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 , 주님과 떼는 첫 발걸음 193
권두언
현시대의 기독교 안에서는 진정한 거듭남에 대한 필요성과 가르침을 접하기가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피상적이고 표면적인 신앙만으로 만족해하고 있습니다. 거듭남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해야 합니다. 거듭남이야말로 천국을 볼 수 있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바람처럼 영혼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합니다. 아무도 거듭남의 과정을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거듭난 자의 생애에 나타난 변화된 성품과 행위로 위대한 거듭남의 역사의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표면적으로 옛것이 변경되고 개량되는 것이 아니라 본성과 원래의 동기와 목적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신과 죄에 대하여는 죽고 전혀 새로운 생명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새롭게 거듭나는 외적인 표를 침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출발의 시작, 새로운 헌신의 지표가 되는 침례는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있어서 의미 있는 전환점이 됩니다. 죄된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침례는 거듭남의 중요한 원칙을 우리 마음에 새겨주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새롭게 태어나는 경험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주위에 많이 생기는 것을 보면서, 그 진정한 거듭남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지속되고 또 그것이 영원한 하늘까지 우리를 인도하는 경험이 되기를 기도해봅니다. 이번 호 신앙기사에서는 침례의 의미를 다시 살펴볼 것입니다. 여러분의 매일의 생애에서 영적 침례의 경험과 거듭남의 비밀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강 병국 목사
Love Letter_깨어진 옥합에 흐르는 사랑의 노래
강 영은
노래하라면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의 노래는 사랑보다 더한 노래여서 다 노래 할 수가 없습니다. 고백하라면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의 고백은 사랑보다 더한 고백이어서 다 읊조릴 수가 없습니다. 전하라면 전하겠습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의 이야기는 사랑보다 더한 이야기라서 입으로 다 전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사랑은 어디에도 담을 수가 없습니다. 순전한 나드 한 옥합에 담아도 모자라는 사랑, 당신께로만 향한 사랑입니다.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일구던 지치고 상처 입고 구멍 난 나의 삶 속에 한 줄기 빛이 비치던 그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일곱 번이나 꾸짖어주신 사랑의 음성에 영혼을 옭아매던 무거운 사슬이 떨어져 나가고 암흑의 그림자 덮인 내 마음이 당신의 탄원으로 깨끗하게 된 그 날을…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절망과 두려움으로 먹먹하게 떨리던 순간, 마치 영겁이 지난 듯 엎어진 시간 속에서 부드럽게 내 귀를 스치는 목소리,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당신의 무릎 아래 앉을 수 있게 된 이 행복을… 아무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의 꿀 송이를 맛보는 이 기쁨을…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말하라면 말하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들은 당신의 음성은 너무 깊은 사랑의 울림이어서 세상에서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너무 따뜻한 목소리여서 내 말에 다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라면 그리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본 당신의 얼굴은 너무 아름다운 얼굴이어서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너무 빛난 모습이어서 내 그림에 다 그려 낼 수가 없습니다.
주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베푸신 사랑의 억만 분의 일도 채 되지 않을 나의 사랑을 옥합에 담았습니다. 세상을 위해 깨뜨려지는 당신의 귀한 몸을 위해 나의 옥합을 깨뜨립니다. 가치없는 내 몸과 영혼과 소욕도 함께… 주여,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겠나이다. 깨어진 옥합에 흐르는 향기로운 노래는 나를 위한 당신의 죽음과 나를 위한 당신의 부활을 기리는 영원한 찬양… 끝없이 흐르는 내 마음의 사랑의 노래 속에는 천근의 나드에도 비교할 수 없는 당신의 향기가 스며납니다.
제1부_지상에서 치르는 혼인 예식, 침례
침례는 하나님께 신앙과 믿음을 고백하고 자신을 온전히 주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바치는 엄숙하고 아름다운 예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침례를 영적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표로 삼으시고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옛 생애를 청산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공식적으로 증거하는 침례는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상징이며, 자신의 생애를 하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권위로 인정을 받기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하는 구별의 표가 됩니다. 침례는 주님과 함께 믿음의 발걸음을 떼는 시작이 됩니다. 침례 속에는 우리들이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심오한 영적인 의미와 교훈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는 침례의 참된 의미를 살펴봅니다. – 편집실 -
제 1부: 지상에서 치르는 혼인 예식, 침례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함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3, 4). 새로운 탄생! 주님과 함께 떼는 첫 발걸음, 침례! 누구나 침례에 대한 감격스러운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마음이 벅차고 뜨거워지며 자기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솟구치는 침례 예식…환희와 감사에 차서 하나님을 큰 소리로 찬양하고 싶었던 그 감동의 순간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침례식이 거행될 때 수침자나 그곳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모두 거룩한 하늘의 분위기와 감화를 느낀다. 흐르는 눈물과 감동으로 가슴이 그렇게 벅차게 되는 이유는,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침례식에는 성령께서 특별한 감화로 임재하시며 하나님과 보이지 않는 수많은 천사들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그 거룩한 예식에 참여하여 함께 감격과 기쁨을 나누기 때문이다. ‘침례’라고 하면 연상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아름다운 결혼식 장면,하얀 예복으로 곱게 단장한 신부가 행복에 겨운 미소를 띠며 결혼식장으로 발걸음을 떼는 장면이다. 침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하나가 되는 영적 예식이다. 영원한 하늘의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기 전에, 이 지상에서 주님과 산 연합을 이루는 혼인 예식과 같은 것이다. 실제로 침례가 우리를 씻거나 그 물이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속죄를 상징하는 침례는 결혼 예식과 같이 이전 생애에서 돌이켜 자신의 생애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영히 연합함을 공중 앞에 선포하는 것이다. 함께 침례의 깊은 영적 의미를 되새겨보자. 1) 침례, 그 장사와 부활의 의미 침례는 죽음이다. 침례는 죽는 것이다. 침례는 옛 몸과 옛 생애와 모든 옛 것들을 물속에 장사지내는 것을 상징한다. ‘침례’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바프티조(baptizo)”이다. 이것은 ‘물에 담그다’, ‘물속에 가라앉히다’라는 의미가 있다. 사람이 죽어 장사 지낼 때는 그 주검을 살짝 가려 덮지 않고 완전히 그 대상을 덮어버린다. 그것처럼 침례를 받을 때도 몸이 완전히 물속에 잠기도록 아래로 눕혀진 후에야 물 위로 나오게 한다. 이것은 죽음, 곧 물속에 모든 것을 장사지냄의 상징이다. 자신의 마음대로, 자신의 감정이 이끄는 대로, 세상의 욕심과 정욕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살던 옛 생애, 예전의 삶을 포기하여 물 속에 장사지내고 새로운 몸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고백하며 그 사실을 공중 앞에 선언하는 것이다. 침례는 세상을 엄숙하게 포기하는 예식이다. 죄된 생활과 세상을 버리고 이제는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그분을 위해, 그분의 기뻐하시는 뜻대로만 살아가는 정결한 신부가 되겠다고 약속하는 혼인 예식인 것이다. 침례는 또 부활이다. 물 무덤에 옛 자아를 묻어버리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 부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서 장사되신 것같이 물속에 장사되고, 그분의 부활을 본받아 물에서 일으킴을 받는 것을 상징한다. 물에서 일어난 사람은 이제 신랑되신 그리스도와 완전히 합해지고, 앞으로 죄된 생애를 살지 않고 예수 안에서 새 생명 가운데 살아가겠다는 서원 속에 새 삶을 시작하게 된다. 이제 그의 생애는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졌다고 선언된다. 그는 죄에 대해 죽었고, 유전적이며 배양된 죄악으로부터 정결케 된 것이다. 이제 새롭게 일어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첫발을 떼게 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1~3). 새로운 피조물이 된 기쁨, 새로운 생애로 들어가는 첫걸음을 떼는 행복은 얼마나 큰 것인가! 2) 침례, 주님과 맺는 엄숙한 약속 침례는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 맺어지는 엄숙한 서약이다. 물이 수침자를 덮을 때에 온 하늘이 보는 앞에서 쌍방이 언약을 맺게 된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엄숙한 맹세를 하는 것인데, 그것은 이제 이후로 내 생명을 삼위 하나님의 생명에 합치시키고, 육체 가운데 사는 나의 삶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명에 신실하게 순종하는 삶이 되게 하겠다는 맹세이다. 마치 결혼 서약을 할 때 공중 앞에서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그에게만 충실하겠다고 맹세하듯이, 천사들 앞과 사람들 앞에서 주님께만 마음을 바치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만 살 것을 서약하는 것이다.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사단과 그에 속한 모든 관계를 끊어 버리고, 이제부터 예수님과만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그 새로운 관계 속에서 다시는 자만과 방종하는 삶을 살지 않고 주님만 위하여 살기로 공적으로 선언하며 계약을 맺은 것이다. 침례를 받을 때 우리는 주께서 쓰시는 도구로 바쳐진다. 침례 서약은 많은 뜻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것은 수침자는 세상에 대하여 죽었으며, 이제부터 그는 주님을 위해 살고, 자기에게 맡겨진 모든 역량을 주님을 위해 사용할 것이며,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요, 그 나라의 신민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라는 것을 시인한다는 의미이다. 침례는 자기의 인격 전체와 소유 전부를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기를 결심하는 서약이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침례를 통해 진실한 언약을 맺은 사람들을 받으신다. 그분들은 침례식이 있는 곳마다 임재하시고, 세상을 포기하고, 영혼의 전으로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는 수침자들을 가납하신다. 이 수침자들은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그들의 이름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다. 주님께서는 침례를 받는 사람들이 당신께 진실하겠다고 약속하는 그들의 충성의 서원을 하늘책에 기록하신다. 그들은 스스로 세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왕국의 법을 지킬 것을 선서하며,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의 유전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부정직한 방법들을 따르지 않으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을 걷는다. 3) 침례, 졸업이 아닌 시작 한 가지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 사실은, 침례는 그리스도인 생애에서 졸업이 아니고 다만 그리스도인 생애의 첫걸음을 떼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침례는 끝이 아니다. 이제부터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생의 시작이다. 첫 발자국을 뗀 다음부터는 성장과 자라남이 필수적이다. 사도바울의 간증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는 고백이 삶 속에서 실제로 체험되어야 한다. 한 가지 주지하고 있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태어난 아기가 갑자기 잘 걸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비틀거리고 쓰러지기도 하고 많은 실패를 거듭하지만, 주님의 손을 놓지 않고 끝까지 인내로써 주님을 따라가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패하거나 쓰러진다고 하여 결코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말자! 쓰러지지 않는 것이 의인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 걷는 것이 의인이라고 성경은 말해주고 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찌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잠 24:16).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어떤 완전을 향해 달려가는 지점으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어떤 한 부분을 이루고 또 다른 한 분야를 성취하면 그만큼까지의 완전과 완성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어떤 지점에 다다르면 완전과 완성을 다 이루었다는 착각과 영적 교만에 빠지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착념해야 할 사실은, 사람이 어떤 공로나 행위나 행적을 쌓는다 해도, 아무리 의로운 생애를 살았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털끝만큼의 의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의는 인간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우리 속에 거할 때에 의가 되는 것이다. 완전한 의는 우리 속에 임재해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의 손을 잡을 때에 빠지지 않고 물 위를 잘 걸어갈 수 있었던 것처럼, 매 순간 주님을 놓치지 않고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이 의를 경험하는 것이며,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던 경험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이루는 좋은 실례가 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 모든 유리한 조건과 기회와 특권을 주셔서 풍부한 그리스도인 경험 가운데 자라나게 하신다. 우리들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배우지는 못한다. 매 계단마다 조금씩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로 나아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배우는 학생이 되는 것이며, 그 배움이 우리를 더 큰 하늘 학교에 입학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침례는 졸업이 아니고 시작임을 명심하자!
제2부_일상에서 계속되는 영적 침례
침례는 영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일상에서 반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죽음과 부활의 반복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앙생활 속에서 영적인 죽음과 영적인 부활이 매일 매 순간 이어지는 것이다. 매 순간의 선택에 의해 하루의 승리와 실패가 좌우되고, 그 과정에서는 끊임없이 영적 죽음과 부활이 반복되고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사단의 시험과 유혹을 만난다. 그때 마음속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지금껏 싸운 싸움 중에서 자아와의 싸움이 가장 치열하다. 사단은 육신의 자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좋은 뜻대로 행하도록 부추기지만 성령께서는 자아를 굴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을 호소하신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편을 택하면 사단과 악을 물리치게 된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갈등과 투쟁이 일어나는 그 순간,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고 주님의 편을 선택하는 그 순간에, 우리의 육적인 자아의 포기와 죽음이 일어나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새로운 삶의 부활이 열린다. 그러므로 침례가 비록 한 번의 예식으로 끝나지만, 영적 의미에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침례 예식처럼 그 죄의 장사지냄과 육적인 자아의 죽음, 그리고 새 삶의 시작과 영적인 부활은 일상생활에서 매 순간 반복되는 것이다. 영적 침례의 반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상에서의 영적 침례의 반복이 바로 우리가 걷는 성화의 길이며, 영적 성장의 과정인 것이다. 1) 침례 후에 오는 시험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침례를 받는다고 영적 생활의 걸음걸이에서 갑자기 점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격정적이거나 감격스러운 환희의 감정이 잦아들면 자신의 신앙이 열렬해지지 않고 식은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신앙은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신앙은 삶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차분하고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 변치 않는 믿음이다. 어찌 보면 더 바르고 굳건한 신앙은 환희에 들뜬 감정이라기보다는 매일의 생활에서 바르고 선한 의도 속에서 행동하며,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로 부드럽게 인도하며, 친절과 온유로 대하고, 사랑과 동정을 보이는 것이 더 훌륭한 신앙이다. 침례를 통해 공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선포할 때에 사단과 그의 부하들이 분노하여 시험으로 공격할 수 있다. 흔히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신 후에 광야로 시험받으시러 가셨다는 성경의 기록 때문에 침례를 받은 후에는 시험이 온다는 말이 정석인양 회자되고 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만일 어떤 사람들이 침례 후에 시험을 받게 되는 경우, 그 이유를 굳이 살펴본다면, 그것은 영적인 교만이나 방심, 또는 영적 미성숙 때문임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침례를 통해 자신의 신앙이 이전보다 일취월장하고 믿을 만한 것이라는 자만에 빠지거나, 자신이 한 헌신의 서약에 만족하고 의기양양해져서 이제 자신의 신앙이 스스로 힘으로도 넉넉히 설 수 있을 만한 것이라는 영적 교만에 빠질 경우 시험에 들 수 있다. 또는 침례 시에 일어나는 드라마틱한 감정의 변화와 감격을 맛보다가, 침례 후에 그런 감정이 사라지고 난 후 자신의 생활에서 침례 전이나 후의 그리 큰 변화나 차이를 발견하지 못할 때에 느끼는 실망감이나 영적 미성숙에서 시험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기억해야 할 것은 침례는 이제 겨우 첫 발걸음을 떼는 시작이므로 주님을 시야에서 절대로 놓치지 말고 늘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과 발걸음을 함께 옮겨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만일 침례 후에 더욱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산다면 시험은 넉넉히 이길 수 있을 것이다.
2) 침례 후 밟는 성장 계단 하나님의 영적 왕국에 들어가는 표로 침례를 받은 사람은 중단 없는 영적 성장의 과정으로 들어가야 한다. 영적 죽음을 거치고 새로운 부활로 태어난 사람은 이제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 안에서 쉬임없이 자라나야 하며, 그래야 영적 생명이 보존될 수 있다. 베드로 후서 1장에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성장 계단이 잘 나타나 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해 밟아야 할 계단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 주신 보배로운 약속으로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어떠해야 하는가 알려준다. 그리스도인이 밟아야 할 성장의 계단, 그리스도인이 올라가야 할 사다리라고 불리는 대표적 구절이 이 장에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 1:4~7). 이 구절은 침례 후에 걸어야 하는 성화의 길, 성장의 단계들을 얼마나 자세하게 지시해주고 있는가! 이 구절을 읽어보면 “이제는 다 이르렀다”고 멈출 만한 곳이 없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단계마다 계속적인 진보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한 덕목을 완성하고 난 후에야 다른 덕목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 성품의 덕성들은 예수님의 사랑의 샘으로부터 계속해서 영양 공급을 받아서 함께 자라나야 하는 것들이다. 이 성품의 특성들을 이루는 데는 계속적인 진보만 있는데, 예를 들어 “믿음”의 열매를 맺는다고 가정해 보자. 거기에는 “믿음”을 다 이루었다고 말할 지점이 없는데, 그 이유는 믿음이 한 번에 완성을 이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 믿음을 키우면 그다음 단계에는 더 깊고 단단한 믿음을 이루는 과정이 오고, 그다음에는 더 큰 믿음, 그렇게 하여 나중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엄청난 믿음을 소유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의 성품의 특징인 믿음이나 덕이나 인내나 경건 같은 성품의 열매들은 영적으로 성장하면 할수록 더 질이 좋아지고 용량이 커지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걷기를 시작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생애에서 이 아름다운 품성의 열매들을 맺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매일의 삶에서 이 복된 속성들을 이루어 낼 수가 있다. 이것들은 주님과 함께 걷는 생애 속에서만 맺어지는 열매들이다. 3) 휴식이 없는 성장과 전쟁 영적 자라남에는 중단이나 휴식이 있을 수 없다. 성장을 멈춘다는 것은 퇴보를 뜻하며, 퇴보란 곧 그리스도와 함께 걷기를 중단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매일 하늘로부터 생명을 받고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자라나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날마다 영적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이 전쟁에는 휴식이 없다. 날마다 우리들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룩해야 한다.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실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영적 성장 계단을 계속하여 밟아 올라가고 성품의 모든 덕목들을 이루기 위한 능력을 받기 위해 힘써 노력해야 한다. 그 노력은 계속적이고 끈질긴 것이어야 하며, 단호하고 확고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우리는 시험이 올 때 그것에 맞서서 저항해야 한다. 자신을 죽이고 주님께 힘을 구하여 시험과 악한 충동과 의도를 이기는 것, 이것이 바로 삶 속에서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며 영적 성숙을 이루는 것이다. 예수님을 알기에 게으르지 말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말자!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한다면, 또 진리에 대한 충성이 모든 것을 삼킬 만큼 열렬하다면, 매일의 영적 싸움을 싸우며 나아가는 이 길이 힘들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 전쟁을 계속 치를 동기를 부여하지 않는가! 4)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신의 성품에 참여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의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우리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약속을 믿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바치고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의 품성을 거룩한 모습으로 꼴지어 주셔서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극복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예수님의 생애는 우리에게 좋은 모본이 되고 있다. 주님은 매 순간 하나님 아버지와 교통하시므로 거룩한 하늘의 빛 가운데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사셨기 때문에, 악의 세력이 그분의 생각에까지라도 침범할 수가 없었다. 우리도 하나님과 긴밀한 교제 속에서 지낼 때에 우리의 생각까지라도 순결하고 거룩해질 수 있으며, 그리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는 데 필요한 모든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는 데 필요한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들을 믿고 그 약속을 개인적으로 적용시키는 일이다. 즉, 그 약속을 주장하고 간구함으로써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은 늘 그분이 하신 약속의 배후에 계신다. 보배로운 약속을 주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성품의 완성을 위해 필요한 모든 은혜와 능력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간구하는 사람들이 되자!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배워야 한다. 우리가 매일 주님의 발아래 앉아 거룩한 교사로부터 배우고, 매일 그분의 본성에 참여할 때에 우리는 사단의 시험을 이길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명상하고 그분을 닮기 위해 그분의 생애의 조목조목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때 어떻게 하셨을까?”하는 것이 우리의 명상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 주님을 바라보면 볼수록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깨닫게 되고, 우리의 연약함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는 그분의 성품을 닮기를 갈망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는 그분의 성품을, 그분의 의를 달라고 부르짖게 될 것이며, 그때에 주님께서는 그분의 성품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다. 이런 애타는 부르짖음과 간구가 매일 우리 입에서 터져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제3부_산채로 장사되는 사람들
요즘 기독교에서 침례는 입교식을 치르는 하나의 형식이나 교인의 명부를 늘리기 위한 교회 성장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듯한 인상을 준다. 외적인 형식만으로의 침례 예식은 아무 의미가 없다. 침례는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그 예식 자체는 사람을 구원하는 힘이 전혀 없다. 침례가 시사하는 진정한 자아 포기와 죽음의 장사지냄과 새 피조물로 나오는 거듭남과 부활의 경험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1) 물에서 죽지 않고 나온 사람들 가끔 미디어에 실리는 당황스럽고 놀라운 세계 면의 뉴스를 접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어떤 사람을 죽은 줄 알고 관에 넣었는데 관을 부수고 살아났다거나 장례식을 치르는데 죽은 사람이 살아서 벌떡 일어났다는 황당한 뉴스이다. 죽은 사람이 살아서 나오다니 그 얼마나 깜짝 놀랄만한 현상인가? 그런데 이 일은 어떤 의미에서 영적으로 자주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영적 죽음을 상징하는 침례를 받으면서 죽지 않고 그대로 살아서 물에서 올라오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산채로 장사된 사람들이 많다. 많은 사람들이 침례를 받았지만 산 채로 장례를 치른다. 말 뿐만의 죽음이지 진정으로 자아가 죽는 경험을 하지 않고 옛 사람이 그대로 살아서 나온다. 옛 성질이 전혀 죽지 않았고 성향이나 경향이 바뀐 적이 없다. 진정한 죽음이 없었기 때문에 삶 속에 진정한 부활 새 삶이 시작되지 못한다. 침례를 받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는데도 그 말과 정신과 품성에 전혀 변화를 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진정한 거듭남을 경험하지 못해서이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나 자기의 목적이나 계획에 대한 반대를 참지 못하는 것, 온유하지 못한 품성을 나타내고 쉽게 화를 내는 것,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자기를 사랑하며 이기심과 급한 성미와 성급한 말을 나타내는 것, 또한 진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자만하고 모난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 등등은 진정한 거듭남을 경험하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아니, 만일 우리 자신들이 이런 성향들을 나타내고 있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자아에 대해 죽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증거가 된다. 과거에 침례를 받았든 앞으로 받을 것이든지를 막론하고, 매일의 삶 속에서 일어나야 하고, 또 매일 지속되어야 할 거듭남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산 생명으로 일어나지 못했거나 현재 그 산 생명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아직도 진정한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지 못했는지 자신들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거듭남의 경험이 이르도록 주님께 간절히 간구해야 할 것이다.
2) 자아가 섞인 봉사 일상생활에서 자아가 죽지 않고 나타나는 사람, 자아를 위하여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은 혹시 외양적으로 주님을 매우 열심히 섬기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자아’라는 실을 섞어 짠다. 자아 사랑과 숭배는 그 모습이 다양하다. 그 모습 중 어떤 것은 별 해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표면적으로 선하고 훌륭한 것 같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자아가 어디에나 나타나 있으면 오히려 그 봉사로 인해 하나님의 사업이 방해를 받는다. 만일 주님을 위한 봉사,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이라고 말하는 어떤 행위에도 자아 숭배의 정신이 들어 있다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을 것이며 그 봉사는 주 앞에 헛된 봉사가 될 것이다. 우리의 육신의 자아는 오늘 하나님 안에서 죽어야 한다. 매일 매 순간 자아는 하나님 앞에 굴복되고 대신 우리의 마음과 정신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셔야 한다. 우리의 자아를 면밀하게 살피자! 그리고 우리 속에 자아 숭배의 정신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주님께 자신을 철저하게 바치자!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다면 그분 앞에 우리의 마음을 낮추고 예수님의 품성을 닮기 위해 열렬하게 노력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이 거룩하고, 순결하고, 깨끗하기를 요구하신다. 왜냐하면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아를 드러내려는 의도로 어떤 것을 행하는 것은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에게 매우 흔한 일이었다. 그들의 외식은 이기주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그들의 생애의 목적이었다. 자아에 대한 사랑은 성경의 말씀을 왜곡하게 하고 메시아를 거절하게 하였으며 예수님의 사명의 목적에 눈을 감게 하였다.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당시의 이런 정신에 어느 정도 물들어 있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것처럼 보였지만 마음속에는 자신을 부각하기 위해 어떤 것들을 추구하는 정신이 자리 잡고 있었고, 이 정신이 누가 더 크냐는 분쟁을 늘 일으켰다. 그러나 제자들이 주님의 십자가 이후에 자아가 완전히 죽는 경험을 하였을 때에 분쟁의 정신은 사라지고 드디어 마음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성령의 능력으로 나아가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게 되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즐겨 자아를 부인한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를 매일 바라본다면, 주님께서 치르신 희생이 얼마나 크고 의미심장한 것인지 충분히 깨닫게 될 것이며, 그 놀라운 구속의 경륜이 우리 마음속에 너무 감사하게 느껴지고 갈보리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활력을 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마음과 입술에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흘러넘칠 것인데, 갈보리의 장면들을 기억 속에 생생하게 간직하는 영혼들에게는 자아 사랑이나 자아 숭배 그리고 교만과 같은 정신이 자리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3) 가장 큰 싸움 세상의 전쟁 중에 가장 큰 싸움은 자아와의 싸움이다. 마음속에서 매일 일어나는 전쟁은 우리가 혼신을 다해 싸워야 할 가장 중요한 싸움인 것이다. 우리의 영생은 이 노력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주님의 능력을 굳게 붙잡는 가운데 이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자아와의 싸움을 상징해 주는 성경의 알맞은 실례는 얍복강가에서 야곱이 하나님과 겨룬 씨름에 대한 경우이다. 야곱은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겼다(창 32:23~30 참조). 장자권을 속여 취한 일 때문에 집을 떠나게 되어 오랜 세월을 방황하던 야곱은 하나님의 허락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아를 온전히 굴복한 경험이 없었으며 온전히 하나님과 화친한 경험의 부족으로 장래에 대한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가족과 권솔들을 이끌고 돌아가면서 아버지를 속였던 자신의 과오에 대한 죄책감으로, 형 에서의 분노와 공격 앞에서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그는 얍복강가에 엎드려 자신의 모든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며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했다. 그가 열렬히 기도하고 있을 때 갑자기 원수처럼 보이는 정체불명의 사람이 나타났다. 야곱은 그가 자신의 원수인 줄 알고 새벽이 맞도록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밤새 자신과 씨름하다가 동이 트자 떠나려는 그분이 언약의 사자임을 깨닫고 야곱은 그분을 붙잡았다. 그는 죄에 대한 용서를 빌면서 축복을 빌어주시기를 간청하였다. 밤이 맞도록 사력을 다해 싸운 야곱! 환도뼈를 침을 당하기까지 주님을 놓지 않았던 야곱은 무엇을 얻었는가? 그는 승리를 얻었다. 그는 새 사람이 되었고 새 이름까지 받았던 것이다. 겸비와 회개와 자아 굴복을 통하여 죄와 허물이 많던 야곱은 하늘의 지존자를 이기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매달렸다. 야곱이 자신의 힘으로 승리를 얻으려고 애쓸 때에는 두렵고 고통스러웠다. 그는 그 거룩하신 손님을 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그의 힘이 다 없어질 때까지 싸웠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내어 던졌을 때에 그는 원수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하신 사랑의 팔에 안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로 대면하여 보았고 그의 죄는 용서를 받았다. 우리도 자아를 굴복하고 자아와 싸우기 위해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붙들어야 한다. 굳세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새 생명을 얻을 때까지 씨름해야 한다. 열렬하고 진지한 기도, 그리고 결정적인 노력과 순종과 예수님의 공로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우리는 승리할 수가 있고 자아를 정복할 수 있다.
제4부_침례와 부르심과 일꾼 되는 증거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갓 침례를 받은 사람뿐 아니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위하여 달려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위대한 사명을 띠고 있다. 그것은 우리를 죄 가운에서 불러내셔서 새 사람이 되게 하신 분의 능력과 덕을 선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빛의 일꾼들이 되기 위해, 그리고 영생을 준비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조건이 무엇인가? 무엇으로 그분의 덕을 선전할 것인가? 그것은 진리의 메시지 안에서 성화된 성품과 생애로 하는 것이다. 수침자들이나 오랜 신앙생활의 연륜을 지닌 그리스도인이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품성을 이루기 위해서 거쳐야 할 단계들이 있다. 신앙과 성품의 완숙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품의 형성은 여러 단계와 과정들을 통과하면서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 가운데 “씨 뿌리는 자”에 대한 이야기에는 그리스도인 신앙의 성장에 대한 중요한 교훈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막 4:26~27). 씨가 밭에 심기워 자라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가 인간의 마음에 심어져 신앙이 싹트게 된다. 씨가 발아하는 것은 영적 생활의 시작을 나타내고, 곡식이 자라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대한 표상이다. 영적 자라남에는 단계가 있는데, 처음에는 싹의 단계, 그다음에는 이삭의 단계, 그리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을 맺는 단계, 그리고 열매가 추수되는 단계가 그것이다. 1) 우리의 평생 과업인 성품 변화 식물은 자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또 자라는 것이 눈에 띄지도 않지만 끊임없이 계속해서 자라난다. 그리스도인 신앙생활도 그렇다. 씨가 발아하는 시점이 있는가 하면, 싹이 트고 이삭이 맺히는 단계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단계는 자라나는 성장의 과정이다. 이 신앙의 자라남에 있어서 모든 단계는 그 단계로서 완전한 것이다. 싹은 싹으로서, 이삭은 이삭의 단계로서 완전하다.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맺히고 열매가 추수되는 것이 최상의 성숙도이겠지만, 신앙의 발전의 단계마다 우리의 생애와 성품은 완전하게 될 수 있다. 열매가 적다고 해서 열매가 아닌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양과 질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뿐이다. 주님을 아는 지식과 진리에 대한 지식이 많아지면 질수록, 그리고 진리 속에 자리 잡은 신앙의 연륜이 깊으면 깊을수록 신앙의 성숙도는 깊어진다. 곧 성품의 열매의 질이 더 좋고 풍성해지는 것이다. 성화의 과정은 하루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의 완성이나 끝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음에 있어서, 진리 안에서 자라나는 일에 있어서 다 이루었다는 완성의 단계는 없다. 우리는 더 넓고 크고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 그 안에서 더 넓고 크고 깊은 신앙의 길로 나아가는 길에 서 있을 뿐이다. 그것은 평생의 과업이며 하나님의 성품의 그 질과 양과 깊이까지 우리의 성품이 자라남은 끝이나 완성의 지점이 없을 것이다. 침례로 첫 발걸음을 시작한 날로부터 성화의 경험은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거룩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거룩한 성품을 준비하기 위해 죄를 이기고 계명을 지키는 순종의 생애를 사는 것은 하나님의 덕을 선전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선전원으로서 이 땅 위에서 우리가 할 일이다. 식물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들을 섭취하므로 자라나듯이, 그 뿌리를 땅속에 뻗고 위로는 햇빛과 이슬과 비를 흡수하며 공기 속에서 생명소를 흡수하듯이,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의 능력과 협력함으로 자라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무능력함을 인식하고 주님의 능력과 은혜 속에서 더 넓은 경험을 얻으며 자라나도록 주어지는 모든 기회들을 잘 이용하여야 한다. 식물이 뿌리를 땅속에 내리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식물이 이슬과 비를 받는 것처럼 우리도 성령을 받기 위해 매일 마음 문을 열어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영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우리는 주님을 개인의 구주로 끊임없이 의지함으로써 범사에 머리가 되신 그분에게까지 자라나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속에 그분의 성품을 재현시키시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생애의 목적은 열매 맺는 일이다. 곧 성품과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품성을 재현시키고 또 다른 사람에게서도 그 품성이 재현되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생애의 목적인 것이다. 그 일이 이루어져야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수 있다.
2) 가장 위대한 건축, 품성 형성 완전한 품성을 얻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고상하고 모든 면에 원만한 품성은 선천적으로 물려받는 것이 아니다. 고상한 품성은 예수님의 은혜를 통해 끊임없는 개인적 노력으로 얻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능력을 주시고 재능과 정신력을 주시지만 품성 형성은 우리가 하는 것이다. 품성은 자아와 더불어 맹렬하게 싸움으로써 형성된다. 타고난 성벽을 끊어 버리기 위해 계속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자신을 면밀하게 살피고 단 하나의 좋지 않은 성벽도 고쳐지지 않은 채 남아있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품성 건설 공사에 성공하려면 철두철미함이 필요하고 확고한 성실성이 필요하다. 위대한 건축자이신 예수님의 모본을 따르려는 진지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부실 공사로 무너지는 건물들을 볼 수 있다. 건축에 사용되는 건축 자재가 견고한 것이어야 그 건물은 안전하다. 품성 형성에도 어떤 재료가 사용되느냐에 따라서 굉장한 차이를 가져온다. 머지않아 모든 사람의 건축한 것이 시험을 받을 것이다.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고전 3:13). 불이 금, 은, 보석들과 나무, 풀, 짚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듯이, 심판의 날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좇아 형성된 품성과 이기적 마음의 모양을 좇아 형성된 품성 사이의 차이가 드러날 것이다. 모든 거짓 신앙은 그때에 실상 그대로 나타날 것이다. 이기심과 교만과 세속적인 무가치한 재료들은 다 타버릴 것이지만, 진실하고 참되고 겸손한 믿음의 금은 그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며, 준비된 하늘의 성품은 썩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시험하는 돌, 모퉁이 돌이 되신다. 예수님께서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신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견고한 기초돌이 되신다. 그러나 반석 되신 예수님께 떨어져 깨지는 자들에게만 그렇다. 반석에 떨어져 깨진다는 것은 자신의 고집과 독선을 버리고, 어린아이 같은 단순한 마음과 겸손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 그분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믿는 가운데 죄를 자복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복하는 것이다. 산 돌이신 그리스도와 합하여 반석 위에 집을 짓는 모든 사람은 주님과 연결되어 산 돌이 된다. 자신의 노력으로 아무리 자르고 닦고 아름답게 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은 사람들은 산 돌이 될 수 없다. 이 연결 없이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시험해 보지 않은 기초 위에 집을 짓고 있다. 비가 내리고 폭풍이 휘몰아치고 홍수가 올 때에 영원한 반석, 곧 모퉁이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지 않은 집들은 크게 무너질 것이며,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거치는 반석이 되실 것이다.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3) 일꾼으로의 부르심 침례를 받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께 바쳤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침례 후에는 더욱 그리스도의 생애를 연구하고 주님의 진리의 교훈들을 실천에 옮기는 삶을 살므로 주님의 품성을 세상에 나타내 보여야 한다. 침례를 통해 모든 세속적인 삶과 생각들을 접고 더 이상 교만과 방종의 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공적으로 선언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주님에 대하여 살아야 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힘과 재능들을 주님을 위해여 사용해야 한다. 자신과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고 주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변화된 삶과 성품은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내재하신다는 것을 세상에 증언하는 가장 큰 증거가 된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과 은혜로운 구속의 능력이 어떻게 결함 많은 품성을 계발시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실례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통해서 그분의 품성과 뜻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신다. 침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올라오시자 강변에서 무릎을 꿇고 당신의 사명의 성공을 위해 기도하셨듯이, 또한 공생애 동안에 인간에게 나눠주시기 위해 매일 성령의 침례를 받으셨듯이, 침례를 받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도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고 나누어주는 삶을 살기 위해 매일 성령의 침례를 받으며 변화된 성품으로 주님을 증거해야 한다. 철저히 회개하고 변화된 영혼들에게서 세상 사람들은 인간의 품성을 개조시키고 성화케 하는 진리의 능력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진리 안에서 꼴지어진 성품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산 연합이 마음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 그리고 그 사실은 믿음, 사랑의 수고, 인내, 온유, 소망 등으로 하나님의 사업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데서 나타날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영혼은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산 선교사가 될 것이다. 우리 모두 일꾼으로 부르신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생애를 살므로 주님의 산 선교사들이 되어야 하겠다.
< 마치면서 > 우리는 진리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침례를 통해 주님과 함께하는 첫 발걸음을 뗀 사람들입니다. 혹시 공적이고 외적인 절차로서의 침례를 받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마음을 헌신하고 주님께서 주신 진리의 교훈대로 순종하며 살기로 결심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 영원한 하늘로 향하는 여정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덕과 구원의 능력을 증거하며 가야 합니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말처럼, 우리의 지향하는 목표나 소망이 한걸음에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 그분의 일꾼과 증인이 되는 일이나, 영원한 구원을 위해 우리의 성품을 준비하는 일이나, 예수님의 재림을 위해, 그리고 마지막 환난을 위해 준비하고 개혁하는 일이나, 그리스도인 신앙의 성장을 향해 나아가는 일이 하루아침에 요술처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은 들끓는 열정만으로도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매일 매 순간 주님께로 향하는 우리의 끊임없는 굴복과 순종으로, 꾸준하고 오래 참는 인내와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침례 예식 때의 서약, 곧 온몸과 마음과 영혼을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의 서약이 매일 필요한 것입니다. 이 일을 이루는 것은, 감정적인 흥분이나 일시적인 열성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역경이나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어떤 시험이나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안정적인 신앙, 진리 안에 잘 안착하는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헌신과 서약이 변하지 않는 것이 되기 위해 매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만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종종 우리가 연약하고, 믿음이 없게 되는 것은 난관들과 어려움에 우리의 시선을 붙들어 매고, 옳은 것을 위해 진지하고 열렬한 싸움을 싸우는 일을 회피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올라가면 가장 높은 언덕길도 오를 수 있으며, 마침내 산의 정상도 정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동안 해야 할 엄청난 양의 일에 압도되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단번에 이 모든 일을 이루고 하라는 요구를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힘을 다하여 그날그날의 일을 수행하고, 귀한 기회를 활용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도움을 감사히 여기면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진보의 사다리를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이며, 우리가 하루 단위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오늘 주신 하루의 특권과 기회를 가치 있게 사용하고, 이 하루가 예수님을 맞기 위해 준비하는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 때에, 머지않아 우리는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시는 주인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뗀 여러분의 발걸음이 하늘까지 다다르는 발걸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 안에서 결코 굴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끝까지 견디면서 이 진리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독자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마지막 시대 이슈_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전포고
오늘날 잔혹하고 폭력적인 사건들이 너무나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사회에 넘치는 폭력은 실로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 (창6:11)하였던 노아의 시대를 연상시키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만연한 전쟁과 경제 파탄의 소문은 이 세상 끝에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마 24:6~7)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성취라고 볼 수밖에는 없다. 특별히 올 초 터키로 건너간 김군이 가담하여 대한민국 언론들의 헤드라인을 오랫동안 장식하기도 한 전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이슬람 극단 무장 테러집단 IS는 근래에 들어 정말 무자비하게 잔혹한 테러 행위들을 감행하였다. 그들은 올 1월 프랑스 파리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엡도’ 건물에서 자동화기로 수십 발의 총알을 쏘며 12명을 살해하고 10명에게 부상을 입힌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을 극찬하며 “이제 시작일 뿐”이라 외쳤고, 2월 초에는 요르단 공군 비행사 포로를 산채로 철장 안에서 태웠으며, 2월 중순에는 21명의 콥트교도들을 해안에 일렬로 앉히고 모두 동시에 잔인하게 참수하며 전 세계를 경악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와중에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더욱 주목해야 할 사건이 있었다. 테러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던 프랑스 ‘샤를리 엡도’ 사건의 공포가 한창일 동안, 로마 천주교 교황 프란치스코는 언론을 동반하여 필리핀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그는 언론의 자유를 활용하는 일과 종교의 자유 보호에 한계가 있으며 어디에 선을 그어야 할지 전 세계에 권면하였는데, 평소답지 않게 온몸을 사용하며 몇 가지 흥미로운 발언을 했다. (프란치스코) “공개적으로 말할 의무가 있다. 우리에게 그 자유가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면 안 된다. 물론 우리가 폭력적으로 대응해선 안 되겠지만, 여기 나의 좋은 친구 가스페리 박사가 나의 어머니를 욕한다면… (번개같이 빠른 오른 주먹을 날리며) 한 방 얻어맞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건 정상이다. 이건 정상이다. 도발하면 안 된다. 다른 사람의 신앙을 모독하면 안 된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아닌 혹자는 “당연한 말 아닌가? 어머니를 모욕하는 사람을 그냥 두면 되겠는가!” 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황 프란치스코는 자칭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더군다나 로마교회가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로서 떠받드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상반되는 모순적인 행동을 해도 된다고 하는 것이다. 양심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욕했다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그리스도의 품성을 올바로 나타내는 사람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마 굉장히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마 5:39)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 바울도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21)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교황 프란치스코의 발언은 교황권이 시작된 AD 538년부터 1798년까지였던 교황권의 전성기 종교 암흑시대를 지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유한한 인간의 교훈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높이는 ”천주교회의 오래된 유전을 이어가고 있는 발언이다. 그러나… 주저 없이 그의 어머니를 욕하는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사실을 번개같이 빠른 오른 주먹을 날리며 보여준 오늘날 이 세상이 세계 도덕적 지도자로서 바라보는 교황의 발언에는 더욱 두려운 이면이 있다. 인자한 외모 덕분에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레이더에 걸리지 않고 통과하여 호감으로 다가가고 있는 교황 프란치스코는 아무 의미 없이 “어머니”를 그의 예로 든 것이 아니다. 그는 매우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어머니”의 예를 사용하였다. 왜냐하면 로마 천주교회는 오랫동안 다음과 같이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이점은 항상 분명해야 한다. 하나이며 거룩하며 사도들을 계승하는 우주적인 카톨릭 교회는 자매가 아니라 모든 교회의 어머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종교 재판소’의 후신인 ‘신앙교리성’의 수장으로 있을 때 (Cf. Congregation for the Doctrine of the Faith, Letter Communionisnotio (28-5-1992), 9: AAS 85 (1993), 843-844.) 그들의 주장은 매우 흥미로운 주장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요한계시록 17장에서 로마 천주교회를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즉 온 세상을 바벨론으로 만든 주범이며 타락하고 배도한 개신교회들이 어미로서 따르는 존재로서 로마 천주교회를 지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황 프란치스코는 자칭 “어머니 교회”되는 로마 천주교회를 공격하는 개인이나 그룹에게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정상적으로 세상에 용인되는 대응법으로써 온 세상에 공표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한 개인이 로마 천주교회를 대담하게 요한계시록 17장의 음녀로서 부른다면? 혹은 더욱 노골적으로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계 17:5) 고 지목한다면? 교황권이 그에게 폭력적으로 대응할 수도 있는 일이 되는 것일까? 역사는 “물론 그렇다.”라고 증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기원후 538년부터 1798년까지 5천만 명 이상의 사람이 교황권을 계시록 17장의 음녀로서 지목하고 항거하였기 때문에 고문을 당했고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교황권이 자칭 “거룩한 아버지–파파”라고 부르는 교황을 한 개인이나 그룹이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 즉 “적그리스도”라고 부른다면 어떻게 될까? 교황권이 폭력적으로 대응하는 일이 생기게 되는 것일까? 역사는 역시 이번에도 “물론 그렇다.”라고 증거한다. 왜냐하면 매우 낮춰 잡은 추산으로 5천만 명 이상이 교황권의 교황을 사도 바울이 말한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로서 즉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하는 성경의 “적그리스도”로서 지목하고 항거하였기 때문에 온갖 고문을 받아 불구가 되었고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확실하게 로마가 폭력을 사용하게 될 사건이 있을까? IS로 알려진 악명 높은 집단이 21명의 그리스도인을 참수하고서 피 묻은 칼을 바다로 향하며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알라의 허락으로 우린 로마를 정복할 것이다.”라고 외쳤다면? 그런 발언이 교황권의 분노를 일으켜 이미 그의 권세 아래 있는 세계의 모든 강력한 정치적 세력들의 배후에서 예수회 산하의 비밀 조직들 –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말타 기사단, 콜럼버스 기사단, 오푸스데이, 빌더버그, 등등 – 을 통해 작전을 펼쳐서, 특별히 서방 국가들의 군사력을 사용하여 IS를 칠 뿐 아니라 성경에 기초하여 공개적으로 교황권의 권위를 무시하고 로마 천주교회를 요한계시록 17장의 “음녀”로서 지목하고 교황을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적그리스도”로서 외치는 집단이나 개인까지 함께 치지 않을까? 그런 일이 과연 벌어질 수 있을까? 오직 시간이 우리에게 답을 알려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이란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별로 없다. 왜냐하면 올 9월 교황은 미국에 방문하여 미 의회에서 연설하기로 일정이 잡혀있는데, 이 일은 역사상 그 어떤 교황도 한 적이 없는 역사적인 사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 성경 예언의 마지막 부분들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다. 표범과 같은 짐승으로 묘사된 요한계시록 13장의 첫 번째 짐승인 교황권은 이제 사냥감을 물어 죽이기 위해 도약하기 직전에 있다. 요한계시록 13장의 두 번째 짐승인 “새끼 양 같이 두 뿔” 있는 짐승으로 상징된 미국은, 기독교 원칙을 가진 국가로 출발한 미국은 결국에는 “용처럼” 말하게 될 것이며 교황권에게 경의를 표하는 법을 법령화하여 1798년에 입은 죽게 되었던 상처가 완전히 회복된 교황권에게 온 세상이 경배하게 할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다. 계 13:12~17 “저(미국)가 먼저 나온 짐승(교황권)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교황권)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저(미국)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중세기 교황권이 가졌었던 종교와 정치의 연합 체계)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교황권을 존경하고 경배하는 종교 법 제정)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교황은 이미 작년 중순 “근본주의자는 실제로 살인을 하지 않고 실제로 누군가를 치지는 않지만 폭력이다. 근본주의자가 가진 정신적 구조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이다.”라고 근본주의자들 특별히 “오직 성경”을 주장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전쟁 선전 포고를 한 바 있다. 또한, 얼마 전 그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개혁교회와의 만남에서 21명의 콥트교도들에게 벌어진 참극에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프란치스코) “그들의 유일한 말은: "예수님, 도와주소서!" 였다. 그들은 그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했다. …혼란이 가득한 세계화된 세상에서 전도하는 우리의 노력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공통적인 기독교증언(종교 연합)이 불가피한 필수요소이다.… 천주교도, 동방정교도, 콥트교도, 개신교도든 차이가 전혀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의 피는 같다. 나는 우리가 이 종교 일치 운동에서 더 전진하여 하나가 되기를 서로 격려하기를 부탁하고 싶다. 이 일은 우리에게 힘을 줄 것이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발언들을 종합해보면 그의 적이 누구인지는 너무나 분명하다. 그의 적은 종교 일치 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오직 성경”의 진리만을 고수하며 아직도 교황권에 항거하고 있는 매우 극소수의 종교 개혁의 후예들이다. 그렇다. 마귀의 사냥감은 언제나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절대로 타협하지 아니하고, 오류와는 절대로 연합하지 아니하며, 죄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의 품성을 나타내고 인내하며 죽기까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이 말세에 그들을 잡아 죽이는 “짐승의 표” 문제는 이제 곧 우리 모두가 직면해야 할 문제로서 다가와 있다.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눅 21:36) 진리의 말씀을 연구하며, 또한 모든 진리에 마음으로 순종하며 예수님의 재림을 위해 준비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진리탐구_사도 베드로의 “영적 이스라엘” 탄생 선언
사도 베드로의 “영적 이스라엘” 탄생 선언 1-1 구약시대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옛 언약이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흠(欠)이 생겼으며 그 언약은 다시 신약 시대에 와서 영적 이스라엘 백성인 그리스도인의 교회 안에서 새 언약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며” (암 9:11) 아모스 9장 말씀을 사도 바울께서는 신약시대의 교회에서 이루어졌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였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지어 일으키리니”(행 15:14-16)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리라는 아모스의 예언을 바울 사도께서는 초대 교회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진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유대인의 사도이며 한 때는 이방인을 “부정한 자”로 여겼던 베드로 사도는 이방인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희는 ①택하신 족속이요 ②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③거룩한 나라요 그의 ④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가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벧전 2:9) 우리는 이 비슷한 말씀을 읽었었는데 그것은 바로 모세가 출애굽 한 후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언약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며 그 언약의 준수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는 출애굽기 19장 5절 이하 말씀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출 19:5-6)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볼 점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켰을 경우 즉 처음부터가 아니라 언약에 대한 순종의 결과가 축복으로 이어지며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부터 거룩한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준수하여야 하는 조건 속에서 제사장과 거룩한 백성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는 말씀은 베드로전서 2장의 말씀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처음에 육신의 이스라엘 자손에게 선포되었지만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그 언약은 파기되었으며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시 그 언약이 선포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선민인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며 더불어 또 한 가지 이 언약의 조건은 지금도 동일하게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는 구약시대 이스라엘이 언약을 불순종했으므로 새로운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인들이라 선언하며 그 당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더욱 충격적인 선언을 다음과 같이 하게 됩니다. ① 택하신 족속 그 첫째가 너희는 택하신 족속, 즉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② 왕 같은 제사장들 : 거룩히 구별되는 제사장이 된 그리스도인들 “두 번째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다음호에 이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기독교회사_아이단이 창시한 잉글랜드 교회 학교들과 양성 대학들
이교도의 나라들에서 벌어진 아이단의 복음주의 운동 이 복음주의 운동은 페르시아나 동방에서 같은 믿음을 가지고 이방인들을 회심시키기 위해 노력하던 신자들에게 큰 감동과 용기를 주었다. 아이단은 기도로 하나님께 열렬히 탄원하며, 진리와 의무에 대한 분명한 자각을 가지고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통해 구원과 변화를 경험하게 했다. 그는 죄인을 위한 사역과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한 노력에 큰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에 깊은 관심이 보였으며, 노예들을 자유인으로 만들기 위해 그들을 위해 속전을 치르는 일에 큰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Latourette, The Thousand Years of Uncertainty, p. 57. 아이단이 창시한 교회학교들과 양성 대학들 “오스왈드 왕이 아이단에게 준 그 왕국의 수도 가까운 섬 린디페어린은 교육기관을 세우기 좋은 환경을 갖춘 곳이었다.” “아이단은 그가 행하는 모든 수고에 항상 자신의 눈은 그의 영적인 후원자 콜룸바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Lingard, The Antiquities of the Anglo-Saxon Church, vol. 1, p. 155. 아이단은 콜룸바가 세운 이오나 선교센터를 본보기로 잉글랜드의 학교를 세웠다. 학생들과 교사들은 들판에서 일하며 자급생활을 했으며, 재정에서는 몇몇 중심지에만 집중하지 않고 많은 센터를 건립하였고, 그 학교가 필요로 하는 만큼만 건물을 지었다. 아이단이 세운 첫 번째 학교를 시작으로 베르니시아, 에이라, 머시아, 동 앵글리아에 훈련센터가 세워졌는데, 그곳에서는 이교가 사라지고 신약성경의 가르친 신앙이 자리 잡았다. 아이단과 그의 직계 후계자들의 짧은 사역 기간 아이단과 그의 후계자 피난과 콜만의 사역 기간은 총 30년으로 이 중 아이단 17년, 피난 10년, 콜만 3년이었다. Bede, Ecclesiastical History of England, b. 3, ch. 26. “이렇게 해서 본래의 켈트교회는 교황 로마교회의 첫 번째 선교사가 그곳에 도착한 때에는 그 나라에 관하여 이미 매우 강력한 지배력을 지니고 있었다.” Meissner, The Celtic Church in England, p. 4. “아이단은 잉글랜드의 사도였다.” Hulme, A History of the British People, p. 33. 아이단에게 성공을 안겨준 양성 학교들 - 초기 브리튼 기독교의 유래지는 서방이 아닌 동방이었다. - 옛 ‘수도원’과 ‘수도사’라는 용어는 본래 독신과 격리의 삶을 의미하지 않은 다른 의미로 쓰였다. - 그곳은 신학원이었고, 학생들은 결혼하였으며, 직책과 임무를 아들들에게 계승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 쿨디, 켈트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이 정착하는 곳에서는 외부의 어떤 상관의 임명이 아닌 자체 선거를 통해 임원회 의장을 선출하였다. - 그 의장은 계급이 아닌 “동등한 사람 중의 첫 번째 사람”에 불과할 뿐이었다. 동방의 고대 수도원들은 양성 학교였다 “고대 우리의 수도원들은 목회자 양성학교들이었다. 박식한 신학자들이 있는 수많은 학교가 있어서 사람들이 늘 그곳에 강연을 들으러 가곤 했다. 또한 이 학교들은 교회에 목회자들을 공급해주는 기관들이기도 하였다.” 제임스 웃셔(Ussher), The Whole Works, vol. 4, p. 297. 아이단은 린디스페어런을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트위드 리버에 두 번째 훈련장인 멜로스를 설립하였으며, 콜룸바 계열의 대학은 그곳에서 문명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Bede, Ecclesiastical History of England, b. 4, ch. 27. 이렇게 로마 교황권 카톨릭 종교가 강제로 진압하기 전에 브리튼의 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훌륭한 양성 센터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장해가고 있었다. -계속
Healing Story_매실
대학 시절에 농촌 하기봉사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몇 가구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혈압을 재드리고, 저녁에는 건강교육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혼자 사시는 한 할머님께서 고마운데 줄 것이 없다고 하시면서 냉커피 비슷한 색의 음료를 주셨습니다. 지금도 유리잔에 얼음 몇 개를 띄어 주셨던 그 시원하고 새콤달콤한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때, 저는 처음으로 매실즙을 먹어 보았습니다. 매실은 매화나무의 열매로 한바탕 꽃 잔치를 끝내고, 꽃잎이 떨어진 매화나무에 5월부터 초록색 알사탕 같은 매실이 달립니다. 매실은 80%의 과육이 있는데 수분이 약 85%, 당분이 약 10% 정도 함유되어 있으며, 구연산, 사과산, 호박산 등의 유기산이 5%가량 들어 있어서 피로회복과 입맛을 돋우는 데 효과가 있습니다. 매실의 산에는 강한 살균성과 해독작용이 있어 식중독이 흔한 여름철에 먹으면 위 속에 산이 강해져 식중독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보통 6월 말에 수확한 매실이 가장 영양이 많다고 하는데, 무더운 여름 가족들의 건강을 위하여, 오가는 손님들을 생각하며 매실청을 담가 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1. 피로회복 몸에 젖산이 쌓이면 피로감과 두통, 요통 등의 증상이 나타납니다. 매실은 젖산을 분해하여 몸 밖으로 배출시켜 주므로 피로회복에 도움을 줍니다. 2. 간기능 증진과 해독작용 매실은 3독을 없앤다고 합니다. (1)음식물의 독 (2) 피의 독 (3) 물의 독 매실에는 피크린산이라는 성분이 미량 들어 있습니다. 피크린산은 독성물질을 분해하는 역할을 하기에 식중독, 배탈 등 음식으로 인한 질병을 예방 치료하는 데 효과적입니다. 따라서 여름철 가정 상비약으로 매실을 준비해 두시면 참 좋습니다. 또한 항암 식품으로 주목받아 각종 연구도 활발히 진행 중입니다. 3. 체질개선 신맛이 강한 매실을 산성식품이라고 오해할 수 있지만 오히려 대표적인 알칼리 식품으로 그 효과는 다른 과일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인스턴트 음식이나 육류 등으로 몸이 산성화되어가는 현대인들에게 각종 성인병을 예방할 수 있는 중요한 식품입니다. 4. 위장장애 완화 매실의 신맛이 소화기관을 자극하여 위장이나 십이지장 등에서 소화액을 촉진시켜 줍니다. 특히 위액 분비를 촉진시켜서 소화불량을 해소하고 위장장애를 치료합니다. 또 매실은 과다 분비되는 위산을 조절하며 과식이나 배탈에도 효과가 있습니다. 5. 변비 완화 매실에는 카테킨산이라는 성분이 있습니다. 카테킨산은 강한 해독작용과 살균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장내 나쁜 균의 생성과 번식을 막아줍니다. 또한 장의 연동 운동을 도와서 변비를 해소해 줍니다. 6. 피부미용 매실 속의 각종 유기산과 비타민들은 체내 혈액순환을 도와줍니다. 혈액 순환이 좋아지면 신진대사가 원활해지고 이는 피부를 탄력 있고 촉촉하게 해줍니다. 7. 칼슘 흡수 증진 매실은 칼슘이 풍부한 식품으로 메론의 4배, 포도의 2배가 있습니다. 칼슘은 기본적으로 장에서 흡수되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 있으나 매실의 구연산과 사과산 등이 칼슘과 결합하여 흡수를 돕는 역할을 해줍니다. 따라서 어린이, 임산부, 폐경기 여성들에게 더욱 좋은 식품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다. 8. 강력한 살균, 살충 작용 대부분의 유해균들은 위의 강력한 위산으로 인해 죽게 되는데, 위의 활동이 좋지 못하면 소장까지 유해균이 내려가게 됩니다. 소장의 경우 알칼리성으로 살균 효과가 거의 없기에 소장까지 내려간 균들이 배탈, 설사, 식중독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 때 매실의 구연산과 사과산들이 일시적으로 위를 산성화시켜서 유해균을 없애는 작용을 합니다. 무더위와 장마가 시작되는 여름입니다. 힘들고 불쾌한 계절이기도 하지만, 밭의 작물들이 건강하게 쑥쑥 자라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의 삶에도 힘든 여름철이 있습니다. 외롭고 지쳐서 주저앉고만 싶지만, 그 시간은 우리를 정결하고 강건한 그리스도의 용사로 성장시켜 주는 시간입니다. 약속의 말씀과 기도로 이겨내시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시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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