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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李承熙(1847 ~ 1916)】
“밀산현 봉밀산에 한흥동 독립운동 기지 개척.”
1847년 2월 19일 경북 성주군(星州郡) 월항면(月恒面) 대포리(大浦里)에서 아버지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과 어머니 흥양이씨(興陽李氏)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자는 계도(啓道), 호는 젊어서 강재(剛齋)라 하였고 장년에 대계(大溪)라 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로 건너간 뒤 1909년 겨울부터 한계(韓溪)로 다시 고쳤으며, 이름도 대하(大夏)로 고쳤다.
성산이씨는 성주의 대표적 사족 가문으로 조선조 말기 종조부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와 한주 이진상이 출현함으로써 영남지방에서 우뚝한 가문의 하나로 성장하였고, 주리세가(主理世家)의 명망을 얻었다. 특히 이진상은 주희(朱熹)와 이황(李滉)의 성리학(性理學)을 계승하여 영남 서부지역에서 독자적인 학통을 형성한 한주학파(寒洲學派)의 종장이 되었다.
5세부터 아버지의 지도 아래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행동 또한 엄중히 하였다. 스스로가 “남들이 너무 강경하다고 꺼리는 사람이 많았다”고 할 정도로 강직하였다. 16세에 여강 이씨(驪江李氏)를 부인으로 맞아들였으나 후사 없이 요절하였다. 27세에 전의 이씨(全義李氏) 이언회(李彦會)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여 딸 하나와 두 아들 기원(基元)과 기인(基仁)을 두었다.
1864년 18세에 고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시행된 정시(庭試) 경과동당시(慶科東堂試)에 응시하여 대책(對策)으로 뽑혔고, 그 후 향시(鄕試)에도 여러 번 합격하였다. 19세에 종조부 이원조가 주강(主講)한 회연서원(檜淵書院)의 강회에 참석하여 심경(心經)을 강론하였다. 그 후 아버지를 따라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부자가 한 방에 거처하면서 강학토론(講學討論)에 몰두하였으며, 부친의 문하를 출입하던 후산(后山) 허유(許愈),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등의 동문들과 함께 학문에 전념하였다.
1867년 성학(聖學) ・ 호적(戶籍) ・ 전제(田制) ・ 선거(選擧) ・ 제병(制兵)의 5조목(五條目)으로 이루어진 내정개혁을 촉구하는 시국대책문을 흥선대원군에게 올려 당시의 정국을 바로 잡으려 하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1880년 정관응(鄭觀應)의 『이언(易言)』과 1881년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척사론적 입장에서 비판하여 성리학적 전통사회의 질서를 옹호하였다.
특히 1882년 1월 이만손(李晩孫)을 소수(疏首)로 한 영남유생들이 『조선책략』에 대한 만인소(萬人疏)를 올리기 위해 상주의 산양(山陽)에 모였을 때, 『청척양사소(請斥洋邪疏)』를 지어 조선이 처한 대내외의 위기를 역설하였다.
1879년 동문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 면와(勉窩) 이덕후(李德厚) 등과 함께 정시에 응시하였다. 1882년에는 과거에 응시하려다가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정부가 혼란에 빠진 것을 보고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이 여러 차례 벼슬길에 나올 것을 권유하였으나 사양하였다. 그리고 1886년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뒤 동문 허유(許愈) ・ 곽종석 ・ 윤주하(尹冑夏) 등과 함께 부친 이진상의 문집을 교정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종조부 이원조와 부친 이진상의 가학을 승계하여 한주학파의 적통을 계승하였다. 부친 이진상의 영향을 받아 현실을 직시하고, 위정척사(衛正斥邪) 입장에서 내수외양(內修外攘)을 견지하였다. 심즉리설(心卽理說)을 극력 옹호하면서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재건하기 위해 향약 시행에 힘을 기울였다. 1883년 빈부 차이에서 비롯된 동족마을의 내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대포의사계(大浦義社契)를 결성하였다. 그 뒤 이진상이 만든 성주향약을 시세의 변화에 맞게 보완하여 향촌사회의 성리학적 신분질서와 윤리규범을 재건하고자 하였다.
한편, 신학문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의제(代議制) 등 행정제도에 관해서만 우호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 대개 부정적이었다. 서양 학문의 기본적인 세계관을 비판한 『태서격물설변(泰西格物說辨)』(1892)과 알랙산더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의 상제설(上帝說)을 비판하는 『위군상제비태극론변(韋君上帝非太極論辨)』(1902) 등을 저술하였다.
동학이 1892년 삼례집회(參禮集會)와 1893년 보은집회(報恩集會)를 거치면서 교세를 삼남지방으로 확장하자, 1893년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로 파견된 어윤중(魚允中)을 대신하여 『통유동학문(通諭東學文)』을 지었다. 이 통유문에서 동학을 ‘유불선(儒彿仙) 3교의 합일(合一)은 유교의 도덕률을 파괴하는 이단(異端), 서학과 같은 사설(邪說), 그리고 무부무군지교(無父無君之敎)’로 동학교도는 ‘황건적(黃巾賊)과 백련교(白蓮敎) 같이 반역을 도모하는 비류(匪類)’로 보았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1896년 동문들과 창의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곽종석의 반대로 그만둔 뒤 외교적인 방안을 통해 국권회복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곽종석 ・ 장완상(張完相) ・ 강구상(姜龜相) ・ 이두훈(李斗勳) 등과 함께 일본의 야만적 행위를 규탄하는 『이토일본국사통고천하각국공관문(以討日本國事通告天下各國公館文)』을 각국 공사관에 송부하였다.
1897년 8월 『한주선생문집(寒洲先生文集)』이 도산서원에서 반송되었고, 상주 도남서원에서는 불태워졌다. 이진상의 심즉이설(心卽理說)이 퇴계의 이발기발설(理發氣發說)과 상반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곽종석과 함께 이를 반박하고 해명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05년 8월 국가의 실정을 통탄하는 『의진시사소(擬陳時事疏)』를 올려 과감한 내정개혁을 촉구하였다.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참수하고 조약을 파기하라는 『청주적신파늑약소(請誅賊臣罷勒約疏)』를 올렸다. 그리고 『유일국신민조(諭一國臣民詔)』, 『투일본사령부문(投日本司令府文)』 등을 주한일본군사령부에 보내 일본의 배신과 침략행위를 규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12월 25일 대구경무서에 구속되어 문초를 받았다.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협박하고 회유하였으나 “선비는 죽일 수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고 하며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옥중에서 통감부를 설치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꾸짖는 편지를 썼다.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지적하고, 이토를 “천하강상지적(天下綱常之賊)”으로 지목하였다. 1906년 4월 7일 출옥하였다.
1907년 국채 1,300만 원을 갚기 위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대구에서 발기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907년 3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자는 통문을 향중에 발의하고 3월 19일(음력) 성주장날 모임을 가지기로 하였다. 배우홍(裵遇鴻) 등과 함께 발기하여 1907년 3월 20일(음력) 성주군 국채보상의무회(星州郡國債報償義務會)를 설립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성주군의무소국채보상취지서(星州郡義務所國債報償趣旨書)』에서 헌금을 국민의 당연한 도리로 강조하였다.
회갑연에 쓸 20원을 의연금으로 출연하기도 하였다. 또 경남지역 국채보상회(慶南地域國債報償會) 회장으로 추대되어 경남지방에 호소하는 통문을 지어 발표하였다. 그 외 향약의 조직 원리를 변용한 국채보상회 조직의 규칙을 만들었으며, 『통유국채의무회인민문(通諭國債義務會人民文)』을 지어 전국에 호소하기도 하였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즈음하여 일본의 조선침략 죄상을 알리고 이를 심판할 것을 호소하는 『여화란국해아만국평화회중서(與和蘭國海牙萬國平和會中書)』를 지었다. 일본이 특사파견을 문제 삼아 고종을 압박하자 『이해아변무사통고만국정부문(以海牙辨誣事通告萬國政府文)』을 지어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이덕후(李德厚) ・ 정인하(鄭寅夏) ・ 이수인(李洙仁) 등 동문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1908년 5월 18일 성주를 출발, 6월 7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여 감리(監理) 김치보(金致甫)의 집에 투숙하였다.
1909년 여름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을 만났다. 당시 이상설은 헤이그에서 이준(李儁)이 순국한 뒤 모스크바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돌아와 있었다. 두 사람은 매일 만나서 명리(名理)와 시사(時事)에 관하여 대담하였는데, 이상설의 박식함과 애국 애족하는 마음에 크게 감명 받았다. 이상설과 함께 독립운동에 매진할 것을 결의하고, 국권회복의 방안으로 『만국대동의원사의(萬國大同議院私議)』를 저술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지도자들을 규합하는 한편, 독립운동기지로 개척할 후보지를 물색하고 그곳의 토지를 사들이기 위한 모금운동을 시작하였다. 1908년 이수인을 국내로 파견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으며, 공동출자 회사인 원동임야주식회사(遠東林野株式會社)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또 이상설과 상의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수 있는 한인의 집단정착지를 물색한 결과 중국과 러시아의 접경에 있는 싱카이호(興凱湖) 주변을 주목하여 중국 쪽의 미산부(蜜山府) 봉밀산(蜂蜜山) 지역으로 결정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700리가 넘는 이곳을 개척하기 위해 1909년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면밀히 답사하였다.
1909년 겨울 이민단과 함께 봉밀산 밑의 기름진 터를 골라 우선 45방(方)의 토지를 사들였다. 이곳을 독립운동기지로 개척하여 1백여 가구의 한인을 이주시키면서 이름을 한흥동(韓興洞)이라고 하였다. 한흥동이란 ‘한국을 부흥하는 마을’이란 뜻이다. 학교를 세워 한민학교(韓民學校)라 하였고,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지어 민족의 역사를 가르쳤다.
또한 마을의 규약인 『민약(民約)』을 제정하여 한인의 단결을 도모하였다. 한흥동에서 실시한 민약은 고향 성주에서 실시했던 향약을 계승한 것이었다. 『일명(日銘)』과 『5강목(五綱目)』을 지어 마을 사람들에게 매일 암송토록 하였다. 이는 전통유교의 바탕을 잃지 않고 생활 속에서 유교 이념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때부터 강재(剛齋)라는 호를 한계(韓溪)로 고치고, 이름도 대하(大夏)로 바꾸었다.
4년 동안 한흥동에 머물며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한흥동 개척은 독립운동 진영의 내분과 권업회(勸業會)의 활동 위축으로 지속되지 못하였다. 1913년 대종교도 백순(白順)과 김현(金玄) 등에게 경영권을 양도하고 서간도로 이거하였다.
1913년 미산부(蜜山府)에서 남만주의 안둥현[安東縣, 현 단둥현(丹東縣)]으로 이주하였다. 당시 안둥현에는 동전(東田) 맹보순(孟輔淳), 대눌(大訥) 노상익(盧相益) 형제, 수파(水坡) 안효제(安孝濟) 형제 등 저명한 유생들이 정착하고 있었다. 이들은 안둥현의 남쪽 접리수(接梨水)에서 농사를 지으며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고 있었다.
안둥현에 도착한 후 동삼성한인공교회(東三省韓人孔敎會)를 창립하고 북경공교회(北京孔敎會)에 편지를 보내 지회(支會)로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914년 1월 5일 베이징으로 들어가 공교총회를 방문하여 동삼성한인공교회(東三省韓人孔敎會)를 공교지회(孔敎支會)로 공식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여 승인을 받았고, 나아가 이문치(李文治) 등 저명한 중국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이때 아들 기인(基仁)과 청도 출신의 이산(伊山) 예대희(芮大僖) 등이 곁에서 함께 하고 있었다.
1914년 6월 펑텐(奉天, 현 선양瀋陽)의 서탑(西塔)으로 이주하여 권병문(權丙文)의 집에 머물며 김창현(金昌鉉, 고령) ・ 권병하(權丙夏, 서울) ・ 성종호(成鍾護, 창녕) ・ 이계동(李啓東, 안동) 등을 만나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들로부터 이 지역에 개간이 가능한 황무지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착하기로 결정하였다. 우선 랴오중현(遼中縣) 덕흥보(德興堡)에 토지를 매입하여 집단농장을 설립하고, 이주 한인을 모집하여 개간과 교육을 실시하기로 하였다.
1914년 8월 경남 함안 출신의 서천(西川) 조정규(趙貞奎)와 함께 토지 매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랴오중현 덕흥보에 약 1백여 호가 생계를 유지할 만한 토지 280일경(日耕)을 매입하였다. 이 일은 시따(西塔)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조정규 ・ 이광룡 ・ 이계동 ・ 정돈섭 ・ 이우열 ・ 이성훈 등의 협조를 얻어 추진하였고 농장일은 주로 둘째 아들 기인(基仁)에게 맡겼다.
1915년 봄 이주를 위해 덕흥보로 들어갔으나 매입한 땅이 해동(解冬)되면 물바다가 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 계획에 함께했던 인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시따의 일승잔(日昇棧)에 머물면서 공교회 운동에 전념하였다.
1915년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와 자부 안씨(安氏), 그리고 장손 해석(海錫)이 펑텐으로 찾아와 가족이 함께 생활하였다. 1916년 2월에는 장남 기원(基元)이 국내에서 들어왔다. 그러나 감기가 점점 악화되어 1916년 3월 30일 새벽 4시 70세를 일기로 망국의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일찍이 “나는 나라가 광복되지 않으면 죽더라도 일본이 지배하는 고국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성주 일원은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반장(返葬)을 촉구하는 편지와 전문이 쇄도하였다. 결국 ‘대한한계이선생(大韓韓溪李先生)’이란 명정을 걸고 기차 편으로 고향 성주로 운구(運柩)되었고, 5월 29일 사림장(士林葬)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저술로는 『한계유고(韓溪遺稿)』 등이 있다.
일찍이 위정척사사상을 견지하였으며, 1895년 이후 상소 ・ 격문 등을 통해 국권수호운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봉밀산 부근에 독립운동기지 한흥동을 건설하였다. 1913년 7월 안둥현을 거쳐 1914년 1월 베이징에서 공교회운동을 통해 민족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고, 라오중현에 독립운동기지 덕흥보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