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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은 왜 끊임없이 조선에게 정도전의 인도를 요구했을까?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요동땅을 회복할 수 있는 호기를 놓쳤다고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모 까페에서는 이성계는 화교이고, 명의 사주를 받아 조선을 건국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사실을 유포한다. 심지어 이런 얘기를 믿는 사람들도 많다.
조선에 대해 사람들의 인식은 부정적이다. 고리타분한 성리학자들의 사고, 명 아니 중화에 대한 심한 사대관계 등을 이유로 조선을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중화에 대한 맹목적인 사대, 고리타분한 성리학자들의 사고는 조선 중기 이후에 등장하는 것이다. 조선이 건국된 초기만 해도 사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대가 아니었다.
조선 중기의 사대가 "중화의 나라 명을 정성으로 받드는 것"임에 반해 조선 초기의 사대란 "큰 나라를 섬겨 우리의 독자적 생존과 평화를 보장받는 것"이었다. 약소국의 생존 철학인 셈이다. 이렇듯 조선 초기 관료, 유학자들은 사대를 실용적으로 이해했다.
고려 왕실을 무너뜨리고 일어선 신생국 조선으로서는 명과의 관계 개선이 중요했다. 왜냐하면 당시 명을 건국한 주원장이 신하의 왕위찬탈을 극악한 범죄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주원장은『맹자』를 읽고, 맹자가 군주가 천명을 위반할 때 정벌하여 축출해도 좋다는 역성혁명론에 대해 분노항, 맹자의 제사를 금지할 정도였다. 당연히 주원장은 주변 제후국들의 역성혁명에 대해 철저히 거부감을 드러내었다. 일례로 1391년 레뀌리에 의해 점성국(占城國:베트남)에서 왕위찬탈이 일어나자 주원장은 점성국의 조공을 거부했고, 명의 3대 황제인 영락제는 레뀌리의 찬탈을 구실로 1406년 겨울 20여 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점성국을 정복하였다.
이런 주원장이었으니, 고려를 무너뜨린 조선으로서는 명이 이를 트집잡을까 두려워 명의 압박에 강경대응으로 맞선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조선 초 상황에서 홍무제(주원장)에 압박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주원장을 위협한 사람이 바로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이었다.
철저한 민본사상을 가진 정도전은 백성을 위해서는 나라를 지켜야 하며 나라를 위해서는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고 판단, 국방강화에 총력을 기울였다. 왕자들과 공신들의 사병 혁파가 그것이다. 각 왕자들과 공신들이 거느린 사병을 혁파하고 그것을 하나의 군제로 단일화하면 조선의 국방력은 상승한다. 또한 정도전은 스스로 그린 진도에 따른 진법훈련을 매 실시함으로써 국방 강화에 박차를 가했다.
정도전의 국방강화사상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국토를 수호하기 위한 방어적 목적을 넘어섰다. 그의 궁극적 목적은 잃어버린 옛 땅을 되찾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여진족이 들어와 살고 있는 함경도 지방을 확실히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는 요동의 넓은 땅을 수복하기 위해 후방 병참기지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그는 태조 2년 동북면 도안무사로 함경도에 가서 여진족을 회유하고 함경도 지역의 지방행정조직을 정리하였으며, 태조 6년 동북면 도선무순찰사로 함경도로 가 주군을 구획하고 성보 등 방어시설을 수리하였으며 호구와 군관을 점검하고 돌아왔다. 그의 공로에 대해 이성계는 고려 때 윤관의 9성 건설에 못지않은 업적이라 칭찬했다.
이런 조선의 움직임 아니 정확히는 정도전의 움직임을 의구심을 갖고 바라본 사람이 주원장이다.
정도전이 개국초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오면서 산해관을 지날 때 "(명과의 관계가) 잘 안풀리면 군대를 이끌고 오겠다"고 말한 바 있으니, 주원장으로서는 정도전이 행하는 국방강화에 두려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주원장 초상화
만약 조선이 요동을 치면 주변 여진족들이 조선에 동조할 가능성이 크고, 몽골지역에서 대치하고 있는 북원의 움직임 또한 심상치 않게 돌아갈 가능성이 컸다. 더욱이 명은 조선 사신을 폭행하고, 조선이 보내는 공물을 받지도 않았으며, 얼토당토한 요구를 하고, 조선에 대해 갖은 협박을 했다. 어쩌면 홍무제는 조선을 두려워했을 가능성이 크다.
정도전의 요동정벌계획은 건국 직후부터 착수된 듯 싶다. 정도전이 개국 직후인 1392년 10월 계품사(啓稟使) 및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간 것은 표면상 새 나라 개창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지만 속내는 달랐다. 명 태조 주원장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에게 1393년 5월 태조 흠차 내사(欽差內史) 황영기(黃永奇) 등을 사신으로 보내, “사람을 요동으로 보내 포백(布帛)과 금은으로 우리 변장(邊將)을 꾀었다”고 비판하고 또 “요사이 몰래 사람을 보내어 여진족을 꾀여 가권(家眷) 500여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몰래 건넜으니, 죄가 이보다 큰 것이 없소”라고 항의했다. 정도전이 요동 수복을 위해 사람을 포섭하고, 여진족을 회유하는 첩보활동을 했다는 항의이다.
주원장은 또
“어찌 그대의 고려에서 급하게 병화(兵禍)를 일으키는가? …짐은 장수에게 명해서 동방을 정벌할 것이지만… 여진인들을 모두 돌려보낸다면 짐의 군사는 국경(國境)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오”
「태조실록」 2년 5월23일
라고 협박했는데, 이는 명의 당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조선이 기마민족인 여진족과 손잡고 북벌에 나선다면 명나라로서 막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정도전은 태조 2년 11월에는 구정(毬庭)에 군사들을 모아놓고 진도(陣圖)에 따라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격구를 빙자한 요동정벌 훈련이었다.
드디어 명나라는 태조 5년(1396) 2월 ‘표전문(表箋文) 사건’을 빌미로 정도전의 압송을 요구했다. 정도전은 명의 의구심을 풀기 위해 그해 7월 판삼사사(判三司事·종1품)에서 봉화백(奉化伯)으로 물러났으나 주원장은 만족하지 않고 태조 6년(1397) 4월, “정도전이란 자는 왕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가? 왕이 만일 깨닫지 못하면 이 사람이 반드시 화(禍)의 근원일 것이다”라며 정도전의 인도를 거듭 요구했다.
명이 지속적으로 정도전 인도를 요구한 것은 정도전이 바로 요동정벌계획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만큼 주원장이 정도전을 두려워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정도전과 함께 북벌에 적극적이었던 남은(南誾)은 “사졸이 이미 훈련되었고 군량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동명왕(東明王)의 옛 강토를 회복할 만합니다”라고 상서(上書)했다. 「태종실록」에는 정도전이 태조에게 했다는 의미심장한 구절이 전한다.
“정도전이 지나간 옛일에 외이(外夷)가 중원(中原)에서 임금이 된 것을 차례로 들어 논하여 남은의 말을 믿을 만하다고 말하고, 또 도참(圖讖)을 인용하여 그 말에 붙여서 맞추었다.” 「태종실록」5년 6월27일
‘외이가 중원에서 임금이 된 것’은 바로 중원을 정복했던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 몽고족의 원나라 등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조선 역시 능히 중원을 정복해 호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했다. 동북면 변방에서 태어나 개국의 위업을 달성한 이성계로서 ‘동명왕의 옛 강토 회복’은 남은 생애를 걸만한 일이었다.
급기야 명나라는 표전문 문제로 자국에 억류한 조선 사신 정총·김약항·노인도를 사형했다. 정총이 태조 이성계의 부인 현비(顯妃) 강씨의 승하 소식을 듣고 흰 상복을 입었다는 이유였다. 이 사건은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을 더욱 분개하게 했다. 인신(人臣)으로 국모의 상을 당해 상복을 입었다고 사람을 죽인 만행에 대한 분개는 당연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로 대명관계가 악화됨을 계기로 정도전은 사병혁파를 통한 국군체제 정비에 박차를 가함과 동시에 군사훈련을 맹렬히 실시하여 전쟁 일보 직전까지 이르게 되었다.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칠 계획을 하고 5진도(五陳圖)와 수수도(蒐狩圖)를 지어 태조에게 바치고, 훈도관(訓導官)을 두어 각 절제사, 군관 및 양반 각품과 성중애마로 하여금 「진도」를 강습하게 하고 또 사람을 각도에 보내서 이것을 가르쳤다. 태조실록 6년 6월 갑오조
요동정벌계획은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의 개국공신이 참여하고 태조도 그 계획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국가정책이었다.
함흥 본궁에 모셔진 이성계 초상
일부에서는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이 요동을 회복할 기회를 스스로 박찬 것이라 하며 이성계는 요동수복보다는 자신의 정권야욕이 앞선 소인배라고 한다. 하지만 공민왕 시기 인당, 지용수, 이성계가 요동을 정벌한 일이 있으며, 또 이렇게 요동정벌계획을 추진한 것을 보면 이성계에게 요동수복의지가 없었다고 하는 건 성급한 판단일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실력만 쌓이면 요동을 수복하겠다는 생각이 시대적 분위기를 형성했다. 그리고 그런 시대 분위기를 형성한 주동 인물이 바로 정도전이었다. 이것이 바로 명이 정도전을 극히 두려워하고 경계한 까닭이었다.
이렇듯 요동정벌을 위한 계획이 단계적으로 착수되었지만, 우리민족의 숙원인 고토수복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요동 정벌을 위해 각 왕자와 공신들이 소유한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군제를 단일화하려 하자 커다란 반발이 일어났다. 사병 개혁에 대한 반발이었다. 요동 정벌에는 고토 회복이라는 역사적 당위성뿐만 아니라 사병 혁파라는 국내 정치적인 요소도 들어 있었다. 정도전은 요동 정벌이란 대의명분으로 군제를 단일화함으로써 여러 왕자들과 공신들이 갖고 있던 사병을 관군으로 편재하려 한 것이다.
대다수의 왕자들은 이성계의 강력한 명에 복종해 사병 혁파에 응했지만 이방원과 방간이 이에 거부해 난을 일으키면서 요동 수복은 목전에서 좌절되었다. 태조 7년(1398) 8월 이방원은 이성계가 와병 중인 틈을 타 전격적으로 난을 일으켰다. 제1차 왕자의 난이었다.
이방원과 방간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 정도전은 남은의 첩 소동(小洞)의 집에서 이직과 술잔을 나누고 있다가 살해된다. 그만큼 전격적인 쿠데타였다. 정도전뿐만 아니라 남은·심효생·이근·장지화 등 북벌을 주장하던 인물들은 모두 살해됐다. 새 나라 개창에 성공했던 정도전이 꿈꾸었던 요동 정벌은 이렇게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조선 초기 국제 정세
정도전의 요동정벌계획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이루어질 수 없는 실현불가능한 계획이며, 만약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착수했다면 조선은 명의 말발굽에 짓밟혔을 것이라 단정짓는다. 그가 요동정벌을 실지로 꿈꾼게 아니라 국내적으로 사병혁파를 단행하여 공신과 왕자들의 세력약화를 꾀하고, 또한 외부적으로는 명의 압박에 대응하여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수립한 일시적인 미봉책이라 한다.
하지만 이는 당시 국제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비록 명이 원을 몰아내고 군벌들을 정벌하여 중원을 통일했다지만, 북으로는 북원이 건재하고, 동북방에는 여진족들이 산재해 있었다. 게다가 명은 조선이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명나라 사서를 보면 조선이 압록강을 건너 요동을 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한 기록이 몇 개 보인다.
게다가 조선왕조실록에 나와있는 진법훈련이며, 요동정벌 착수를 위한 사전작업 등이 나와있는 기록을 보면 요동정벌은 정도전과 태조 이성계가 추진한 국가시책이었음을 능히 알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정도전이 이방원에 의해 허무하게 죽지 않고, 그대로 요동수복작전을 단행했다면 모르긴 몰라도 명과 한판 붙어볼 만 할지도 모른다.
조선이 압록강을 건너면 분명 동북방의 여진족이 흔들릴 것이고, 조선과 여진 기병이 요동을 휩쓴다면, 북원 역시 그 여세를 몰아 명을 칠지도 모른다. 당시 정도전은 이런 국제정세까지 다 계산하고 요동정벌계획을 세운 것이지, 자기가 살기 위해 세운 것이 아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게 없지만 정도전의 요동정벌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흘렀을까?
우리가 알고있는 중화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명에게 절대 사대를 하는 나약하고 폐쇄적인 조선이 아니라 고구려와 고려처럼 대륙을 호령하고 요동벌판을 질주하는 강인한 조선이 되지 않았을까?
참고문헌
박시백,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 태조 정종실록』, 휴머니스트, 2005
박영규, 『조선왕조실록』, 들녘, 1996
이덕일,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한겨례출판사, 2008
이병권, 『소설보다 재미있는 조선왕조사』, 평단문화사, 2008
한영우,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지식산업사, 1999
[출처] 명 태조 주원장이 두려워 한 정도전 (대한민국 역사(歷史) 바로 알리기) |작성자 조의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