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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초승달이 노송의 가지 끝에 걸려 있었다.
부인사(符仁寺)는 순식간에 광란의 불길에 휩싸였고
이곳 저곳에서 치솟는 불기둥은 어둠을 살라먹고
하늘까지 태울 듯한 기세였다. 부인사 본사 판전을 불태워 버리기 위해
몽고군 적장 살례탑(撒禮塔)이 십만의 별동군을 이끌고
한강을 도강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
몽고군은 북소리를 울리며 한밤 중 부인사로 돌진해 온 것이다.
몽고군들은 부인사 좌우 숲 속에 불을 놓더니 이내 부인사 전체를 불태워 버렸다.
살례탑은 결국 판전과 부인사 대웅전까지 모두 불태우고 나서야 물러갔다.
하루가 지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불길은 잦아질 줄을 모른 채 시뻘건 혀를 빼물고 있었다.
고종 임금은 매일 밤하늘을 우러르고 서있었다.
외적의 침입을 당한 것만도 종묘(宗廟)에 씻을 수 없는 일이건만
만백성의 어버이인 임금이 되어서 이렇게 강화도로 도망쳐 오다니...
어찌하여 중신들이 천도를 제의했을 때 완강히 반대를 하지 못했던가.
결국 중신들도 자기들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 사직(社稷)의 위태로움을 빙자한 것이었다.
임금은 하염없이 밤하늘을 바라보며 이런 자책의 수렁을 헤매고 있었다.
마침내 고종 임금은 어찌하면 고통받는 백성을 구할 수 있을지 강구하기 시작했다.
고종 임금의 이 같은 고심을 눈치 챈 교정별감 최우는 한 가지 묘책을 임금께 아뢰었다.
"교정별감 최우 아뢰옵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신이 오랫동안 숙고한 결과
이 국난을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그 방법이라 함은
부인사에 봉안되었다가 소실 된 대장경에 걸맞거나 더 능가하는
규모로 대장경을 다시 판각하는 일이옵니다
. " 최우의 열변을 계속해서 듣고 있던 고종 임금은 이윽고 눈을 떴다.
"대장경 판각 불사를 윤허하노라." 대장경 판각 불사의 총괄은 수기대사(守其大師)가
책임지기로 하였다. 최우가 수기대사를 찾아 대장경 판각 불사의 일을 의논하니
수기대사는 이미 준비하고 있던 바를 이야기했다.
"우선 판각에 들어가기 전까지 준비과정에서 네 가지로 대별(大別),
다시 한 가지씩 세부 계획을 수립해서 추진해야 되리라고 봅니다.
먼저 그 네 가지는 수록 경전의 채택, 필생(筆生)의 확보와 그 훈련, 각수(刻手)의 확보와
그 훈련, 판목(板木)의 벌채와 그 수습 등입니다"
"대사께선 과연 장하십니다.
그럼 그 준비기간이 대략 얼마나 걸릴까요?" "지금으로선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대략 삼 년 남짓 걸리지 않을까 합니다" 수기 대사는 조용히 자신의 생각을 최우에게 전달하였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전국적으로 글씨에 뛰어나다는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을 모두 같은 필체로 훈련시켜야 했다.
또한 각수들도 전국적으로 모아야 할 것이며
그들 또한 훈련을 시켜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단단하고 결이 좋은 자작나무를
판목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며
이 판목을 바닷물에 삼 년여를 담가 진을 빼고 다시 건져서 그늘에 건조시켜
제대로 된 판목을 만들어야 했다. 이처럼 대장경을 다시 복원하는 일은 지리하고도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수기대사는 우선 전국에 분사대장도감(分司大臧都監)을 두기로 했다.
이는 용재(用材)인 자작나무를 거제도를 중심으로 하여
완도, 지리산 연변, 사천 등지에서 채취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필생과 각수는 승려들을 중심으로 하되 자원을 할 경우에 한해서
민간인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불사가 언제 끝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며,
불사가 진행중인 동안 필생과 각수들은 엄한 규율 밑에 통제된 생활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민간인들도 승려생활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었다.
분사를 중심으로 판목을 제작할 목수들과 벌목에 필요한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하는 일이
불가피하였으나, 백성들에게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불심을 작용해서 솔선하는 분위기가 되도록
유도하는 일이 무엇보다 긴요했다.
이 모든 일은 수기대사가 전국 사찰의 주지들을 중심으로 펴나갔다.
수기대사는 분사대장도감설치와 필생과 각수들을 뽑기 위해 반년 동안이나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강화로 돌아왔다. 수기대사가 도착했을 때,
최우와 함께 세웠던 모든 계획이 진행 중에 있었다. 수기대사는 강화도로 돌아오자마자
대기중인 민간인 지원자들의 선발에 들어갔다.
먼저 글씨와 판각의 실기를 시켰다. 여기서 수준에 오른 사람만 뽑아 면접에 들어갔다.
자원을 한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백 여명 중에서 탈락자는 불과 열 명 남짓이었다.
이렇게 해서 육 십여 명이 자원서약을 하게 되었다.
서약을 마친 사람들은 그날로 삭발을 하고 목욕재계를 한 후 승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나절, 한 지원자가 찾아들었다.
건장한 체구와는 달리 그 남자의 얼굴은 초췌해 보였다.
"필생을 지원하십니까, 각수를 지원하십니까?"
"소인은 필생도 각수도 아니옵고 목수이옵니다"
"목수요?"
"소인에게 판전 신축을 맡겨 주신다면 끝없는 영광으로 알고 뼈가 부서지도록 일을 하겠습니다.
소인은 사라진 부인사 판전의 구조를 일곱 살 때부터 소실되기 전날 밤까지
삼 십 여 년을 보아왔기 때문에 지금도 만지는 듯 그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수기대사는 이 남자의 말을 듣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남자는 근필이란 이로 수기대사께 부인사가 불에 타 소실되던 날의 이야기를 자세히 아뢰었다.
그날 밤 대웅전에는 불이 꼬박 밝혀져 있었고 잠시도 끊임없이 독경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침내 근필은 판전 신축의 모든 공사를 책임지게 되었다.
필생과 각수로서 수련(手鍊)을 쌓고 있는 사람들은 도합 오백여 명에 이르렀다.
그 중에 민간인은 백여 명이었다.
삼백여 명의 각수 수련 생들은 처음 육 개월 동안 붓을 잡았다.
장경판 글씨를 손에 익히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들 오백여 수련 생들은 한 치의 틈도 없는 규칙 생활을 익혀나가고 있었다.
필생들은 규격 종이 열 장에 글씨를 가득 채워야 했고 각수들은 삼십 자를 양각(陽刻)해야 했다.
그런데 이러한 수련생활에서 제외된 유일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근필이었다.
그는 수련 생들이 아침 공양을 마치고 수련장으로 갈 때면
그제서야 느린 걸음으로 절을 나서 강화부(江華府) 가문(價門) 밖에 정한
판전 신축지로 가는 것이었다.
근필은 그곳 바위에 앉아 점심도 굶고 하루해를 다 보냈다.
또 갑자기 어느 때는 막대기를 들어 직직 줄을 긋기도 하다가
해가 지면 바위를 버리고 절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그러기를 반년째 하고 있었다.
수기대사는 경전 정리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는 경전의 종류를 결정하고 내용을 확인하며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고종 이십 삼 년에 접어들면서부터 준비 작업은 거의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필생들은 서너 달이 지나면서부터 꼬집을 데 없는 글씨들을 써내고 있었다.
우아하면서도 정결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글씨들이었는데 모두 한 사람이 쓴 것 같은
통일과 조화를 이루었다.
각수들도 제각기 나무랄 데 없는 솜씨들을 자랑하게 되었다.
판전 신축지 구석에 아예 움막을 짓고 기거하게 된 근필은 이제 밤낮없이 일에 미쳐 있었다.
고종 이십 사 년 이월, 이제 모든 수련과정을 마치고 본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올라온 천여 장의 판목에 글을 새기기 시작한 것이다.
필생들은 한 글자를 쓰고 숨을 가다듬고,
또 한 글자를 쓰고는 벼루 위에다 한정 없이 붓을 다듬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럴 때마다 자신들도 모르게 관세음보살을 소리 없이 부르고 있었다.
하루에 백여 명이 두 장씩 이백여 장의 경판용 글씨를 써내려 갔으며
그것들은 차례대로 정리되어 목판에 오르기를 기다리며 쌓여갔다.
하루에 사십 자(字)에서 오십 자까지 각조(刻造)해야 하는 각수들은
그들 나름의 괴로움을 겪어내고 있었다.
보름만에 예정대로 삼백여 장의 첫 경판이 완성되었을 때
수기대사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근필은 판전 공사를 하면서 몸이 많이 쇠약해져 갔다.
끼니도 거르며 온 종일 공사에만 몰두하니 다른 이들은 근필에게 신이 들렸다며
이상하게 생각했다.
필생들의 일은 마지막 고비를 치달아 오르고 있었다.
칠만 오천 장의 경판 글씨를 양면 합쳐 십 오만 장까지 쓰기에 이른 것이다.
이년 반 세월동안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앞으로 남은 대략 이천 여 경판분은 넉넉잡아 다섯 달이면 끝낼 수 있을 것이었다.
수기대사는 그만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들과 더불어 지내온 세월이 어언 육 년이 되었다.
생각할수록 빠르게 지나가는 나날이었다.
필생들의 일이 끝날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 수기대사는 필생들과 헤어져야 하는
마음의 그늘을 지닌 채 다른 한편으로는 해맑은 햇살의 눈부심을 보고 있었다.
마침내 필생들의 일이 끝나는 날이 왔다.
"대사님 이것으로 끝막음인 듯하옵니다"
이것으로 팔만 일천 일백 삼십 칠 장의 경판분인 십 육만 이천 이백 칠십 사 장의 글씨를
완성해 낸 것이다. 그러니까 백여 명의 필생들은 삼 년에 걸쳐 제각기 오만 자 이상을 쓴 셈이었다. 이미 필생들은 떠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각수들은 법당 앞에서 그들과 이별의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작업장으로 향했다.
"부디 다들 편안히 가십시오, 항시 여러분과 권속들에게 부처님의 가피가 내려지기를 축원합니다" 수기대사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각수들의 일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 일을, 준비 기간을 뺀 오년 동안
하루 같이 계속해 온 것이었다.
근필은 이제 외부공사는 완전히 마치고 내부공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판전은 특히 다른 건물과 달라서 외부보다 내부공사가 훨씬 복잡했다.
경판은 삼만 오천 장에 육박하고 있었다.
"대, 대, 대사님. 큰, 큰일났습니다"
승려는 숨을 걷잡지 못했다.
"근필 목수가 쓰러졌습니다"
수기 대사가 달려가 보니 이미 근필이 기력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대사님 정말정말 죄송합니다.
이제, 이제 겨우......일을 다 마쳤습니다"
근필을 잃어 가는 정신을 붙잡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대, 사, 님... 아들놈을..." 근필의 몸이 한 순간 떨리더니 푹 늘어졌다.
수기 대사의 울부짖음이 드넓은 판전을 울렸다.
"내일부터 천일 불공을 준비하라"
수기 대사의 볼멘 소리가 공허하게 퍼져 나갔다.
-사이버 문학광장 자료에서 옮김
그의 소설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이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가 쓴 대하소설 《태백산맥》과 《아리랑》은
우리 문학사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오래도록 읽히고 평가받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소설 대장경》(민족과 문학사, 1992)이라는 작품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또 드문 것같다.
작가는 1976년에 쓴 《소설 대장경》이
그의 첫 장편소설임을 고백하고있다(<작가의 말>).
단편을 써서 작가로서의 등단절차를 마쳤을 그가,
또 나중에는 10권 혹은 12권의 방대한 대하소설을 쓰게 되는 그가
처음 발표한 장편소설의 소재를 `고려대장경'에서 구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
《소설 대장경》은
작가가 밝힌대로 `고려대장경'의 탄생기다.
그런 만큼 역사소설이라 할 수 있는데,
역사소설의 경우 이미 그 내용의 서론.본론.결론이 다 알려져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방해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또 마찬가지 맥락에서 재미도 없을 것같다.
`고려대장경'은
몽고군의 침입을 불력으로 막아내기 위해서
16년에 걸쳐서 만들어졌다는 줄거리 자체가 이미 다 아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장편소설에 도전하는 젊은 작가 조정래는
《소설 대장경》을 쓴다.
어쩌면 그의 내면에는 반드시 역사소설을 써야 할 이유,
또 《소설 대장경》을 써야 할 이유가 있었을 것같다.
첫째,
우리 역사를 이끌어온 밑바닥 백성들의 힘에 대한 작가의 깊은 애정을 들고 싶다.
이름 하나 제대로 남길 수 없으면서도 기꺼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밀었던
백성들의 희생에 대한 인식과 사랑-이를 문학평론가 조남현은 `민중사관'이라했다.
(<작품 해설〉, 273쪽)-
이 작가로 하여금 《소설 대장경》을 시작으로 역사소설의 창작에 매진케 하였던 것같다.
《태백산맥》과 《아리랑》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민중에 대한 짙은 신뢰와 애정은
이미 초기 작품인 《소설 대장경》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인데,
한 예로 부인사 판전의 수호나 새로운 판각불사에 동참한 백성(=재가불자)들의 희생과
주인의식에 대한 강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다음, 하필 `고려대장경'을 소재로 선택했던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작가는 그 스스로의 전기적 삶의 역사를 언급하고 있다.
즉 아버지가 스님이라는 것,
절도량에서 태어났다는 등의 인연이 합쳐져서 된 일이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다.
작가의 개인사적 인연과 역사관이 만나는 자리가 곧
`고려대장경' 탄생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시도되는 자리인 것이다.
이제, 작가 조정래의 역사 이해를 살펴 보기로 하자.
그는 "불력으로 외적을 퇴치한다는 `고려대장경'에 얽힌 기존의 신화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부정하는 데서부터 소설을 시작하고자 했다"(<작가의 말>)고 말한다.
우리는 모두 `고려대장경'은 불력으로 외적을 퇴치하기 위해서 판각된 것이라고 배웠다.
아마 고등학교 때의 국사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불력이란 무엇인가?
《소설 대장경》에는 불력에 대한 두가지 해석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
첫째,
《고려대장경》 자체에 외적을 격퇴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관점이다.
이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믿음이다.
예컨데, 신라시대 명랑법사가 문두루비법을 행하여 당나라 군사를 물리쳤던 일이나,
거란의 침입을 격퇴한 것은 부인사에 모셔져 있던 대장경의 힘이었다는 관점 등이다.
몽고군이 굳이 부인사를 침입하여 대장경을 소각하였던 일이나,
실제로 최고 권력자인 최우가 대장경을 다시 조성하고자 하였던 일 등이
모두 이같은 불력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최우가 가지고 있었던 불력 이해와는 다른 방식이 있다.
그것은 최우와 대립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수기대사의 입장이다.
작가는 고려대장경 판각불사의 총책임자였으며,
그 과정에서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한글대장경, 135)이라는 저술을 남긴
수기대사의 입을 빌어 최우의 불력이해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불력 개념을 제시한다.
"어찌 그리 허약하고 무책임한 말씀을 하십니까?
불력으로 적을 퇴치할 수 있다면 왜 부인사의 장경은 적의 손에 불타고 말았습니까?
불력은 적을 무찌르는 무기가 아니라 중생을 제도하는 힘입니다.
백성들이 두터운 불심을 바탕으로 뭉치고 그리고 용기를 얻어 적과 맞서 싸워 이겼을 때
비로소 불력은 국력이나 병력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장경 판각이 곧 불력이라 혼돈하시며, 판각된 장경이 곧 적을 무찌르는 힘이라고
오해하시는 겁니까?"(92쪽)
이같은 수기대사의 말 속에
두가지 차원의 불력 이해가 모두 등장하고 있는데,
첫째의 불력 이해는 부정되면서도
둘째의 불력 이해는 긍정되고 있는 것이다.
`백성들이 두터운 불심을 바탕으로 뭉치고,
용기를 얻어'서 생기는 힘이 전정한 불력이라는 입장이다.
민력이 곧 불력이다.
물론, 《소설 대장경》에서는
이같은 불력에 의해서 외적을 격퇴했다는 이야기까지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 역사 역시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몽고군의 지배 아래에서 피난지 강화를 중심으로 한
16년간의 대불사의 성취는 결코 왕실이나 권문세족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했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부처님을 중심으로 민력이 굳게 뭉쳤다는 이야기는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불력에 대한 작가의 비판은 불력 자체의 부정이라기 보다는
불력이해의 새로운 차원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지난 3년 동안 `고려대장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불사에 동참하면서
나는`고려대장경'을 판각한 사람들의 힘에 놀라워했다.
전쟁 중이었고, 정부가 피난 중이었고, 더욱이 컴퓨터.전기.에어콘 같은 것은 없었지 않은가.
정녕, 《소설 대장경》 속의 근필과 같은 예술가적 광기라 할까, 필생의 신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번에 《소설 대장경》을 읽으면서
새로 인식한 일이 하나 있다.
바로 `고려대장경'의 한 글자 한 글자마다 피가 어려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메마른 결론만 기록하는 정사가 담을 수 없었던 눈물과 한.원.고통.죽음 등을
작가의 능숙한 솜씨는 고스란히 건져 올리고 있다.
천여명의 승속이 몰살당한 부인사 판전 수호작전,
몽고군의 군량미를 빼앗아서 불사미를 조달하던`삼적떼(=의병떼)'들의 몰살,
폭풍에 수장된 뱃사람들, 벌목하는 과정에서 죽은 사람들,
몽고군에 짓밟혀서 자살한 필생 장군의 누나 등…. `고려대장경' 뒤에는
수많은 목숨들의 공양이 있었다.
죽은 자의 원력은 죽음을 넘어서 산 자의 생명력으로 작용한다.
이렇게 이어지는 원력의 끈.생명의 끈은 부인사 주지스님의 사리로 상징되고 있는데,
구사일생 홀로 살아남은 근필을 통하여 수기대사에게 이어진다.
《소설 대장경》은 깊은 감동을 주는 책이다.
- 김호성의 책이야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