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도 2박 3일 – 부산, 통영, 여수, 순천
윤제철
1.들어가는 글
5월 3일부터 5월 5일까지 2박3일로 남해여행을 떠났다. 여러 번 다녀온 곳이긴 해도 연휴를 보내는 방법으로 결정한 일이다. 서울역에서 오전 7시 50분에 출발하였다. 몇 년 전에 다녀온 코스와 같아 내용이 같으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변화가 무쌍한 요즘의 바닷가라면 분명 무언가 달라졌음을 기대하였다. 하다못해 가이드나 동행하는 일행들은 다르지 않겠느냐고 되씹어 물었다.
2.부산
부산역에 오전 10시쯤에 도착하여 산복도로를 타고 디오라마 전망대를 찾았다. 오르는 도중에 남의 지붕 위에 주차장을 설치한 것을 보고 참으로 놀랐다. 언덕 위에서 멀리 부산항이 내려다보이고 중앙에 부산항대교가 놓여있었다. 좌측에는 항만의 부두가, 우측에는 태종대가 있는 작은 섬과 다리로 연결된 섬 영도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들이 관광할 장소로 예정되었다. 밤에는 조명등이 설치되어 볼만하다고 했다.
버스를 타고 남포동 자갈치시장을 비롯한 수산물거리로 가면서 보수동 책방골목이나 부평동 깡통시장과 한복거리, 그리고 족발골목을 바라다보며 야시장을 그렸다. 영화「국제시장」의 배경이 되었던 바로 그 국제시장의「꽃분이네 가게」도 떠올랐다.「자갈치」는 자갈로 된 언덕을 뜻하며 그 길이가 1킬로미터가 넘었던 지역이름이다.
점심을 먹으러 수산물거리 인근 골목식당에 들러 꼼장어집이 모여 있었지만 식성에 맞지 않아 생선구이를 먹었다. 영도대교가 도개하는 걸 오후 2시부터 15분간 볼 수 있었다. 연육교로서 일엽식 도개교를 전에는 중대형 선박이 지날 때 열었지만 이제는 지나지 않아도 하루에 한 번 도개한다는 것이었다. 영도대교 도로 상판이 서서히 열리기전부터 자동차는 서서 기다렸고 열리면서 밑에 배가 지나가고 있었다. 실로 오십년이 넘는 중학교수학여행 때 보던 옛 영도다리가 떠올랐다.
과거 부산을 대표하는 세 동내는 남포동, 광복동, 중앙동이었다. 롯데백화점 광복점이 영도대교 인근 좋은 자리에 서있었다. 옛 시청이 있던 곳이었지만 롯데 측에서 소유하고 있던 자리와 맞바꾸고 싶어 영도대교를 무상으로 설치해주는 조건이 받아드려져 이곳에 세웠고 지역발전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기업이 되었다.
돌아 나와「국제시장」을 보고 싶었다. 연휴인파가 대단하였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어느 정당 대통령후보가 유세를 한 지 얼마 안 된 시간이었다. 아내와 함께「꽃분이네 가게」를 물어서 찾았다.「포토 존」까지 표시된 걸로 보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가게 주인은 유명세를 탄 후에 난리를 치는데 영업에 큰 효과를 주지는 못한다고 했다. 미안하여 기념으로「들고 다니는 선풍기」를 사주었다.
광안대교를 달렸다. 복층형으로 길이가 7.3킬로미터, 7995억원 공사비가 들었다. 해운대방향으로 들어갈 때는 저층부로, 나올 때는 상층부로 달린다고 했다. 바라다 보이는 해운대쪽의 고층아파트들은 바다를 매립하여 지은 것이다.
해운대 달맞이길에서 내려다보이는 옛 동해남부선 철로를 옮기면서 그냥 놓아두어 관광명소가 되어버린「미포철길」을 걷기로 했다. 철로 사이로 걷다가 침목사이가 보폭 보다 길어 철로 밖으로 걸으려니 자갈이 많아 발바닥이 아파 제 걸음을 걷기에 불편하였다. 바다를 옆에 두고 아내와 함께 걸어 새로운 추억을 만들면서 해운대에서 송정역까지 4.8킬로미터를 다 걸을 수는 없어 천천히 한 시간 정도 걷다가 고만두었다.
오륙도를 배를 타고 해운대 앞을 지나면서 동백섬이 보이고 고층건물촌을 지나 좌측에 오륙도가 눈에 띄었다. 얼핏 보면 좌측에 세 개 우측에 떨어져서 하나하면 네 개로 보였다. 그러나 가까이 가보니 세 개가 네 개가 되고 돌아 나오면서 떨어져 있던 하나가 두 개로 분명하게 보였다. 그러나 두 개로 보이던 것이 바닷물이 들어오면 하나로 보여 다섯 개가 되었다가 여섯 개가 되다보니 오륙도라 했다.
해운대역 5번 출구「시타딘해운대부산」호텔을 숙소로 잡았다. 콘도형으로 편리하게 객실 수가 468개나 되었다. 해운대 바닷가까지는 얼마 안 되어 산책이 가능하였다. 저녁식사를 하고 해운대를 돌기로 했다. 해운대로 나오는 길에 밀면 집이나 돼지국밥집, 그리고 횟집이 많았으나 갈치조림을 먹었다.
해운대는 어둑어둑하여 불을 밝히고 있었다. 마술을 하는지 불꽃쇼를 하는지 땀을 흘리며 인파 속에 둘러싸여 상의를 벗은 남자가 열중하고 있었다. 바라다보다가 백사장을 돌았다. 스탠드가 있는 곳엔 에스지워너비 노래와 춤으로 버스킹 하는 두 청년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언제부턴가 달라진 우리문화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얼마쯤 떨어진 곳에서는 또 다른 노래가 펼쳐졌다. 우리가 발걸음을 멈추었을 땐 최백호의「내 마음 갈 곳을 잃어」나 김광석의「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등의 애절한 노래가 진정 끼 있는 가수의 음성으로 쏟아내어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리고 있었다. 노래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그에게 적은 지폐를 넣어주고 자리를 떴다.
이름을 얻고 활동하는 가수 보다 더 잘 부르는 실력을 갖고도 정식으로 활동하지 않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들의 안타까운 일면과 김광석의 생애가 떠올라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맥주 한 캔을 사들고 아내와 한 잔 반을 마시고 잠을 청했다.
멀리 떠나
돌아올 수 없었던 추억을
노래로 듣는다
떼어내고 싶어도
끈끈하고 애절하게 달라붙어
끌어당기다가 주저앉아버릴 뿐
누구의 도움으로 우려낸 리듬이기에
가슴에 파고 들어와
이다지도 슬프게 하나
갈 곳을 잃게 하는 아픔으로
꽁꽁 묶어 멀리 버리고 싶어도
차마 던지지 못하는 추억을
노래로 듣는다
- 어느 해운대 버스킹(busking)
3.통영
5월 4일 아침식사를 하러 호텔 5층 식당으로 가방을 싸가지고 내려갔다. 일행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여행을 하는 동안 아는 척하다가도 끝나고 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잊어버리는 상황을 거듭하니 애써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대체로 가족단위로 묶어져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오전 8시에 통영으로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서둘러야 했다.
버스는 다시 광안대교를 행해 달렸다. 마린시티 고층빌딩을 끼고 달리는 영화거리는 광안대교가 지루하니까 영화포스터를 게시해놓고 보라는 의도였다. 이곳 고층빌딩촌은 전국고층의 30프로가 집중되어 있고 부산의 70프로가 서있는 곳이다. 고속도로를 타고가면 빨리 갈 수 있는 곳이 통영, 거제지만 거가대교를 보고 이동하기 때문에 시간이 더 걸리게 되었고 일찍 출발하게 되었다.
부산항대교를 지나 부산항 부두나 영도를 지나쳤다. 부두 9개 중에 현재 5개가 남았으나 2020년이 지나면 신부산항으로 모두 옮겨가 하나도 남지 않고 주거지로 개발하게 된다. 용두산공원은 이제 주변 고층주택으로 가로 막혀 자주 찾지 않는 곳이 되었다. 공동주택이 들어서지 않았으면 산꼭대기까지 단독주택들로 가득 채웠을 것이다.
낙동강하구뚝에 들어 서기전에 좌측은 바닷물과 민물이 섞여 있지만 우측은 낙동강물이다. 바다 건너 섬은 가덕도이며 부산신항만은 부산과 창원의 경계로 보인다. 거가대교는 가덕도섬으로 들어가 휴게소에서 잠깐 쉬고 터널을 지나 부산과 거제 간 연결도로를 탄다. 휴게소 뒤편 정자에서 거가대교를 바라다보면 가려지지 않고 사진이 잘 나오는 포토 존이 있다. 해저터널은 노태우대통령 당시계획이 모두 세워졌으나 시공기술이 모자라 김영삼대통령 때 비로소 시공이 완료되었다. 터널길이는 8.2킬로미터이나 해저로는 3.5킬로미터가 된다. 터널을 나와 거제도로 들어섰다. 거제의 중심은 삼성중공업이 있는 곳인 듯하다.
도로를 타고 신거제대교를 타기 전까지가 거제지만 지나면 통영이라 한다. 바다가 보이는 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바다에 하얀 스트로풀이 떠있는 것을 보면 통영이라 할 정도로 멍게와 굴 농사를 짓는 곳으로 알려져 전체 생산량의 60-70프로를 차지한다. 이미 표를 끊어 놓은 통영의 케이블을 타기까지 시간을 맞추어야 하는데 도로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눈썰매장처럼 사시사철 탈 수 있는「루지」라는 놀이 때문에 같은 길로 올라가야 하므로 정체를 가중시켰다. 통영에 들어서서 1시간 반이나 정체로 도착시간은 12시가 다되어서였다.
4.장사도(長蛇島)
겨우겨우 케이블을 탔지만 식사를 하고 남도의 작은 섬 장사도(長蛇島)로 들어가는 뱃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는 위에 올라가 머무를 여유가 없었다. 케이블카를 내려 바로 그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통영 앞 바다의 많은 섬들이 신비스러울 만큼 눈앞에 펼쳐졌다. 꼭대기까지 올라가느니 가깝게 더 잘 보는 게 아닌가 싶었다. 시간이 허락하는데 까지 오르다 얼른 내려갔다. 점심식사는 오후 1시로 예약된 해물된장이었다. 오후 1시 40분 까지 버스를 타고 배를 타야했다. 마치 007작전이라도 펼치는 듯 민첩하게 움직여야 했다.
장사도는 거제도 남단에서 서쪽으로 1킬로미터 거리에 있고 부근에 죽도, 대덕도, 소덕도, 가왕도 등이 있다. 1900년경 인근 거제에서 정씨가 처음으로 입도 정착하였으며 섬모양이 뱀의 형상이고 섬에 뱀이 많아 장사도로 불려졌다. 울창한 동백수림이 자랑꺼리이다.
오후 2시에 출발한 배는 요동 없이 순탄하게 바다를 달려 2시 45분에 도착하였다. 2시간 섬에 머무를 수 있었다. 섬은 오후 4시 45분에 출발하니 시간을 엄수하라고 선장은 강조하였다.
「장사도 해상공원 까멜리아」는 해안에 해식애가 발달되었고, 기후가 온난하여 난대림이 무성한데 이 가운데 70%가 동백나무, 후박나무, 구실잣밤나무가 차지한다. 이른 봄에 동백꽃이 필 때면 섬 전체가 불타는 듯한 장관을 연출하여 한라해상공원의 일부로 지정되었다. 외도와 가까이에 있으면서 서로를 비교하게 해서 경쟁대상이 되서는 안 될 것 같다. 30년이란 긴 시간을 민간의 힘으로 가꾼 외도와 10년이란 시간을 많은 투자를 바탕으로 일구어낸 관공서의 힘은 별개의 것으로 놓고 장점을 높이 평가해야한다.
장사도는 거제도 남단에서 서쪽으로 1킬로미터 거리에 있고 부근에 죽도, 대덕도, 소덕도, 가왕도 등이 있다. 1900년경 인근 거제에서 정씨가 처음으로 입도 정착하였으며 섬모양이 뱀의 형상이고 섬에 뱀이 많아 장사도로 불려졌다. 울창한 동백수림이 자랑꺼리이다. 입장시에 배포되는 지도를 번호순사대로 관람하면 2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5.동피랑 마을 벽화
통영에 돌아와 항구를 끼고 해안도로를 달려 중앙시장 근처에 차를 세워놓고「동피랑 마을의 벽화」를 보기로 했다. 언덕 위에는 적을 경계하여 봉화로 신호하게 하려고 이순신 장군이 만들어 초소로 썼던 정자를 둘러볼 겸 서서히 걸어올라 갔다. 마을의 주택 담에 화가들이 그림을 그려 전시한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소재로 그린 그림도 많았다.
도로가에만 그린 줄 알았는데 골목마다 펼쳐져 있어 상당한 분량이었다. 잠깐 동안에 정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통영 앞 바다의 전경이 훤하게 내려다보여 초소 자리로 적합하였다. 장군이 우리 역시나 문화에 끼친 영향이 크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끼면서 발을 옮겼다. 내려오는 길가 마을 이곳저곳에 작은 카페가 눈에 띄었다.
내려오다가 보니 중앙시장 안길로 들어섰다. 해물이나 건어물들을 취급하는 상가들이 즐비한데 사람들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들어온 김에 물 좋은 건어물을 샀다. 명함도 받아들고 다 먹으면 배달시키리라 마음먹었다.
예정 보다 늦어 숙소에 오후 9시가 다되어 식사를 하러 나왔다. 문을 닫은 데가 많아 잘 찾아야 했다. 중앙시장에서 먹고 온 사람들도 있었는데 벽화와 건어물에 신경을 쓰다 저녁이 더 늦어진 걸 후회하였다. 그러나「홍익전통육개장 통영죽림점」을 찾았다. 궁중전통육개장과 궁중만두를 시켜 명품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 값도 저렴하여 각각 8천원과 5천원을 받았다. 바쁜 하루를 잘 마무리하는 기분이었다.
6.여수
5월 5일은 아침에 더 일찍 서둘러야 했다. 오동도 케이블카를 예약 없이 도착순으로 표를 끊어주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침 7시에 버스에 짐을 싣고 인근에서 식사를 하고 출발하기로 했다.
오동도를 먼저 보기로 했는데 들어서면서부터 정체가 시작되었다. 많은 시간을 얻는다는 것은 어려울 듯 했다. 바다를 가로질러 오동도 다리를 오가는 동백열차(요금별도: 성인 800원)가 있지만 얼마 안 되는 거리를 기다리는 시간에 걸어갔다 오는 것이 나을 판이었다. 여러 번 오동도에 들어간 경험도 있어 목표를 케이블카를 타는 것에 두고 있었다.
정체의 원인은 어린이날이었다. 시간을 맞추어 오동도를 다녀와서 케이블카를 위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순서대로 타는 형식이었다. 왕복을 타지 않고 편도로 올라가서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가 타고 다음 일정으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007작전이라도 펼치듯 가이드의 일거수일투족에 호흡을 맞추어야 했다. 올라가면서 멀리 보이는 오동도와 연결 부두가 그림처럼 보이다가 아래로 보이는 돌산대교와 거북선대교 교량을 살펴보며 사진을 찍었다. 어항의 수초처럼 하늘거리는 숲도 보았다. 처음으로 타보는 신비로움이 모두였다.
여수 어시장에 도착하여 점심식사를 했다. 네 명씩 한 상이 되어 나온 음식 중에 게장을 같이 식사를 한 분들이 못 드신다는 바람에 많이 남아 싸들고 어시장을 돌다가 생선을 아이스박스로 사서 그 안에 담아 차를 탔다.
다음 코스는 이순신 장군의 숨결이 묻어있는 진남관이었다. 진남관(鎭南館)은 조선시대에 객사로 지은 현존 국내 최대의 단층 목조건물이며 임진왜란 때는 삼도 수군통제영으로 사용된 조선수군의 중심 기지였다. 진남관은 1598년 전라좌수영 객사로 건립한 건물로써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수군기지로써의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고소동 벽화마을은 여수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부락으로, 언덕에 자리해 바다와 돌산대교, 거북선대교가 한눈에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작전을 세우고 명령을 내리던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다. 2012 여수엑스포를 계기로 여수시와 고소동 주민들이 힘을 합쳐 담벼락에 벽화를 채우고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관광명소화 했다. 진남관에서 부터 고소동 언덕을 지나 여수해양공원에 이르는 길이가 1004m라서 천사벽화골목이라고도 불린다
7.순천
한국관광공사 최우수 자연경관 선정되었고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세계유일의 연안습지로 손꼽히는 순천만자연생태공원을 탐방하였다. 비가 내리는 갈대밭은 짙은 구름으로 어둑어둑하였다. 우산을 썼지만 옷과 몸을 적셨다. 허리를 드러낸 갯벌의 구멍에서 짱뚱어가 배를 끌고나왔다. 구름 사이로 내려오는 가느다란 빛줄기가 용산 위 하늘에서부터 무척 슬픈 의미를 담고 내려왔다.
용산까지 올라갔다 내려올 시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엄두가 나지 않아 갈대밭을 크게 돌고 나가기로 했다. 여러 번 다녔지만 갈 때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맛이 있었다. 작년에 다녔던 것과 새로 나온 갈대의 빛깔 조화가 우리를 반기기 때문일까? 용이 되어 승천하다 말고 이곳의 정취에 빠져 승천을 포기하고 떨어져 용산이 된 전설 때문일까? 어둑한 이 갈대밭을 나올 때까지 풀리지 않았다.
무섭도록 검은 커튼이 드리워진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새로 싹이 난 갈대와
작년을 지낸 갈대가 바람에 흔들린다
갯벌구멍에서 짱뚱어가
배를 깔고 기어 나와 몸을 적신다
용산을 비치는 빛줄기가 가슴을 찌른다
아직도 미련이 남은
이무기의 몸부림이 몰고 온 비는
우산을 써도 손등과 바지를 적신다
관절로 걷지 못하는 노모가 버스에서
자식들 구경 잘 하고 오라
손짓하며 흘리는 눈물이다
아쉬움에 젖는 갈대밭 흐느낌이다
- 갈대밭에 내리는 비
여수반도와 고흥반도가 만나 항아리 모양의 순천만을 이뤘다. 갈대밭과 갯벌의 풍광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뻗어있었다. 이곳은 각종 희귀 철새들과 갯벌의 생명들이 평화롭게 공존한다. 순천만자연생태관은 순천만이 지닌 환경과 생명의 의미를 배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 지역 대표 철새인 흑두루미 가족도 만나고 순천만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은 갯벌의 생명체와 철새, 텃새들을 관람하면서 순천만의 가치와 환경의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일행은 여행일정을 마무리하면서 젖은 몸을 버스에 실었고 순천역을 향하여 빗길을 달렸다. 저녁식사를 하고 열차를 타는데 걱정이 없다고 말하는 가이드의 여유를 부러워해야했다. 사실상 남은 시간은 불과 이십 여분 남짓하였다. 식당을 따로 찾을 것 없이 우산을 쓰고 나가 인근의 김밥 집을 찾아가 김밥 세 줄을 사가지고 아내가 기다리는 역내로 들어가 간단히 먹고 말았다.
8.나오는 글
5월 3일부터 5월9일까지 징검다리 휴일로 연결되어 4일과 6일만 휴가를 내면 7일간의 연휴가 끼어 있는 기간이라 뒤늦게 예약을 잡았던 여행이었지만 정체 속에서 가이드에게 쫓기듯 움직였으나 나름대로 열성 다하는 모습을 보며 띠라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한 번 다녀간 곳을 다시 보는 것에 대한 편견은 기우였다. 먼저 번에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되는 기회였다. 갈 때 보지 못한 것을 올 때 보고 온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늘 45인승 버스로 널널하게 다니다가 17명으로 25인승을 타고 다니는 것도 불편하다는 선입견을 깼다. 대체로 가족단위로 여행 다니시는 분들이 많아 대화는 많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소통이 잘되었다. 또한 주변의 상황을 마주하고 사물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덕분에 시「해운대 어느 버스킹(busking)」,「비 내리는 갈대밭에서」를 쓸 수 있었다.
자연 속에 나 자신은 지극히 작은 일부로 존재할 뿐 지배하지도 지배를 당하지도 않는 독립된 존재로 서로를 존중하고 보호하며 살아가는 섬이며 별이다. 그중에 가장 가까이 있어 언제나 내편이 되어주는 아내가 사랑스럽다. 늘 건강하기를 다시 한 번 빌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