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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기행 9 운하의 정치학
우리의 가이드는 중국의 문자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국민들을 바보로 만든다는 것이죠. 최치원 기념관으로 가면서 길가 집들 대문이나 벽에 붙어있는 복(福)자를 가리키며 福은 옆에 입을 옷(衣)이 있고 하나(一)의 입(口)/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밭(田)이 있으면 행복하다는 의미라면서 표의문자인 한자의 장점을 강조하군요. 획을 줄인 간자(簡字)로 쓰니 글자는 의미를 알 수 없고 식자층도 옛 글을 읽지 못한다고 열을 올립니다. 연변의 조선족 출신으로 의과대학을 나온 의사인 가이드는 사람 몸의 각 기관을 정체로 쓰면 이해하기 쉽다고 합니다.
한자는 중국이란 큰 땅덩어리가 통일국가를 이루는데 큰 기여를 했지요.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각국이 쓰던 문자들을 진(秦)의 문자로 통일하니 말로는 서로 통하지 않은 중국을 하나로 엮을 수 있었습니다. TV와 라디오가 완전히 보급된 오늘날에도 북경어와 광동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서로 이해하기 어렵지요. 옛날에는 관리가 지방으로 내려가면 말이 통하지 않아 지방관원의 도움을 받아야했습니다.
그러나 한자는 점점 새로운 글자나 획이 추가되면서 괴물로 변하지요. 중국의 지식인들은 1910년대 5.4 신문화 운동 시기부터 한자 개혁을 외쳤습니다. 소설가 노신(魯迅)은 ‘한자가 없어지지 않으면 중국이 반드시 망한다(漢字不滅, 中國必亡)’라고까지 했지요. 놀라운 것은 모택동이 정강산 투쟁기(1920년대 말) 혹은 강서 소비에트 시절(1931-34) 정부군의 공산당 소탕작전을 당하면서도 한자개혁을 구상했습니다. 그의 <선집>에 나옵니다. 한자를 아예 폐기하고 로마자로 쓰는 방안까지 검토했다는 것 같은 데 오래 전에 읽은 것이라 확인이 필요합니다! 지금같이 간자로 쓴 결과 표의문자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면 알파벳으로 완전히 바꾸는 것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을 겁니다. 베트남 문자 같이 말입니다. 모택동과 주원장 모두 촌놈 출신이지만 새 정권의 안정을 위해 엄청난 개혁을 구상하고 실천한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양주(楊州)는 수양제가 건설한 운하의 장관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중국은 강들이 대부분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어 이 강들을 연결하기 위한 운하는 당연히 남북으로 건설됩니다. 대운하는 북에서 남으로 황하, 회하(淮河) 그리고 양자강을 연결한 것입니다. 양주는 대운하가 양자강과 만나는 교통의 요지로 발전합니다. 서쪽 낙양에서 남으로 양주를 거쳐 양자강을 통해 바다와 이어져 명-청 시대까지 번성합니다.
이날 저녁때까지 7시간 달려도 차 번호판에 4가 보이지 않군요. 중국인들도 우리와 같이 4의 발음이 죽을 사(死)와 같다고 해서 피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도 4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차 번호판은 별다른 저항감을 느끼진 않는데... 나의 첫차 번호가 ‘서울 4고...’이어서 ‘이놈의 차가 사고는 내지 않아야 할 텐데’....하면서도 10년 쯤 탄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맹신적인 신념체계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 여행 중 상해에서 4가 들어간 번호판을 한번 보았는데 외국인이 운전하는 것 같았습니다. 가이드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도 4를 쓰지 않고 3층과 4층을 3A, 3B로 표기하는 곳이 많다고 합니다.
전에 비해 서양의 프랜차이즈 체인식당도 많이 눈에 띠군요. 코카콜라를 가구가락(可口可樂)이라고 하는 건 잘 아시지요? 발음이 ‘커코우컬러’로 비슷하고 뜻도 좋지요. 길가 상호들을 몇 개 적어 보았습니다. 맞춰보세요. 맥당노(麥當勞), 긍덕기(肯德基) 성파극가비(星巴克咖啡), 아파트 이름 오탁방(烏托邦).... 많은 줄 알았는데 겨우 4개 건졌네요. 답은 맥도날도, 켄터키 치킨(KFC), 스타벅스 커피, 아파트 이름 유토피아입니다. 성(星)은 별이니 ‘스타’이고 파극이 벅스, 가비는 커피입니다. 오(烏)는 까마귀라는 뜻과 함께 ‘없다’다는 의미도 있다니 땅이 없다, u-topos, -topia라는 말입니다. (상점 이름 사진)
현재 약 30km 정도 남아 있다는 양주 운하는 아름답군요. ‘아름답다’ 외에 다른 표현은 없을까요? 우리는 한동안 운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찌고 부근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운하의 폭이 상당히 넓군요. 양재천 정도? 혹은 런던을 가로지르는 템스(Thames) 강보다는 약간 좁은가요? 임금을 주지 않고 노예같이 노역을 시켰을 것인데, 얼마나 인간을 동원했는가, 그 원성이 어떠했을까 등등이 연상되면서 일순간 분노가 치미는군요. 대운하 건설에 연인원만 1억 5천만 명이 동원되었고, 운하를 충분히 깊게 파지 않았다고 책임자와 인부 5만 명을 생매장했다는 기사도 보이군요. 혼란스러운 남북조 시대를 마감하던 당시 중국인구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아마도 3천만이 수준이었을 텐데.... 아무리 ‘연’인원이라 해도 1억 5천은 과정된 것 같습니다. 중국의 인구는 평화가 장기간 유지되면 폭발적으로 늘어나지만 혼란기에는 엄청나게 줄어듭니다. 수백 년간 지속된 남북조 시대를 마감하면서 인구는 3-5천 정도일 겁니다. 잘 정돈된 운하 변을 걸으니 양제에 대한 분노는 사그라지고 ‘양주는 정말 놀기 좋은 곳’이라는 그의 시가 떠오릅니다. 참 요상한 게 것이 인간 마음인 것 같습니다.
철도의 정치학(politics of railway)라는 말은 있지만 ‘운하의 정치학’은 처음 써봅니다. 만주를 두고 일본과 러시아가 다툰 20세기 초 러시아가 건설한 동만주 철도는 러시아식 광궤이며 일본이 건설한 남만주 철도는 표준궤입니다. 이 두 철도가 만나는 하얼빈에서 일본 열차는 러시아 철도를 이용할 수 없고 반대로 러시아 열차는 일본 철도를 이용할 수 없지요. 하얼빈을 경계로 서로 남의 영향권을 넘보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이자 약속인 셈입니다. 이게 ‘철도의 정치학’이죠.
해상수송이 육상보다 비용이 훨씬 적게 들어갑니다. 로마 시대 지중해 동쪽 끝 시리아의 밀을 서쪽 스페인으로 배로 운반하는 비용이 육로 120km 운송비용보다 적게 들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3남의 쌀을 주로 뱃길을 이용하여 서울로 운송하였지요. 그래서 노량‘진’이나 한강‘나루’ 등이 발전한 것입니다. 영국의 Ox‘ford’도 비슷하죠. 나루라는 말입니다. 철도가 등장한 이후에도 비용 면에서는 여전히 해상수송이 유리했습니다.
해상로를 확보하고 거점을 장악하면 물자수송은 획기적으로 발전하고 국력은 엄청나게 신장합니다. 영국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20세기 초까지 성경과 <자본론> 다음으로 많이 읽혔다는 마한(Alfred Mahan)의 <역사에 있어 해상세력의 영향(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1890)은 영국이 바다를 지배하여 세계제국이 된 이야기입니다. 지브랄탈 해협, 지중해 말타, 수에즈 운하, 아라비아 반도 끝 아덴,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 봄베이(뭄바이), 스리랑카, 말라카 해협, 미주대륙의 St. Lawrence 강, 남미 남단 마젤란 해협으로 들어가는 포크랜드(Falkland)섬 등등... 파마마 운하만 제외하고 세계의 전략적 요지는 거의 장악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바다를 통한 수송은 쉽지 않습니다. 바다의 험난함은 강과는 다르지요.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이 부산 아래 가덕도에서 거제도 서쪽과 고성이 맞닿은 견내량이라는 좁은 수로를 지킴으로써 왜적들은 서쪽으로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거제도 남단이나 진도 서쪽 대양을 돌아 서울로 북상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 일본군은 왜 굳이 이 좁은 수로를 돌파하려 했을까요? 바람과 조수에 의존하는 당시의 원양항해는 엄청난 모험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역상들이 뱃길을 잘 안다는 신안 앞바다에 난파된 무역선과 도자기들이 이를 보여주지요. 다음 회에서 고려 말 정몽주가 바다를 건너 사신으로 가다 겨우 살아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서양 각국들은 19세기 중반 증기선이 본격적으로 원양항해에 나서기 이전에는 내륙운하를 건설했습니다. 1970년대 런던의 캄덴 구(Borough of Camden)에는 캄덴 운하라는 게 있었습니다. 제가 유학 초기에 살던 지역이죠. 폭이 7-10m 정도 쯤 될까요? 수에즈나 파나마 운하 정도가 되어야 운하라고 생각하던 저에겐 동내 개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운하라 하더군요. 철도가 건설되기 전까지 석탄 등 물자를 운송하던 운하였던 겁니다. 19세기 초까지 영국의 운하 길이가 6,000km라 합니다. 어마어마하죠. 북아일랜드를 뺀 영국의 면적이 한반도와 비슷한데 남북한을 관통하는 운하가 6개 있다는 말입니다. 런던 중심부에서 템스 강을 따라 윈저 성까지 배를 타고 가면 강 중간에 콘크리트 장벽이 있는데 한쪽은 물이 뱃전까지 찰랑찰랑 차 있고 다른 쪽은 바닥이 들어나 보입니다. 강을 운하같이 만들어 여전히 물자 수송이나 관광용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철도와 대형 차량들이 등장한 이후에도 수로를 통한 운송이 그만큼 싸다는 것이지요. 문득 4대강 운하사업이 생각 나군요. 그러나 철도의 발달로 이들 운하는 도시의 하수 처리와 쓰레기들로 몸살을 앓았지요. 최근엔 관광명소로 탈바꿈됐다고 하군요. 이 중 절반인 3000km 이상이 정비되어 운하 변을 걸으며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합니다.
미국은 19세기 말까지 대륙횡단 철도를 7개 건설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요. 그러나 대서양 해안을 따라 보스턴에서 플로리다 만까지 2,000km에 이르는 내륙의 운하가 있다는 건 잘 모릅니다. 일부는 땅을 판 것이지만 강과 호수 등을 연결한 것입니다. 대서양 연안을 따라 남북으로 항해하는 게 위험해 내륙운하를 건설하여 경제적으로 남북을 연결한 것입니다.
운하는 철도 이전 시대 경제활동의 동맥이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의 동부 국경을 이루는 St. Lawrence강과 오대호가 연결되고, 이리(Irie)운하로 경제 중심지인 뉴욕이 허드슨 강과 이리호로 연결되고, 다시 오대호로 통하면서 동부와 중서부의 운송이 단번에 해결됩니다. 동부와 오대호가 연결된다는 것은 5대호 변의 Cleveland, Chicago, Pittsburgh 등 호수연안 지역이 활성화되고 미시시피 강을 따라 내려오면 St. Louis에서 미시시피의 지류인 미주리 강(Missouri River)이 합류하고 다시 미시시피 강을 따라 멕시코 만의 New Orleans까지 연결됨으로써 미국 전체가 하나의 경제권을 이루게 됩니다. 미국 경제는 석탄, 철강 수송이 원활해지면서 획기적으로 발전하여 19세기 말에는 유럽의 강대국인 영국, 독일, 프랑스의 경제력을 합친 것보다 앞서게 됩니다.
‘운하의 정치학’이라 부른 것은 특히 중국의 경우 적절하군요. 중국의 대운하는 동도(東都)로 불리는 낙양에서 황하를 따라 동진하고 남으로 양자강과 연결되니 중국의 정치적-경제적 요지를 관통하는 셈입니다. 경제적 중심부를 정치적 중심부와 연결하다는 건 극히 중요합니다. 수도라고 부르는 정치적 중심부는 대부분의 경우 경제적 중심부 위에 자리 잡습니다. 다른 나라로 눈을 돌릴 것 없이 한국사를 일별해 봅시다. 고구려의 평양, 백제의 위례, 부여, 신라의 경주, 개성, 서울 등이 모두 경제적 기반을 갖춘 지역입니다. 공주는 방어에 용이하지만 고구려의 침공 위협이 사라지면서 풍요로운 금강유역 부여로 내려오지요. 경주는 그 자체가 분지라 고대 도시국가를 지탱할만한 경제력을 갖추었습니다. 궁예의 철원조차도 철원평야라는 크지는 않지만 경제적 기반을 갖춘 곳입니다.
그런데 북경은 북방민족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이지만 경제력에서 충분치 못합니다. 황제가 남경이나 장안(西安)에 거주하고 북방에 군대를 보내면 지휘관이 아무리 충성한다고 해도 세월이 지나고 독립적인 군대를 가지게 되면 창끝은 거꾸로 돌릴지 모릅니다. 당 시대 안록산의 난과 명초기 연왕(영락제)의 정변이 그렇습니다. 결국 황제가 군대를 이끌고 북으로 가서 자리 잡는 게 최선입니다. 여기에서 황실과 고위 관료들 그리고 수도방위를 위한 군대라는 정치적 필요성이 생기지만 이들을 먹여 살릴 경제적 기반이 빈약하여 이들 간의 괴리가 생깁니다. 북경의 이같은 약점을 운하가 해결해준 것입니다.
송태조 조광윤(趙匡胤, 927-976)은 수도를 변량(汴梁) 오늘날 개봉(開封)에 정했으나 주변에 방어를 위한 산이나 큰 강이 없다는 점을 우려합니다. 다행히 대운하를 통해 남쪽에서 매년 수백만석이 올라와 소의 문민위주 정책을 뒷받침하면서 문화적 풍요를 구가하죠. 그러나 여진족의 금이 1127년 공격하자 수도가 함락되고 황제 흠종(欽宗), 태상황(太上皇) 휘종(徽宗)이 사로잡히고(靖康之變) 황제의 동생이 남으로 내려가 항주에서 즉위하니 이때부터가 남송(南宋)입니다. 수양제가 만든 대운하는 남부의 물자를 낙양(洛陽)으로 운반하는 기능에서 출발하지만 중국의 역사가 전개되면서 송대에는 개봉 이후 원-명대 북경이 행정적 수도가 되면서 그 중요성은 더욱 증대된 것입니다.
운하는 지속적으로 정비하지 않으면 곧 기능을 상실하게 됩니다. 인공으로 만든 수로는 자정기능이 없기 때문에 한 번의 홍수로 흙이 쌓여 수로가 막힙니다. 또 운하는 중앙정부가 전체를 관장하고 정비해야지 몇몇 지방이 나선하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중국과 같이 정치적 변동이 심한 국가에서 대운하가 잊히는 건 시간문제였겠죠. 그런데 최근엔 대운하도 영국과 같이 구역별로 정비되어 관광 상품으로 선보인 다군요. 양주 운하의 멋진 모습도 바로 그것인 것 같습니다.(2017.10.13.)
사진: 맥당노(麥當勞), 긍덕기(肯德基) 성파극가비(星巴克咖啡), 오탁방(烏托邦) 등
첫댓글 중국사에서이렇게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양주가 한국인들에게는 왜 그렇게 잊혀져 있었을까요. 글의 필자께서 양주기행문을 쓰자니 자연 양주의 얘기를 많이할수밖에 없을것입니다. 양주에 한번 가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