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의 부석사와 안양루에서 바라본 소백산맥]
천하의 명산에 있는 부석사
『 오직 이 네산이 태백산맥의 여덟 산과 함께 나라의 가장 큰 명산이고, (세상을 피해서) 숨어사는 무리들이 수양하는 곳이다. 옛말에 “천하의 명산은 중들이 많이 차지했다.” 했는데, 우리나라에는 불교만 있고 도교는 없다. 그러므로 이 열두 명산을 모두 불교의 절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 밖에도 크게 이름난 절 때문에 그 지역이 세상에 알려진 경우가 있는데, 기이한 자취와 이상한 경치가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있으니, 신라 때의 절인 부석사浮石寺다. 불전 뒤에 큰 바위 하나가 옆으로 서 있는데, 그 위에 큰 돌 하나가 지붕을 씌운 듯하다. 얼핏 보면 위아래가 서로 이어진 듯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두 돌 사이가 서로 이어지거나 눌려 있지는 않다. 조금 빈 틈이 있어, 노끈을 넘기면 걸리지 않고 드나든다. 그제서야 비로소 떠 있는 돌[浮石]인줄 알게 된다. 절이 돌 때문에 ‘부석사’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이렇게 떠 있는 이치는 자못 알 수가 없다.
절 문 밖에는 살아 있는 모래가 덩어리져 있는데, 예부터 부서지지도 않고, 깍아 내면 다시 솟아나니, 마치 살아 있는 흙덩이 같다.
신라 때 중 의상義相이 도를 깨치고 서역 천축으로 떠나려다. 자기가 머물던 요사채 문 앞 처마 밑에다 지팡이를 꽃으면서 “내가 떠난 뒤에 이 지팡이에서 반드시 가지와 잎이 날 것이다. 이 나무가 말라 죽지 않으면, 나도 죽지 않은 줄 알아라.”했다. 의상이 떠난뒤에 절의 중이 의상의 상像을 빛어서 그가 머물던 곳에 모셨다. 창밖에 있는 나무는 가지와 잎이 나왔는데, 햇빛과 달빛은 받지만 비와 이슬에는 젖지 않았다. 늘 지붕 밑에 있으면서 지붕을 뚫지 않고 겨우 한길만 자랐는데, 1000년이 마치 하루 같았다. 광해군 때 경상감사 정조鄭造가 절에 왔다가 이 나무를 보고 “선인이 짚던 지팡이니, 나도 짚어 보고 싶다.”하면서 톱으로 자르게 해 가지고 갔다. 그러자 그 나무가 곧 두 줄기로 뻗어나 전과 같이 자랐다. 정조는 인조 계해년(1623)에 역적으로 몰려 죽었다. 나무는 지금까지도 사철내내 푸르며 꽃이 피거나 지는 일도 없는데, 중들이 비선화수飛仙花樹 라고 부른다.
옛날에 퇴계가 이 나무를 보고 읊은 시가 있다.
옥처럼 아름답게 절 문에 기대섰는데 중의 말로는 지팡이가 신령스런 나무로 화했다네. 지팡이 머리에 스스로 조계曹溪의 물이 있어서 하늘이 내리는 비와 이슬의 은혜를 빌리지 않는구나.
절 뒤에 있는 취원루聚遠樓는 크고도 넓다. 마치 천지의 한 가운데 솟은 것처럼 아득하다. 기세와 정신이 웅장해서 마치 온 경상도를 위압할 듯하다. 벽 위에는 퇴계의 시를 새긴 현판이 있다. 계묘년(1723) 가을에 내가 승지 노닐다가 이 절에 올라, 드디어 이 시의 운자韻字를 따서 시를 지었다.
아득히 높은 다락 열두 난간에 동남쪽 천 리 땅이 눈앞에 보이네. 인간 세상은 아득한 신라국이고 하늘 아래는 깊고 깊은 태백산일세. 가을 골짜기 어두운 연기는 날아가는 새 너머에 일고 해협에 지는 노을은 어지러운 구름 끝에 비치네. 가고 가도 위쪽 절에는 닿지 못하니 예부터 행로의 어려움을 어찌 알았으랴.
또 시를 읊었다.
아득한 태백산은 하늘과 통하고 옛 절은 웅장하게 바다 동쪽에 열렸네. 강과 산들은 천 리 밖에서 멀리 조회하고 불당과 다락은 날아갈 듯 천지 사이에 솟았네. 이름난 중이 처소를 떠났는데도 꽃은 나무에 피고 옛 나라야 흥하든 말든 새는 하늘을 날아가네. 누가 알랴, 주남周南 나그네가 머뭇거리며 뜬 구름 지는 해에 하염없는 뜻을.
취원루 위 한쪽 구석에 방을 만들었는데, 그 방에 신라 이래 이 절에 머물렀던 중 가운데 사리가 나온 이름난 중의 화상 10여 폭이 걸려 있다. 모두 얼굴 모습이 예스럽고도 괴이하며 풍채가 맑고도 깨끗해, 엄연히 다락위에서 서로 대좌해 선정에 든 듯하다. 지세는 구불구불 뻗어 내려 가는데, 그 아래쪽에 작은 암자가 있다. 불경을 강하거나 선정에 들어가는 중들이 거처하는 곳이라고 한다. 이 절은 경상도 순흥부 지역이다.』
택리지[서해문집/이중환지음/허경전옮김] 212쪽
조선의 실학자인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은 본관은 여주, 호는 청담, 청화산인이고 참판 이진휴의 아들이다. 성호 이익의 문인이자 재종간이다.
청담은 증광문과(1713년) 병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김천도찰방, 승정원 주서, 성균관 전적, 병조정랑을 지냈으며, 당파 싸움에 따른 네 차례의 형을 받고 두번의 유배를 떠나야 했다.
택리지는 청담이 몸으로 전라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전국의 각 지역을 직접 방문하고 눈으로 발로 겪으면서 기록한 책이다. 처가의 당쟁 패배에 따른 몰락으로 조선 팔도를 정처없이 방황하며 당쟁이 없는 평화로운 곳을 찾아 다녔다.
경상도 순흥부에 위치한 부석사방문기는 당쟁의 피해가 오기 이년 전에 승지 함께 방문하여, 순탄한 관직 생활 중에 기록한 글이다.
청담은 전국을 유랑하면서 당쟁이 없고 기름지고 경치가 좋은 곳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먹거리를 해결해야 한다는 실학 사상이 배어 있는 이상향을 꿈꾸었다. 실학 사상은 성호의 실사구시 학풍의 영향을 받아서 택리지에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꿈꾸었던‘이상향은 어디에 있을까?’궁굼하다. 성호 이익이 재종인 청담의 선물을 받고 답례로 시를 한편 보냈다.
족손(族孫) 휘조(輝祖) 중환(重煥)가 선물을 보내왔기에 답례로 시를 부쳐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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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의 역로가 구불구불 아스라이 먼데 천리 밖에서 서신이 돌아와 이별을 말하네 쓸쓸한 절에서 달 밝을 제 함께 구경했고 해산에 봄기운 가득할 때 거듭 만나자 했지 사람들은 다 땅에 선 그으니 그만둠이 부끄럽겠지만 도는 본래 하늘과 같으니 깊이 사색해야 하리라 진중한 귀이에 마음 더욱 기쁘고 즐거워 한마디 말에서 마음이 통함을 알겠도다 <성호전집 제1권>/한국고전번역원
수정20090606 |
출처: 역사의 숨결을 느끼며 원문보기 글쓴이: 조은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