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일발 1
1972년 5월 22일 월요일.
숨가쁜 하루가 지나고 다시 날이 밝았다. 허열의 집 앞 은신처에서 백수웅은 오랜만에 늦잠을 잤고,
깨어난 뒤에도 피로한 몸을 이불 위에 누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노옥진이 넘겨 준 필름과 지난 밤 온실 안을 훔쳐 보던 사내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회담장, 그 현장을 촬영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미라를 다치게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회담장은 워커힐도 영빈관도 아닌 온양의 별장이라고 말했다.
그 말과, 온실을 훔쳐 보던 사내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만일 온양이 실제 회담장이라면, 에메랄드와 영빈관은 위장장소가 분명하다. 만일 온양이 위장 장소라면,
회담장은 영빈관보다도 에메랄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후락과 허열의 방문이 그걸 증명한다.
그렇다면 지난 밤 온실을 훔쳐 본 사내의 정체는 무엇일까? 단순한 호기심으로 들여다 본 사람일까? 아니다.
온실까지 일부러 찾아와 남녀의 포옹 장면을 훔쳐 볼 사람은 없다. 더구나 직원이라고는 더욱 생각할 수 없다.
내가 밖으로 나섰을 때, 사내는 적어도 3분 이상 호흡을 멈추고 있었다. 훈련받지 않은 사람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기관원이 틀림없다. 그는 노옥진을 미행했다.'
백수웅이 온실에서 뛰쳐나갔을 때 그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백수웅은 손에 잭 나이프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어디서든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리면 그곳을 향해 칼을 던졌을 것이다. 그러나 숨어 있는 사내는 잡소리는커녕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백수웅은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신경을 곤두세우다가 노옥진 보다 먼저 떠나 버렸다.
만일 그 때 박상남이 권총을 뽑아 들었다면,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남성우처럼 몸 어딘가에 칼이 먼저
꽃혔을 것이다. 숨을 죽이고 백수웅이 떠나는 것을 확인한 것이 그의 생명을 살려 주었던 것이다.
온실에 나타났던 그림자 사나이, 생각에 골몰하던 백수웅은 마침내 그가 남성우의 후임자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허열은 성격이 급하다. 더구나 상대는 나와 그의 아내 노옥진이었다. 그는 내가 떠날 때까지 참고 지켜 볼
인물이 아니다. 그렇다고 최일우라고 볼 수도 없다. 그는 아직 훈련이 덜 되어, 3분 이상 호흡을 멈출 능력도
없으려니와, 허열이 최일우 단 한 사람을 내게 보낼 리도 없다. 그렇다면 그는 남성우의 후임자로,
적어도 특수 교육을 받은 베테랑급 수사관이 분명하다. 허열과 에메랄드에 나타났던 그 녀석이다.'
그런 추리 외에도 백수웅은 육감적으로 또 다른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위기감의 전류를 보낸 것이 바로 지난 밤 사내였다.
"복병이 나타났군. 재미있는걸. 남성우를 없애고 기사키 하쓰요를 보내고 나니 뉴 페이스가 등장했단 말야."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생각이 떠올랐다.
지난 밤 백수웅은 비교적 침착한 태도로 온실을 빠져나왔다.
뉴 페이스의 새 정보원이라면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백수웅의 태도로 보아, 나를 수사관이라고는 생각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는 너무나 여유 있게 온실을 빠져나갔다.'
"허허허 허허허"
백수웅은 누운 채 껄껄 웃었다.
"녀석들은 틀림없이, 오늘 밤 온실을 습격할 거다. 나를 체포하기위해, 아니, 나의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해."
백수웅은 이불 위에 누워, 지난 밤 박상남의 온실 습격을 단번에 궤뚫고 있었다. 놀라운 추리력이었다.
그 추리력은 온실에서의 대하고 여유 있는 행동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역습을 가할 것이다.
지난 밤엔 네가 나를 습격했지만, 오늘은 내가 너를 습격할 것이다. 이 백수웅이 어떤 인물인지,
왜 이런 포악한 인간이 되었는지 너희들은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이다.
백수웅은 회사에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연락할 필요도 없다. 출근 시간이 되면 새로운 수사관과
최일우가 온실을 수색할 것이다. 그 곳엔 나의 살림 일부가 남아 있다.
그런데 백수웅은 역습보다 먼저 할 일이 있다.
"딩,딩,딩,"
안집 구멍가게의 벽시계가 아흡 점을 두드렸다. 어느 새 아침 9시가 된 것이다.
뒤이어 누군가가 백수웅의 방 문을 두드렸다.
"총각, 며칠 안 들어오더니 피곤한가 보지? 9시야. 오늘은 출근 안 해?"
주인 여자였다.
이곳을 은신처로 정한 후, 그녀는 술에 취한 채 두 번이나 방으로 습격해 들어왔다. 외롭다고 하소연해 왔고,
살갗을 비비며 백수웅을 자극시켰다. 하지만 그녀의 몸을 받아 줄 만큼 마음의 여유도 없었으려니와,
어찌 되었건 코앞에 있는 노옥진이 머리에 떠올라 그 짓거리를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주인 여자의 외롭고 애처로운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허열과 노옥진의 결혼 확인, 서지아의 죽음,
그리고 도쿄 송죽의 히데코 피살이 그로 하여금 여성 거부감을 갖게 했다.
백수웅은 눈을 뜨고 문을 열었다.
겸연쩍은 얼굴로 백수웅의 벌거벗은 상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또다시 이글대기 시작했다.
"네. 오늘은 쉬는 날이에요."
"그래? 하긴, 쉬는 날도 있어야지."
그녀는 불쑥 방 안으로 들어와 백수웅 옆에 바짝 다가앉았다.
"야근이란 말 듣고, 과로하는 건 아닌가 걱정했었지. 어때, 해장 한 그릇 하겠어?"
"아뇨. 오늘 모처럼 쉬는 날이라 밀린 일을 좀 하려구요."
"아따, 모처럼 쉬는 날인데, 나도 총각 쉬는 거 같아서 문 안 열었어.
우리 오늘 어디 놀러 가. 창경원이나 공원, 응?"
그 동안 이 여인은 빨래며 청소까지 정말 열심히 해 주었다. 술 취해 들어왔을 때 애써 떼밀어도
화 한 번 내본 일 없었다. 옆에 앉은 여인의 상체가 어느 새 반쯤 백수웅의 어깨에 기대졌고,
그녀의 손가락이 벌거벗은 그의 등을 훑었다.
"총각, 나보고 화냥년이라고 욕하지 마. 벌써 몇 년째 이렇게 혼자 사는지 알기나 해?
그렇다고 붙어 살자는 것도 아냐."
백수웅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이제 다시 워커힐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곳은 가장 안전하고 완벽한 은신처가 되어 줄 것이다. D데이를 며칠 앞두고 다시 호텔을 전전할 수도 없고,
남산이나 4 . 19 묘소 같은 곳에서 밤샘을 하는 것도 위험 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여인은 어느 새 자신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서른아홉 살이라고 하지만, 아직도 살은 처녀처럼 팽팽하고 눈처럼 희고 눈부셨다.
오늘은 술도 취하지 않아 쉽사리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마지막 내의를 벗는 여인의 얼굴은
이미 불꽃처럼 이글거렸고, 숨소리는 거칠어져만 갔다. 두 개의 젖무덤이 출렁이며 떠올랐다.
그녀는 백수웅의 등 뒤로 자리를 옮겨 뒤에서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따뜻해, 사내의 따뜻한 살 내음 맡아 본 게 언젠지도 몰라. 총각"
여인의 두 개의 젖무덤이 등을 간지렵히며 백수웅을 자극시켰다. 허리를 껴안은 손이 점점 더 밑으로
흘러내렸다. 여인은 턱에 닿을 듯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눈동자는 이미 반쯤 풀려 있었고,
손가락은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후들거리는 손가락이 사타구니까지 밀려 내려왔고,
그녀는 기어이 괴성을 지르며 한 손으로 백수웅의 목을 껴안았다.
"으흐흐"
여인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등가죽에 마구 볼을 비벼 댔다.
"안아 줘, 응? 총각, 안아 줘."
백수웅의 몸이 한결 뜨거워졌다. 한편으로는 난감해하면서도, 오랫동안의 긴장과 숨가쁜 도주로 수축되었던
근육이 부드러운 살결에 의해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는 문득 8년 전 어느 날이 영상처럼 머리에 떠올랐다.
그 날 노 옥진은 이 여인처럼 온힘을 다해 내 어깨를 껴안고, 전율과 경이로움에 몸을 떨며 문을 열었지.
마침내 몸이 하나로 합쳐졌을 때, 나는 본능적인 희열보다도 그녀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며 죽을 때까지
그녀를 사랑하고 아끼겠다는 다짐을 했었지. 순결을 바친 후 노옥진은 울었어. 그런데 그 눈물이 행복감과
안도감과 소유에 대한 만족의 기쁨에서 나온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기까진 8년이나 걸렸지.
그 때 그 눈물은 노옥진이 나를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는 슬픔 때문에 흘린 눈물이었어. 아아, 그 눈물의
의미를 아는 데 8년이나 걸리다니.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태운 불꽃이었다니.
왜 나는 그 때 그것을 깨우치지 못했던가.
만해 한용운 님의 시집을 받아 읽고도 알지 못했다니. 나는 바보였었어. 천하에 둘도 없는
백수웅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갑자기 열기가 식고 마음이 차갑게 얼어붙어 버렸다.
미친 듯 가슴에 매달려 살을 비벼 대는 여인을 조용히 밀어 냈다.
'이 여인에게 또다시 불행을 안겨 줄 수는 없다. 혼자 사는 외로움을 풀려고 내게 의지하려 하지만,
나도 나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고 있다. 만일 며칠 후 나의 죽음을 알게 된다면
이 여인은 또 얼마나 비탄에 젖을까.'
"왜 이래? 정말 내가 싫어? 어디가 싫지? 그렇게 못생긴 편도 아니잖아. 돈도 있어.
과부년이 죽어라 하고 모았으니 얼마나 많이 모았겠어. 밀어 내지 마. 날 받아 줘, 응?"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애타게 호소하고 있었다.
"내 마음을 몰라서 그래. 총각이 너무 좋았어. 같이 살아 주지않아도 좋아.
날 받아 줘. 힘껏 안아 줘. 아, 미치겠어."
백수웅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여인을 밀어 내고 옷을 주워 입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저도 아주머니가 좋아요. 밤에 잘 때는 바로옆에 있는 것처럼 체취를 느끼곤 했죠."
"그럼, 왜 이러는 거야?"
"잠깐 기다리세요. 할 얘기가 있으니까."
백수웅은 구석에 있는 플라스틱 가방의 비밀 다이얼을 돌려, 그 속에서 한 덩이의 신문 뭉치를 꺼내 들었다.
백수웅의 손에 들려 있는 신문 뭉치를 여인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게 뭐지?"
"돈입니다."
"돈?"
돈이다. 기사키 하쓰요로부터 받은 테러 자금의 일부다. 테러는 막바지로 접어들었고,
돈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그 일부를 선량하고 외로운 이 여인에게 선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 밤에는 허열과 그 부하들을 역습 할 것이고, 그보다 더 급한 것은
노옥진으로부터 받은, 회담장이 담긴 필름을 현상하는 일이다.
백수웅은 돈을 핑계로 이 여인을 내보낼 작정이었다.
"아주머니가 죽어라 하고 돈을 모았듯이, 저도 피처럼 생각하고 돈을 모았습니다.
한 번도 품에서 꺼내 본 일이 없는 돈이죠."
"이 돈으로 뭘 어쩌자는 거야?"
"저는 아주머니의 진심을 오늘 알았어요.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결 혼을?"
그녀의 눈이 또다시 휘둥그래졌다. 얼빠진 듯 한동안 백수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게 정말이야? 놀리는 건 아니지?"
"아닙니다. 저도 지금까지 혼자 외롭게 떠돌아다녔죠. 돈이 있어도 없는 척하며 돈 하나만 의지해 살아 왔습니다.
그러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기술도 많고요. 지금은 워커힐에 취직해 다니지만, 곧 장사를 시작할 겁니다.
아주머니, 같이 돈벌어요. 하지만 이 동네는 싫어요. 아주 낯선, 아주머니가 전혀 불편해하지 않을 곳으로
가고 싶어요. 우선 2백만 원 드릴테니, 오늘 안양이나 의정부 같은 데 가서 집 좀 알아보고 오세요."
" "
여인은 꿈꾸는 듯한 얼굴로 백수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지만,
신문지 속에서 시퍼런 만 원권이 두 뭉치나 쏟아져 나왔다.
"자, 저 좀 할 일이 있으니 빨리 다녀오세요. 저녁 5시까지 알아보고 돌아오면 됩니다."
"설마 도망가는 건 아니겠지?"
"허허 2백만 원이나 드렸잖아요. 마음에 드는 집 있으면 계약하고 오십시오."
"알았어. 그럼 갔다 올게."
두말할 필요가 없다. 거액을 믿고 맡기는데도 믿지 않는다면 그건 나쁜 년이다.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얼굴이 금세 싱싱하게 살아오르고 있었다. 불 줄 안다면 휘파람이라도 획획 불고 싶었고,
날 줄 안다면 하늘이라도 펄펄 날고 싶었다.
그녀는 밖으로 나가 의정부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백수웅은 서둘러 옷을 입고 종로 3가 단성사 부근으로 갔다. 대형 사진 자료상이 밀집해 있었다.
그는 제법 큰 점포로 들어가 흑백 사진 현상에 필요한 화학 제품과 도구 몇 가지를 사 들고
다시 은신처로 돌아왔다. 안채의 커튼을 뜯어 창을 가려 암실을 만들고, 알루미늄 현상 탱크에 물을 담았다.
그리고는 현상액 마이크로돌(Microdol)을 풀고 필름을 현상하여 인화했다.
불과 2~3분 사이에 인화가 끝났다. 사진들을 확대경으로 살펴 갔다.
야산 숲 속에 커다란 양옥식의 별장이 보였고, 그것이 점점 커지더니 9장째 사진에는 한 대형 회의실이 보였다.
대형 테이블 한가운데 두 개의 작은 깃발이 꽂혀 있고, 다음 장에는 확대된 깃발이 두 개의 깃발이 테이블
한가운데 나란히 서 있는데,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태극기와 인공기였다.
놀라운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테극기와 인공기가 있는 테이블 뒤에 사진이 두 장 걸려 있는데, 멀리서 보아도 그것은 남한의 박정희 대통령과
북한의 김일성 주석 사진이 분명했다. 마지막 장에 두 개의 사진이 확대되어 찍혀있어, 더욱 분명히 볼 수 있었다.
"털썩."
백수웅은 들고 있던 사진들을 놓아 버렸다. 팔과 다리의 힘이 풀려,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었다.
쌓이고 쌓였던 긴장과 피로가 한꺼번에 풀려 버리는 것 같았다. 온양 별장, 그 별장이 이미 남북
회담장으로 꾸며져 있는 것이다.
"그랬었구나."
두 다리를 길게 뻗은 채 넋 없이 앉아 있던 백수웅이 혼자 중얼 거렸다. 회담장은 온양 별장까지 합쳐
모두 세 곳에 설치되었다. 그런데 남한 당국은, '남북 회담은 서울에서'라는 고정 관념을 깨 버리고
지방인 온양의 한 별장에 회담장을 마련한 것이다. 그리고 위장된 회담장을 이후락 부장과 허열이
드나들며 설쳐 댔던 것이다.
"당할 뻔했어."
정말 꼼짝 없이 당할 뻔했다.
만일 영빈관이나 에메랄드를 기습했다면, 자신은 텅 빈 호텔에서 아무런 뜻도 없이,
녀석들이 갈겨 대는 총알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개자식들."
그는 앉은 채 다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분풀이를 오늘 밤 할 것이다.
백수웅은 필름과 사진, 현상, 인화 도구 등을 들고 밖으로 나가 쓰레기통에 넣고 불을 질렀다.
박정희 . 김일성의 얼굴과 태극기 . 인공기가 함께 어우러져, 널름거리는 불꽃 속에서 타기 시작했다.
그것을 바라보며 백수웅은 중얼거렸다.
"불타 버려라, 불타 버려라. 알량한 이념도, 더러운 권력도, 전쟁도, 미움도, 야망도 모두 불타 버려라.
그리고 그 잿더미위에 새 장미꽃을 피워라.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며, 질시도 적대감도 없는 세상을,
그렇게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피워라.오라, 우리들이 꿈꾸는 새 세계여. 힘으로 누르지 않고
무력으로 침공하지 않으며, 누구나 밝게 사는 새 세상이여, 오라. 와서 우리와 함께 살아라."
이 때 누군가가 그의 등 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불타는 사진을 바라보며 망연히 서 있는 백수웅은, 뒤로 접근해오는 사람의 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다리를 움켜잡는 것을 느끼고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갑작스러운 접근이었다.
그의 눈이 또다시 놀라움으로 팽창되었다. 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너 너, 미라 아니냐?"
"네, 아저씨. 왜 집에 없었어요? 몇 번이나 찾아왔었는데."
"몇 번이나 찾아왔었어?"
백수웅은 재빨리 주위를 살펴보았다. 오가는 행인 외에 별달리 주의해야 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미라를 번쩍 들고 빠른 걸음으로 방으로 뛰어들었다.
"잘 있었니? 그래, 아저씨는 왜 찾았지?"
"보고 싶었어. 옛날 얘기나 동화 얘기도 듣고 싶었고, 아저씨는 나빠요.
미라는 아저씨가 보고 싶었는데, 아저씨는 내가 안 보고 싶었나 봐."
"그래, 그래, 미안하다. 하지만 요즘은 아저씨가 너무 바빠요. 아 참, 미라야. 부탁 하나 할까?"
"부탁?"
아이는 반짝이는 눈으로 백수웅을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는 발개진 아이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아, 따가워 수염 좀 깎아요. 히히히"
백수웅이 잠시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본 후 비로소 입을 열었다.
"부탁이 있는데, 오늘부터 일곱 밤만 자면"
"일곱 밤? 그럼 29일 아냐?"
"그래. 29일이 아저씨 생일이거든. 그런데 그 날은 바쁘니까 28일 저녁 8시경에 몰래 나한테 오지 않겠니?
생일 전날 저녁, 미라와 함께 밥을 먹고 싶구나."
"28일 저녁 8시? 좋아요. 꼭 올게요. 그 대신, 지금 백설 공주얘기 해 줘."
"안 돼. 오늘은 아저씨가 굉장히 바쁘거든. 오늘은 그냥 돌아가. 그리고 28일 저녁 때 몰래 잠깐만 나와."
"응!"
"참, 아빠는 지금 뭐하고 계시니?"
"아빠? 아빠는 집에 잘 안 들어와. 그런데 엄마는 집에서 꼼짝도 안 한다. 맨날 전화기에만 붙어 있어.
그래서 심심해 죽겠어. 피아노 학원도 못 가게 하고, 가정 교사도 내쫓고"
"그래, 알았다. 엄마한테는 비밀이다. 28일 저녁에 몰래 나오는거."
"알았어."
백수웅은 미라를 서둘러 내쫓았다. 만일 노옥진이 찾아 나서다 이 곳에서 미라가 나오는 것을 보거나
또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면 기절을 할 것이다. 미라가 돌아간 후 백수웅은 미라의 처리 문제를 생각했다.
온양의 비밀 회담장을 기습할 때 미라를 데려갈 작정이었다. 만일 또 다른 복선이 깔려 있거나 허열이 추적해
온다면, 허열이 보는 앞에서 미라를 살해할 것이다.
이미 허열에게, 자신의 행동에 간섭하지 말라는 충고를 해 두었기 때문이다.
잠시 앉아 있던 백수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을 살펴보았다. 눈초리가 매섭게 빚나고,
신경은 있는 대로 날카로워졌다. 누군가가 미라와의 은밀한 데이트를 눈치챈 것은 아닌가. 머리좋은 허열이
벌써 부하들과 합세하여 집을 포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미라를 찾아 헤매던 노옥진이 기어이
은신처를 찾아 내 쳐들어오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밖은 몇몇 마을 사람들과 도선사(道詵寺)를 찾는 불자(佛
子)들만 오갈 뿐, 경계할 만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별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백수웅은 오토바이 헬멧을
눌러 쓰고, 주머니에 한 다발 돈을 넣고, 주인 여자에게는 내일 오후나 밤 늦게 돌아온다는 메모를 남긴 후
구멍가게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미친 듯 시내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는 오늘 밤의 작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같은 날 오후 1시, 장충동 특수대.
1시간 가까이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아 회의를 하던 수사 팀 요원들이, 책상 위의 서류들을 쓸어 모아
각기 자신들의 캐비닛 속에 깊숙이 넣었다.
허열의 지시에 따라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총은 다들 휴대했지?"
"네!"
"가능한 한 발사는 하지 마라. 사살보다는 생포에 주력하라.
만일 부득이할 경우 부상을 입혀 탈주를 저지시켜라. 모두 특등 사수이니 실패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일행이 우르르 밖으로 몰려 나갔다. 허열과 새로 합류한 박상남, 그리고 백수웅에게 맹렬한 적개심을
품고 있는 최일우였다. 허열이 작전을 변경시켜, 두 사람을 아침 일찍 수사 본부로 나오게 했던 것이다.
이들은 지프를 이용하지 않고 평범한 승용차인 포니를 이용하여 워커힐로 달려갔다.
워커힐 정문에 도착한 뒤에도 곧바로 들어가지 않고, 구내 전화로 영선과장을 밖으로 불러 냈다.
세 명의 수사관들을 바라보며 영선과장 김일남은 어리둥절해했다.
"웬일로?"
김일남은 중앙정보부 신분증을 보이는 박상남을 겁먹은 얼굴로 바라 보았다.
"원예를 담당하는 사람 이름이 무엇이죠?"
"네, 윤재구 주임인데요."
"우리가 찾아온 걸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고, 온실을 담당하는 직원 이름을 알아보시오. 온실에서 먹고 자는 사람"
영선과장이 어디론가로 부지런히 전화를 걸어 한참이나 대화를 주고 받았다.
"네, 김영태라는 임시직 직원인데, 오늘은 몸이 아파 밤 9시경에나 들어올 거라는군요."
"좋소. 그러니까 그 자는 지금 여기에 없다는 거죠?"
"네. 얼마 전 전화가 왔는데, 밤 9시경에나 들어갈 테니 온실열쇠를 영선 사무실 숙직자에게 맡겨 놓으라고 했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우리를 총지배인에게 안내해 주시오."
영선과장 김일남을 태운 소형 승용차가 정문 경비실에서 본관을 향해 질주해 들어갔다.
현관에 내린 이들은 2층에 있는 총지배인(당시는 사장 제도가 아니라 총지배인 제도로 운영하고 있었음.)실로
몰려 들어갔다. 영선과장이 이들을 응접실에 세워 놓고 신의균 총지배인 집무실 로 들어갔고,
잠시 후 놀란 얼굴로 다시 튀어나왔다.
영선과장 뒤에 역시 놀란 얼굴의 총지배인이 보였다.
"허 검사님 , 여기까지 웬일이십니까?"
"상의할 일이 좀 있어서요."
"들어오십시오, 제 방으로."
이들은 7평의 깨끗하게 정리된 총지배인실로 들어섰다.
"혹 에메랄드에 부족한 점이라도?"
"아닙니다."
이 때 영선과장이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돌아가려 했다.
"아니오. 과장님도 함께 계셔야 합니다."
영선과장은 아직도 긴장이 풀리지 않는지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허열이 손짓하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불순 분자가 이 회사에 위장 취업했소."
"불순 분자? 그럼 간첩?"
"아니오. 그런 건 묻지 마시오. 김영태라는 온실 담당에 대한 인적 사항을 알아보아 주시오.
담당 주임이 자세히 알 거요."
"아닙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영태는 저를 직접 찾아와 원예에 경력이 있다며 일자리를
달라고 했습니다. 원예 전문가가 부족한 상태라 윤 주임이 직접 테스트해 보았는데, 희귀종
열대 식물 이름은 물론 나이까지, 병이 생겼을 때의 치료법까지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선 일용자로 일 주일 근무케 한 다음 잡급(임시직)으로 채용키로 했습니다."
"서류는?"
"자양동 138번지 주민등록 등본을 가져왔습니다. 이름은 김영태, 나이는 31세로 되어 있었죠.
농업 고등 학교 출신인데, 졸업 증명서, 호적 등본, 학력 증명서는 회사 규칙에 따라 이 달 31일까지
제출케 했습니다. 원래는 서류가 접수된 뒤에 작업을 시키는 것이 원칙이지만, 워낙 일손이 달려
곧바로 작업장에 투입시킨 겁니다."
"좋소. 그 자가 바로 불온 사상을 가지고 있는 자요. 다행히 오늘은 쉰다고 하니,
그 자가 근무한 온실 현장을 수사하고 싶소. 안내하시오."
영선과장이 앞장 서고 허열 혼자 그의 뒤를 따랐다. 허열도 회사측의 협조를 받아 직원용 작업복으로 갈아 입었다.
외부 직원들은 이 엄청난 현장 수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대형 온실은 화초와 꽃 향기로 가득했다. 싱그러운 향내와 마찬가지로 화분들도 아주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어,
마치 부대의 내무 시찰을 하는 기분이었다.
백수웅이 사용하던 침대에는 모포가 질서 있게 정돈되어 있고,
여분의 작업복도 군복처럼 깨끗이 세탁된 채 다림질까지 잘 되어있다.
"아주 깔끔했죠. 마치 갓 제대한 장교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허열은 온실과 온실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숲, 그리고 7~8미터 위쪽에 있는 한식당 명월관을 둘러보았다.
야산 중턱에 위치한 온실은, 아래로는 후문과 영선과 사무실로 이어지는 좁은 길이 있었고,
위로는 명월관과 이어지는 또 그런길이 나 있었다.
온실에서 나온 허열은 박상남과 최일우를 양쪽 길 입구에, 자신은 온실 정문에 잠복하기로 작전을 세운 다음,
김 과장과 함께 총지배인실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총지배인을 이해시키기 위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배인님, 김영태는 가명이며 그의 본명을 밝힐 수 없음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의 위장 취업에는
어느 누구의 책임도 뒤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못박아 놓고 싶습니다. 아무도 문책하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그 자는 오늘 밤 9시 전후해서 온실로 되돌아온다는 연락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7시경부터 잠복해 있다가
체포나 사살할 작정 입니다만, 이 곳은 내외국인 관광객들이 모이는 곳이라 가능하면 총성을 내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렇게까지 배려해 주셔서 정말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앉아 있던 신의균 총지배인이 다시 허리를 굽혔다.
어려서부터 관광계에 투신한 이 노신사를 업계 사람들은 왕보이(King Hotel Boy)라고 불렀다.
"자, 그럼 호텔 방 하나만 마련해 주십시오. 저녁때까지는 휴식을 취하고 있겠습니다."
허열 일행은 호텔측에서 제공한 더글러스 특실(미국 NASA의 최초 우주인 글렌 중령이 투숙했던 곳)에 몸을 풀었다.
"자, 다들 마음놓고 휴식해. 하지만 오늘 밤을 놓쳐서는 안 된다. 7시쯤 온실을 에워싸고 있으면
9시를 전후해 녀석이 나타날 것이다. 어떻든 가능한 대로 사살은 피하도록, 알겠지?"
"네. 목숨을 걸고 녀석을 끝장내겠습니다."
샤워를 한 후 이들은 침대 하나씩을 차지하고 긴 휴식에 들어갔다. 훈련이 잘 되어 있어 눕자마자 코들을 골아 댔다.
이들이 깨어난 것은 정확히 오후 6시. 세 사람은 명월관으로부터 배달된 불고기와 냉면으로 배를 채우고,
영선과 김 과장에게 연락하여 온실 상황을 체크했다. 그런데 백수웅이 돌아왔다는 보고는 받을 수 없었다.
허열은 영선과 직원들과 온실 관련자들을 모두 퇴근시키도록 조 치한 다음,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6시 50분
온실을 향해 출발했다. 온실을 중심으로 한 아래위 도로 입구에 박상남과 최일우를 매복 시켜 놓고,
자신은 온실 정문 맞은편 숲 속에 몸을 감추었다. 꼼짝도 하지 않고 두 시간을 보냈다.
참으로 놀라운 체력이며 인내였다. 허열과 최일우, 박상남은 9시가 가까워지자 더욱 긴장되어 갔다.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각이 되었다. 밤 9시가 된 것이다. 초침이 9시 정각을 지날 때 멀리서 부르릉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왔다. 오토바이의 엔진음이 가까이 들려 오자, 허열과 그의 부하들은 한 층 더
긴장된 표정으로 권총을 움켜잡았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오토바이의 주인공이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엔진음이 명월관 광장에서 멈추었고, 이어 외눈 해드라이트마저 꺼져 버렸다.
"녀석이다!"
백수웅이 내려올 것이다. 녀석이 온실로 들어가면 습격하여 체포 할 것이다.
몇 번이나 체포에 실패한 허열은 다시는 쓰라린 실패의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며 이빨을 갈았고,
박상남은 그 나름대로 일등공신이 되겠다며 결의를 다졌다.
최일우의 결심은 좀더 단호했다.
"개새끼, 사타구니에 콩알을 박아 남성우 선배의 원수를 갚아 주겠다."
한 사내의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났다. 그림자의 사내는 한동안 움직임을 멈춘 채 숲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자세는 무려 5분이나 지속되었다.
'녀석이 혹 우리의 잠복을 눈치챈 것은 아닌가?'
허열이 초조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잔뜩 웅크린 채, 5분 동안이나 언덕 위에 서 있는 그림자를
의혹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침내 사내가 한 걸음 좁은 길로 내려섰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잠복자들을 향해 걸어왔다. 숲 속에 숨어 있는 박상남의 코앞을 스쳐 갔다.
모자로 얼굴을 잔뜩 가린 채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박상남은 사내의 얼굴을 향해 한 방 갈기고 싶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절대 먼저 공격하지 마라. 위험한 놈이다. 온실에 들어가면 내가 공격 신호를 내릴 것이다.
잘못하면 녀석이 먼저 눈치챌 것이다. 총알보다 칼이 먼저 날아들지도 모른다. 절대 명령에 복종하라.'
이미 백수웅에 대해 전문가가 되어 버린 허열의 명령이었다.
박상남을 스쳐 간 사내가 온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불과 5~6 미터 앞 숲 속에는 역시 잔뜩 웅크린
허열이 지키고 있었다. 그림자의 사내가 몇 번이나 주위를 돌아본 다음 주머니에서 무엇 인가를 꺼내더니
자물쇠를 주물럭거렸고, 잠가졌던 온실문이 순식간에 활짝 입을 열었다. 사내가 재빠른 동작으로 들어갔다.
문도 닫지 않고 불도 켜지 않았다.
허열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다. 우리가 잠복한 것을 모른다면 들어가자마자 불을 켤텐데 또 온실 열쇠는 당직자가 보관하고 있어
온실보다 사무실을 먼저 찾아갔어야 하는데'
도무지 녀석의 속셈을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온실 안에서 덜컹 화분 건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허열이 손짓하여 두 부하를 집결시켰다.
"녀석이 들어갔다. 만일 문을 나서면 다리를 쏘아 쓰러뜨리고, 나오지 않으면 5분 후 공격한다.
자수를 권해서 듣지 않으면 부상을 입혀라. 누군가에게 칼이 날아오면 즉각 발사하라.
우리 셋 중 하나만 다치면 녀석을 체포할 수 있다."
첫댓글 감사히 잘읽고 갑니다~` 긴장의 연속이군요``
백수웅이 죽으려고 온실안으로 들어온것 같지는 않고....온실안에 남자는 누구일까?
긴장되네요..
감사히 잘봤읍니다~
즐감요 ~~~
잘 읽고갑니다~~
감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