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바(모스크바의 러시아식 발음)에 봄이 왔다. 따뜻한 햇살 아래로 산책을 나선 사람들의 표정이 더없이 행복해 보인다. 나 또한 정말 오랜만에 가벼운 차림으로 외출을 했는데, 두꺼운 옷과 부츠에서 해방된 내 몸이 날아갈 듯 가볍게 느껴진다. 아! 봄이구나. 그러나 내일부터는 또 추워진다고 하니 아직도 완전한 봄이 되려면 더 기다려야만 한다. 러시아의 겨울은 지루할 정도로 길다. 시월 말부터 사월 초까지 거의 육 개월이 겨울이다. 이때는 일조량도 적고, 영하 이십 도 아래로 내려가는 일이 많으며, 자주 눈이 내려 주위가 온통 은세계로 변해 버린다. 이 길고도 혹독한 겨울을 러시아 사람들은 어떻게 견뎠고, 또 견디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이들은 나름대로 여유로웠다. 그것은 내게 충격이었다. 처음 이곳에 와서는 온갖 건물들의 장대함에 압도되었다. 그 다음에는 문화의 풍성함과 그 깊이에 기가 질리기도 했다. 모든 것이 획일화되어 있을 것이라는 선입견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러시아 문화의 독자성과 특징은 무엇보다도 러시아의 자연 환경과 지리적인 요인에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광활한 영토와 그에 따른 기후와 계절 그리고 백야와 같이 다른 지역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한 조건들은 러시아 사람들의 심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Among the first ballet teachers to come to Russia was Jean Baptist Lande.
러시아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
그러나 오늘날, 세계에서 러시아의 지위는 러시아 자체보다는 많은 부분 미국과 서유럽 자유 세계의 눈에 의해 매겨졌다. 미국과 서유럽에서 나온 러시아에 대한 여러 논의들과 담론들은 우리를 여전히 러시아 문화에 대한 편견과 오해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나 또한 러시아에 대한 근거 없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더 일찍 용기를 내지 못하다가 지난해에야 이곳 모스크바로 오게 되었다. 오랫동안 무대에 서 왔고, 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늘 러시아의 체계적인 발레 교육 제도를 깊이 연구해 보고 싶은 열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러시아 발레를 온몸으로 느껴 보고자 하는 욕심도 발동한 것이다. 물론 내가 러시아 발레를 접한 것은 오래 전이었다. 천구백칠십년대 중반 일본에 다녀오신 아버지는 내게 마야 플리세츠카야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볼쇼이 발레단의 <곱사등이 망아지>란 작품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선물로 주셨는데, 그 길로 나는 그이의 영원한 팬이 되어 버렸다. 그이의 작품을 구할 수 있는 대로 구해서 보고 또 보았다.
<카르멘>, <안나 카레니나>, <바흐치사라이의 샘> 들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지난해 모스크바에 오자마자 집을 구하러 이곳 저곳 둘러보고 있을 때, 안내를 하던 사람이 트베르스카야 거리에 유명한 발레리나의 집이 나온 게 있는데 보겠느냐고 했던 것이다. 나는 호기심이 생겨 그러자며 따라 나섰다. 그 집은 민스크 호텔 건너편에 있었는데, 그 집이 바로 마야 플리세츠카야가 살았던 곳이라는 것이다.
나는 놀랍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드디어 러시아에 온 것을 실감하였다. 그이는 일흔 살이 넘은 지금도 공연 활동을 하고 있다. 그이의 열정적인 삶은 곧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데, 그이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싫어하는 사람들로 확실히 구분되어 평가가 된다. 흔히들 그이와 갈리나 울라노바를 견주는데, 지상의 춤과 천상의 춤으로 구분하여 말하고는 한다. 옛날 낭만주의 시대의 화니 엘슬러와 마리 탈리오니를 그렇게 견주었듯이 말이다. 마야 플리세츠카야와 갈리나 울라노바뿐 아니라 예카테리나 막시모바, 류드밀라 세메니아카, 나탈리아 베스메르트노바의 춤을 비디오를 통해 볼 수 있었다. 또한 옛 소련에서 망명한 루돌프 누레예프, 나탈리아 마카로바, 미하일 바리슈니코프 들의 뛰어난 춤은 우수한 러시아 발레의 전통을 내게 깊이 새겨 주었다. 이때까지도 러시아는 머나먼, 실체가 느껴지지 않는 땅으로 여겼었다. 그런데 내게 러시아 발레와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옛 소련이 붕괴된 뒤, 한국과 러시아의 수교를 기념하여, 천구백구십일년 볼쇼이 발레단의 마리나 콘드라체바가 우리나라에 온 것이다. 그이는 국립발레단의 <돈 키호테> 안무를 맡았고 나는 주역인 키트리 역을 맡게 되었다. 마리나 콘드라체바는 러시아 발레 역사에서 가장 서정적인 발레리나로 손꼽혔던 이였으며, 볼쇼이 발레단의 지도를 맡고 있는 뛰어난 예술인이다. 그이의 남편인 발레리 또한 과거 볼쇼이의 캐릭터 댄서 출신으로, 둘이 함께 와서 국립발레단원들에게 직접 시범을 보이면서 지도를 해주었다. 내게는 이 공연이 러시아 발레의 전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문화가 있어 여유 있다
모스크바의 첫인상은 빛 바랜 컬러 사진을 보는 것 같았다. 중간 색조를 많이 사용해서 그런 것인지, 청소를 하지 않아 먼지를 뒤집어쓴 것인지 도시 전체가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때 보았던 몇몇 러시아 사람들의 무뚝뚝함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곧 모스크바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이곳의 독특한 문화에 마음이 끌렸다. 모스크바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곳이라고 누군가 말하였는데 사실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현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미래를 위하여 지나치게 현재를 희생시키지 않는다. 여가도 다양한 방법으로 즐기면서 산다.
그이들의 산책 문화만 봐도 알 수 있다. 거개의 러시아 사람들은 집안에서 개나 고양이를 즐겨 키운다. 특히 개에 대한 사랑은 각별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개를 앞세워 산책을 한다. 도시 곳곳에는 고리키 공원을 비롯하여 산책을 할 수 있는 곳이 많다. 러시아 사람들은 어찌나 개를 사람 대하듯 하는지, 개로 태어난다면 우리나라 아닌 러시아에 태어날 일이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아무리 날이 추워도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거리를 걷는 러시아 여자들의 당당함이다. 남녀 차별이 거의 없는 이곳의 여자들은 말과 행동에서도 거침이 없어 보인다. 처음에는 그런 모습에 당황도 했지만 솔직 담백한 그리고 꾸밈없는 그이들의 모습이 오히려 마음에 든다. 모스크바 시민들은 주말이나 휴가 때가 되면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다차(개인 소유의 별장)나 시나토리(대단위 휴양소)에서 휴식을 하는데, 다차에 머물면서 일 년 동안 먹을 감자, 채소들을 가꾼다. 아마 다차에서 나오는 것으로 부식을 해결하는 것 같다.
러시아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것과는 아주 다르게 살고 있다. 분명 달러로 표시한 일인당 국민 소득으로 보면 우리보다 처진다고는 하지만, 그이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삶의 질에서는 우리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일 경우도 많다. 특히 그이들에게 예술은 지금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삶의 동반자와도 같다. 늘 책을 가까이하는 그이들의 모습은 우리의 뒤떨어진 독서 문화를 생각나게 한다. 곳곳에 큰 책방들이 있고, 길거리에도 지하도의 상가에도 책방이 있었다. 미국 다음의 출판 대국이라는 사실은 그이들의 모습을 볼 때 쉽게 다가온다. 게다가 수많은 극장,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들은 도시 전체에, 시민 하나하나에게 예술의 향기와 에너지를 불어넣고 있다.
부러운 공연 시설들
모스크바에만도 영화관을 빼고 이백여 개의 공연예술전용극장이 있다. 발레와 오페라 극장, 연극극장, 뮤지컬 극장, 어린이뮤지컬 극장, 음악전용극장, 서커스 전용극장, 개나 고양이만 나오는 동물극장, 집시 극장들이 있는데 그 극장들은 저마다의 특성을 살려 레퍼터리 시스템에 의한 풍성한 공연물들을 제공하고 있다.
극장들의 입구는 여기가 과연 공연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될까 의심이 갈 정도로 단순하거나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거개의 경우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 넓고 화려한 실내를 보고 놀라게 된다. 물론 겉모습과 실내 공간이 다 화려한 볼쇼이 극장과 크렘린 극장도 있기는 하다. 어느 극장에 가 보더라도 공연은 어느 수준 이상으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교육시스템으로 키운 예술인들에 의해 모든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다.
서커스 단원들도 모두 서커스전문학교 출신의 베테랑들로 단순한 묘기만 부리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종합 예술을 지향하고 있었다. 게다가 서커스 전용극장의 시설은 말할 수 없이 훌륭했다. 그 공연을 보며 오래 전 우리나라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동춘 서커스 단원의 자조 섞인 푸념이 생각났다. 한국이 아닌 서커스가 대접받는 나라에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얘기였다. 천막극장 아닌 서커스 전용극장에서 공연해 보고 싶다던 그 단원의 말이 내내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지금 내가 소속한 스타니슬라프스키 극장은 오페라와 발레 공연을 주로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레퍼터리를 많이 볼 수가 있다.
발레의 경우 고전발레는 물론 <말괄량이 길들이기>, <살로메>, <에스메랄다>, <눈처녀>, <곱사등이 망아지> 들이 있고 오페라의 경우 <타이스>, <에르나니>, <카르멘(현대적인 해석에 의한)>, <보리스 고두노프>, <예브게니 오네긴> 들이 있는데 작품마다 무대장치와 연출이 볼 만하다. 단원들과 극장 직원을 위한 아담하면서도 분위기 있는 식당에서는 싼 값에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아프면 마사지를 받을 수 있는 시설이 있다. 넓은 로비에는 이 극장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많은 사진이 걸려 있다. 지금의 주역들은 물론이고 과거의 주역들, 예술 감독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과거의 주역들은 거개가 다 이 극장에서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다. 이러한 철저한 위계질서가 바로 러시아 사람들의 예술인에 대한 사랑과 존경으로까지 이어지는 듯하다. 모스크바에 처음 온 사람들은 키오스크(길거리 티켓 판매소)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놀라는데, 그것이 이곳 시민들의 일상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된다. 대부분의 극장에는 카사라고 부르는 예매창구가 마련되어 있어 언제고 편리하게 티켓을 살 수 있다. 그 밖에도 지하철역 입구와 역 구내, 지하도에서도 티켓을 판다. 길을 가다가도, 퇴근길 지하철 역 안에서도 쉽게 예술과 만날 수 있게 된다. 그 가운데에서도 발레 공연에 대한 러시아 사람들의 관심은 각별하다.
한 예로 볼쇼이 발레의 티켓은 구하기가 꽤 어렵다. 더구나 좋은 자리에서 보려고 한다면 더욱 그렇다. 모스크바에 잠깐 다녀가는 외국 관광객들의 일정에는 볼쇼이 발레 관람이 필수인가 보다. 그래서인지 보통 사람들은 표 구하기가 더 어렵다. 바꿔 말하자면 볼쇼이 발레의 인기는 대단하다. 암표라도 사서 보겠다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좋은 자리의 표는 미리 빼돌려 몇 배나 비싼 값에 판다. 그러나 좋지 않은 자리는 남아 있으므로, 오페라 글라스에 의지하여 보는 수밖에 없다.
나는 바실리예프가 개작한 <백조의 호수>를 시작으로, 그라초바가 주역으로 나오는 <지젤>, 그 밖에 <쇼피니아나>, <카사노바>, <호두까기 인형>, <레 실피드> 그리고 요즈음에는 발란신의 신고전주의 작품인 <아곤(스트라빈스키 작곡)>, <모찰티아나(차이코프스키 작곡)>, <심포니 디 장조(비제 작곡)> 또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보리스 에이프만이 볼쇼이를 위해 안무한 <러시아 햄릿> 들을 차례로 보았다. 러시아의 최고 무용수들이 있는 볼쇼이의 공연은 볼거리가 충분하다. 아직도 니나 아나니아슈빌리는 건재했고, 스테파넨코의 춤은 일품이었다. 특히 군무를 추는 이들의 조화는 뛰어났고 남자 무용수들의 늠름한 체격과 활기 넘치는 춤은 늘 박수 갈채를 받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발레를 사랑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보러 가는 것 자체를 즐긴다. 특히 기나긴 겨울밤에 이러한 공연 예술이 없었다면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에 공연예술이 발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발레, 순간 소멸의 예술
어쨌든 그이들은 극장에 가는 것을 아주 즐긴다. 어린 시절부터 식구들과 함께 다양한 발레, 연극, 오페라, 뮤지컬 들을 접하므로, 평생 동안 자연스럽게 예술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다. 극장마다 넘치는 관객을 보며 나는 속으로 놀랐고, 또한 부러웠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처럼 대부분 무료 초대권이 아니라 자기가 보고 싶어 돈을 내고 표를 사서 온 관객들이므로 공연 내내 진지하고 성숙한 태도로 관람을 하고 있었다. 또 하나 놀란 것은 극장에 올 때의 차림새다. 특히 겨울에는 샤프카라 부르는 털모자에 두꺼운 외투, 눈에 젖은 부츠 차림이다.
그러나 로비로 들어가면 반드시 겉옷과 모자를 맡기게 되어 있다. 극장마다 엄청난 규모의 옷 보관소가 있고(이곳에서는 반드시 외투를 맡기도록 되어 있음), 옷을 받아 걸어 주는 많은 직원이 있는데 이 일은 보통 할머니들이 한다. 겉옷과 모자를 맡기고 난 뒤, 가벼워진 이들의 모습은 파티에 온 듯 나름대로 멋지다. 어떤 이들은 가방 속에 예쁜 구두까지 준비해 와 갈아 신는다. 마치 공연에 출연하려는 사람들 같다. 로비마다 걸려 있는 큰 거울 앞에는 머리를 다시 매만지고 옷매무새를 확인하는 사람들로 언제나 붐빈다. 준비가 끝나고도 여유가 있으면 극장에 있는 식당에서 연어알과 버터를 얹은 빵과 차로 요기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자리를 찾아가 앉은 뒤 곧 있게 될 발레 작품의 프로그램을 살펴보며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어려운 현실을 잠시 잊고, 꿈을 꾸게 하는 장치로 특히 발레는 이들 러시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발레는 살아 있는 예술이다
러시아 무용수였고 미국에서 뉴욕시티 발레단을 태동시킨 조지 발란신은 내가 모르는 미래의 무용수가 내 작품을 발레로 추게 된다면, 그것은 이미 내 작품이 아닐 것이다. 내게 훗날은 없다. 내가 미친 듯이 작업한 멋진 발레는 지금 이 순간에만 있을 뿐이다. 바로 지금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춤은 살아 있는 육체에만 존재하는 것이고, 시간과 함께 사라지며, 어떠한 육체적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글이나 그림처럼 만든 이와 창작물이 따로 존재하는 예술 분야와는 달리, 발레는 그 둘을 나눌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숙명처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무용수를 꽃이라고 비유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도 백여 년 전의 발레 작품을 극장에서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안무가의 고유한 작품성은 보존하기 어렵다. 또한 처음 공연을 했던 무용수들의 춤 또한, 그 무용수가 무대를 내려오자마자 사라져 버린다. 단지 비평인들이 쓴 몇 줄의 글이나 사진 또는 관객들의 기억 속에 남을 뿐이다. 이렇게 허무한 발레 예술에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어 사람들은 열광하는 것일까? 어쨌든 발레는 이 속도 지향의 현대에 살아남은 힘겨운, 그러나 매혹적인 수공업 예술이다. 지금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의 충실한 도제식 전수로 발레는 순간순간 새롭게 피어나고 있는데, 이러한 전통을 충실히 지켜 오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러시아이다. 흔히 러시아는 고전 발레의 메카로 불린다. 사실 오귀스트 부르농빌이 세운 전통에 따라 완전히 독자적인 길을 걸어온 덴마크만 빼고 오늘날 세계의 모든 발레는 러시아 발레의 전통에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본래 러시아 발레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발레를 들여온 것이지만, 이것이 러시아에 옮겨 심어지자,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발레와는 전혀 다른 양식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뒤 서양의 발레는 모두 러시아에서 역수입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Ballets & *Revivals of Marius Petipa
프티파가 발레에 끼친 공적
러시아의 발레는 십칠 세기 초 표트르 대제가 수도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기면서 시작한 서유럽화 정책에서부터 시작한다. 그이는 무용을 민중의 오락으로 채택했고, 뒤를 이어 안나 대제는 천칠백삼십팔년 황실무용학교를 세워 프랑스나 이탈리아로부터 우수한 선생이나 안무가를 초빙하였으며, 예카테리나 이세 때에는 러시아 발레가 빠르게 발전하였다. 이때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는 발레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때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던 샤를 루이 디드로가 러시아로 오게 되었는데, 그이는 러시아 발레 역사에 굳건한 주춧돌을 놓아 준 인물로 러시아 발레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이는 무려 삼십일 년 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레 마스터와 안무가, 선생으로 활약하면서 스무 편 넘는 발레를 만들었고, 발레학교 교육과정을 확대하고, 교육체계를 완전히 재조직해서 이른바 상트페테르부르크 스쿨 스타일의 기초를 닦았으며, 황실극장의 발레 스타일을 개혁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또한 천팔백사십칠년 프랑스 출신의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를 초빙하면서, 러시아 발레 역사에 이른바 프티파 시대를 맞게 된다. 프티파는 육십삼 년 동안 러시아에서 살았으며, 오십육 년 동안 프랑스가 아니라 러시아의 무대에서 러시아 예술을 위해 헌신하였다. 천팔백칠십년에서 천구백오년까지 그이는 육십 편의 새 발레를 만들어 내고, 열일곱 편의 기존 발레를 보완하여 리바이벌했으며, 그 밖에도 삼십사 편의 오페라를 위한 춤을 구성하였다. 우리에게 친숙한 레퍼터리인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바야데르>, <잠자는 숲속의 미녀>, <레이몬다>, <해적> 들이 바로 그이의 안무를 따른 것인데, 그이는 작품마다 디벨티스망(줄거리와는 상관없이 다양한 발레의 기교를 보여 주기 위해 구성된 일련의 춤)을 넣었고, 스펙터클한 극적 구성을 보여 주고 있다. 오늘날 고전 발레는 곧 프티파의 발레라고 일컬을 정도로 그이의 발레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한편 그이의 발레는 구태의연한 형식에 얽매여 진부한 표현만을 계속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러시아 발레단의 탄생
천구백십사년 전통의 테두리 안에서 혁신을 단행하려던 포킨은 당시 새로운 예술의 창조에 열을 올리고 있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를 중심으로 한 예술인들에 합류하게 되고, 마침내 이것은 세계 발레 역사에 하나의 혁명을 가져오게 된다. 천구백구년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러시아 발레단은 파리에서 첫 공연을 시작했는데, 이것은 서양에서 러시아 발레의 창세기를 열어 준 기념비가 되는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발레는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어 다시 한번 역동적인 발전을 꾀하게 되었다. 이 발레단은 천구백이십구년 디아길레프의 죽음으로 단체가 해산될 때까지 세계 발레계를 이끌며 육십여 편에 이르는 새 작품을 공연하였다.
디아길레프는 다양한 예술 장르에 안목이 뛰어났던 인물로 새로운 사조를 표방하는 안무가, 미술인, 음악인들을 발레 작품에 끌어들인 공적을 남겼다. 그이는 포킨, 니진스키, 마신, 니진스카, 발란신 들의 안무가, 피카소, 마티스, 박스트 들의 미술인, 파블로바, 니진스키, 카르사비나들의 무용인, 스트라빈스키, 라벨, 사티, 프로코피예프들의 작곡가들을 작품에 참여시켰으며, 발레리나 중심의 양식화, 인습화된, 더구나 토슈즈에 의해 기교 중심으로 치우쳤던 발레를 개혁하고, 종합예술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지위에까지 올려 놓았다. 디아길레프 발레단이 해체되자 많은 안무가와 무용수들은 서유럽과 미국으로 건너가 예술 활동을 계속하였는데, 그것은 영국의 로열 발레단과 미국의 뉴욕시티 발레단을 태동시키고 프랑스의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Saint-Petersburg State Academic Ballet Theatre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차이
천구백십칠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뒤 발레는 옛 시대의 산물로 여겨져 무척 어려운 고비를 맞게 되었으나, 볼셰비키 정권의 초대 교육부 장관 루나카르스키 같은 지지자들의 적극적인 옹호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런 가운데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 발레학교 안에서는 아그리피나 바가노바가, 바가노바 교수법을 완성하였는데, 그이가 다져 놓은 이른바 바가노바 스타일은 무용을 배우고 있는 세계의 젊은 학생들에게 고전 무용이라는 학문의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그이의 지도 아래 성장한 마리나 세메노바, 갈리나 울라노바, 나탈리아 두딘스카야의 등장으로 발레는 더욱 활성화된다. 바가노바는 제자들이 정서적 표현과 형식의 엄격함, 그리고 단호하고 활력에 넘치는 공연 태도를 가지도록 끈질기게 노력했다. 러시아 발레 스타일, 곧 공간을 지배하는 풍부한 움직임의 폭을 익힌 무용수들의 활약은 발레의 수준을 더 끌어올리는 기폭제가 된다. 혁명 뒤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기자, 발레의 중심지도 이동하게 되었다.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활동하고 있던 울라노바, 라브로브스키 들의 많은 무용인들이 모스크바로 옮겨왔다. 그전까지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발레 스타일은 확연히 구분되었으나 혁명 뒤 예술인들이 잦은 교류를 가지면서 다양한 발레 스타일이 공존하게 되었다.
볼쇼이 발레단
볼쇼이 발레단의 알렉산더 골스키는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극 이론의 영향을 받아, 발레에 리얼리즘을 도입한 안무가이다. 이 리얼리즘은 오늘날 볼쇼이 발레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어 있다. 골스키는 포킨과 마찬가지로 학구적인 발레의 법칙을 단호하게 깨뜨렸는데, 때로 고전 발레에 대한 그이의 태도가 너무나 단호하여 반발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발레를 이 시대의 예술로 만들기 위해 실험과 실천을 멈추지 않았다. 이렇듯 골스키는 발레를 당대의 예술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온 힘을 다했으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이의 진보적인 정신만큼은 지금도 퇴색되지 않고 후세의 예술인들에게 전해오고 있다. <돈 키호테> 일 막의 생생한 연출이 그이의 작품이고, 또한 <백조의 호수> 일 막의 어릿광대 역이 그이가 창조한 역할이다. 기회가 된다면 이 두 작품을 꼭 보기를 권한다. 골스키 이후에는 본격적인 러시아 발레가 창작되었으나, 오히려 고전 발레가 더 대중화되고 환영받았다.
울라노바와 플리세츠카야를 비롯한 볼쇼이 발레단의 천구백오십육년 런던 공연과 천구백오십구년 뉴욕 공연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미국과 서유럽에 러시아 발레의 우수성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레닌그라드 키로프 발레단의 예술 감독이었던 유리 그리고로비치가 천구백육십사년 볼쇼이의 예술 감독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모스크바 스타일이 된 곡예적이고, 우아하며 고상한 작품들이 등장했고, 특히 활력이 넘치는 춤은 특기할 만하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스파르타쿠스>, <사랑의 전설>, <석화> 들의 작품이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은 블라디미르 바실리예프가 예술 감독으로 있는데, 예술 감독으로서의 그이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는 않은 것 같다.
마린스키 발레단
볼쇼이 발레단과 견주어 마린스키(옛 키로프) 발레단은 보다 섬세하고 고전에 충실한 스타일을 고집하고 있다. 그 까닭은 바가노바 학교에서 끈임없이 뛰어난 무용인들을 배출해 내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모스크바 사람들과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은 서로 자기들이 러시아 문화의 원류라고 다툰다고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역사의 질곡 때문에 여러 번 수도를 옮기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감정 대립 때문이 아닐까 한다.
발레 또한 모스크바의 볼쇼이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쟁이 있는데, 내가 볼 때에는 둘 다 장단점을 가지고 있어 어느 쪽이 더 나은지 판단하기 어렵다. 나는 모스크바에 살고 있지만 가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간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의 올가 교수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비행기를 이용하기도 하고 기차를 타기도 한다. 한 시간 걸리는 비행기보다는 아홉 시간 걸리는 기차 여행을 나는 더 좋아한다. 밤 열한시에 타면 다음날 아침 일곱시에 도착한다. 침대열차에는 사인용, 이인용이 있다. 값도 비행기보다 싸지만 무엇보다 자는 시간에 이동하니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서 좋고, 흔들리며 한없이 달리는 낭만이 있다.
아침에 내리자마자 역 구내에 있는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는 향기롭다. 갈 때마다 올가 교수, 나 형만 씨(전 국립발레단 주역이며 지금은 야콥슨 발레단 단원)가 고맙게도 마중 나와 준다. 올가, 루다, 아냐 들은 내가 우리나라에서 동덕여대에 있을 때 교환교수로 왔던 인연으로 알게 된 이들이다. 올가와 함께 바가노바 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시내에 있는 바가노바 학교 입구에서 코발료바 선생을 만나 반갑게 인사했다. 그 분은 내가 발레단 단원이었을 때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를 지도한 적이 있기 때문에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올가의 친구이기도 한 코발료바 선생의 수업을 참관하였는데, 군살이라고는 전혀 없는 길고 가는 몸의 러시아 소녀들이 전통적인 발레 교수 방법에 따라 훈련을 받고 있었다. 이곳에서 팔 년의 과정을 마친 뒤에는 마린스키나 말리 극장의 무용수가 되거나, 더 공부를 하기 위해 컨서바토리나대학으로 진학을 해서 오 년의 과정을 마친 뒤에 선생이 된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는 발레학교가 없다. 발레단은 생겨났지만 학교는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다. 세계적인 발레단의 경우 모두 부설 발레학교가 있고, 거기에서 발레단의 스타일이 형성 전수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에는 볼쇼이와 마린스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작은 규모의 실험적인 단체들도 점차로 생겨나고 있고, 현대 예술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모스크바에서 격월로 <발레>를 내는 잡지사에서는 천구백구십사년부터 해마다 한 차례씩 발레의 향연을 연다. 올해 들어서는 삼월 사일 스타니슬라프스키 극장에서 열렸는데, 기대하지 않고 극장에 갔던 나는 전설적인 발레리나 두딘스카야, 레페신스카야를 가까이에서 보았으며, 리에파와 그 밖에도 많은 현역 무용인들과 함께 공연을 지켜볼 수 있었다.
볼쇼이 발레단, 마린스키 발레단을 비롯해, 크렘린 발레단, 모스크바 발레단, 스타니슬라프스키 발레단, 러시아 발레단, 무소르크스키 발레단들에서 활약하는 무용인들의 춤을 한자리에 앉아 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고전 발레뿐 아니라 모던 발레까지도 무대에 올려졌는데, 한눈에 러시아 발레의 현주소를 가늠하게 해 주는 공연이었다. 이 페스티벌의 이름은 춤의 혼이었는데 말 그대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공연에 임하는 그이들의 모습은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나는 왜 슬프도록~이란 말을 썼을까? 모든 일이 다 힘겹지만 무용인의 길은 수도자의 길처럼 험난하기 때문이다. 급변하는 러시아의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무대를 지키고 있는 수많은 예술인들이 있기에 러시아의 발레는 앞으로도 희망이 있다.
김순정 글쓴이는 이화여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영국 라반 센터와 로열 무용 아카데미에서 연수했다. 국립발레단에서 주역을 맡았으며 한국발레연구회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동덕여자대학교 무용과 교수를 거쳐 지금은 러시아의 모스크바 스티니슬라프스키 발레단에서 연수 중이다. 동아무용 콩쿠르에서 대상을, 제오회 무용예술상에서 안무가상을 받기도 했다. <백조의 호수>, <처용>, <돈 키호테>, <카르멘> 들의 많은 작품에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