매우 친한 서로간의 꿈은 끝내 이뤄지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이 나이키 광고 기억하시는 분 많이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국버젼으로도 광고되었고
한 성우분이 저음으로
"호나우두의 ?은 그라운드에 있다. 그들이 함께 뛸때면 말조차 필요없다. 심지어 골키퍼까지."
라고 나레이션한 광고인데 한국어 버젼은 찾기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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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우 좋은글이네요 ㅎㅎ
호마리우의 득점력은 정말 ㅎㄷㄷ이군요
저 땐 너무 어려서...........저 둘의 콤비를 못 본게 한이군요 ㅜㅜ
갠적으로 저 투톱이 가동됐다면 브라질이 결승에서 그렇게 헤매지 않았을텐데...그리고 호돈신이 없었어도 호마리우가 있었다면 그렇게 공격이 빌빌대진 않았을거라 보고요 저도 맨 밑의 광고 기억납니다 갠적으로 저 광고 녹화한적이 있고요^^ 호마리우가 바르샤에서 뛸때 요한 크루이프 감독에게 휴가 보내달라고 떙깡 부린적이 있었는데 요한 크루이프가 레알전에서 해트트릭 하면 보내주겠다고 하자 바로 해트트릭 하면서 기분좋게 고향에 휴가를 간 일화가 있죠
아버지의 어린시절 우상. 호마리우-베베투 콤비는 개인적으로 직접 플레이를 보고싶은 레전드 중 하나에요.
정말. 2002 3R 가동했듯이. 호마리우 베베토 호나우도 같이 가동하는걸 볼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호나우도는 영광스럽게도 호마리우 베베토 둘다와 콤비를 맞춰 봤는데.. 그래도 전 갠적으로 호마리우 베베토 콤비가 황금콤비 같아요..
2002년에 호마리우의 괘씸죄가 없었다면 꿈의 4R을 볼 수도 있었죠. 호나우두 호마리우 히바우두 호나우지뉴 라인
94 월드컵때는 베르캄프를 좋아해서 열심히 응원했었는데 브라질에 막혀서 ㅠㅠ
94년엔 호마리우, 베베토에게 당하고 98년엔 호나우두, 베베토에게 당했네요ㅠ
글고보면 잘나가는 호나우두를 번번히 막은게 지단과 프랑스네요.. 그런데 호두와 지단은 베프..;; 저도 지주 싫어했는데, 좋아질수 밖에 없음. 축구 넘 잘함.
98프랑스 월드컵당시에는 로날도가 무릅에 심각한 부상을 안고 출전을 합니다. 브라질축협 나이키 피파측에서 그라운드에서 죽는한이 있어도 로날도는 꼭 나오게 한다는 미친짓을 하고 말죠(당시 로날도의 위상을 보여주는 단편입니다.) 결국 무릅에 진통제를투여하고 뛰기는하나 기존의 로날도가 아닌 비몽사몽의 로날도가 결승에서 경기를하고 우승은 프랑스가 차지하고 경기후 로날도는 바로 병원으로 이송을 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죠. 하늘이 내린 재능을 쓰레기 같은 놈들 때문에 점점 갉아먹고 있었다는게요.
정말 프랑스가 예전부터 브라질 천적이죠....
바죠님/ 대충 짐작은 하고있었는데 이정도일줄은 몰랐네요. 브라질 축협도 축협이지만 나이키도 점점 싫어지는데요. (피파야 원래 그런 놈들이고.)
호마리우라도 있었다면 94년만큼은 아니어도 베베투-호마리우 콤비가 그렇게 프랑스에게 빌빌대진 않았을텐데... 그리고 브라질 축협, 프로연맹도 막장단체로 유명합니다 선수들과의 보너스 분배 문제로 항상 트러블을 일으켜왔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