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성 있고 예절 바른 아이들만 보다가 간혹 막가는 아이나 부모님을 볼 때면 우짜다가 선생이 됐는가 싶어 자괴심을 느껴 질 때가 있지요.
선생님의 눈길 한번만 받아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던 때와는 완전히 다르지요. 그렇다고 남의 자식에게 체벌을 맘대로 할 수 있는 교육현장은 더 더욱 아니건만 一罰百戒란 말이 학교 현장에 사라진지 이미 오래되었다고 봐도 지나친 말은 아닐지. “왜 다른 선생님은 가만히 있는데 유독 우리 애만 못살게 구느냐?” 앙칼지게 몰아세우며 달려드는 학부모 모습들을 대할 때마다 선생님의 교육방법이 나쁘다느니, 어린애들을 차별대우 한다느니, 전화로는 애를 어떻게 맘놓고 맡길 수 있느냐? 심지어 불친절하다며 인터넷에 무기명으로 갖은 투의 빈정대는 글귀를 대할 때는 입에서 쓴 물이 나는 고초를 겪어 보는 경우가 교육현장에서 종종 벌어지고 있지요. 시시때때로 매스컴을 통해 보고 듣는 부모들의 자기자식에 대한 과보호의 선을 넘고 있음에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당면한 현실이지요. 며칠 전 평소에 얼굴 익은 학생이 다짜고짜로 교무실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서더니 울면서 숨이 찬 큰 목소리로 내뱉는 말이 심상치 않았지요. 울먹이는 아이를 자리에 앉게 하고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아까보다 더 심하게 “이런 학교는 싫어요. 전학시켜 주이소” 이유야 어찌 되었건 옆에 친구가 장난 친 것을 자기가 집적인 것으로 오해하여 담임의 꾸짖는 몸짓에 자기는 억울하다며 행정과에서 교무실로 출입문을 쾅 닫아버리고 집으로 가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해야 했지요. 담임선생님에게까지 막무가내인 그 아동의 언행은 교직이후 처음 느껴보는 씁쓰레하고 심란한 선생님의 깎여진 위상을 그 누가 건져 올릴 건가요, 동료들마저 ‘왜 꾸짖어요? 그만 내버려두지 않고 괜한 일로 치부하여 받는 자존심 상하는 따가운 시선들. 학생들에게는 불친절한 선생님으로, 학부모에게 폭력교사로, 관리자에겐 평지풍파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매스컴에겐 책임이 전적으로 선생님에게만 있는 것처럼 비쳐지는 교육현장의 그늘진 곳이 보여질 때 제대로 가르칠 맘이나 나겠어요? 그 답답한 심정을 트이기란 오랜 시간이 필요해지는게 저 자신만 느끼는 것일까요?. 삭막해져 가는 인성의 한 모습으로 각인 될 것 같은 안타까운 생각이 들곤 했지요. 두 세시간이 흐른 뒤 부모님과 함께 전후 사정 이야기를 서로 나누게 되었고 ‘제 자식이 너무 고지식하여 참을 줄 모르고 일으킨 일에 대하여 굵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이제는 자기 자식도 맘대로 못하는 세태로까지 온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하였지요. 그 애의 아버지는 자기자식이 보는 앞에서 담임선생님에게 큰절을 올리면서 “부족한 저의 자식놈을 잘 가르쳐 주십시오. 모든 것이 이 못난 아비 어미의 잘못입니다” 아비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반성의 기미도 나타낼 줄 모르는 눈빛의 그 학생, 예절 체감지수는 어느 정도일까? 차라리 전학이라도 시켜 버린다면 하는 맘이 꿀떡 같았지만 어째 전학시켜주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터이고 소설이긴 하지만 현장 감각을 리얼하게 표현한 주 여사의 갸륵한 고민을 통해 이 같은 학생을 자라도록 누굴 탓하기 전에 바로 우리 함께 고민할 거리를 제공했다고 봐요. 자녀의 언행으로 큰절을 올리는 아비 어미의 뜻을 더불어 품어야할 우리로서는 .
<정태주 부산명서초등학교 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