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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원(漆原)은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칠토현(漆吐縣)이었던 것을
757년(신라 경덕왕 16)이 칠제(漆隄)로 고쳐서 의안군(義安郡 : 昌原)에 예속시켰으며,
고려 초에 칠원(漆原)으로 고쳐 1018년(현종 9) 김해(金海)에 속하게 하였다.
조선에 와서는 초기에 칠원현으로 고친 후,
선조 때 창원(昌原)에 속하였다가
광해군 때 현(縣)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관할의 칠원군이 되었고,
1896년 경상남도로 이관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칠원, 칠서, 칠북의 3면으로 편성되어
함안군(咸安郡) 칠원면이 되었다.
칠원읍(漆原邑)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함안군의 읍이다. 함안군의 동북에 위치하며,
북으로 칠서면, 칠북면과 접하고, 동남쪽으로 창원시에 인접하고 있다.
북쪽으로 낙동강 줄기를 끼고, 남쪽으로 창원시와 인접하고 있다.
[1] 칠서면, 칠북면과 함께
삼칠 (三漆, 칠원 (漆原), 칠서 (漆西), 칠북 (漆北)에서 칠 (漆) 자만 따서 만들어진 말)권을 이루고 있다.
칠원은 삼한시대에 변진 12개국의 하나인 접도국이었으며, 가야시대에 와서는 칠포국이었다.
신라시대에는 칠토현이라 하였으나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에 칠제현으로 개칭되었다. 940년 고려 태조 23년에 칠원으로 칭하였으며, 1018년 현종 9년에 금주(김해)의 속현이 되었다. 1906년 함안군과 합병되면서 그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아 칠원면이라 칭하였으며, 1983년 2월 15일 칠북면 운서리 및 운곡리의 4개마을이 편입되었고, 2000년 9월 29일 무기리 무기마을을 무기1리, 무기2리 마을로 분동하였다.(10개리 26개마을) 그 후 대단위 아파트의 형성 등으로 주민편의를 고려, 2008년 11월 19일 구성리 이현마을을 동성, 이현 마을로 분동, 오곡리 호곡마을을 호곡, 자이1, 자이2, 자이3마을로 분동, 무기리 무기1마을을, 무기1, 갈티마을로 분동, 2009년 7월 호곡마을의 벽산블루밍 아파트의 분동으로 현재 10개리 32개 마을을 관할하고 있다.[2]
2014년 7월 기준 인구를 2만명을 넘긴 2만 526명이 되었으며 시가지 인구 비율 및
도시적 산업 종사비율과 같은 읍 승격 요건을 충족해 2015년 1월 1일부로 칠원읍으로 승격되었다.[3]
가야시대 낙동강 하류 및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안일대에 있던 8개의 소국.
8국의 이름은 다 전하지 않으나 《삼국사기》 물계자전(勿稽子傳)에 보이는 골포국(骨浦國 : 지금의 昌原 또는 馬山), 칠포국(柒浦國 : 지금의 咸安郡 漆原), 고사포국(古史浦國 : 지금의 鎭海 또는 固城), 그리고 《삼국유사》 권5 물계자전에 나오는 사물국(史勿國 : 지금의 泗川), 고자국(古自國 : 지금의 固城, 고사포국과 동일지역으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 보라국(保羅國 : 위치 미상) 등이 이에 속한다.
209년(내해이사금 14)에 포상8국이 가라(加羅)를 침략하려고 꾀하매 가라의 왕자가 신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신라의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伊伐飡) 이음(利音)이 6부(六部)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여 8국의 장군을 죽이고 그들이 잡아간 6,000명을 빼앗아 돌려보내 주었다. 이 때의 가라는 지금의 김해에 있던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으로 추정되고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국역삼국사기』(이병도, 을유문화사, 1977)
•「복원가야사」 상(천관우, 『문학과 지성』 28, 1977)
가야에서의 반란 - 포상 8국의 난
포상 8국의 난
"중계무역권이 붕괴되고 찾아온 가야의 위기.... 그들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장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
삼국육사의 가락국기에 보면 서기 42년에 김수로왕이 금관가야를 건국하였다고 하면서, 또한 금관가야를 포함하여 6 가야가 건설되었다고 합니다. 6 가야는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연맹체를 이루고 있었지만, 강력한 왕이 등장하지 못한 나라였습니다.
가야는 초기 변한지역에서 철기 문화와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등장한 나라입니다. 2세기에 금관가야는 낙동강 유역 일대에 일종의 군장 연합체인 전기 가야 연맹의 맹주가 되었습니다. 금관가야가 발전한 이유는 철의 중계무역과 이를 통한 정치적 연대로 맹주의 자리를 차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금관가야의 전성기는 4세기에 막을 내립니다. 그 이유는 먼저 4세기에 낙랑과 대방이 고구려 등에 의해 타격을 입어 중계무역의 주요 루트가 끊겼다는 점입니다. 고대 상업권은 고조선이 중국 한나라와 서로 차지하려고 무단히 애쓰던 대동강이 중계무역권이었습니다. 그 중계무역권을 장악하던 가야는 주요 무역국가들이 타격을 입자, 백제 및 왜와 연결하여 그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였죠.
금관 가야의 세력이 위축되고, 중계무역의 타격이 커지자 거제도 등 남해 지방에 있었던 8개의 소국들이 금관 가야의 지배에서 이탈하여 독립적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들 8개 소국들을 통칭하여 포상 8국이라고 부릅니다.
초기에 금관가야는 왜와 연결하여 무역경쟁국인 신라를 견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금관 가야가 위로는 아라 가야로부터 아래로는 포상 8국으로부터 압박을 받게되자 201년에 신라에게 군사적 도움을 청하게 되었죠. 결국 금관 가야는 신라의 도움으로 6 가야의 맹주국 위치를 다시 찾고, 포상 8국의 독립 의지를 꺽고자 하였던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신라는 김해 지방에 군사를 파견하는 등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 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신라가 김해 지역에 진출하려면 동해안을 따라서 내려와서 장산국이 있는 해운대를 거쳐서 김해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장산국은 포상 8국과 연계하여 김해의 금관 가야로부터 독립하려고 하습니다. 이러한 장산국을 그대로 놔두고 신라군이 김해로 진출하면 중간에 보급로를 차단당하게 되서, 군사 작전을 수행할 수가 없었고, 장산국은 장산의 정상 부근에 있어서 공격하기가 용이하지 않았죠. .
따라서 신라군은 장산국 정벌을 위해 새로운 전략을 수립합니다. 신라는 어느 해 가을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기장에서 군사 훈련을 시행하였습니다. 군사 훈련을 마치고는 사신을 장산국에 보내서 감사의 선물을 바치고 물러갔죠. 이러한 군사 훈련을 매년 가을마다 수행하자 어느덧 장산국에서는 경계를 게을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신라는 갑자기 5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장산국을 기습하여서 멸망시켰습니다.
209년 7월에는 포상 8국이 금관 가야를 침공하였고, 이에 신라는 내해왕이 태자를 중심으로 대병을 파견하여 금관 가야를 도왔습니다, 이때 잡힌 포로가 6천명에 이르렸다고 하니 이 전쟁도 큰 규모였던 것 같습니다. 이 전쟁을 가르켜 삼국사기에는 포상 8국의 난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포상 8국의 난이 평정된 후의 금관 가야는 신라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고, 가야 연맹은 점차 쇠약해지게 되었죠.
가야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왜와 연결을 시도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도 광개토대왕이 신라에 넘어온 왜를 격퇴하고, 가야까지 침공하면서 전기 6가야 연맹의 몰락을 가져오게 됩니다. 일본은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 기사를 왜곡하고, 그것을 예로 들어 일본이 가야 또는 백제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실제 가야사에 있어 일본이 점령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고성군의 연혁
삼한시대에 변진12국 중의 고자미동국 또는 포상8국 중의 고자국으로 비정되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6가야 중 소가야국이었으며, 그 유적으로 보이는 고분군이 고성읍과 동해면 등에 남아 있다.
신라가 이곳을 차지한 뒤 고자군(또는 고자국)을 두었으며, 757년에는 고성군으로 고쳐 강주(진주)에 속했다. 이때 영현으로 사수현(사천시)·상선현(뒤에 영선현 지금의 영현면 일대)을 거느렸다. 고려에 들어 995년에 고주자사를 두었다가 1018년 현령으로 강등시켰다. 1266년 지주사로 승격되었으며, 공민왕 때 현령을 파견한 후 지속되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고성현은 현재의 통영시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지금의 고성군보다 넓은 영역을 관할했다. 또한 당시 남해안의 방어상 중요한 요지였음이 임진왜란을 통해서 입증되어, 1604년 거제현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영이 거제현 두룡포(지금의 통영시)로 이전했다가 두룡포가 1617년 고성현으로 이관되었다. 1895년 지방제도 개혁으로 진주부 고성군이 되었으며 수군통제영이 폐지되었다. 1896년 13도제 실시로 경상남도에 소속되었다.
1900년 통제영이 있던 고성군 남쪽 지역을 분할하여 진남군을 신설함으로써 고성군의 영역이 대폭 줄어들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 때 진주의 두입지였던 문선면·남양면·영현면·영이곡면·오읍곡면·개주면 등이 편입되어 면적이 다소 넓어졌으나, 남양면(지금의 사천시 중심가)은 1912년 사천군으로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용남군의 동해면이 편입되었다. 1938년 고성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함안군 咸安郡
개관
동쪽은 창원시, 서쪽은 의령군·진주시, 남쪽은 고성군, 북쪽은 남강과 낙동강을 경계로 의령군과 창녕군에 접하고 있다. 동경 128°16′∼128°35′, 북위 35°09′∼35°23′에 위치한다. 면적은 416.64㎢이고, 인구는 6만 9156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개 읍, 8개 면, 248개 행정리(88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말산리에 있다.
자연환경
경상남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남서로 여항산(770m)과 방어산(530m) 등 고봉을 이루고 북으로 남강과 낙동강이 흘러 남고북저의 지형이다. 남부에 해안산맥이 고성에서 김해까지 동서로 걸쳐 있어 대체로 지세가 험준한 산지를 이루며, 북부의 저지부와 남부의 고지로 양분되는 지형상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지역이다.
남부에 여항산(餘航山, 744m)·봉화산(烽火山, 649m)·서북산(西北山, 739m)·천주산(天柱山, 640m)·미산령(嵋山嶺, 661m)·광려산(匡廬山, 720m)·방어산(防禦山, 530), 동부에 오봉산(五峰山, 528m)·작대산(爵隊山, 648m)·무릉산(武陵山, 556m), 중앙부에 자양산(紫陽山, 402m) 등이 남쪽과 동쪽에 잇달아 있고, 남쪽으로는 여항산(770m)과 북쪽의 방어산(530m)이 솟아 있어 남고북저(南高北低)의 지형으로 물이 역류하여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함으로써 양대 강의 연안에는 평야가 비교적 넓게 발달되어 있다.
주요 하천으로는 영운천이 방어산 부근에서 발원하여 북류하다가 남강에 흘러들고, 석교천(石橋川)이 오봉산 부근에서 발원하여 북류하다 남강으로 흘러들고 있다. 중앙에서는 남부의 여항산·서북산 부근에서 발원한 검암천(儉巖川) 일명 함안천(咸安川)이 북류하며 함안·가야를 지나 낙동강에 흘러든다. 또한 동남부에서는 광려천(匡廬川)이 광로산에서 발원하여 길게 북류하며 칠원·칠서에서 서류하는 칠원천·운곡천·가연천 등을 합한 뒤, 대산면에서 낙동강에 합류하며 하구에 큰 모래섬을 형성하고 있다.
기후는 남부온대기후대에 속하며, 연평균기온 14.8℃, 1월 평균기온 4℃, 8월 평균기온 26.6℃이며, 연강수량은 1,497.2㎜이다(2007년 기준).
지질은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경상계 신라통의 퇴적암이 주를 이루나 산지부에는 화강암계의 지층도 분포한다.
식생은 온대남동부대에 속하는 수종이 주를 이룬다.
역사
이 지역은 경상남도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두 강의 유역에는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 지역에서 일찍부터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선사시대의 유적으로는 함안면·칠원읍·군북면 등지의 지석묘군(支石墓群)이 있으며, 그 분포 지역과 양으로 보아 청동기시대의 활발했던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삼한시대에는 변진 안야국(弁辰安耶國)이라는 부족국가가 형성되었고, 이것이 발전하여 아라가야(阿羅加耶), 즉 6가야의 하나로 손꼽히는 유력한 나라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라가야의 역사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없으나, 현재 가야읍 말산리·도항리에 남아 있는 고분군은 그들이 남긴 유적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함안군은 법흥왕이 많은 군사로 아시라국(阿尸良國, 阿那加耶라고도 함)을 정벌하고 그 땅으로 군(郡)을 삼은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법흥왕 때의 신라 세력이 이곳까지는 미치지 못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아시량국은 경주에 가까운 지방의 이름과 혼동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아라가야가 멸망한 시기에 대하여도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신라가 창녕지방에 진출하였던 진흥왕 때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신라는 757년(경덕왕 16) 이곳을 함안군으로 개칭하고 현무(玄武)·의령(宜寧) 등 2개 현을 영현으로 삼았다. 본래 현무현은 소삼현(召彡縣)이고 의령현은 장함현(獐含縣)인데, 이 때 각각 개칭한 것이다. 한편, 지금의 칠원지방은 본래 칠토현(漆吐縣)인데 이 때 칠제현(漆隄縣)으로 개칭하여 의안군(義安郡)의 영현이 되었다.
983년(성종 2)함주(咸州)로 개칭하여 자사(刺史)라는 지방관을 두었다가 1018년(현종 9)함안군으로 환원하여 금주(金州: 지금의 金海)의 속군이 되었다. 1172년(명종 2) 감무를 설치했다가 1373년(공민왕 22) 군으로 환원하였다. 칠제현은 고려 초에 칠원(漆原 또는 漆園)으로 개칭하고 1018년금주의 속현이 되었다. 1391년(공양왕 3) 현에 감무를 두었는데 이 때 금주의 영현이었던 구산현(龜山縣)이 칠원의 영현으로 편입되었다. 현무현은 소삼부곡(召彡部曲)으로 강등되었는데, 그 상세한 연대는 알 수 없다.
1413년(태종 13)칠원현에 현감을 두었다. 1505년(연산군 11)함안도호부(咸安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다음 해 군으로 환원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세종 때의 호구수는 함안군 732호 3,266인, 칠원현 337호 1,330인, 구산현 104호 300인이었다.
단종 때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趙旅)는 명망이 높은 선비로서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에 오르자 고향인 이곳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이 곳 출신으로 중종 때의 학자인 주세붕(周世鵬)은 풍기군수로 재임 중이던 1543년(중종 38)순흥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뒤의 紹修書院)을 세웠다. 1587년(선조 20) 문명이 높았던 정구(鄭逑)는 함안군수로 있으면서 지방교화에 진력하였으며 그 때 사귄 인사와 문인들 중에는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적지 않다. 『함주지(咸州誌)』는 그가 군수 재임 시 편찬한 읍지이다.
임진왜란 후 칠원현은 읍세가 약해져 1601년창원도호부(昌原都護府)에 병합되었다가 1617년(광해군 9) 다시 현으로 복구되었다. 지금의 창원시 삼진지방(진동면·진전면·진북면)은 1601년(선조 34)∼1617년, 1629년(인조 7)∼1639년의 2차에 걸쳐 함안군에 편입되었다가 창원부로 복귀하는 등의 복잡한 변동을 겪었다. 『함안군읍지』와 『칠원현읍지』에 의하면, 당시의 호구 수는 함안군 5,198호 2만 5362인, 칠원현 2,567호 1만 953인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895년(고종 32)의 지방관제 개편으로 칠원현이 군으로 개칭되었다. 1906년 행정구역 개편 에 따라 칠원군은 함안군에 통합되고, 진주군의 상봉·하봉·사봉 등 3개 면을 편입하였으며, 구산면이 창원군으로 이관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진주군에서 편입된 3개 면이 다시 진주군으로 이관되고, 1933년죽남면이 군북면에 편입(10개 면)되었다. 1944년여항면에 산서출장소를 설치하여 10개 면·1 출장소가 되었다.
1950년 6·25전쟁 때에는 낙동강방어선의 최전선으로 가장 치열한 공방전이 이 지역에서 전개되기도 하였다. 전란 후인 1954년 군청을 함안면에서 현 위치인 가야읍으로 이전하였다. 1969년 이후 낙동강 및 남강 상류에 다목적댐이 계속 건설되면서 지역개발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1973년 남해고속도로가, 1977년에는 구마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이 지역 교통사정이 크게 개선되었다.
1971년 5월 10일여항면에 산서(山西)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73년 7월 1일대산면 산서리가 가야면에 편입되었다. 1979년 5월 1일가야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0년군북면에 월촌(月村)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3년 2월 15일칠북면 운서리와 운곡리가 칠원면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 여항면 산서출장소가 의창군(지금의 창원시) 진전면으로 편입되었다. 1999년군북면 월촌출장소 폐지하였고 2015년칠원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2읍 8면의 행정구역으로 오늘날까지 이른다.
유물·유적
불교문화재인 군북면 하림리의 방어산마애불(防禦山磨崖佛, 보물 제159호)은 801년(애장왕 2)의 조상기(造像記)가 새겨져 있어서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군북면 사촌리의 원효암칠성각(元曉庵七星閣,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5호), 함안면의 함안대산리석불(보물 제71호), 칠북면 영동리의 장춘사석조여래좌상(長春寺石造如來坐像,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호)·장춘사오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8호)·장춘사대웅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6호), 함안면 북촌리의 함안주리사지사자석탑(咸安主吏寺址獅子石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호) 등은 모두 고려시대의 작품들이다.
함안면 봉성리의 함안향교(咸安鄕校,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1호)와 칠원읍 용정리의 덕연서원(德淵書院,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7호)이 있다. 또한, 함안면 괴산리의 무진정(無盡亭,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8호)은 조려의 손자 참(參)이 은퇴 후 정자를 세우고 연당을 파서 꾸민 한국식 정원이다.
이 밖에도 대산면 장암리의 낙동강변에 반구정(伴鷗亭), 용화산(龍華山) 기슭에 합강정(合江亭), 군북면 원북리에 채미정(菜薇亭) 등 유서 깊은 정자가 많이 있다. 산인면 운곡리에 오비각(五備閣,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82호), 대산면 서촌리에 악양루(岳陽樓,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0호) 등이 있다.
함안면 봉성리·괴산리, 칠원읍 예곡리, 군북면 동촌리, 칠서면 회산리 등지에 지석묘들이 남아 있다. 가야시대의 유적은 가야읍의 함안도항리고분군(사적 제84호)·함안말산리고분군(사적 제85호)·가야리고분군 등이 있는데, 말산리 제3·4호분은 1917년에 발굴, 조사되었다. 한편, 우리 나라 서원의 창설자인 주세붕을 모신 주세붕묘역(周世鵬墓域, 경상남도 기념물 제33호)은 칠서면 계내리에 있고, 주세붕영정(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2호)은 무릉리의 무산사(武山祠,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3호)에 봉안되어 있다.
또한, 이 지역에는 많은 전적들이 보존되어 있는데, 칠서면 무릉리의 무릉잡고책판 및 수구집·구봉집책판(武陵雜稿冊板·守口集龜峰集冊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73호), 가야읍 신음리의(謹齋集冊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74호), 대산면 장암리의 간송문집책판 및 금라전신록책판(澗松文集冊板·金羅傳信錄冊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0호), 산인면 모곡리의 백운래홍첩(白雲來鴻帖,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8호), 칠원읍 무기리의 국담문집책판(菊潭文集冊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2호) 등이 대표적이다.
칠북면 화천리와 검단리에는(咸安化川農樂,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3호) 등이 전해 온다.
칠원읍에는 함안무기리연당(咸安舞沂里蓮塘, 중요민속자료 제208호)·함안무기리주씨고가(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0호), 군북면 원북리에는 조선 단종조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趙旅)의 생가인 어계생가(漁溪生家,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9호), 하림리에는 그 일가 5대의 부부묘가 한 묘역에 설치되어 있는 조안묘소(趙安墓所, 경상남도 기념물 제34호)와 동산정(東山亭)이 있다.
『함주지』에서는 아라가야의 옛 궁터를 가야읍의 성산산성(城山山城)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아직까지 뚜렷한 유적이 발견된 바는 없다. 산성으로는 함안면과 가야읍에 걸쳐 있는 함안성산산성(사적 제67호)을 비롯하여, 함안면 대산리의 동지산성(冬只山城), 가야읍 사내리의 봉산성(蓬山城), 칠서면 무릉리의 무릉산성 등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산성들이 있으며, 함안면의 함안읍성은 삼포왜란에 대비하기 위해 1510년(중종 5)에 축성한 것이다.
가야읍 검암리에는 조순장군비(趙純將軍碑,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8호)가 있다. 군북면 명관리에는 도천재단서죽백(道川齋丹書竹帛,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6호), 산인면 내인리에는 박진영장군유품(朴震英將軍遺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이 있다.
또한 칠원읍 용산리에 있는 함안층의 새발자국화석(咸安層――化石, 천연기념물 제222호), 칠북면 영동리의 함안칠북면의 회화나무(천연기념물 제319호), 법수면 대송리의 함안법수면의 늪지식물(천연기념물 제346호), 여항면의 함안외암리공룡발자국화석(경상남도 기념물 제68호)과 산인면 모곡리의 고려동유적지(高麗洞遺蹟址, 경상남도 기념물 제56호)도 이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재들이다.
교육·문화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함안향교와 칠원향교(漆原鄕校)가 있다. 함안향교는 1392년(태조 1)함안면 파수리 청곡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1398년 최인보(崔仁父)가 부임하여 향리의 자제들을 가르쳤으며, 1595년(선조 28)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칠원읍 용산리의 칠원향교는 1623년(인조 1)에 중건했다가 1760년(영조 36)에 또 다시 이전하였으며, 1906년 칠원군이 폐군되어 함안향교에 속했다가 1961년 중수되었다. 서원으로는 1569년 설립된 금천서원(琴川書院), 1651년(효종 2)칠원읍 용정리에 설립된 덕연서원, 1672년(현종 13)대산면 대사리에 설립된 도림서원(道林書院), 1706년(숙종 32)군북면 사촌리에 설립된 서산서원(西山書院), 1721년(경종 1)산인면 송정리에 설립된 송정서원(松亭書院) 등이 있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지금의 함안초등학교가 「보통학교령」에 따라 1911년 개교하였고, 1914년 칠원초등학교가 개교하였으며, 1937년 함안공립농업전수학교가 개교하여 중등교육이 시작되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7개교, 중학교 9개교, 고등학교 5개교가 있다.
1966년에 개원한 함안문화원은 이 지역 문화발전에 공헌하고 있으며, 1984년부터 가야읍에서 매년 11월 초에 개최되는 아라제(阿羅祭)는 군민의 종합 문화행사이다.
민속
이 고장에는 씨름·그네뛰기·소싸움·백중놀이·두레삼·유두놀이·달불놀이 등 농경지역의 특성을 살린 민속놀이들이 널리 행해지고 있다. 단옷날에는 씨름대회나 그네뛰기가 성대히 열리며, 특히 소싸움은 중부 경상남도의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기를 모으는 놀이이다. 백중은 이 지역에서 농부날·초연(草宴)·풋굿·호미씻기 등으로 불리며, 이 날 농사가 잘 된 집의 머슴을 우두머리로 삼아 삿갓을 씌우고 황소를 태워 마을을 돌게 하고 주인은 주식을 푸짐하게 낸다.
서부 경상남도 일대에 널리 퍼져 있었던 두레삼의 양속은 현재 그 흔적을 찾기 힘드나 두레삼의 각종 민요는 지금도 많이 불리고 있다. 유두에는 유두연(流頭宴)이라 하여 이웃·친척들이 냇가나 계곡에 나가 술과 음식을 차려 먹으며 하루를 즐긴다. 대산면 대사리에서는 마을사람들이 정월 대보름날 안곡산성(安谷山城)에 모여 달불놀이를 즐긴다.
삼칠지역(칠원읍·칠서면·칠북면)의 대표적인 민속행사인 삼칠민속줄다리기는 윗줄과 아랫줄로 팀을 구성하여 3전2선승제로 진행되며, 윗줄은 구성·유원·장남·오곡·예곡·용정·무기리 주민으로 구성하고 아랫줄은 용산·운서·운곡리와 칠북면 및 칠서면 주민으로 구성된다.
이 고장에서는 음력 10월 10일이나 정월 보름날 주로 노거수를 중심으로 동제를 지낸다. 그 대표적인 예를 칠북면 영동리의 회화나무, 가야읍 검암리와 대산면 서촌리의 느티나무, 칠서면 무릉리의 은행나무 등에 대한 동제에서 찾을 수 있으며, 특히 함안면 봉성리의 느티나무는 수나무로서 득남의 영험이 있다 하여 이를 바라는 부녀자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무릉리의 은행나무는 주세붕이 심은 것이라 전하며 위인전설과 습합되어 제사의 대상이 된다. 대산면 장암리 장포(長浦)마을의 왕버들나무는 이무기의 승천설화를 간직한 것으로, 가뭄이 계속되면 동민들이 이 나무를 중심으로 기우제를 올린다. 그 밖에 대산면 서촌리의 느티나무는 잎의 발아를 보고 농사의 길흉을 점칠 수 있기 때문에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설화·민요
이 고장 옛말에 ‘울고 왔다 울고 가는 함안 원님’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부임하는 도중에 험한 산세를 보고 낙심하지만 살아보면 순후한 풍속과 아름다운 경관에 반해서 이 고장을 떠나게 될 때에는 도리어 섭섭해한다는 것이다. 경상남도 사람들은 함안군을 두고 ‘물이 거꾸로 흐르는 땅’이라고들 한다. 즉, 이 고장은 서북쪽이 낮고 동남쪽이 높은 까닭에 물줄기가 모두 남강이 있는 서북쪽으로 흐른다. 이 때문에 왕조시대에는 이 고장을 임금이 계신 북쪽으로 물이 거슬러 올라가는 불경스런 땅인 ‘역수(逆水)의 고장’이라 하여 조정으로부터 무척 홀대를 받았다고 한다.
이 고장에는 서부 경상남도처럼 지역적 특성을 강조하는 구비전승보다 윤리적이고 교화적인 내용의 설화가 풍부하게 전승되고 있다. 가령 늙은 어머니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외아들을 삶아서 바쳤는데 나중에 보니 동자삼(童子蔘)이더라는 효도담이나, 병든 시어머니가 겨울에 전복을 원하자 하늘의 덕으로 우물에서 전복이 나왔다는 「복정유래담(鰒井由來譚)」(산인면), 늙은 어머니를 위해 효자가 심은 앵두나무가 어머니가 죽은 뒤에는 열매를 맺지 않았다는「효자나무전설」(가야읍), 왜구가 겁탈하려고 달려들자 죽음으로 정조를 지킨 처녀의 화신이라는「절부목전설[節婦木(乳木)傳說]」(군북면) 등의 설화가 그 예이다.
또한 시화류에 자주 등장하는 장성기생 노아(蘆兒)의 이야기도 있는데, 고을 수령들이 노아에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나라에서 탄핵사를 파견, 치죄하려 했으나 오히려 노아의 꾐에 빠진다는 내용이다. 이를 ‘함안차사’라고 하는 것은 ‘함흥차사’고사에서 음과 내용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경상남도 전역에 퍼져 있는 「재산을 아끼기 위하여 지세를 바꾸다 망한 이야기」가 산인면 입곡리의 하천과 연결되어 전승되고 있으며, 칠원읍의 「장사바위전설」은 두 장사의 힘겨루기 유형을 표본적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 외에도 개운지복(開運之福), 파수(巴水)곶감에 얽힌 전설(傳說), 파산익삼(巴山翼蔘), 동자삼과 외아들, 부자공씨와 도사, 상사나무에 얽힌 전설 등이 있다.
이 고장에는 논이 비교적 많은 관계로 논농사를 많이 짓는다. 따라서 농업노동요가 발달하였는데, 이 고장에서는 모내기노래를 「정자」라고 한다. 점심참이 올 때가 되어 독촉하며 부르는 「모내기노래」를 들어 보면 “삼동이야 삼동이야 맛보느라 늦었는가/ 뒤축없는 신을신고 끄이느라 늦었는가……남산이라 저모롱이 점심이라 더디오네/ 미나리라 시금초라 맛보니라 더디온다/……늦었다오 늦었다오 점심참이 늦었다오……”처럼 부른다. “외와내자 외와내자 이모판을 외와내자/ 들어내자 들어내자 이모판을 들어내자……”는 「모찌기노래」이다.
「보리타작노래」는 구(句)마다 ‘에호’라는 뒷소리를 붙여 부르는데 “일꾼들/ 어이/ 도리깨 들게/ 어이/ 보리타작 우리하세/ 어이/ 에호에호 에호에호/ 에호/ 어깨가 지쑥/ 에호/ 오김이 주춤/ 에호/ 힘써 때거라/ 에호/ 넘어간다 보리도/ 에호/ 여기도 알보리/ 에호/ 저기도 알보리/ 에호/……뒤으로 물러서/ 에호/ 발로 골라라/ 에호/ 도리깨 돌려라/ 에호/ 에호에호 에호에호/ 자 우리 쉬어가지고 한잔 먹고 합시다.”처럼 한다. 앞소리꾼이 노동의 리듬에 맞추어 흥을 돋우기도 하고 동작을 지시하기도 하면서 앞소리를 메긴다.
이 고장에서 불리는 「망께소리」를 들어보면 “어이여라차/ 천근망께는 공중에 놀고/ 어이여라차/ 망께소리를 잘도하면은/ 술을 많이 준단다……”처럼 부른다. 부녀자들의 「베틀노래」는 “바람은 솔솔 부는날 구름은 둥실 뜨는날/ 월궁에 노던선녀 옥황님께 죄를 짓고/ 인간으로 귀양와서 좌우산천 둘러보니/ 하실일이 전혀없어 금사한필 짜자하고/ 월궁으로 치치달아……”처럼 부른다.
경상남도 일원에서 전승되는 「담바귀타령」이 이 고장에서도 불리는데 “귀야귀야 담바귀야/ 너국을랑 어디두고 조선국에 나왔노/ 조선국이 병이많아 약줄라고 내가왔다/ 그씨좋다 씨를받아 담장안에 모를 붓고/ 단장안에 웽기내여 애숭대숭 전잎따서/ 애양애양 엮어내어 쎄글안에 걸었다가……살림맛이 요만하면 패가할이 뉘있을고……”처럼 담배씨를 재배하여 피우기까지의 정황을 노래하고 있다.
산업·교통
이 지역의 매우 편리한 교통여건으로 인하여 곡물 농업 외에 시설원예농업이 크게 발전되어 있고, 공업도 칠서 지방 산업 단지와 4개의 농공 단지를 중심으로 1990년대부터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
농경지 면적은 116.02㎢로서 전체 면적 중 경지면적이 점유하는 비율은 27.84%이며, 임야가 52.14%인 215.61㎢, 농지가 30.75%인 127.92㎢, 대지와 공장용지가 2.95%인 15.40㎢, 도로, 하천이 7.22%인 30.07㎢ 기타지목이 6.95%인 28.95㎢로서 전형적인 농업지역의 토지이용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시가구역에 해당되는 가야읍의 면적 중 도시계획이 적용되는 용도지역면적은 주거지역 1.10㎢, 상업지역 0.12㎢, 공업지역 0.59㎢로 되어 있고 잔여면적은 농촌적 특성의 토지로 되어 있다.
경지이용을 보면, 총 경지면적(경지정리율은 86.2%)이 11.602㏊이고 이 중 논이 7,798㏊, 밭이 3,264㏊로서 각각의 점유비는 논이 67%, 밭이 33%로 되어 논의 비중이 밭에 비해 거의 2배이 이른다. 군의 서부·북부·동부를 곡류하며 흐르는 남강유역이 관개가 용이하므로 논농사에 매우 유리한 이 지역의 입지적 조건이 그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들 지역에는 입곡저수지·면관저수지·운곡저수지와 크고 작은 늪이 있어 관개용수를 제공하고 있다. 군의 농가호수는 7,612호, 농가인구는 1만 8065명으로서 전체인구에 대한 농가인구율은 27%에 달한다.
농업생산은 하천유역의 평지부가 우세한 법수·대산·칠서·칠북 등지에서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주곡인 쌀을 비롯하여 보리·콩·서류 등이 있고, 배추·무·양파·수박·고추·마늘·시금치 등의 채소류와 참깨 등의 특용작물, 복숭아·감 등의 과일도 지역에 따라서 생산된다. 특히 밤·대추와 함안면의 파수(巴水)곶감과 군북면의 월촌수박은 이 지역의 특산물로서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또한 농가부업으로 축산이 장려되어 한우·젖소·돼지·닭·오리·거위 등 가축의 사육이 활발하고 양봉도 성하다. 함안군은 농업진흥구역(6,647.3㏊)과 농업보호구역(851.3㏊)을 설정하여 이 지역 농업생산량의 확대를 도모하고 있다.
산업구조의 특성을 보면 제1차 산업에 속한 농·임업의 경우 10개 업체가 활동 중이며 154명을 고용하고 있다. 제2차 산업에 속한 광공업을 보면, 광업은 1개 업소에 16명이 고용되어 있으나 현재 고령토를 제외하고는 10개의 광구가 전혀 가동되지 않는다.
제조업은 1,205개 업소에 14,456명이 고용되고 있다. 고용규모가 큰 업종은 조립금속산업(1,696명)·비금속광물제품(573명)·음식료품(972명)·섬유제품(313명)·화학제품(637)·가구제품(183) 등이다.
상업 및 서비스업의 특성을 보면, 총 3,388개 업소에 1만 745명이 고용되어 있는데, 도·소매업이 906개 업소 1,958명, 음식 및 숙박업이 921개 업소 1,964명으로 중심을 이루고 있다.
제3차 산업기능은 교육·개인 서비스 부문이 판매 부문과 함께 현저하며 여타 농촌지역과는 달리 창원·마산 등의 공업도시의 근교지역에 해당되는 지역의 특성 때문에 장차 공업 부문이 더욱 발전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
한편, 군내에는 2개의 상설시장과 4개의 정기시장이 있어 주민의 수요에 부응하고 있다. 함안군에는 가야·파수·군북·법수·산인농공단지와 칠서지방산업단지에 총 135개 업체가 입주하여 3,467명의 종업원을 고용하고 있다.
교통은 국도 5호선이 창녕∼마산과 연결되고 가야읍을 중심으로 지방도가 인접군과 연결되어 있어 매우 편리하다. 동서로 뻗은 남해고속도로와 남북으로 뻗은 구마고속도로가 군의 중앙을 지나고 있다. 도로포장율은 67.6%(2006년 현재)이다. 영호남을 연결하는 경전선철도가 군의 중심부인 가야읍을 지나 마산∼진주와 연결되어 인근 대도시와의 교류를 원활하게 한다.
관광
이 지역은 삼한시대 아라가야의 본거지로 각종 고분을 비롯한 고적유물이 산재하는 역사적인 고장이다. 의령군과 경계를 이루며 굽이굽이 흐르는 남강변은 시인묵객과 유람객이 많이 찾는 경승지이다. 또한 남해고속도로와 국도가 잘 정비되어 있으며, 수려한 남강변에는 공해에 오염되지 않은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남강과 함안천이 합류하는 곳이자 층암절벽의 사이에 자리잡은 대산면 서촌리의 악양루는 이 고장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이곳에서 굽어보는 남강의 풍치는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게 한다. 악양루에서 남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곳곳에 백사장과 층암절벽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경승지가 즐비하다. 군북면 월촌리의 남강변에 위치한 와룡정(臥龍亭)은 주변 경관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숲으로 둘러싸인 그윽한 풍치가 돋보인다. 이 밖에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합강정과 낙동강변의 광심정(廣心亭)도 풍치가 빼어난 관광명소로, 특히 7월 보름날 밤 합강정에서 내려다보는 낙동강의 월계(月桂)는 장관이다.
한편 칠서면 용성리의 경양대(景釀臺), 칠북면 영동리의 장춘사(長春寺)도 뛰어난 경치와 문화재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함안 5일장은 이 고장의 전통적인 시장으로서 가야시장·군북시장 등이 대표적이다. 장날에는 아침 일찍부터 해질 무렵까지 장이 서며 주변에서 생산된 농산물과 어물전, 의복류 등 기타 생활 필수품들이 거래되고 있다.
육가야 중 맹주국에 해당하는 ‘아라가야’에 해당하는 이 고장은 그 얼과 슬기를 계승하기 위해 매년 아라제를 개최하고 있다. 조선 선조 때 함안 군수인 정구가 시작한 낙화놀이를 계승한 이수정낙화놀이가 있다.
가야읍 동항리에 있는 함안박물관에는 4∼5세기 때 지배계층의 유물과 토기류를 비롯해 도항 및 말산리 고분군 일원에서 출토된 안라국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2005년 개관한 함안문화예술회관은 가야읍 도항리에 위치하며 대공연장과 소공연장 등을 갖춘 함안문화공연의 중심 역할을 한다.
칠원읍 용산리에 위치한 함안공설운동장은 1999년에 준공되었으며 주경기장을 비롯하여 사계절잔디구장, 인조잔디구장, 테니스장 등을 갖추고 있다.
읍·면
1. 가야읍(伽倻邑)
군의 중앙에 위치한 읍. 면적 42.21㎢, 인구 1만 9409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말산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여항산 바깥쪽이 되므로 산외면(山外面)이라 하여 말산리 등 3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우곡면(牛谷面)·산내면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아라가야의 옛터가 되므로 가야면이라 하였다. 1954년 군청이 함안면에서 가야면 말산리로 이전되면서 행정중심지가 되었다. 1973년대산면 산서리가 편입되고, 1979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동부에는 조남산(鳥南山, 139m), 북서부에는 천제봉(天祭峰, 225m)·계티고개·장고개, 동북부에는 배나무실고개가 있어 읍의 경계를 이룬다. 검안천이 읍의 동쪽으로 흐르고 광정천(廣井川)이 중앙을, 신음천(新音川)이 북서부를 각각 북류한다.
농경지가 넓고 비옥하며 수원이 풍부하여 일찍부터 수도작이 발달하였으며,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이며, 그 밖에 채소류와 참깨·들깨 등의 특용작물 재배와 배·복숭아·사과 등의 과수재배가 활발하다. 최근에는 수박 참외, 방울토마토 등 시설원예 농업으로 경제작물을 재배하여 수출에 활기를 띠고 있다. 교통은 읍의 북부를 남해고속도로가, 남부를 지방도 및 경전선철도가 동서로 달리고 있다.
문화유적은 말산리와 가야리의 고분군, 광정리의 성산산성, 사내리의 봉산성, 검안리의 조순장군비·동산정, 신음리의 근재집책판 등이 있다.
말산(末山)·검암(儉巖)·광정(廣井)·도항(道項)·신음(新音)·설곡(舌谷)·춘곡(春谷)·사내(沙內)·가야(伽倻)·묘사(苗沙)·산서(山西) 등 11개 리가 있다.
2. 칠원읍(漆原邑)
군의 동단에 위치한 면. 면적 50.61㎢, 인구 2만 107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구성리이다. 본래 칠원군의 지역으로 칠원현청이 있었으므로 현상리면(縣上里面)이라 하여 용전리 등 14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08년함안군에 편입되어 칠원면이 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칠서면 회문리·신산리의 각 일부와 내서면(內西面) 예곡리를 합하여 8개 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83년칠북면의 운서·운곡 등 2개 리가 편입되었다. 지형상 면의 동부와 서부가 모두 산지이며 중부에 있는 약간의 평탄지역으로 광로천이 흘러간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이다. 산지에서는 고령토가 약간 산출될 뿐 특산물은 없다. 교통은 구마고속도로와 대구∼마산간의 국도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지나고 있다.
문화유적은 예곡리의 지석묘, 구성리의 성지·삼층석탑, 용산리의 사지, 무기리의 사지·석조부도·삼층석탑·연당·주씨고가·국담문집책판, 용정리의 덕연서원 등이 있으며, 용산리에 천연기념물인 새발자국 화석이 있다.
구성(龜城)·용산(龍山)·유원(柳原)·장암(藏巖)·오곡(梧谷)·예곡(禮谷)·용정(龍亭)·무기(舞沂)·운서(雲西)·운곡(雲谷) 등 10개 리, 26개 마을을 관할하고 있다.
3. 군북면(郡北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80.47㎢, 인구 6,79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덕대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안도면(安道面)이라 하여 중촌리 등 4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곡면(大谷面)의 신창리 등 7개 리와 남산면(南山面)의 봉남리 등 2개 리를 합하여 군북면이라 하였다. 1933년 죽남면(竹南面)의 10개 리가 편입되었고, 1980년 월촌출장소가 설치되었다. 진주 경계인 남쪽에는 오봉산·괘방산(掛榜山, 451m) 등이 있어 대체로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은 남강유역으로서 평야지대를 이룬다. 이 평야지대의 최저지대가 유현리의 유전늪인데 지금은 이 늪도 매립하여 공장이 들어서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며 배추·무의 생산이 많다. 교통은 남해고속도로가 면의 북부를 동서로 가로지르고 의령∼마산간 국가지원지방도 67호선, 지방도 1004호선등과 연계되어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문화유적은 동촌리의 지석묘군, 명관리의 지석묘군과 도천재단서죽백, 하림리의 방어산성·조안묘소·방어산마애불, 사촌리의 원효암 칠성각·심원사지·삼층석탑, 영운리의 송방사지(松放寺址)·송방사지오층석탑, 원북리의 어계생가·채미정 등이 있다.
덕대(德垈)·중암(中闇)·소포(小浦)·동촌(東村)·사촌(舍村)·오곡(烏谷)·명관(明館)·모로(慕老)·사도(沙道)·장지(長池)·유현(柳峴)·월촌(月村)·박곡(朴谷)·수곡(藪谷)·영운(迎運)·하림(下林)·원북(院北) 등 17개 리, 37개동 120반 92자연마을을 관할하고 있다.
4. 대산면(代山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47.56㎢, 인구 3,941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평림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내대산면(內代山面)이라 하여 평림리 등 8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외대산면(外代山面)의 산서리 등 6개 리를 합하여 대산면이라 하고 9개 리로 개편되었다. 1973년산서리가 가야읍에 편입되었다. 지형은 대체로 남쪽은 안국산(安國山, 338m) 등의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쪽과 북쪽에는 남강과 낙동강에 면한 평지가 펼쳐져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이다. 토질이 사질 퇴적토로 이루어진 평야지대로서 수박하우스 재배지로는 천혜적인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 655㏊ 수박하우스 집단재배지는 전국적인 명성을 가진다. 교통은 칠원면∼의령군 부림면 간의 지방도가 지나고 있다.
문화유적은 대사리의 안곡산성(安谷山城), 서촌리의 아현사지(阿峴寺址)·악양루, 장암리의 합강정·반구정과 간송문집책판 및 금라전신록책판 등이 있다.
평림(平林)·부목(富木)·대사(大沙)·옥열(玉悅)·하기(下基)·서촌(西村)·구혜(九惠)·장암(長巖) 등 8개 리가 있다.
5. 법수면(法守面)
군의 서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34.61㎢, 인구 3,196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우거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대산면(大山面)이라고 하여 걸산리 등 6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마륜면(馬侖面)의 내(內)·외(外)·주물(主勿)·우거(于巨) 등 4개 리를 합하여 법수산의 이름을 따서 법수면이라 하고 9개 리로 개편하였다. 면의 남쪽에 천제봉 줄기의 산지가 있을 뿐 전체적으로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서북부를 남강이 둘러싸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이다. 교통은 가야면∼의령군 정곡면 간의 지방도가 지난다.
문화유적은 강주리에 조려묘, 윤내리에 한극검(韓克儉)의 정려가 있으며, 대송리에 천연기념물인 늪지식물이 있다.
우거(于巨)·강주(江州)·윤내(輪內)·윤외(輪外)·주물(主勿)·대송(大松)·백산(白山)·사정(沙亭)·황사(篁沙) 등 9개 리가 있다.
6. 산인면(山仁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36.89㎢, 인구 2,888(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모곡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화개산 아래라 하여 산익면(山翼面)이라 하고 입곡리 등 5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안인면(安仁面)의 송정리 등 5개 리와 외대산면(外大山面)의 산서리와 옥지리 일부, 산외면(山外面)의 검암리 일부를 합하여 산익과 안인의 이름을 따서 산인면이라 하고 7개 리로 개편하였다. 대체로 동·남·북부는 산지를 이루고 있고, 서부는 약간의 평야지대가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다. 농공병진된 지역으로 2차 산업이 급성장하고 있으며, 동부에는 1991년 산인특별농공단지가 조성되어 공업지역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서부에는 수리시설이 용이하고 토질이 비옥하여 비닐하우스 시설을 통하여 각종 원예작물의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교통은 경전선철도가 동서로 면의 중앙을 횡단하고 있으며, 남해고속도로와 의령∼마산간의 지방도가 지난다.
문화유적은 내인리의 박진영장군유품, 신산리의 포덕산성(飽德山城), 모곡리의 백운래홍첩·고려동유적지·문암산성(門巖山城), 입곡리의 성점산성(城岾山城)·자미정(紫薇亭) 등이 있다.
모곡(茅谷)·입곡(入谷)·신산(新山)·송정(松汀)·내인(內仁)·부봉(釜峰)·운곡(雲谷) 등 7개 리가 있다.
7. 여항면(艅航面)
군의 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28.35㎢, 인구 91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외암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두 골짜기의 물이 합친다 하여 병곡면(幷谷面)이라 하고 주동리 등 5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비곡면(比谷面)의 6개 리와 양전면(良田面)의 일부를 합하여 면 내의 산 이름을 딴 여항면이라 하고 8개 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71년 산서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9년 산서출장소가 의창군 진전면(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에 편입되었다. 동부에 광려산(匡廬山, 720m), 남부에 서북산(西北山, 739m)·봉화산, 북부에 여항산 등 비교적 높은 산이 솟아 있으며, 주동리에서 발원한 쌍계천은 검암천의 상류로 남강의 지류가 된다. 여항산은 한국전쟁 당시 우리 국토를 지켜주었던 요충지로 호국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성산이다.
대부분 산지로 이루어진 이 고장은 농작물 수확이 다른 면에 비하여 뒤떨어지며 특산물도 없다. 수도작과 축산업이 주민의 주 소득원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이다. 교통은 가야면∼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간의 지방도가 있다.
문화유적은 주서리의 주리사지(主吏寺址), 외암리의 조곡사지(朝谷寺址)·조곡사지삼층석탑 및 공룡발자국화석 등이 있다.
외암(外巖)·내곡(內谷)·주동(主東)·주서(主西) 등 4개 리가 있다.
8. 칠북면(漆北面)
군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32.32㎢, 인구 2,11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검단리이다. 본래 칠원군 지역으로 북면(北面)이라 하여 봉계리 등 14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08년함안군에 편입되어 칠북면이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칠서면의 구포리 일부, 칠원면 죽청리와 영산군 길곡면(吉谷面)의 사촌리를 합하여 9개 리로 개편되었다. 1983년운서·운곡 등 2개 리가 칠원면으로 편입되었다. 동쪽과 남쪽은 작대산 등 산지가 많고 북쪽은 낙동강에 면하여 약간의 평야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남쪽에서 흘러온 광로천이 칠서면과의 경계를 이루면서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며, 그 밖에 낮은 구릉지대에서 생산되는 복숭아와 단감은 군내에서 생산량 제1위를 차지한다. 교통은 면내를 잇는 군도가 있을 뿐이어서 불편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덕남리의 성지, 영동리의 장춘사·장춘사석조여래좌상·장춘사오층석탑과 천연기념물인 회화나무가 있다. 특히 1919년 3월 9일 이령 연개장터 일원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했던 곳으로 1976년 독립기념비를 세워 매년 기념, 문화행사 등을 실시하고 있다.
검단(檢丹)·화천(化川)·덕남(德南)·이령(二靈)·봉촌(鳳村)·가연(佳淵)·영동(榮東) 등 7개 리가 있다.
9. 칠서면(漆西面)
군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35.95㎢, 인구 6,17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천계리이다. 본래 칠원군 지역으로 서면(西面)이라고 하여 용중리 등 13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08년함안군에 편입되어 칠서면이 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9개 리로 개편되었다. 남북으로 긴 모양으로 남쪽에 약간의 산지가 있고, 낙동강과 면한 지역은 평야지대를 이루어 농산물의 산출이 많다. 이 지역은 대치리, 계내리 일대 107만평 규모의 칠서지방산업단지가 조성되어 함안군을 비롯한 서부경남지역의 산업단지로 거듭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며, 특히 복숭아·포도 등의 과일 생산이 많다. 교통은 구마고속도로와 대구∼마산 간의 국도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다. 문화유적은 회산리의 지석묘, 구포리의 고분, 계내리의 주세붕묘역, 무릉리의 무릉산성·주세붕영정·무산사와 무릉잡고 및 수구집·구봉집책판 등이 있다.
천계(天界)·회산(會山)·무릉(武陵)·구포(龜浦)·태곡(泰谷)·대치(大峙)·계내(溪內)·용성(龍城)·이룡(二龍) 등 9개 리가 있다.
10. 함안면(咸安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28.92㎢, 인구 2,64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봉성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상리면(上里面)이라 하여 신교리 등 8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산내면(山內面)의 동촌리 등 5개 리를 합하여 읍내면(邑內面)이라고 하여 6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8년함안면으로 개칭되었다. 지형은 대체로 동부와 남부가 신지로서 여항산·광로산 등이 있으며, 여기에서 발원한 하천이 봉성리를 거쳐 남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 등이 있으며, 특용작물로 마늘의 생산이 많다. 그리고 주요 특산물은 파수곶감으로 이 고장 소득증대에 크게 기여 하고 있다. 파수농공단지 등에 29개 기업체가 입주하여 가동되고 있다. 교통은 가야면∼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간의 지방도가 지나고 있다.
문화유적은 함안읍성을 비롯하여 괴산리의 지석묘, 봉성리의 지석묘군, 대산리의 동지산성·사지·석불, 강명리의 영대암지(靈臺庵址), 북촌리의 함안주리사지사자석탑, 봉성리의 함안향교, 괴산리의 무진정 등이 있다.
봉성(鳳城)·북촌(北村)·괴산(槐山)·대산(大山)·강명(康命)·파수(巴水) 등 6개 리가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함안통계연보』(함안군, 2008)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0)
•『함안군지』(함안군지편찬위원회, 1992)
•『아라의 얼과 향기』(함안군, 1988)
•『한국관광자원총람』(한국관광공사, 1985)
•『경남교육사』(경상남도교육위원회, 1980)
•『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 1980)
•『경상남도지』(경상남도지편찬위원회, 1978)
•함안군(www.㏊man.go.kr)
가야(加耶)의 멸망(滅亡)과 그 영토의 후속처리 문제
신라 법흥왕 19년(532)에 금관가야의 구형왕이 투항해왔다.
540년에 신라가 대병으로 아시랑국(阿羅加耶:咸安)을 멸하였다.
신라의 진흥왕은 관산성 전투 다음해인 16년(555)에 비화가야(非火加耶)인 창녕에 완산주를 설치하였고
561년에는 진흥왕이 하주(下州)인 창녕에 친행하였는데 현재에도 화왕산성과 목마산성 밑에 진흥왕의 순수비가 있다.
진흥왕 23년(562)에 이사부, 사다함을 보내 대가야를 멸하였다.
정약용의 {강역고}에는 지증왕 6년(505)에 신라가 이사부를 보내 소가야를 멸하였다고 하였으나
천관우(千寬宇)는 이 년대가 잘못된 것으로 고성의 소가야는 562년에 대가야가 멸망할때까지 존재하였을 것으로 본다.
백제가 가야와 동맹관게를 구축하게 된것은
가야는 400년 광개토대왕이 왜에게 공격 당한 신라를 구하고 그들의 후원세력인 금관가야를 공격하고
404년에는 일본의 구주와 본토를 공략해 들어가는 과정에서 가야의 전기연맹이 무너지고 후기연맹이 성립되고 백제는 475년 장수왕의 공격으로 개로왕이 전사당해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공주(公州)로 천도하였다.
그당시 고구려의 세력권으로 들어간 신라는 내물왕 37년(392)에 이찬 대서지의 아들인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으며 실성왕 11년(412)에는 내물왕의 아들인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눌지왕 8년(424)에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눌지왕 34년(450)에 고구려의 변장이 실직원에서 사냥하자 하슬라성주가 군사를 보내 그를 공격해 죽인이후 38년(454)에도 고구려가 신라의 북변을 공격해 왔다.
이로서 여제동맹은 깨어지고 39년(455)에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을 받자 신라가 군원병을 보냄으로서 나제동맹(羅濟同盟)이 성립되게 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당시 내물왕은 자기의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기 위해 정치적 라이벌인 실성을 인질로 고구려에 보냈으며 고구려의 세력을 업고 귀국한 실성에게 피살되었는데 왕위에 오른 실성은 내물왕의 아들인 복호를 고구려,미사흔은 왜로 추방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도피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내물왕의 장남인 눌지는 실성왕을 살해하고 자립하여 고구려의 세력을 극복하려고 나제동맹을 결성하게된 것이다. 소지왕 3년(481)에는 고구려의 신라 공격을 백제와 가야가 구원병을 보낸 사실을 보면 신라, 백제, 가야가 동맹관계를 유지해 고구려의 남침을 막고 있음을 볼때
백제와 가야가 동맹관계 유지해 오다가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벋어나고자하는 신라가 이들과 제휴하게 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렇게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벋어난 신라는 의성, 안동, 경산, 대구, 칠곡, 성주, 선산, 창녕, 울산, 양산, 부산(동래) 등으로 그 영역을 확대시켜나가 가야의 서쪽 경계를 조여들어왔다.
이들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가야는 백제와 계속적으로 결속하게 된다. 예를 들면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의 성왕을 도와 고구려를 밀어낸후 백제의 한강 유역마저 빼았음으로서 나제동맹이 결렬되고 백제(百濟)의 성왕이 554년에 신라의 관산성 공격하게 되는데 이때에 가야, 왜의 구원병이 참전하고 있음을 볼때 가야(加耶)는 백제, 왜와 연결된 동맹세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수 있기 때문이다.
532년 금관가야의 멸망으로부터 562년 대가야가 멸망 당하기까지 신라가 가야의 서쪽을 조여왔는데 대가야가 멸망당한 후 그 땅은 신라와 백제의 각축장으로 변하게된다.백제의 무왕 3년에 신라의 아막산성(雲峰)을 공격하였고 17년에는 신라의 모산성(운봉)을 공격했다.
25년네 신라의 석함(咸陽) 등 6성을 쳐서 빼았았다.의자왕 2년 7월에는 백제 의자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서쪽 40개의 성을 공격하여 빼았았으며 8월 윤충장군을 보내 신라의 대야성(陜川)을 쳐서 성주 품석을 죽였다.
4년 신라의 김유신장군이 백제를 쳐서 7성을 빼았았다. 5년 신라를 쳐서 7성을 빼았았다. 7년 백제의 의직 장군이 신라의 무산성(무주군 무풍면)에 밑에 진군하여 감물(금릉군 개녕면),동잠성을 쳤으나 김유신에게 패하여 돌아왔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가야가 멸망한후 신라(新羅)는 합천, 거창, 고령, 함양, 고성, 함안, 창녕, 김해지방을
백제(百濟)는 남원, 임실, 순창, 진안, 장수, 구례, 무주, 진주, 남해, 하동를 차지하였음을 알수 있다.
이당시 백제가 신라가 차지한 옛 가야 땅의 가장 깊숙히 침공해 들어간 것은 신라 40개의 성을 빼았은 후 합천에서 벌어진 대야성(大耶城) 전투였다. 이것은 이미 차지한 함양과 남쪽의 거점인 진주에서 공격한 것으로 40개의 성은 주로 이들 지역과 합천 중간에 위치한 거창과 산청지역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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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조
칠원 윤씨(漆原尹氏)는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윤시영(尹始榮)은 신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때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지냈다고 한다. 그의 아들 윤황(尹璜)은 판태사국사(判太史局事)를 지냈는데, 이후의 수대는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알 수 없다. 따라서 고려에서 칠원현의 호장보윤(戶長甫尹)을 지낸 윤거부(尹鉅富)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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