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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카타의 배낭여행자 거리 셔더스트리트(Sudder Street)는 이번에 세 번째다. 마치 고향집에 온 것처럼, 심리적으로 편안한 느낌이다. 전에 비해 좀더 깨끗해 져 있고, 여행자들도 북적거려서 마음이 편안해 진다.
델리의 파하르간즈에서는 여행자거리라는 느낌이 오히려 덜 했는데, 여기서는 완연하다. 상대적으로 숙소가 좋지 않은데도 비싸다는 점을 제외하면, 음식도 좋고 여행편의시설도 모여있다. 대표적으로는 환전소인데, 그 수도 많고 환율도 좋다. 델리(1달러 = 62.2루피)보다 낫다. 1루피 이상 더 준다. 1달러 = 63.5루피.
이 셔더스트리트가 세계적으로 더욱 유명해진 계기가 된 것은 영화 『시티 오브 조이(City of Joy)』덕분일 것이다.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을 보고 인도로, 콜카타로, 셔더스트리트로 모여든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 팀의 ‘막내’(23세. 제대하고 왔다)만 해도 인도방문의 이유로 “인도영화 좋아해서 오고 싶었다”고 했는데, 그 인도영화 중에 『시티 오브 조이』가 있었다. 이미 꽤 시간이 지났으나, 젊은 세대들에게도 이 영화는 알려져 있는 것같다.
인도에서 아마 가장 가난한 지역인 비하르(Bihar)에서 한 일가(一家)가 고향을 등진다. 고향에서는 먹고 살기 힘들어서였다. 델리는 너무 멀고, 그나마 콜카타가 가까운 대도시라서 모여들기 좋은 곳이다. 도시에 가면 무슨 일자리가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
그러나 도시에는 순진한 촌사람을 등쳐 먹고 사는 벌레같은 인간도 키우는 법. 고향을 뜰 때 마련한 전재산은 방 한칸 못 빌린 채, 사기를 당하고 만다.당장 노숙을 해야 할 판. 그래 할 수 없이 이 셔더스트리트로 흘러들어 인력거를 끄는 일을 할 수 밖에 없다.
인력거는 글자 그대로 사람이나 짐을 실어나르는 수레인데, 아무런 동력없이 사람이 직접 사람의 힘만으로 끄는 것이다. 인도의 다른 곳에서는 다 없어졌는데(적어도 사이클릭샤로 변신했지만), 여기 콜카타의 이 거리에서만 아직 존재한다.
한편,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다가 의료사고를 낸 백인 남자 하나가 훌쩍 길을 떠난다. 인도로 오는 것이다. 그런 일을 겪고서 재생(再生)을 하기 위해서 오는 곳으로는 인도나, 콜카타나 다 제 격이다. 그 역시 이 거리에서 어떤 사건에 말려든다.
이 두 주인공이 만나게 되고, 인력거꾼(릭샤왈라)이 거대회사(인력거를 임대해주는 회사. 우리의 택시회사를 생각하면 비슷할까?)와 맞서 싸우는 것을 돕기도 하고, 먼저 와서 빈민촌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던 서양 여성 조안나와 함게 빈민구호(의료봉사)를 하게도 된다. 이 과정에서, 국경을 초월한 우정, 뭉치면 부조리에 맞설 수도 있음을 이 영화는 그리고 있다.
당시 『시티 오브 조이』에서 서양의사로 나온 인물이 『사랑과 영혼』의 남자 주인공으로, 연전에 작고한 패트릭 스웨이지였다. 또 인도의 남자 주인공 아내로 출연한 여자배우가 디퍼 메타 감독의 영화 『화이어』에서 큰동서 라다역으로 나왔던 바로 그 배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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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셔더스트리트의 모습은 현실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이 거리를 영화가 아닌 ‘다큐’로 재연(再演)한 감독이 있다. 이성규 감독.
2000년 겨울(2월 3일) 나는 그를 보드가야에서 만났다.(『배낭에 담아온 인도』, p.139) 당시 그는 비하르의 농촌에서 벌어지는 지주게급과 농민계급 사이의 살인과 보복의 악순환을 그린 다큐 『보이지 않는 전쟁』을 찍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전쟁』이후, 후속작업으로 그는 이 거리의 인력거꾼 이야기를 들고 왔다. 『후세인과 샬림의 캘커타 스토리』가 전편이고, 『오래된 인력거』가 후편이다.
후세인과 샬림은 모두 무슬림이고, 모두 비하르의 농촌 출신이다. 후세인은 이미 70을 넘긴 나이라서 일도 잘 못한다. 가족도 없다. 비하르의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아들을 잃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40년만에 고향을 찾았지만, 아들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아도, “모른다” 했을지 모른다.
샬림은 고향에서 그로부터 송금만 오기를 기다리는 ‘공동가족’(부모님을 모시고 형제의 가족이 함께사는 인도의 가족제도) 17명의 유일한 생명선이다. 백내장과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노모, 영향실조로 부종이 온 막내아들 ---.
그의 희망은 ‘가족’이다. 가족을 위해서, 그는 감히‘맨발의 청춘’이 되어서 콜카타의 아스팔트 위를 달리고 또 달린다.
“돈이 잘 벌리면 쌀밥에 고기 먹고, 돈 못 벌면 허름한 음식을 먹는 것, 그게 인생이잖아요.”
그의 명언이다.
후편 『오래된 인력거』는, 샬림을 중심으로 후일담을 다룬다. 샬림이 그토록 희망했던, “아들만은 나와는 다른 삶을 사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가출한 큰 아들은 뭄바이까지 갔고, 봉제공장에서 붙잡혀 있다. ‘빚’을 내 쓰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노예노동 중이었다
기차를 타고 아들을 만나고 온 그에게, 아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인력거를 몰 수밖에. 다행히, 그에게는 아직 꿈이 있다.
“오토릭샤의 기사”가 되는 꿈 말이다.
인도에서 오토릭샤의 기사가 되는 것은, 우리네 같으면 개인택시 면허를 따는 것과 마찬가지. 제법, 돈도 모았다. 화면은 그가 개인적으로 관리하는 --- 은행에 예금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위험해 보였다 --- 돈이 많이 모였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암초가 나타났다. 아내가 아픈 것이다. 이유도 모르고, 원인도 모른 채 ---. 큰 병원을 전전한다. 돈이 들어갈 수밖에. 아내를 살리려면 오토릭샤의 꿈은 포기해야 하고, 오토릭샤의 꿈을 위한다면 아내를 잃을지도 모른다.
끝내 “엉엉” 울고 마는 샬림. 다큐를 찍는 이성규 감독에게도 “촬영거부”를 선언하고, “집으로 가라”고 말한다. “어떻게 외국인이 친구가 되겠는가”라는 절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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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문에, 이 다큐를 본 어느 재미교포가 샬림에게 오토릭샤를 1대 사주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나는 들었다.
이 이성규 감독의 다큐 2편은 내 핵심교양수업(인도사회와 불교, 인도여성과 불교) 시간에 학생들에게 많이 틀어주었다. 그 다큐를 보고, 이 셔더스트리트까지 찾아온 학생(역사교육과 어정윤과 그의 친구들)도 있었다. 우리의 젊은 학생들이 남긴 감상문 중, 가장 많은 것은 “우리 아버지가 생각난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살아가고, 투쟁해 간다. 온 가족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
3년 9개월 전(2010년 2월), 두 번째로 이 거리로 왔을 때 나는 샬림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만날 수 있었다. 이감독의 다큐를 통해서 그를 안다고 말했다. “이성규감독이 내 친구”라고 ---. “그가 지금 아프다”고 하니, 그도 안단다. “암”이라 말하면서, 이감독과 전화통화를 했다 말한다. 나는 후세인과 가족들의 안부를 물었다. 후세인은 비ㅡ 농촌으로 갔는데, “2개월 후 온다”고 한다. 막내 아들과 아내 모두 건강은 “괜찮다”고 했다. 모두 비하르에 있다고. 그의 걱정거리 “큰아들”은 아직 뭄바이에서 노예노동 중인지는 묻지 못했다.
그래도 변한 것은 있었다. 다큐에서는 전화가게에서 시외전화로 가족의 안부를 묻고, “막내를 병원으로 데려가라”고 했던 그에게도 이제 핸드폰이 생긴 것이다.
그의 아내가 아팠던 것처럼, 지금 나의 아내가 아프다. 그 덕분에/ 때문에 이 거리의 호텔에서 발이 묶인 나로서는, 그의 릭샤를 한번 타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다큐 2편을 통해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이국(異國)에서 생겼다. 이 사실이 현실적으로 그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다만 그것이 그에게는 정신적으로나마 힘이 되고, 용기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국에서 투병 중인 이성규 감독이나 샬림, 후세인, 그리고 여전히 일(손님을 태우는 것)은 안 하고, 외국인에게 ‘릭샤왈라의 방울’(=크랙숀) 팔기에만 열중하는 커멀라다 역시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길 빌어본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샬림과 같은 애틋한 사연이 없는 사람이 이 셔더스트리트의 릭샤왈라 중에 누가 있으랴. 가족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후세인 할아버지 역시, 그의 가슴 속에는 가족이 살아있을 것이므로. 가족 --- 생의 끈을 이어가게 하는 생명줄이 아니겠는가. 짊이면서 동시에, 에너지 드링크 말이다.
우리 학생들처럼, 나도 나의 가족을 생각한다. 그렇다. 나는 아버지다. 잔인하게도, 그러나 영광스럽게도 ---.
(2013. 12. 2. 콜카타 셔더스트리트의 호텔 파라곤)
후기 :
1. 이 글을 쓴 다음날, 샬림을 다시 만났다. 짜이 한 잔을 다 마시지 못한다. 일을 할 때 배가 잔뜩 부르면 불편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그의 인력거에 타기를 바랐다. 마침 아내의 상태도 다소 호전되었으므로, 우리는 타기로 했다. 처음 인력거를 탔다. 그저 ‘목적없는 드라이브’다. 그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는 셔더스트리트를 멀리 벗어나서 한 바퀴 돌고 돌았다. 너무 멀리 도는 것같아서 마음이 불편하고, 미안하다. 아내가 준비한 봉투를 꺼내드리니, 그는 세어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넣었다.
2. 이성규 감독은 12월 13일 먼 길을 떠났다. 조시 "오래된 빚"을 델리에서 지었다.
3. 이성규 감독의 영화 "시바, 인생을 던져"를 서울에 돌아와서 두번째로 보았다. 그 "시바, 인생을 던져"에서도 후세인과 샬림은 잠깐 엑스트라로 등장하였다. 다시 한번, 이감독의 명복을 빈다.
첫댓글 故 이성규 감독 유골 인도 갠지스 강 품으로 - 손에 잡히는 뉴스 눈에 보이는 뉴스 - 뉴스엔 -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401060904209610
최근 소식 올립니다 ‥
감사합니다. 제 글도 좀 옮겨가 주세요. 나무아미타불
그렇잖아도
교수님께 여쭈려던참이었어요
이감독님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렸습니다 ‥
감사합니다. 제 글은 일체 "저작권"이 없습니다. 어디든지 갖다가 쓰셔도 좋습니다. 제 글의 주인은 부처님이신데, 부처님은 우리 한테 저작권료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저작권이 설정되는 글, 즉 출판이 되는 글들은 여기 아예 안 싣습니다. 자유롭게 날려주시면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민족사에서 우연히
뵈었을때 ‥ ^^
이성규감독가족분께 전하신 시집은
오늘 대구로 내려가는 진피디편에 잘 챙겨보냈습니다‥
감동적인 댓글이네요‥^^
그럼 앞으로 종종 교수님글들은 맘놓고 퍼나르겠습니다‥~^^
아, 민족사에서는 또 언제 사진을 찍으셨는지요? 놀랍습니다. 사진에 대한 느낌은 뭐랄까요? 초로같기도 하고, 중년 같기도 하고, 우리 집은 내력이 머리가 올라가거든요. 점점 머리가 멀리 올라가는 것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