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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난리
서 기 원
동학란(東學亂)이라고도 하고 동학혁명이라고도 한다. 물론 지배층의 눈으로 보면 반란일 수 있고, 피지배층의 입장에서는 혁명이라고도 할만하다. 허지만 성공하지 못한 혁명은 혁명이 아니라는 가설(假說)을 받아들인다면 동학혁명 이라고 부르기엔 뭔가 좀 미흡한 느낌이 든다. 이 경우 피지배층이란 정확한 용어가 못 되지만 민족사의 인목에선 마땅히 혁명이라고 해야 할 것이나 이런 용어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근 십년전 나는 동학혁명을 주제로 한 장편을 잡지에 연재한 일이 있다. 첫회분 마감까지 두달 남짓 여유가 있어서 나는 동학혁멍의 본고장을 답사하기로 하고, 먼지 정읍에 들렸다. 정읍에서 택시를 세내어 황토현(黃土峴)을 찾았다. 펑퍼침한 야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구릉지대이다. 한복판 그중 높은 꼭대기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당시엔 울창한 산림지대였다는 전승(傳承)이지만, 지금은 이름 그대로 민숭민숭한 벌거숭이 황토마루이다.
다행히 기념비까지 차도가 나 있었는데 무슨 기념행사 같은 거나 있어야 이용을 하는 모양으로 장마가 지면 들어갈 수 없고, 여느때 여간해서 황토현을 찾는 손님도 드물다는 운전수의 말이었다.
마침 칠월의 폭양이 내려쪼이는 한낮이라 들녘에 나와 일하는 농군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운전수에게 부탁해서 사진을 찍고나서 언저리를 어슬링거리고 있는데 웬 농군차림의 중늙은이가 말을 붙여왔다.
“서울서 오셨오?”
“그렇습니다. 이 근처 사십니까?”
“그렇소이다.”
이런 첫 대면인 경우, 한두 마디 오가는 사이에 호오(好惡)의 감정 같은 것을 피차 느끼게 마련인데, 나는 좀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고 저편도 궁금증이 있어 뵈는 눈치였다. 아니 뭔가 얘기꺼리를 지닌 듯한 그 사람의 분위기에 끌려들었는지도 모른다.
“저 봉우리가 망제봉(望帝峯), 그리고 그 오른편이 두승산이구요. 녹두장군의 생가가 지기 언덕 아래 마을인데 여기선 볼 수 없지요. 동학군이 망제봉과 두승산사이의 고개길을 넘어 와서 관군을 기습했다고 합디다.”
“아, 네.”
아무래도 여느 시골 농군 같지 않은 말씨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동학혁명에 무척 관심이 깊거나, 어쩌면 그 자신이 동학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나는 동학혁명을 소설로 쓸 사람이라는 얘기를 밝히고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다고 했다.
“누추하지만 저희 집으로 가십시다. 요 아래 대추나무골이올시다.”
나는 택시 때문에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자동차를 보내시지요. 나중 제가 버스 타는 데까지 모셔다 드릴테니까요.”
나는 소설의 ‘꺼리’를 한 가지라도 더 얻고 싶은 욕심으로 그를 뒤쫓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의 친절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게 됐던 것 이다. 얘기를 좀더 들려달라고 했던 내 말에 내가 일총의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집안 얘기를 나는 예의 장편 속에서 써먹지는 않았다. 이미 소설의 틀이 잡혀 있었던 탓도 있지만 얘기의 내용이 좀 허황된데다가 소설의 재미를 한결 돋굴만큼 극적인 것이 못 됐던 것이다. 하나의 단편 정도로는 살릴 수도 있을 것 같아 될수록 윤색을 피해서 소개해볼까 한다.
그 무렵 김상학(金相學) 씨의 조부는 정읍 읍내에 사는 토호(土豪)였다. 무반(武班)의 명문으로 직계 조상에 등단(登壇)한 장수 세 분이 나온 지체였으나, 고조대에 당쟁에 말려들어 죄를 얻고 낙향했던 것이다. 자자손손 벼슬을 하지 말라는 것이 고조의 유언이었다. 그뒤 샴대(三代) 동안 이 유언을 잘 지키고 보신(保身)과 이재(理財)에 힘쓴 보람이 있어 조부대에 이르러서는 벼 천이나 한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조부의 함자는 태(泰)자 열(烈)자 라고 한다. 맏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렸을 적부터 힘이 장사여서 집안 어른들의 근심걱정 속에서 장성했다. 가령 타고난 숙맥이라든가, 간질병 같은 것이라도 가졌다면 몰라도 단순히 기골이 장대하고 기운이 강하다는 천분(天分)만으로 집안의 걱정거리가 된다는 것은 도무지 석연찮은 노릇이었을 것이다.
태열이는 지각이 들면서 자기를 감싸고 있는 집안 분위기에 거북함과 반발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열다섯 난 가을, 추수를 바지러 온 작인들 앞에서 장난삼아 벼 한가마씩을 양손에 들고, 곳간까지 옮겨놓은 일이 있었다. 힘깨나 쓴다는 젊은 농군들도 고개를 내저었다. 듣던 소문을 뺨칠 지경 었으니 말이다.
식자우환(識者憂患)이라 하여, 글은 이름 석자나 적을 수 있을 정도면 족하다는 것이 또한 계율처럼 내려온 가훈이기도 했다.
그날 밤, 아버지와 큰삼촌, 그리고 이웃 동리에 사는 작은삼촌까지 세 분이 이마를 맞대이다시피 하며 이댁 종손의 장래를 의논하고 있었다.
“어른들 눈치를 대강 알고 좀처럼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더니만…….”
“글쎄 말입니다. 오늘 낮엔 무슨 변덕이 났는지 모를 일입니다.”
“헌데 형님, 범을 가둬놓고 길들이기 어려운 것처럼 한창 혈기에 넘칠 나이에 무작정 덮어누른다고 해서 될 노릇이 아닙니다. 절로 뻗지는 기운을 어떡 헙니까?”
그나마 좀 이치에 닿는 소리를 한 것은 작은삼촌이었다.
“그래서 혼처를 구하는 중이 아니냐.”
“장가들인다고 그놈의 기력이 금시 진하겠어요? 이제 세상 물정도 짐작할 나이가 됐으니 형님께서 알아들을 수 있게끔 차분히 가르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거야 어렵지 않지만, 대관절 어떻게 알아듣도록 한다?”
다음날 아침, 태열이가 큰사랑으로 불려 들어가자 아버지는,
“기운 센 것은 좋은 일이다. 무앳이든지 남에게 뒤져서는 안 되니까. 허되 겉으로 그걸 드러내면 못쓰느니라.”
“예에, 아버님.”
“너도 세상 돌아가는 일을 대충 알 수 있는 나이가 됐다. 기운이 막강하다는 소문이 나면 나라에서 그냥 놔두질 않아. 군사로 뽑아서 써먹게 마련이야.”
“양반은 군역(軍役)을 면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다. 그러니까 더 난감하다는 거지. 차라리 우리가 상놈이라면 군포(軍布)를 내고 군역을 면하면 그만이지만 명색 호반이라, 난리라도 터져 장수를 뽑아올린다 할 때, 너를 내버려 둘 것 같으냐?”
태열이는 장수가 돼서 나라에 공을 세우는 것이 어째서 난감한 일인지 아버 님 말귀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하시기를 비록 생원·참봉이라도 벼슬을 말라 하셨느니라. 허지만 할아버지 말씀을 덮어놓고 지켜야 한다 해서 지켜지는 게 아니다. 이놈의 세상은 어떻게 된 셈판이지 선(善)과 악(惡)이 뒤죽박죽이고 충신과 역신을 분별할 재간이 없는 나라야. 내 입이 닳도록 말했지만 할아버지께선 친구분한테 보낸 문안편지 한통으로 해서 혹평을 받으신 후 귀양을 사시고, 까딱하면 삼족이 멸할 뻔했었다.”
“예에.”
“난세(亂世)니라, 이런 난세는 벼슬이고 감투고 아무짝에 소용이 없느니라. 아무도 대단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그지 재앙을 당하지 않고 처자권속을 거느리고 편안하게 지내는 것만 같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만사를 남의 눈에 띄우게 하면 안 된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알만합니다.”
“네, 기력도 그렇다. 구설수에 오르면 탈이 나고야 만다. 네가 우리집 구대 종손이란 걸 잊지 말아라.”
“남들 앞에서 힘을 쓰지 말라는 말씀이신가요?”
“알아들었구나. 기특하다.”
“아버님, 그리하겠읍니다.”
진주 땅에선 낫·도끼·쇠스랑 같은 연장으로 무장한 농군들이 관가를 습격했다는 소문이었다. 관군한테 토벌당해 수백명이 떼죽음을 당했다고도 한다. 수모자(首謀者) 로 지목되어 능지처참을 당한 자가 그 고장의 토반(土班)이었다는 얘기를 듣고 아버지는 까닭없이 안색이 변했던 것이다.
“죄인이 따로 없느니라. 의심을 받으면 죄인이야.”
여느때 입 버릇을 되뇌었다.
그날부터 태열 이는 울안에서도 무척 조심을 했다. 심심풀이로 하인들을 제쳐놓고 도맡다시피 했던 장작패기도 그만두었을 뿐 아니라, 걸음걸이, 몸가짐 하나하나를 일부러 느리처분하게 뵈도록 스스로 길을 들였다. 육척을 넘는 키에 참나무 기둥처럼 단단한 골격이 물르고 나약하고 허약하게 뵈려고 애쓰자니 결코 수월한 단련이 아니었지만, 원체 효심이 지극한 위인이어서 어른들 기대에 어긋나기는커녕, 아버지의 훈계를 한술 더 뜨다시피 했던 것이다.
신혼부부라도 한방에 거처할 수는 없는 것이 옛적 풍습이다. 그런데 태열 내외만은 아버지의 각별한 배려로 신방을 따로 차지할 수가 있었다.
아내가 다듬이돌을 마루에서 방안으로 옮겨달라고 무심코 부탁했을 때,
“어이쿠, 보기보다는 무거운걸.”
다듬이돌을 붙들고 엄살을 부리면서 느물느믈 웃었다.
허긴 이런 엄살이야말로 시체말의 저항 혹은 반항과 맞먹는 것이겠지만, 그처럼 비윗살 좋게 느물거리고 넘길 수가 있으니 망정이지, 외곬수로 좁아터진 성깔이었다면 영락없이 발광을 하고야 말았을 것이다.
거조가 의젓하고 언변이 장중하니 나이보다 노성해 보일밖에, 대인(大人)의 풍모가 절로 갖춰지면서 이웃의 존경과 두려움을 한 몸에 지니게 되었다. 아버님의 생각대로 한다면, 이도 또한 과히 달갑지 못한 일이겠으나 그렇다고 일부러 못된 짓을 지질러 욕을 얻어먹이거나 바보 천지를 가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는데, 어른들도 장사란 소문을 내기보다는 점잖다는 소리를 듣는 편이 해롭지 않다고 여기는 듯하여 다행스러웠다.
스무살 생일을 지내고나서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절에 다녀볼까 합니다.”
하며 아버지께 아뢰었다. 대경실색한 아버지가,
“입산(入山)하겠다는 거냐?”
하자, 태열이는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아뇰시다. 가끔 내장사에 들려서 불공도 드리고 수양도 하자는 것이지요.”
아버지는 뭘 골돌하게 생각하는 기색이더니,
“그래라. 불공을 드리는데 돈이 필요하다면, 서슴지 말고 말해라.”
뜻밖에 너그러운 말씀이었다. 아버지께선 아마 이모지모로 득실(得失)을 따졌을 것이다. 큰아들이 절에 다니다가 아예 출가하겠다고 생각이 잘못 들면 그것도 낭패이다. 허지만 저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해서 탈을 내게 하여 집안이 망하느니 아들 하나를 잃는 심 잡는 게 상책이라 싶었을 것이다.
동네를 빠져나가기까지 뒷짐을 지고 어슬렁어슬렁 행보를 옮긴다. 인척이 뜸해지는 산길로 들어서자 별안간 성난 황소처럼 달리기 시작한다. 나무꾼을 만나면 천연스럽게 걸음을 늦춘다. 보통사람이 반나절을 실히 걸리는 거리인데, 재수 좋은 날엔 중들이 채 조반을 치르기 전에 당도하기도 한다. 중들이 의아해할까 보아 먼저 부처님을 뵙지는 않는다. 멀찌감치 절을 피해서 산으로 들어간다. 침침한 숲속을 헤치고, 가파른 등성이를 넘어서면 아침 햇살을 받은 귀면봉(鬼面峯)의 앞가슴이 눈에 부시다. 바위를 다고 봉우리에 올라 안개가 자욱한 들판을 내려다본다. 그의 수도장은 산정에서 북향으로 치닫는 급한 골짜기 속에 있었다. 어름 같은 계곡물에 세수를 한다. 바위 위에 올라앉아, 좌선 (坐禪)의 시늉이라도 냈으면 좋으련만 송아지만한 바위돌을 번쩍 올렸다 놓는다. 그보다 좀 작은 바위를 이번에는 머리 위에 쳐들어 용을 쓰다가 쿵! 하고 내던진다. 바위를 맞으면 붙꽃이 튀고 풀속에 박으면 지진처럼 진동한다.
날마다 바위만 던지기도 싱거운 노릇이다. 기둥만한 통나무를 창칼 쓰듯 휘두른다. 무예를 배우지 못했으니 들은 풍월로 흉내를 낼 뿐이지만 날을 거듭할수록 내려치는 서슬이 날카로와져서 웬만한 소나무 허리가 맥 없이 꺾어지곤 한다.
고함을 치면 산울림이 너덧 차례 꼬리를 문다. 그 산울림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도 한 가지 낙이라면 낙이었다. 한바탕 땀을 흘린 뒤 물맛도 신선놀음이었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란 말이 괜한 문자가 아니었다.
그날, 태열이는 평소와 같이 바위로 부싯돌을 잡고 작대기로 도끼질을 한 다음, 가쁜한 기분으로 땀을 들이고 있었다. 뭔가 섬뜩한 바람을 느껴 고개를 들었다. 바위틈에 어디서 많이 구경한 듯한 짐승이 도사리고 있었다. 호랑이었다. 시뻘건 그 눈빛이 그림과 꼭 같았다. 퍼뜩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얼룩덜룩한 덩치가 확 달겨들었다.
호랑이와 맞붙어서 너댓 번 뒹굴었다. 밑으로 깔리다가 물구나무서기도 했다. 그놈의 움낫 같은 발톱을 용케도 피했던 모양이다. 마침내 쿵! 땅이 울리며 나가 떨어진 것은 사람의 몸뚱이가 아니었다. 거꾸로 바위에 처박힌 호랑이가 두어 번 눈을 검벅검벅하며 사지를 파르르 떨더니 축 늘어졌다. 숫놈이었다.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다니 그제야 태열이는 오금이 죄어들고 턱이 덜덜 떨렸다.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지질렀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호피(虎皮) 가 귀한 줄 모르는 태열이는 아니었으나 사람을 암장하듯 짐승의 송장을 묻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혁혁한 무용담을 제 입으로 발설할 수 있는 세상을 과연 생전에 만날 수 있을는지 그저 막막할 따름이었다. 이 몸이 늙어 저승길을 떠나기 직전에 식구들을 모아놓고 기어이 실토하고 가리라 하며 마음 속에 깊숙이 다져넣었던 것이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절에 들려 부처님한테 살생의 죄를 빈다음 시치미를 떼며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가 아버님 말씀이라고 하면서,
“서울서 또 역적 난리가 났대요. 벼슬을 하는 사람이건 안하는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붙들어다가 개잡듯 하고 있답디다.”
그저 시골구석에 틀어박혀 남편을 여의지 않고 사는 게 호강이란 그런 얼굴이었다. 태열이도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먹을것 있것다. 집 안이 화목하것다. 나라님이 부럽지 않으이.”
호랑이를 때려잡은 담력을 넌지시 비치고 싶었던지 제법 굵직한 소리를 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대요. 큰일날 소리 마시오.”
아내는 목을 움추리며 중얼거렸다.
내장산의 장님 부엉이가 그 현장을 구경했을 턱도 없을 텐데, 다람쥐새끼들이 엿보고 있었는지 마침내 탄로가 나고야 만 것이다. 소문은 초사흘 장날, 파시 전에 이미 김씨댁 하인 귀에 들어갔다.
“김 부자네 큰아들이 내장산에서 호랑이를 잡았다. 호피는 아버님께 올리고, 뼈는 빻아서 보약으로 쓰느고, 살은 포를 켜서 말리고 있다더라.”
“호안(虎眼)은 어떻게 하고?”
“호괘에다 꿰달아 차고 다닌다더라.”
“굉장하군.”
장거리 주막에서 들은 얘기를 신나게 아뢰자 노발대발한 아버지는 녀석을 묶어놓고 호되게 매를 쳤다.
“이놈 어디서 그런 황당한 거짓말을 주워듣고 합부로 주둥아릴 놀리느냐.”
집안 식구들한테 호랑이의 호자도 모른 체하도록 단단히 일러 놓았지만 다른 사람들 입까지 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태열아, 네가 정말 그랬단 말이냐? 네가 아마 꿈을 꿨던 모양이다. 꿈속에 그련 짓을 저지르고 잠꼬대를 했을 것이야.”
며칠째 식음을 페하고 자리에 누운 아버지께서는 무시로 아들을 머리맡에 불러놓고 헛소리처럼 되뇌이곤 했다.
“아버님께서 하도 그러시니 저도 이제 뭐가 어떻게 됐던건지 잘 모르겠읍니다.”
“난리났다. 네가 정말 호랑이를 잡았건 말았건 아무래도 좋다만 그런 흉악한 소문이 탈이란 말이다.”
“호랑이를 잡지 않았다면 그만 아닙니까?”
“세상 일이 어디 그러냐?”
아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눈이 심장치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을 물리친 다음 의관을 갖춰입고 비틀비틀 사당 앞으로 나갔다. 향을 피우고 오랜 시간을 엎드려 있었다. 참배를 마치고 난 아버지의 얼굴 모습은 뭣인가 비장한 결의를 다진 것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날 밤 오랜만에 세 분 형제가 한데 모였다.
“어느 과객(過客)이 전해준 말이, 호남에 장사가 나서 천하를 엎는다는 동요가 서울에 나돌고 있답디다. 꼼짝없이 당하게 됐어요. 형님, 이걸 어떡헙니까.”
“현(縣)에선 별말이 없다더냐?”
관으로 출두하라는 기별이라도 오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판국인 것이다.
“포졸을 풀어 오랏줄에 묶어서 끌고 갈테지요.”
“그런 불길한 소리를 왜 하느냐?”
“아뭏든 야단은 났어요. 앉아 벼락을 맞을 수야 있겠읍니까.”
“음.”
세 사람 사이에는 아까부터 묘한 묵계 같은 것이 음산하게 흐르고 있었다. 누가 먼저 그걸 건드리느냐, 제각기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꾸벅꾸벅 졸다가 첫닭이 홰를 치는 소리에 놀래기도 했다. 참을성이 모자란 탓인지, 그 중 박정한 까닭인지는 몰라도 큰삼촌이 말문을 열었다.
“관격으로 급사한 걸로 할밖에 신통한 수가 없는데…….”
“위계(僞計)를 써서 제 자식을 죽일 수야 있나.”
아버지의 침통한 목소리였다.
“광 속에 가둬두고 굶어죽기를 기다릴 수는 없지요. 기둥을 빼고 달아날 테니까요.”
“다른 도리가 없군.”
필경 약사발을 들이키게 하는 궁리밖엔 묘안이 나오지를 않았다. 차마 어미에게 그 짓을 시킬 수는 없으므로, 천상 아비가 손수 약을 달여 보약이라 속여 마시게 해야 할 판이었다. 아버지는 두 동생 앞에서 가느다란 곡성을 냈다.
“어이구, 기구한 내 팔자야. 내 손으로 아들을 죽여야 하다니.”
들릴까 말까 싶게 음성을 줄이며 읊조렸다.
“형님 너무 상심하지마 오. 내게 비방(秘方)이 있으니.”
그 끔찍스런 패륜(悖倫)의 구렁텅이 속에서 김씨댁을 건지려고 했던 것은 그중 조카를 귀여워해 온 작은삼촌뿐이었다.
“소문으로 망한다면 소문으로 갚아야지요.”
태열이를 멀리 도망보내고 송장없는 장사를 치르자는 것이었다.
“만약에 탄로가 나면, 그땐 끝장일세.”
“네 심정을 모를배 아니나 어버이보다 더 하겠느냐. 거짓 장사라니 어림도 없다. 화를 자초할 뿐이다.”
나흘 뒤 아버지는 손수 탈인 약을 백지로 덮고, 아들을 불렀다.
“게 앉거라.”
등잔불을 외면하며 아버지는 나직히 일렀다.
“약사발을 딘숨에 마셔라.”
“무슨 약입니까. 아버님.”
“마시고 나면 알 것이다.”
아버지의 양미간엔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대고 있었다. 모든 것을 알아차린 태열이는 벌떡 일어서며 내질렀다.
“죽기 싫습니다.”
“그래도 마셔야 한다. 그래야 우리집이 사느니라. 이것도 네 명(命)이다.”
장지문을 부수고 달아난 태열이는 동학난리가 터지기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새 여름해가 서산 마루턱에 기울어지고 있었다. 김상학씨는 탁주잔을 단숨에 들이키고 나서 내게 권했다.
“재미도 없는 얘기를 길게 늘어놔서 송구합니다.”
“선생님 말씀은 그걸로 끝난겁니까?”
나는 기대에 어긋난 싱거움을 웃는 낯에 드러내 뵈이며 물었다.
“그렇소이 다. 실망하셨지요.”
“아니, 퍽 재미있었읍니다.”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동학난리 때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 수두룩하지요. 혹시 김태열이란 이름을 들으신 적이 있읍니까?”
“누구요? 아, 조부장 어른이요? 못 들었는데요.”
“집에선, 그러니까 내 작은종증조할아버지 말씀대로 급환 때문에 돌아가셨다 하고 빈 장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할아버지도 변명(變名)을 하셨을 것이고 태자 열자 함자가 후세에 남을 수가 없었지요. 이건 내 추측이올씨다만 역사에 남은 동학의 장수 가운데 한분이 반드시 그 어른일 겁니다.”
그의 어두운 얼굴이 잠시 먼산을 바라보고 있더니 불쑥 내뱉었다.
“동학군을 구름처럼 몰고 와서 당신 스스로 당신 집에 불을 질렀지요. 내 조모(祖母) 만은 동학군 손에 구출되셨지만…… 그러니까…… 내 가친이 유복자였지요. 지금 읍내 우체국 자리가 집터라고 합디다만.”
나는 실상 감동을 받기보다는 그제껏 차츰 윤곽이 잡혀가던 동학혁명의 형국이 별안간 망가지는 것 같아 약간 당황하고 있었다.
“난 무식해서 글을 모릅니다만 선생님 소설이 어느 잡지에 나신다구요.”
“아직 모릅니다. 준비도 안 됐고 또 연제 책으로 돼 나갈지 아무 기약이 없으니까요.”
나는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안 할 수 없었다. 그의 핏줄 속에 엉켜 있는 동학난리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얘기가 될 수밖에 없겠기에 이번에는 내가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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