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녔던 법성포 남 공립 국민 학교
황 선 기(삼덕1회, 1949년)
법성면 삼당리 209번지 거주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해는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학도지원병제를 실시하여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모두 전쟁터로 내 몰던 시기였다.
이렇듯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당시 법성포 동 공립 국민 학교 부설 용덕간이학교가 6년제 학교로 승격되어 법성포 남 공립 국민 학교(삼덕 국민 학교 전신)로 문을 열어 처음으로 6년제 신입생을 모집했던 1943년 6월 7일, 나는 8살의 나이로 이 학교에 입학했다.
이제 내 나이 일흔 네 살이니 지금부터 65년 전에 법성포초등학교 공립 28회(통합 38회)와 같은 시기에 이 학교에 처음 발을 디딘 셈이다.
막상 60여 년 전 코 흘릴 적 옛 시절을 더듬어 가며 지워진 영상을 되돌려 보려니 그저 아마득하지만 그래도 또렷이 남아있는 자국이 있어 더듬더듬 더듬어 남아있는 일들을 추려서 부족한 글이지만 옮겨 보았다.
내가 입학했을 때는 학교가 용현마을 동편에 있었었고, 대충 논 한 방구(약 1,500평) 정도의 터에 목조 초가로 된 두 칸 교실과 작은 방만이나 하는 직원실이 교실 옆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교실 뒤편으로는 변소 1칸과 농기구 보관창고가 부속 건물로 있었고 초가삼간의 사택 한 채가 자리하고 있었다.
교사가 낡아 해마다 이엉지붕을 했었기 때문에 내가 입학하던 해에도 논을 많이 경작하는 집안의 아이들은 마름 두 장을, 이 보다 조금 적게 짓는 집안의 아이들은 마름 한 장을, 아예 논농사를 하지 않은 집안의 아이들은 새끼를 50발씩을 가져와 이것들을 모아서 눈 오기 전에 당시 후원회장이셨던 고 이용신 어르신이 주도하여 어린 학생들이 비바람, 눈가림하여 공부할 수 있도록 많은 애를 쓰셨다.
입학 당시 은사로는 오하라 선생, 단 한분이셨고, 이 분은 교사 뒤편의 사택에서 기거하셨다.
입학 당시 열여섯 명의 간이학교 2학년 졸업반이 재학했었는데 이 선배들은 우리 동기생들보다 훨씬 많은 나이의 청장년들이었고 기혼자도 있었으며, 두 칸 교실 중 한 칸을 이들 간이학교 마지막 졸업생들이 4∼5개 책상에 네 명씩 앉아 수업했었다. 그리고 나머지 교실 한 칸이 우리 동기들 차지였는데, 책걸상도 없는 부서진 맨 마루였지만 나나 우리 동기들은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만으로 철없이 기뻐 날뛰며 매일 같이 조잘대고 마냥 좋아 했었다.
산 너머 들지나 한 고개 더 넘어 등교하여 울퉁불퉁 헌 마룻바닥에 책 펴 놓고 공부했어도 투정하지 않고 신나기만 했었고, 하굣길에는 친구들과 앞서거니 뒤서가니 내 달음 치며 학교에서 배운 노래, 큰 소리로 합창하며 집에 오곤 했었다.
학교 갔다 집에 오면 “어서 온다. 배고프겠다.” 하면서 부랴부랴 된장 고추 새우젓 김치에 보리밥 한 그릇 가득히 담아주는 누나의 점심상... 그때 그 시절 상념에 세삼 누나가 그리워진다.
학교 기억을 더듬어 보니 당시 직원실 벽에는 조그마한 괘종시계 하나가 걸려있었는데, 이 시계에 50cm 정도 되는 각목 두 개를 매달아 두고, 지금은 고인이 되신 양갑용 소사가 이 시계를 보고 매단 각목 두 개를 손바닥 치듯이 부딪쳐 나무 종을 쳤었다. 두 번치면 수업준비고 세 번치면 수업 끝, 계속치면 운동장으로 모이라는 신호였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제일 귀히 여겼던 이 괘종시계를 도둑맞아 버렸다. 선생님과 후원회장, 그리고 마을사람들이 이 시계를 훔쳐간 도둑놈을 잡으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끝내 잡지 못했고, 그래서 양갑용 소사는 시계가 없어 일정한 시간에 나무 종을 치지 못하고 대충 치는 바람에 선생님이나 우리들 모두 짜증스러워했었다.
이 당시 학교운영은 마을의 독지가들이 기탁하는 후원금과 아동들의 수업료인 월사금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은 학교에 다닐 수 없었고, 어렵사리 학교에 다닌다하여도 월말에 월사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교실에 들려 보내지 않아 울면서 집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울며 지쳐 들어오는 아이들을 보면서 학부모는 학부모대로 가슴 미어지는 아픔을 견뎌야 했고 끝내는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여 매월 취학 아동들이 줄어들었다.
이렇게 일제 말기였던 이 시기에는 가정형편이 여의치 못한 아동들이 많아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도 가르칠 수 없었고, 학교에서도 일본 말로 국어와 산수 위주로 가르치며 우리말과 우리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여 일본말에 서툴렀던 어린 아동들이 매일 수업시간이면 너나없이 모두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아가며 눈물 콧물 흘리며 위압적인 분위기에서 수업을 받았었다.
일본 패망 1년 전인 1944년 초여름으로 기억된다.
2학년이 되어 내 밑으로 1년 후배들이 재학했던 시기에 일본인 선생이 가고 오기홍, 김동수 두 분이 새로 부임하셨다. 2학년이 된 우리 동기들을 오기홍선생님이 담임하셨고 당시 재학생이 1, 2학년 합쳐 약 70여명 정도 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학생 수가 많아 어린 눈에는 교실도 운동장도 모두 비좁게 만 보였다.
1945년 8월 15일, 3학년으로 진학하고 한 달 조금 지나 8.15 광복을 맞았다.
그리고 1946년, 해방 이듬해 봄, 3학년 2학기 때 목조 건물이었던 지금의 법성포초등학교에 큰 불이 나 깡그리 타 버린,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우리학교는 광복 이후부터 학생 수가 급격히 늘어 오전, 오후로 나뉘어 2부제 수업을 실시했고, 교실이 부족하여 야외로 나가 나무 그늘 밑이나 잔디밭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렇게 교실난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용현마를 서쪽, 용덕리 556번지에 학교터를 새로 잡아 교사를 마련하였는데, 이때 제일 상급생이었던 우리 동기들은 수업을 작파하고 학부형들을 도와 학교 짓는 일에 온힘을 다했었다. 기왓장 나르는 일, 기와지붕공사에 필요한 황토 흙을 이겨 나르는 일들이 주로 우리들 몫이었기 때문에 옷은 매일 황토 흙 범벅이 되었지만 누구 하나 투정부리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학부모들을 도와 1946년 여름에 교사 짓는 일을 마쳤다.
4학년으로 진학하여 기와집에 훤한 유리창으로 단장된 새 교실에서 검은 칠판에 선생님의 하얀 백목글씨가 너무도 뚜렷했던 첫 수업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책상위에 책과 공책을 펴 놓고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 하나 하나 빼 놓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 세웠고, 강조하셨던 부분을 몽당연필로 또박 또박 적어 가슴 깊이 새겼던 선생님의 가르침이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의 지평이 되었다. 하늘나라에 계시는 정진환 스승님에게 세삼 고개 숙여 명복을 빈다.
좁아만 보였던 옛 운동장보다 몇 배나 넓은 운동장에서 달리고 또 달리고, 땀은 쭉쭉 흐르지만 몸은 훨훨 나는 기분이었고 아침조회 시간이면 새로 제정된 교가를 목청껏 불렀던 일이 엊그제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