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전리(苧田里)=안동시 서후면 저전리
모시밭마을
▼ 한양조씨 문중의
"성암정, 쌍계서당, 존경재"







모시밭이 많다고 모시밭이라 불렀는데 한자 표기로
모시 저(苧)자에 밭 전(田)자를 써서 저전이라 하였다.
자연마을은 모시밭, 거리마, 정외, 조랏, 양지마, 삼거리, 무지랑 등
7개이며 206 가구에 616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옛 부터 한양조씨들이 모여 살았다.
▼ 최근에 건립한 "한양조씨 모시밭 입향
행적사"비


▼ 한양조씨 문중의 "성암정, 쌍계서당,
존경재"

▼ 성 암 정
제비원 석불에 "나무아미타불"을 새겼다고 전해지는
주사 조병태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961년 세운
정자.

▼ 쌍 계 서 당
한양조씨 시조의 13세 손인 조적의 증손자인
조덕립.조예립 형제가 부친 조사룡을 위해 19세기 초에
지어
학문을 닦고 문준자제들을 가르치던 곳.
학남초등학교의 모태가 된다.
=뒷쪽 산등성이에 큰바위 7개가 북두칠성 모양으로 놓여 있어
"칠성바우"라 하며, 아기를 낳지 못하는 부인들이 치성을 올리면
아기를 낳을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 존 경 재
조적의 부인 청송심씨의 재실, 매년 10월 10일
제사지냄.
<1519년 기묘사화 때 한양조씨가 역적으로 몰리게 되자 조종(趙琮)의 아들 5형제가
영주로 몸을 피하였는데, 이후 넷째 아들 조신완(趙信琬)은 봉화군 소천면
대현리에 정착하여 세거하였다. 조신완의 증손자인 조적(趙績)이 세상을 뜨자 부인
청송심씨는 막막한 두메산골을 벗어날 결심을 하고 아들 3형제를 데리고 무작정 길을 떠나 저전리에 정착하여
한양조씨 집성촌이 이루어 졌다.>


한양조씨(漢陽趙氏)
안동시
서후면(西後面)
저전리(苧田里,
모시밭)
마을
안동시에서
영주로 가는 5번
국도와 안동 서부 외곽의 솟밤다리에서 천년불패지지라 일컫는 금계리(金溪里),
서후면
소재지를 지나는 924번
지방도가 ‘서후교차로’에서
만나게 되는데 거기 교차점 일대가 안동시 서후면 저전리(苧田里)
마을이다.
저전은
모시밭이란 뜻인데,
옛날에
그 일대에 모시밭이 많았고,
모시를
짜는 아낙네가 많았으므로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이
마을이 예부터 한양조씨의 집성촌이었다.
한양조씨(漢陽趙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고종(高宗)
때
조순대부(朝順大夫)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낸 조지수(趙之壽)이다.
그의
증손(曾孫)으로
조선 개국과 함께 한성(漢城)으로
옮긴 조돈(趙暾)의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면서 조지수를 시조로 하고 한양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었다.
한양조씨(漢陽趙氏)가
더욱 번성하게 된 것은 그 시조(始祖)인
조지수(趙之壽)의
현손 조인벽(趙仁壁)
때부터이다.
조인벽의
아버지는 용성총관(龍城摠管)을
지내고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워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에
봉해진 상게(上揭)
조돈(趙暾)이며,
아우
조인옥(趙仁沃)과
함께 조선 개국에 많은 공을 세워 대장군(大將軍)이
되었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매부(妹夫)가
되었다.
조인벽의
아들 양절공(良節公) 조온(趙溫,
1347∼1417)은
찬성사(贊成事),
조위(趙渭)는
우의정(右議政)을
지냈다.
한양조씨의
안동 입향은 1518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온(趙溫)의
현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죽자 우의정 조위의 증손(曾孫)인
현감 조종(趙琮)이
화를 피하여 영주(榮州)로
이거하였다.
조종의
장자 조인완(趙仁琬)의
후손은 풍기(豊基)
와단에,
차자
조예완(趙禮琬)의
후손은 임하면 오대리에 정착하고,
삼자
조지완(趙智琬)의
손자 조관(趙貫)은
병자호란 뒤 출세를 단념하고 옛 안동부 감천현(현
예천군 감천면)에
이거하였으며 후손 중 문과 6명,
진사
15명을
배출하여 일대에 두루 알려진 가문이 되었다.
또
사자(四子)
조신완(趙信琬)의
증손 조적(趙績)은
안동 저전(苧田,
현
서후면 저전리)에
정착하였으며,
오자(五子)
조형완(趙亨琬)의
아들 조원(趙源)은
영양(英陽)으로
이거하여 후손이 일월(日月)과
주곡(注谷)에서
크게 문호(門戶)를
개창(開創)하였다.
곧
안동의 한양조씨는 1600년대
중엽 조적(趙績)이
영주에서 안동으로 옮긴 후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형성된 가문이다.
조적의
세 아들의 후손들이 현재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서후면 저전리을 중심으로 인근 마을에 세거하여 오고 있다.
안동
지역 세거 한양조씨의 대표격 집성촌인 서후면(西後面)
저전리(苧田里)는
예부터 모시밭이 많았고 모시를 짜는 부인들이 많아서 ‘모시밭’이라
하였다.
저전(苧田)은
모시밭의 한자 표기이다.
이미
위에서 본 바와 같이 1519년
기묘사화 때 한양조씨가 역적으로 몰리게 되자 조종(趙琮)의
아들 5형제가
영주로 몸을 피하였는데,
이후
넷째 아들 조신완(趙信琬)은
봉화군 소천면 대현리에 정착하여 세거하였다.
조신완의
증손자인 조적(趙績)이
세상을 뜨자 부인 청송심씨는 막막한 두메산골을 벗어날 결심을 하고 아들 3형제를
데리고 무작정 길을 떠나 저전리에 정착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한양조씨 집성촌이 이루어졌다.
마을
북쪽에 천등산(天燈山)이
우뚝 솟아 있고 천등산에서 발원한 송야천이 마을을 가로질러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저전리는
양지마·동녁마·음지마·정외·조랏·삼거리·무지랑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저전리에
거주하는 총 190여
가구 가운데 한양조씨는 약 160가구가
살고 있다.
관련
유적으로 마을 동쪽에 쌍계서재(雙溪書齋)가
있다.







▶ 존경재(尊敬齋)
이 마을에 입향한 청송 심씨의 묘제와
묘소를 수호하기 위하여 마련한 재실이다. 매년 10월 10일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이곳에서는 후손들이 문중의 공론이나 화수의 의를 도모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재사는 일제 강점기 때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서후면사무소와 주재소로 쓰이기도 했다.
▶ 성암정(星巖亭)
제비원석불에
새겨진‘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글씨를 썼다고 구전되는 한양인(漢陽人) 주사(主事) 조병태(趙秉泰) 공의 학덕을 기려서 후학들이 50여 년
동안 정성스럽게 모은 성금으로 1961년 4월에 칠성봉에 있는 선생의 묘소 아래에 세운 정자이다.
▶ 쌍계서재(雙溪書齋)
한양 조씨 시조의 13세손인 적의
증손자인 덕립, 예립 형제가 19세기 초에
아버지 사룡(師龍)공을 위해 정자를 지어 학문과 문중 자제들을 교육하던 곳이다. 그후 일제 때에는 학남학술강습회가 개설되어 인재를 기르기도
했으며 그 맥은 다시 학남초등학교로 이어졌다. 쌍계라는 이름은 두 개울물이 합수되는 지점에 있기 때문에 이름 붙인 것이다. 쌍계서재는 칠성등에
자리잡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