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7:7]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줄 알았나이다..."
지금 저희는...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 예수는 자신의 구체적인 선교 사역이 아버지에게 의존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본절을 앞절과 연결시켜 이해하면, 본절은 제자들이 예수 자신의 말씀을 지킴으로 아버지의 말씀을 지킬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근거를 제공한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란 단지 예수의 말씀'이나 '이적'등 사역에 필요한 요소들 뿐만 아니라 예수 안에 포함된 모든 것들을 강조하여 표현한 말이다. 반면에 제자들이 '알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비밀을 다알았다는 의미보다는 예수의 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에 대한 지식일 것이다..
한편 '지금'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예수의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던 제자들이 드디어 예수의 모든 것이 하나님과 연유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를 강조한다.
[요 17:8]"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내게 주신 말씀들을...받고...아오며...믿었사옵나이다 - 헬라어 원문에서 본절은 '왜냐하면'으로 시작함으로써 앞절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여기서 '말씀'은 입술로써 이야기한 것과 같은 하나님의 개개의 말씀들을 지칭한다. 이는 말로써 전달한 사상을 뜻하고 '로고스'(6, 14절)와 구분된다.
본서에서 '로고스'는 말이라는 의미 보다는 '예수의 인격'과 관계되어 더 많이 사용되었다. 한편 본절 속에는 다섯 개의 부정 과거 동사가 나온다. 먼저, 두 개는 예수께 관한 것이며 나머지 세 개는 제자들에 관한 것이다. (1) '나오다'와 '보내다'는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역사적인 사실을 나타내는 부정과거로 사용되었다.
반면에 (2) 나머지 세 개 즉 '받았다', '믿었다' 등은 제자들의 영적 상태의 변화를 암시한다. 제자들은 동시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의심을 품고서 말씀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께 대한 이해와 지식으로 성장해 갔으며 그 앎(16:30)으로부터 믿음이 생겨났다. 물론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시간적 순서를 엄격히 규정하기란 쉽지 않으며 어떤 면에서 이 두 표현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따라서 보다 중요한 것은 안다는 것과 믿는 것은 순서에 관계 없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절에서 강조하는 바는 말씀을 받음으로 그들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 17:9]"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 본절에서 예수께서 위하여 간구하는 대상을 제자들에게만 제한시키셨다고 해서 세상을 위하여 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제자들은 세상과 구별되어 있다.여기서 아버지와 아들과 제자들은 밀접한 상호 관계로 연결되어 있으며 예수는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유지시키신다.
특히 '비옵나니'의 헬라어 '에로탄'은 종속 관계에서 사용하는 '아이테인'과는 달리 대개 동등한 위치에서 말하는 것을 가리키며, 이는 곧 중보자로서의 예수의 신적 신분을 시사한다. 한편 예수께서는 '세상'을 위해서도 기도하신다.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궁극적으로 세상 역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대상이다.
본장 속에서도 예수는 세상이 '믿을 것과 세상이 '알게 될 것'을 위해 기도하신다. 예수는 제자들의 죄만을 짊어지신 것이 아니라 세상 죄를 짊어지셨다'그는 세상의 어리석음과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기도하셨다(눅 23:34). 세상은 제자들과 달리 하나님과 대립적인 위치에 있다.
따라서 그 기도의 내용이 서로 다른 것은 필연적이며, 세상을 위한 기도는 더 이상 세상이 '세상적'이지 않기를 구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회개에 이르기를 구하는 것이다. 예수는 세상에서 그의 말씀을 듣고 회개를 외쳐야 하는 제자들을 위해 먼저 기도한다.
[요 17:10]"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내 것이온데 - 모든 피조물은 모두 이와 같이 고백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라는 말씀은 피조물 중에 누구도 따라할 수 없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동등함을 증거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내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의 말씀'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 '그에게 속한 제자들' 뿐만 아니라
창세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지녔던 신적인 존재와 영광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의 인성은 아버지의 것이며 아버지의 신성도 예수의 것이다. 이것은 아들 예수와 아버지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 무이한 부자 관계로서 예수의 계속적인 중보(中保) 사역을 보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저희로...영광을 받았나이다 -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완수하여 세상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신 예수는 제자들로부터 영광을 받았다고 완료형으로 기록한다. 이러한 완료형은 제자들의 복종적인 믿음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미 영광을 받으셨음을 시사함과 아울러 장차 제자들의 신앙 고백과 복음 사역을 통해 영광받으시게 될 것을 암시한다.
외관상 제자들이 동시대의 사람들과 달리 특출한 신앙을 보였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말씀하심은 제자들의 장래에 대한 예수의 신뢰와 확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혹자는 이 완료형 시제의 사용을 저자가 보다 후대의 관점에서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하나 그다지 합당하다고는 보기 힘들다.
[요 17:11]"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할 시간이 임박해짐에 따라, 자연히 예수의 관심은 황량한 세상에 남는 제자들에게 닥칠 위험에 집중되었다. 본절의 기도 내용은 특별히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승천에 이르는 비교적 짧은 시간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할 수 있다.
예수는 부활 승천 후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또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보내시고 성령 안에서 제자들을 계속 보호 인도하실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죽음에서 승천에 이르기까지의 막간에는 예수께서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만 제자들을 맡기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 세상의 죄악과 대조를 이루는 '거룩하다'라는 단어가 아버지의 칭호에 붙여졌다.
'거룩한 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은 본질적인 의미에서 동의어 반복적 표현이다. 아버지의 이름 즉 본질은 모든 죄와 분리되어 있고 대립되어 있기 때문에 거룩한 아버지에게 죄악 가운데 남겨두는 제자들의 보전을 간구하는 것은 조화를 이룬다. 또한 이 말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고 말씀하심으로 세상으로부터 성별을 요구하셨던 것과 같이 제자들에게 당신 안에서 세상과 성별되기를 바라는 예수의 간구를 담고 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보전하사 - 헬라어 '테레오'는 '조심스럽게 돌보다', '굳게 붙들다', '보호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며 본장에서는 '제자들이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제자들을 보전해야 할 대상은 세상의 악이며 그 수단은 하나님의 이름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계시 특히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모든 신성과 뜻을 가리킨다.
이후에 사도들은 자신들의 복음 사역의 능력이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고백한다. 우리과 같이...하나가 되게 - 아버지의 이름은 세상의 악으로부터 저희를 성별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저희로 하나가 되게 하신다. '하나'가 되는 근거는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이다. 예수는 고별 설교 속에서도 연합과 하나됨을 계속 강조하셨으며. 본장 기도 속에서도 계속 반복하고 있다.
'하나가 되게'라는 표현에 대한 여러 견해를 살펴보자. (1) '하나가 되게'가 아니라 '하나로 계속 있게'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 제자들은 이미 아버지가 '예수에게 주신 이름에 의하여 하나가 되었으므로 계속 하나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지켜 달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2) 제자들은 독립된 여러 개개인들로서가 아니라 연합된 하나로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보는 견해((3) 제자들이 예수 안에서 서로 연합하여 유기체적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세상의 온갖 불의와 죄악으로부터 성별되고 보호받아야 함을 뜻한다는 견해. 이중 세번째가 가장 자연스럽게 이해되지만 나머지 두 견해도 보완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
[요 17:12]"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 지상에 계셨을 '때'를 언급하신 것은 그의 사역이 완성 단계에 있음을 시사한다. 예수는 지난 날을 회상하면서 그의 사역이 아버지의 이름에 의존되어 있었음을 고백하며 이를 이후에도 아버지께서 보전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 한편 본절에서 '보전하다'와 '지키었나이다'가 나란히 언급되었다.
전자는 6, 11절 등에서 두루 사용되었으나 후자는 본절과 12:25에서만 나온다. 후자는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대한 방어라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한다. 그러나 두 단어는 '보전'과 '보호'를 강조하는 의미에서 동의적으로 반복되었으므로 서로의 위치가 바뀐다 해도 별다른 의미 차이를 드러내지 않는다.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
이 말은 명백히 가룟 유다를 지칭한다. '멸망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헬라어 '아폴뤼오'는 일반적으로 종말론적인 완전한 파멸 또는 저주를 의미한다. 살후 2:3에서 이 단어는 예수 재림 전에 일어나는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을 칭할 때 사용되었다. 유다를 '멸망의 자식'이라고 부른 것은 그의 종국적 운명이 멸망에 처하게 되어 있다는 의미보다는 그의 인격 자체가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을 정도로 타락되어 있다는 의미에 가깝다.
유다는 엄연히 자신의 주관적 결정에 따라 멸망의 길을 걸어갔을 뿐이다. 따라서 유다의 반역은 예언을 통해 이미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다의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보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성경을 응하게 함 - 유다는 자신의 독자적 의사에 따라 행동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성경의 예언을 성취시켰다.
이 예언된 말씀은 예수께서 직접 인용하신 바 있는 시 41:9을 가리킨다. 혹자는 시 55:12-15 등의 말씀을 추가하기도 한다 또한 사 57:12과 같은 적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유다에게 적용한다 할지라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