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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내가 나의 왕을 세웠다.(최한나)
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시편 2:1-12 말씀 아멘!
시편 2편은 시편 1편과 함께 전체의 서론을 구성한다. “복”에 관한 것으로 시작하고, 기도와 묵상에 관한 주제를 다루는 시편 1편은 세상속에서 악의 문제에 직면한 개인적인 삶과 생명의 길을 가기 위해서 어떤 것을 택해야 하는가에 대한 필연적 결과를 다루었다. 그러나 이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기에 그 의미가 있으며, 풍성한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가능한 것이다. 한편 본 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고, 권세를 차지하기 위해 벌어지는 열방의 경영이 초래하는 문제를 신앙 공통체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 즉 세상의 정치와 음모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자의 말을 시적으로 표현했다. 본 시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 “기름 부은 자”, “아들”이라는 세가지 칭호가 함께 들어 있는 유일한 구약성경 본문이다. 이 칭호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묘사하는 중요한 수단을 제공하기도 한다, 본 시는 시편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주제로 하는 다른 시편의 개요 역할을 하고 있다.
본 시가 어떻게 사용되었는가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즉위시”로 쓰였을것이라는 답변을 할 수 있는데, 아마도 포로기 이전 예루살렘에서 왕의 즉위시 때 제의적인 축제용이었을 것이다. 즉의시는 새로운 왕의 머리에 왕관을 쒸우고 율법서를 공식적으로 수여하며,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그가 왕위에 올랐음을 선포하는 의식을 포함한다. 그러나 시편 2편은 즉위시를 반영하는가에 대한 진위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문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본시에는 여러 명의 발언자가 있다. 첫째는 “반역적인 말을 하는 이방 나라들”과(3절) “이방나라의 왕”(1~2절)으로서, 수사적질문 형식의 절규를 담고 있다. 둘째는 “선택받은 왕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4~6절)인데 이방 왕들의 반역에 대한 여호와의 진노와 비웃으심을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은 주께서 어떠하신 모습으로 그 반역자들에 대해 대처하실 것인가를 밝혀 준다. 셋째, “자신의 왕권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을 내포하고 있는 다윗의 혈통의 왕”(7~9절)으로서 아버지 되시는 여호와께서 바로 그날에 혹은 즉위시 날에 그의 왕을 주의 아들로 삼으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열방을 다스리고 정복할 힘을 약속하고 계신다. 넷째로는 “이방 나라들과 통치자들을 향한 권유”하는 말로써, 주꼐 피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내용으로 마무리 된다. 그리고 시의 배경이 된 무대는 소란스럽게 떼드는 이방나라들을 시작으로 하나님과 그가 택하신 왕에 이어서 소란스러운 상태에서 진압 상태에 있는 이방 나라들로 옮겨지고 있다.
한편 본 시의 주제는 그 구성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네 부분 모두 주요 관심사는 주의 나라와 열방과 군왕들과의 관계에 있다. 즉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는 권세가 과연 누구에게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시편 2편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하늘에 계신 주권자가 세우신 기름부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을 다스릴 권세와 자격이 있다는 분명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 나라”는 성경의 핵심적인 주제로써, 이스라엘 왕조 시대에 이스라엘 왕국과 동일시되었다. 비록 이스라엘은 왕을 가지고 있었으나 하나님은 그 왕국의 궁극적인 통치자다. 즉 하나님은 온 우주의 왕으로서 한 나라의 왕은 하나님의 통치 대리자였다. 하나님이 범우주적인 이상 그의 대리자 역시 범세계적이어야 하는데 다윗 혈통이 왕들에게 이것은 이상일 뿐 현실적으로 요원했다. 다윗 혈통의 계승은 유다 왕국의 몰락과 파멸로 인해 공식적으로는 종결되었으며, 다윗 혈통의 범세계적인 통치는 왕조 시대에는 결코 실현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이는 근본적인 사상의 변화로서 새로운 왕권에 대한 계약 때문이었다. 즉 어떤 형태로든 다윗 혈통의 왕들이 왕으로서의 역할을 다시 수행하게 될 것이며 본래 지상의 왕에게만 적용되었던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 하는 말은 이제 종말론적인 의미와 메시아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예수의 복음 선포에서 핵심적인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였으며,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새로 선포된 나라의 왕이었다. 즉 시편 2편에서의 메시아적인 시편 해석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그의 사역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 준다. 다윗 혈통의 왕의 즉위는 하루에 이루어진 반면, 예수 그리스도의 즉위는 그의 사역 전체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그가 왕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공적으로 선포하고 있다. 로마서 1장 4절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역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 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라고 바울을 편지로 전하였다.
비록 시편 2편에서 이방 나라에 대한 폭력적인 분위기와 달리 예수님께서는 헤롯솨 본디오 빌라도의 폭력에 대하여 폭력으로 맞서지 않고, 그것을 수용함으로써 하나님으 나라와 왕권을 수립했다. 심지어 죽음과 죽음에 대한 승리의 부활은 그 사역의 절정에 이르렀다. 다윗 혈통의 왕들이 법세계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했듯이 이 세상은 실제적으로 여전히 오만하고도 혼란한 나라와 반역적인 통치자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수립되기는 했으나, 그의 완전한 통치는 아직 미래의 것으로 남아 있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 분의 궁극적인 통치와 승리에 대해 기대를 하는 이유다.
6. 요한 복음 3장 16절의 신비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말씀 아멘!
본 절은 복음에 관한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내용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복음서들 속에 있는 복음”(the Gospel within the Gospels) 혹은 “작은 복음서”(Little Gospel)라고 불리기도 한다. 구약 성경과 신약성경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요절인 본 절은 복음의 진수로써, 복음이 담고 있는 모든 계시의 말씀을 사랑의 개념에서 천명(天命)한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의 “세상”을 뜻하는 헬라어 코스모스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온 인류를 가리킨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은 선민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민족이나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이는 곧 복음의 보편성과 그 맥을 같이 한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개방되어 있지만 그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본 절에는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동기가 된 것임이 밝혀져 있다. 특별히 “사랑”의 헬라어 “아가페”은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들 중의 하나로써, 하나님 편에서 선수권과 주도권을 가지고 인생의 연약함과 죄성을 끝없이 감싸 안으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본성이라 하겠으며(요일 4:8)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의 생애를 보면 우리는 그 사랑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사랑은 결코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며 막연한 이론이나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응분(應分)의 대가를 아낌없이 지불하는 것이다.
또한 독생자를 주셨으니는 개역한글판, 개역개정판의 “독생자”와 제임스왕역(KJV)의 ‘only begotten Son’은 마치 하나님이 예수를 낳았으며,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분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시작이 있으며 하나님보다 열등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성육신하신 기간만을 생각할 때는 예수께서 사람의 몸으로 태어났고, 예수께서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고 의지한 것을 보면 독생자라는 표현도 어느 정도 맞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본문의 말씀은 성육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원래부터 독생자였던 분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독생자란 말은 무슨 뜻인가? 독생자는 헬라어로 모노게네스 라고 한다. 모노게네스는 모노스(홀로, 혼자서)와 게노스(자식, 자손)의 합성어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모노게네스를 태어났다는 의미의 “독생”으로 번역하는 것은 정확한 의미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최근의 많은 영어 성경들은 “only begotten Son” 대신에 “only Son”(유일한 아들)로 번역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70인역(LXX)은 히브리어 야히드를 헬라어 모노게네스로 번역하였다. 야히드는 구약에서 12번 쓰이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 가장 사랑하는(darling) 2회, 고독한(desolate) 1회, 유일한(only) 6회, 유일한 아이(only child) 1회, 외로운, 혼자의(solitary) 1회. 예를 들면 시편은 모노게네스를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하고 귀한 것을 가리킬 때 사용하였다(시 22:20, 35:17). 따라서 여기서는 출생의 의미가 거의 없고 유일하게 귀중한 것,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것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약에는 요한의 글을 제외하고는 모노게네스라는 말이 4회(눅 7:12, 8:43, 9:38, 히 11:7) 나오는데 모두가 부모의 유일한 자녀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누가복음의 귀중한 세 자녀의 경우에 주의깊이 읽어보면 강조점이 그들의 출생에 있지 않고 그들이 부모들에게 얼마나 귀중한 존재였는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에서는 그 뜻이 더욱 분명하다. 아브라함은 그의 모노게네스를 제단에 바쳤는데, 사실상 이삭은 그의 단 하나의 아들은 아니었다. 이미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삭이 모노게네스가 된 것 이유는, 이삭이 유일하게 귀중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신약의 다른 책에서는 모노게네스가 주로 사람의 유일하고 귀중한 자녀를 말하는데 쓰였지만, 요한의 글에서는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인 그리스도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요한복음 1장은 말씀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쓰여졌다. 그러므로 요 1:14의 “아버지의 모노게네스(독생자)의 영광”이신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보다 열등하거나,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거나, 혹은 시작이 있었던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 가장 귀중하고 유일하고 친밀하고 독특한 분이며, 그분과 동등한 분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빌 2:6). 즉 “독생자”라는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의 특수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루터의 말을 빌리면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 전부터 계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결국 예수의 탄생은 영원 전부터 독생자로 존재하셨던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이었다는 점에서 유일무이한 사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독생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노게네스은 외아들이란 뜻 외에 그 속성과 성품에 있어서 유일 무이하신 분이란 의미도 내표한다. 그리고 본서에서는 아들의 뜻인 휘오스를 주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3:16, 36, 5:20, 23, 8:36 등).
한편 “주셨으니”의 헬라어 디도미은 “보내다”(send)와 “넘겨주다”(hand over), “값을 지불하다”(pay) 등의 뜻이 있는데 본 절에서도 이 말은 성육신(Incarnation)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심(Crucifixion)까지도 의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웨스트콧(Westcott)은 이 낱말이 제물을 바치는 일을 암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믿는 자의 구원에 있음을 15절에 이어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멸망과 영생 사이에 어떠한 중립적인 선택은 없으며 그것은 절대적인 양자 택일의 문제이다. 멸망하다의 뜻인 아폴뤼미 또한 요한이 자주 사용한(10번 정도) 단어로서,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첫째, 잃다, 상실하다’to be lost)의 뜻, 둘째, 없어지다, 파괴되다(to perish, be destroyed)의 뜻이 그것이다. 또한 이 동사는 구원과 반대되는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이며,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을 나타낼 때(막 3:6), 존속되는 것과 반대되는 멸망을 나타낼 때(고전 1:19), 그리고 무엇을 얻거나 받는 것과는 반대되는 상실을 나타낼 때 등의 경우에도(요이 8절) 사용되었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살아가는 자들은 필경 절망과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그들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허망하며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멸망을 뜻한다.
요한복음 3장은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복음의 기본 원리를 확고히 선포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제공해 주고자 하신다. 그런데 그 영생을 소유 하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된다. 오늘 날 교회 가운데 구원의 기준을 애매하게 제시하며 구원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용인하려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참된 교회는 요한복음 3장에 제시된 구원의 확고한 기준에 귀를 귀울려야 한다. 참된 교회는 영생이 아니라 진노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자들에게 거짓된 구원의 가능성을 애매하게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진노의 구렁텅이에 더욱 깊이 빠져 들어가도록 유도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러한 자들에게일수록 영생의 유일한 깅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명확히 제시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구원의 길로 나아가도록 도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7. 가인과 아벨 추수 감사절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세기 4:1-8 말씀 아멘!
시간적 관점에서 보자면 1,2장은 안식일의 제정까지 포함하여 총 7일간의 창조 사건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제 3장은 전 인류 중 첫 사람으로써 하나니으로부터 직접 지음받았던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제 본당에서부터 그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태어난 자손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본문의 본 단락과 다음 두 단락은 이와 같은 아담 이후의 세대들의 이야기의 첫 부분으로서 아담의 제1대 후손들인 가인과 아벨의 대하여 이야기 한다. 이처럼 아담 이후의 첫 세대인 가인과 아벨의 가적을 기록한 이 두 단락에서 가장 두드려진 사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인간들의 창조자요,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전혀 다른 태도를 가진 두 부류로 구분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인간은 영원한 운명도 전혀 다른 두 갈래로 양분되기 시작하였다. 가인과 아벨 그리고 가인에게 죽음을 당할 아벨을 대신한 셋의 등장은 두 분류의 인간들의 구분과 양자 사이의 영원한 대립의 역사적 기원인 동시에 영원한 상징이기도 하다.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모든 인간의 첫 죽음은 다름이 아니라 형제에 의한 타살이라는 실로 참담란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이는 먼제는 일단 본래의 완전성을 파괴하고 오염시킨 죄성의 영향력이 그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지, 그 결과가 얼마나 추악하고 광포한 것인지를 웅변하고 있다. 실로 선악과 범죄 이후 죄의 소원이 늘 우리안에 있으니 우리는 이 죄를 다스리기 위하여 늘 깨어 있을 것이다(창 4:7절) 또한 인간의 첫 죽음이 살인에 의한 것이라는 이 비참한 사실은 앞서 역사상 최초의 죽음이 사람을 위해 희생한 짐승의 죽음이었다는 사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범하고 수치에 떠는 인간을 위해여 정작 죽어야 할 인간 대신 한 이름없는 짐승을 죽여 그 가죽으로 인간을 위한 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던 것이다. 따라서 역사상 최초의 죽음이었던 그 짐승의 죽음은 거룩한 희생의 죽음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인간은 이제 형제를 죽이고 형제 손에 죽는 난맥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선함과 인간의 악함을 선명히 대조시켜주는 동시에 그 누구도 예외없이 죄인으로 전락한인간들의 사회에 세상 끝날까지 이어질 혼란의 서곡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이 인류최초의 죽음과 살인의 현장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창조자인 동시에 새로 이 구원의 은혜까지 베푸시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 의뢰만이 우리의 육적 생명은 물론 영적 생명까지 보호받고 풍요롭게 되는 유일한 길임을 교훈하고 있다.
최초 인가의 법죄는 세상에 죄가 유입되게 하였고 이후 인류는 역사를 죄로 점철된 타락한 역사로 만들었다. 본은은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의 배경이 되는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의 제사와 그 결과에 대한 기록으로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유입ㄷ된 죄의 심각한 파괴성을 보여주고 있다. 즉 본문은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각각 땅의 소산과 양의 새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사실과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신 반면, 가인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신 사실 및 그에 대한 가인의 악한 반응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는다. 오늘 본문 중 3-5절을 보면 가인과 아멜은 각각 땅의 소산과 양의 새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물론 가인과 아벨이 선택한 제물은 그들의 직업에 따른 것이였다(2절).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반변(4절),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가는 받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아벨은 마음과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린 반면, 가인은 그저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린 까닭이였다. 우리는 이를 두 가지 사실로 알 수 있다.
첫째는 본문이 아벨의 제물에 대해서는 “양의 첫 새끼”라고 기록함으로써 그것이 아벨의 전성이 흠뻑 담긴 것임을 강조하는 반면, 가인의 제물에 대해서는 단순히 “땅의 소산”으로 기록함으로써 그것이 가인의 정성이 내포되어 있지 않음을 시사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본문의 “아벨과 그 재물”, “가인과 그 재물”이라고 기록함으로써 제사의 열납 여부가 그것을 드리는 자이 인격 또는 마음의 자세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하나님 중심의 제사였기에 하나님께 열납된 것이며 가인의 제사는 자기를 생각하는 인간 중심의 제사였기에 하나님께 외면당한 것이다. 실로 하나님은 제물이 아니라 그것을 드리는 자의 마음을 보신 것이다. 생각해보면,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해서 정성도 없이 형식적으로 드리는 자의 제사를 받으시겠습니까?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 가증한 것으로 여겨질뿐이다. 하나님은 이방 신과 같이 인간이 바치는 제물에 눈이 어두운 거짓된 신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다. 사무엘상 16장 7절을 보면 “여호와는 중심을 보시느니라”라고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게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 마지 못해 하거나 형식적으로나 억지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떄 마음과 정성을 다햐여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기에 힘써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꼐 온전히 바치고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길 때 우리의 예배를 열납하시고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8. 신령한 사람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린도전서 2:11-16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린도전서 3:1-3 말씀 아멘!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철학과 수사학은 열정적인 추구의 대상이 었다. 유명한 소피스트(sophist)들과 수사학자들은 크게 존경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다. 당시 부모들의 관심도 자연히 자기 아들을 위해 최고의 선생을 찾는 일이었다 학생들의 사회적 지위는 자기 스승들의 명성과 직접 연관돼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종종 다른 학파의 학생들과 스승들의 장, 단점을 비교하면서 논쟁했다 이런 풍토속에서, 고린도 성도들은 자신들에 대해 세상적인 관점으로 인식하고, 영적 지도자들을 당시 철학과 수사학의 기준으로 서로 비교하며 불화를 일으켰다.
구체적으로 말해, 고린도 성도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가식 없는 복음 선포보다 인간의 현란한 지혜를 더 가치 있게 평가했고, 바울의 단순한 접근보다 아볼로의 웅변을 선호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나온 행위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에 대한 가르침을 제시한다.
고린도전서 1~2장은 무엇보다 설교에 대해 소중한 가르침을 준다. 첫째, 설교자는 십자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자기 선포의 중심 내용으로 삼았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지나가는 과정의 일부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절정이요,구원 역사의 전체를 통합하고 해석하는 핵심이다. 인간의 일시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십자가 복음 외에 다른 것들을 전한다면 복음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개종은 발생하지 않는다. 둘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겐 거리낌이요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에겐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십자가를 통해 죄와 죽음의 세력을 정복하시고 믿는 자들을 구원하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과 구원의 길을 상의하 셨다면, 인간은 십자가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방법을 제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과 단 한마디도 상의하시지 않고, 어리석고 연약하게 보이는 십자가를 택하여 제시하셨다. 이제 인간은 모험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을 믿고 구원받든지, 아니면 자신의 지혜를 고집하다가 멸망하든지 둘 중에 하나다.
셋째, 십자가의 복음은 직선적으로 선포돼야 한다. 아볼로는 설교할 때 고대 수사학적 화술을 멋지게 활용했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십자가를 단순하게 선포했다. 십자기는 그 단순함과 투명함 속에서 밝히 드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를 수사학적 화술로 전한다면, 그 안에 있는 인간적인 요소가 십자가의 능력을 나타내는 일에 녕F해로 작용한다. 설교자는 청중을 십자가 앞에 세워야 한다. 그래야 인간은 적당한 종교 생활을 중단하고 운명의 결단을 하게 된다. 넷째, 십자가를 선포하는 설교자는 성령의 능력만을 의지해야 한다. 설교자는 수사학의 다이내믹을 교묘하게 사용해 청중을 설득하려 해선 안된다. 대신에 성령님께서 설교를 통해 스스로 역사하시도록 해야 한다. 십자가의 복음은 성령님으로만 깨달아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시기와 분쟁' 이었다. 그 이면에 사람을 자랑하는 태도가 있었다. 이런 자랑은 하나님께서 “은혜”((2:12)로, “어리석은 십자가의 메시지”(1:18;21)로 그들을부르셨고 이로써 세상의 가치관을 전복시키셨음을 깨닫지 못한 결과다(1:18-31). 따라서 그들은 “육신에 속한 지들” 이었다(3:1). “신령한 자”라면 하나님의 생각을 알고 그에 따라 움직일것이다(2:10-12). 그런데 당시 분열상은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는 신령한 태도가 아니라, 사람을 따라 움직이는 육적 행태일 뿐이다(3:3).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들은 아직 육에 속한 자들로서 성령님의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2:14). 태어났지만 아직 자라지 못한 '어린 아이들' 인 것이다(3-1).
바울이 휘두른 목회적 채찍의 한 가닥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각기 다른 지도자들을 빙자해 분열되는 상황을 겨냥하고 있다(1:10-12;3:4). 그들은 각기 바울, 아볼로, 게바(베드로), 혹은 그리스도를 들먹이며 나눠져 있었다. 네 개의 이름 모두 실제적으로 교회의 분열과 관련되었는지 분명치 않다. 한 곳에 바울과 아볼로만 언급(3:3-6)되므로 당시 분열상은 고린도교회의 설립자 바울과 후속 목회자 아볼로의 이름 아래 전개되었을 수도 있다. 물론 이런 행태는 정작 바울이나 아볼로 자신의 의도와 정면으로 배치된다(4:6). 지도자를 빌미로 파당을 짓는 것은 그들이 사역자의 역할을 심각하게 오해했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의 이야기는 초대 교회에 대한 우리의 막연한 동경을 허망하게 만든다.이 편지를 읽노라면 사람 사는 데는 어디나 똑같다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마치 오늘날 목회 현장에서 만나는 “골치 덩어리들”을 한 곳에 모은 것 같다. 영적 자만이 하늘을 찌르면서도 저급한 세상의 가치들이 여과 없이 통용된다.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바울의 좌절감은 교회가 세상과 구분이 안 된다는 현대 우리의 좌절감과 다르지 않다. 하긴 사람의 본성이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면, 옛날이 오늘과 같다고 해서 무엇이 이상할까?
우리가 초대 교회에서 기대하는 것은 모방할 만한 이상은 아니다. 고린도교회는 우리와 같이 “죄의 증상”으로 힘겨워히는 사람들, 하지만 복음을 받고 그 능력에 참여한 사람들의 공동체였다. 우리는 눈물로 그들을 섬겼던 사랑 깊은 한 목회자의 펀지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단순히 시시비비를 가리는 도덕적 교훈만은 아니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이야기를 새롭게 들으며 “골치 아픈”삶에 역사한 복음의 족적을 찾는 일이다. 물론 오늘 날 우리의 삶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복음의 길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이 편지가 현대 우리를 위한 말씀인 이유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하심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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