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은 보물 제1758호 ‘포항 중성리 신라비’를 국보로 승격예고하고, ‘금동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 등 13건을 보물로 지정 예고하였다.
‘금동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金銅國王慶膺造無垢淨塔願記)’는 통일신라 46대 문성왕(재위 839~857)이 대중(大中) 3년(855)에 탑을 세우면서 납입한 금동판 형태의 발원문으로, 1824년에 경주 남산 창림사 삼층석탑이 도괴될 때 무구정광다라니경과 함께 발견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 탑원기는 이미 발견된 금동염거화상탑지나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 등과 유사한 시기의 금속제 명문 자료로, 불교사는 물론 금속공예사, 서예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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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聖王代의 政局과 「昌林寺 無垢淨塔願記」 造成의 정치적 배경(강재광).pdf
경주 창림사 삼층석탑 무구정탑원기 발견
창림사탑 발원기 전면 세부
김정희가 모사한 실물. 이천 영원사서 출토
신라 제46대 문성왕 17년(855) 지금의 경주 남산 창림사에 삼층석탑을 건립하면서 그 조성 내력을 적어 봉안한 발원문 실물이 발견됐다.
대한불교 조계종 산하 불교문화재연구소(소장 미등 스님)는 ‘한국의 사찰문화재 일제조사 사업’ 과정에서 용주사 효행박물관이 보관 중인 ‘국왕 경응 조 무구정탑 원기’(國王慶膺造無垢淨塔願記)를 발견했다고 28일 말했다.
정밀조사 결과 이 발원기는 문성왕(재위 839~857)이 대중(大中) 3년(855)에 탑을 세우면서 납입한 금동판 형태의 발원문으로 밝혀졌다. ‘경응’(慶膺)은 문성왕의 생전 이름이며 무구정(無垢淨)은 통일신라시대에 탑을 세우는 근거가 된 불교 경전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의미한다.
이 발원기는 세로 22.4cm×가로 38.2cm에 두께 0.08㎝의 순동에 금을 입힌 판형이며, 앞뒷면에 탑을 건립하게 된 배경과 발원 내용, 조탑(造塔)에 관여한 인물들을 기록했다.
뜻밖에도 이 발원기는 1824년 석공(石工)이 경주 남산 창림사 삼층석탑을 무너뜨릴 때 무구정광다라니경과 함께 발견된 것이다. 당시 금석학의 대가 秋史 金正喜(1786~1856)가 그 글자를 그대로 모사해둔 바로 그 실물로 드러났다.
김정희가 베껴 적은 이 발원기는 조선총독부가 경주 남산 일대 佛蹟을 조사하고 그 성과를 묶어 정리한 보고서 <경주 남산의 불적>(1940년)에 수록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지만, 그 실물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창림사탑 발원기 뒷면
연구소는 이번 조사에서 확인한 결과 효행박물관 보관품과 추사가 말한 창림사 석탑 발원기의 글자가 내용이나 체제, 서체 등이 모두 동일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이 발원기는 경기 화성 용주사(龍珠寺) 말사인 이천의 영원사(靈源寺)에서 1968년 대웅전을 해체하다가 기단에서 발견됨으로 드러났다.
이 발원기는 발견 이후 줄곧 영원사에 비장(秘藏)되다가 지난해 용주사 효행박물관에 기탁됐다.
영원사는 조선후기 명문거족인 안동김씨의 원찰(願刹)로 1827년 김조순(金祖淳)이 시주함으로써 중건됐다.
연구소는 “김조순의 아들 김유근은 김정희와 석교(石交)에 비유될 정도로 돈독한 우정을 나눴다”면서 “이런 점을 고려할 때 1824년 창림사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무구정탑원기는 김정희를 통해 김조순 일가로 들어갔다가 1825년 영원사를 중창할 때 대웅전 공양구로 기단에 매납(埋納)된 것”으로 추정했다.
이 금속판은 분석 결과 순동(Cu), 금(Au), 수은(Hg) 등이 검출됨으로써 아말감수은기법으로 동판에 금을 입힌 것으로 밝혀졌다.
이번에 발원기에서 확인된 글자는 그 윤곽을 따라 그리는 쌍구법(雙鉤法)으로 만든 것으로 드러났다.
연구서는 이런 기법이 염거화상탑지(844년), 황룡사 구층목탑 찰주본기(872년), 중화3년명 경통(883년) 등 통일신라 동판에 글씨를 새길 때 즐겨 사용하던 것이라고 말했다.
taeshik@yna.co.kr 기사입력 2012-02-28 15:08
창림사탑 발원기 앞면
김정희 모사 창림사탑 발원기
불교문화재연구소는 ‘한국의 사찰문화재 일제조사 사업’을 하면서 이 탑지가 용주사의 말사인 경기 이천시 영원사 대웅전 법당 마루 아래에서 1968년 발굴된 뒤 용주사 효행박물관에 보관돼온 것을 발견했다. 영원사는 안동 김씨 일가가 세운 절로 1825년에 다시 고쳐 지었다.
불교문화재연구소 이용운 문화재조사팀장은 “탑지가 창림사 석탑에서 출토된 뒤 추사와 가까웠던 안동 김씨 일가로 들어갔으며 영원사를 중창할 때 대웅전의 지신을 누르기 위한 물건(진단구)으로 묻혔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한편 이 탑지가 창림사지 삼층석탑이 아니라 인근의 다른 탑에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무구정탑원기의 출토지에 대한 논문을 쓴 신용철 통도사 성보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현존 삼층석탑은 양식으로 볼 때 8세기에 세워진 것이어서 이번에 나온 탑지와 연대가 어긋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22.4cm×가로 38.2cm의 판형이 이보다 작은 창림사 삼층석탑 내부의 사리공(약 33cm×28cm)에 봉안했는지는 풀어야할 과제로 남아있다.
※ 금동판은 순동에 금을 입히는 전통 기법인 아말감수은기법으로 제작됐고 탑 건립 배경과 발원 내용, 건립에 관여한 인물들이 앞, 뒷면에 기록돼 있다.
탑을 세우도록 한 이는 문성왕(재위 839∼857)이다. 불국정토를 향한 선행을 쌓은 방법으로 탑 건립만한 게 없다는 일종의 발원문(發願文)이 적혀 있다.
불교문화재연구소 이용운 연구실장은 “제작 연대와 발원자가 나와 있는 완벽한 형태의 금석문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고 말했다. 연구소 측은 문화재청에 요청해 문화재 지정 절차를 밟을 예정이라고 한다.
※ 이 탑지가 창림사지 삼층석탑이 아니라 인근의 다른 탑에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무구정탑원기의 출토지에 대한 논문을 쓴 신용철 통도사성보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현존 삼층석탑은 양식으로 볼 때 8세기에 세워진 것이어서 이번에 나온 탑지와 연대가 어긋난다”고 말했다.
※ 경주에 있던 금동판이 어떻게 경기도 용주사로 옮겨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1800년대 탑이 무너졌을 때 이를 손에 넣은 김정희가 자신과 친분이 깊던 안동 김씨 김조순 일가가 시주해 세워진 경기도 이천 영원사(靈源寺)에 맡겼던 것이 다시 용주사로 전해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선인장 '백설황'이 꽃을 피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