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글--
고려시대 신유학의 전래 문제와 함께 검토되어야 할 호남의 인물로는 광산출신의 김양감이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 신유학의 전래가 늦어진 것은 고려가 원 나라의 지배에 있었고 송나라가 원 나라와 항쟁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로서는 송나라와 쉽게 접촉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었으므로 송의 명망 이후에 원나라를 통하여 수입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김양감은 직접 송나라를 통하여 처음 신유학을 접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지금까지 신유학의 수입이 원 나라에서 안향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되엇고 그 이전 송나라와는 교통이 없었다고 여겨 온 사실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원나라의 눈치를 살피면서 송나라와 직접적인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뜻 한다.
김양감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등 여러 곳에 보이고 있는데 신유학의 전래에 관한 기록은 『광주읍지』에 비교적 자세하다. 이로 본다면 고려에서는 원나라를 통하여 주자학이 전래되기 이전 직접 송나라와 교역하기 위하여 요나라를 피하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였고 또한 태묘와 국자감의 그림을 그려오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노력들이 더욱 확대되었다면 보다 일찍이 송을 통하여 직접 신유학의 수입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업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김양감을 통하여 고려의 조정에서 처음 송나라의 신유학에 대한 문물을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김양감의 활동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으로서 그 업적은 결코 과소평가 할 수 없을 것이다
김양감
본관은 광산. 1070년(문종 24) 상서우승좌간의대부(尙書右丞左諫議大夫)에 이어 서북로병마부사(西北路兵馬副使)에 오르고, 이듬해 상서좌승지어사대사(尙書左丞知御史臺事)가 되었다. 1074년 사은사로 송(宋)에 가서 양국간 왕래 항로의 정박지를 종래의 등주(登州)에서 명주(明州:浙江省)로 변경할 것을 합의했다. 이듬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고, 동지중추원사·예부시랑·참지정사판상서병부사(參知政事判尙書兵部事)를 거쳐 1082년 좌복야(左僕射)에 올랐다. 선종초에 중서시랑평장사·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내고, 1087년(선종 4) 판상서호부사(判尙書戶部事)를 거쳐 수태위(守太尉)에 올랐으며 지공거(知貢擧)를 지냈다. 〈삼국유사〉에 있는〈가락국기〉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
첫댓글 ?? 글 전체가 펌글이라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만, 1) 어디서 퍼 온 글인지(원글쓴이가 누구인지), 그리고 2) 펌글을 통해 무엇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네요.
인터넷검색이 좋군요.. 어떤 잘 알 수 없는 문제를 이렇게 쉽게 구할 수 있으니 말이죠..사실 신유학이라해서 개신유학이라고도 하는 .. 그 배경은 송나라나 고려나 원나라의 진출에 의한 이데아적인 딜레마에 빠진..불교를 배척하고 유학을 지지하려는 동북아시아의 흐름에서..지배층의 통치논리로 개신유학을 받아들이지만, 민중은 불교와 도교가 이미 라이프스타일로 자리잡고 있는 상황에서, 지배층의 통치논리가 합리적이나 민중에게는 전달되지 않고, 오히려 불교의 비통치적논리가 민중에게 만연되니 대승불교의 핵심인 누구가 부처나 될수 있다는 생각은 당시로서는 역모의 근거가 될수도 있다는 생각에..누구나 집권자가 될수 있다는
즉 그동안 알고 있던 불교의 폐혜는 다름아닌 민주주의의 근거가 될만한 사상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불교사상이 민주주의와 연결될까? 사실 모든 종교는 해방의 논리를 통해서 민중을 끌어모으고 신도수를 늘리는게 현상이기도 한데, 그 해방의 원인은 업보라든지 원죄라든지 하는 것이겠지만, 정치적 억압에 의한 해방도 일부분 담겨 있어서, 조선후반기에 카톨릭이 남인에게 설득된 것도 그러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후에 도교적 라이프스타일에 익숙한 농민들이 동학이라는 거대한 사상축에 가담하게 되는 것도 그러한 해방의 이유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천주교는 서양 학문의 일종으로 들어왔죠.남인들이 믿은 것도 그 때문이고요. 진까 구원은 신유박해가 지나고 양반 신자들 대다수가 빠져나가고 여인이나 하층민에게까지 확대되면서 생긴 거죠 애초 도입때 부터가 아니라
역사 스페셜 "다산 정약용" 에서 카톨릭의 전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더군요..나름 좋은 프로라 생각됩니다. 도입시기에 신앙심의 발로가 아니라 노론과 대적하기 위한 방법이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백서사건 때문에 카톨릭신자들이 역도로 몰리게 되고, 즉 당시의 이데올로기에 반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역적으로 몰려서 탄압받는 것은, 순수한 신앙의 발로가 아니었다는 것이죠. 나중에는 신앙으로 이어지지만.
누구와 신라의 철학을 논하다가 보니 결국 고려의 철학은 무엇이었을까? 대충 알고 잇는 것들이 전부는 아니기에, 고려에서 무신정권과 원나라의 식민지적 상황에서 ... 다양한 사상과 철학이 있었을 것 같은데..조선의 건국으로 잠수를 타고 하는 과정이 ..너무나 알 수는 없지만..어떤 짦은 근거들은 그것이 널리 민중에게 각인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대승불교의 부처론은 민중불교의 핵심이기도 할 것이란 생각입니다. 실천을 강조하려는 생각은 발전해서 일부는 호국불교가 된다지만 일부는 해방의 불법을 선택할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대승불교 역시 민중의 불교가 아닌 승려와 지식인의 불교였습니다. 자신들의 주장의 정당화를 위해 민중들의 신앙 몇 가지를 수용한 것 뿐이지요. 그 점이 인도에서 불교가 몰락하는 큰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대승불교를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서 ..다만 종교가 정치적이고 지배층의 것이었다 해도, 우리사는 주변에는 정말 순수한 신앙의 발로로 만배의 절을 한다든지 하면서.. 자신과의 싸움을 합니다. 저도 108배를 해보니 알것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