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한 대목. 소년의 부모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매년 같은 선물을 보내온다. 또래의 아이들이라면 모두 탐을 낼만한 고가의 선물이다. 그런데 소년은 또 매년, 그 선물을 던져버리거나 부숴 버린다. 아마도 소년의 부모는 내도록 소년에게 무관심하다가 '크리스마스에 아이들이 가장 받고 싶어하는 선물'이라는 기사를 보고는 그 중에서 최고가로 지목된 물건을 전화 한 통화로 간단히 주문해서 소년이 머물고 있는 기숙사로 배달시켰을 것이다. 지난 크리스마스에도 또 그 전에도 자신들이 같은 선물을 보냈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모른 채 말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뭔가 뜨끔한 구석이 없잖아 있는 이야기다. 우리가 주고받았던 숱한 선물들 중에는 그렇게 무관심과 관습으로 범벅된, 선물 아닌 선물이 꽤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물건이 아닌, '선물'이라면 문제는 마음이다. 보내는 사람이 선물 꾸러미 속에 제일 먼저 넣어야 하는 것도 마음이고, 받는 사람이 제일 먼저 꺼내들어야 하는 것도 마음이다. 그것이 누구나 알고 있지만 잊어버리고 착각하기 쉬운, 선물 주고받는 일의 예외 없는 법칙이다.
그런데, 마음을 전하는 데에도 요령이란 것이 필요하다. 요령이란 첫째, 눈썰미다. 내가 고른 선물이 그 임자가 될 이에게 어떤 쓰임과 의미가 있을지를 알아채는 안목이 먼저 있어야 하고,내 취향이나 기호를 곁들이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둘째, 때를 잘 맞추어야 한다. 의미를 새기자면 1년 365일이 모두 '때'가 될 수도 있지만 가장 좋은 때, 적절한 시기는 또 따로 있는 법이다.
선물하기 좋은 날
첫돌과 환갑, 그새 그후로도 해마다 돌아오는 생일, 몇 번의 입학과 졸업, 취직, 결혼, 집들이, 임신과 출산, 명절과 각종 기념일….선물을 주고받는 날들만 꼽아봐도 상당하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이런 의례적인 날들조차 챙기지 못할 때도 많다. 그럴 땐, 다른 이들에겐 별 의미가 없어도 적어도 그에게만큼은 또는 주고받는 이의 관계에서만큼은 특별한 날을 떠올려 보는 것도 방법이다. 다른 의례적인 날들의 선물보다 외려 더 기억에 남는 선물이 될 수도 있다. 그도 마땅치 않다면 날짜 계산기와 같이 조금 애교스런 방법도 있다. 연인들 사이에서, 우리 만난 지 100일, 200일 하는 식으로 '그 날로부터 몇 일'이라는 것 자체를 또 하나의 특별한 날로 삼는 것이다. 그 몇 일은 되도록 상징적인 숫자가 좋다. 날짜 계산은 물론, 이런 저런 의미를 갖고 있는 날들에 대한 정보나 미리 입력해 두면 그에 앞서 메일로 예고를 받을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로 는 www.nal.co.kr이 대표적이다.
그냥 넘어가기 쉽지만 의미를 발견해 주고 함께 기뻐하면 더욱 좋은 날들도 있다. 가령, 요즘 십대의 딸을 둔 부모들이 딸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는 초경 파티. 굳이 파티가 아니더라도 작은 선물이나 축하의 말들로 그 날을 기념해 주는 것이다. 전에는 비밀에 부쳐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던 그 날에 말이다. 미처 생각도 못했던 날에 건네는 작은 선물 하나가 누군가에겐 최고의 날, 최고의 선물로 기억될 수도 있는 법이다. 멋진 발상의 전환이 있다면!
마음에 쏙 드는 선물
어린이와 청소년에겐 지적 호기심과 탐구욕을 불러 일으킬만한 학습도구나 놀잇감 또는, 또래들에게 유행하고 있는 품목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이들에겐 양복이나 서류가방, 구두와 같이 일을 하는 데 쓸모가 닿는 물건들, 결혼을 앞둔 이들에겐 살림에 도움이 되거나 장식용 소품이 될만한 것들, 어르신들에겐 무엇보다 건강을 위한 보조품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외우고 있는 공식은 이렇다. 대개의 경우, 공식을 따르면 무난한 선택을 할 수 있다. 조금만 더 신경을 써서, 선호하는 선물을 묻는 각종 설문조사와 통계, 선물 도우미를 자처하는 인터넷 사이트들을 찾아보면 선물하기에 좋은 품목을 어렵잖게 정할 수도 있고 때를 맞춰 전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딘지 상투적이거나 스스로가 대금 결제인이 된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선물을 하는 이의 상대에 대한 관심, 그의 필요와 취향을 알아보는 눈썰미가 없다면, 세상의 그 어떤 만능 검색기도 소용이 없는 탓이다. 그래서, 눈썰미에 자신이 없다면, 어설프게 공식을 따르고 검색기에 의존하기보다는 상대방에게 직접 물어 보고 그가 원하는 선물을 전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럴 때, 받는 입장에서도 준비해 두면 좋은 것이 하나 있다. 새로운 결혼문화의 하나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결혼선물등록(Wedding Gift Registry)처럼, 자신이 원하는 선물의 목록을 공개하는 것. 주는 이가 자신의 형편에 맞게 선택할 수 있도록 귀띔을 해줘서 좋고, 실속을 최대화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선물이 틀에 박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시선을 조금 넓혀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 백일이나 돌잔치, 생일 등에 당사자가 아닌 그의 부모에게 선물을 건네는 것, 생일이 여름인 그에게 겨울 물건을 선물해 보는 것, 지금 당장이 아니라 몇 년 뒤에나 소용이 닿을 법한 '미래의 선물 '을 선사해 보는 것 등등 경우의 수는 오히려 무궁무진하다.
선물 수첩
때마다 무슨 선물이 좋을까 고민하는 일도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하나의 스트레스가 된다. 두고두고 기억되는 선물이 되길 바라면서도 막상 자신이, 언제 누구에게 무슨 선물을 건넸는지 가물가물해지는 경우도 제법 많다. 그럴 땐 기억력을 탓하기에 앞서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게 된다. 받는 이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누군가 나에게 마음을 담아 보낸 선물이 집안 구석구석에 널려 있는 보통의 물건들과 다름없게 되거나 소모품이었다고 해도 기억조차 희미하다면 보낸 이에게 그처럼 미안한 일이 없다. 그래서, 따로 마련해 봄직한 것이 선물 수첩이다. 언제, 누구에게, 어떤 선물을 주거나 받았는지, 반응과 소감은 어땠는지 기록해 두면, 우선 주고받은 의미가 흐린 기억 속으로 증발해 버릴 염려가 줄어들어 좋다. 의미뿐 아니라 쓰임새도 요긴 하다. 누군가를 위해 선물을 마련할 때 참고삼을 자료가 그만큼 많아진다는 얘기도 되고, 보다 흡족한 선물을 하게 될 확률도 높아진다. 받는 이의 개성과 취향, 명절도 그 어떤 특별한 날도 아니지만 그에게만큼은 기념이 될만한 날들, 그에게 쓰임새가 많을 듯한 물건 등등 항목은 많을수록 좋다. 한번으로 그쳤든 평생을 두고 이어지든, 사적이든 공적이든 인연이 닿았던 이들에 대한 조금 특별한 기록이라고 생각하면 번거롭다거나 유별나게 여길 일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