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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19 고향의 죽마고우 세가족
죽마고우 하링이서 태어나고 어린시절 추억이 깃든곳, 고향의 풀냄세가 가득한 내가살던 고향 와룡!
하링이는 어머님의 품안같은 포근한 느낌이 드는곳이라네.
죽마고우 예닐곱 어린이들이 고향의 향수를 느끼고자 그시절 추억을 그리워 하며 세가족이 두어달에 돌아가며 유사를 하는디 오늘은 김제 참예우한우프라자에서 세가족 죽마고우들이 만나 육사시미와 냉면으로 점심을 들면서 안부를 나누고 추억을 나누었다.
오늘 유사는 한용친구가 김제 참예유한우프라자로 예약하여 냉면과 육사시미로 들었는디 맛이 좋더구먼.
다들 나이들먹어 석양의 시절에 건강을 다짐하는 자리가 되얐지.
사람사는 일이 별것이여. 다들 거기서 거건거여.
하루 밥 세끼 먹으며,
친구들과 만나서 식사하며 정을 돈독히 쌓아가는것이 인생이여.
하링이의 유래는 마을이름 와룡, 화룡에서 유래된것 같은디 부르기 좋게 "하링이" 사투리로 부르게 되여 조동화는 구수한 고향사투리로 "하링이"라고 부르는바이여.
두글자로 부르는 와룡보다는 하링이가 정감이가는 마을이름이여.
하링이 죽마고우여.
오늘 무엇보다도 참예우 육사 맛이 좋아 입이 즐거웠지.
고향 산천은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안식처이기에 죽마고우 만나면 그냥 좋은거여.
죽마고우의 뜻은 대나무로 만든 목마를 같이 타고 놀았던 친구라는 뜻으로,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사귄 친구를 의미하며, 한문으로는 竹馬故友로 쓰고
개별한자의 뜻은 '竹 : 대 죽, 馬 : 말 마, 故 : 연고 고, 友 : 벗 우'입니다.
죽마고우(竹馬故友)란 고사가 피부에 와 닿는 어린 시절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하링이 죽마고우가 70넘은 어른이 되어 예닐곱살 추억을 뒤 세기게 하는구나.
모임때마다 어린시절 동심의 추억을 느끼게 하나이다.
병창아저씨는 동화보다 학렬이 높은디 나이가 비슷하여 꼬맹이적에 산천을 쏘 다니며 삐비도 뽑아먹고, 개구리도 잡고, 새도 잡고, 뒤동산에 올라가 딩굴고 놀고 불놀이 하고 해질력무렵 둠벙이나 미날깡에 나가 왕잠자리 잡던 추억도 생각이 나고, 내가 고구마도 한용이네 집에 가서 많이 얻어 먹었제.
죽마고우 황한용은 농사를 지으며 어머님을 모시고 살고 있으며 장남은 육사를 졸업하여 중령으로 복무하고 있는디 계룡대 육군본부로 전근, 자주 시골고향집에 오고 있다 하였지.
정규 육사를 나와 장교가 되여 현재 중령으로 국가에 이바지하는 훌륭한 아들을 길러내느라 시골 하링이서 농사일하며 친구의 살과 뼈가 닳았겠구나.
하링이서도 장군이 탄생하길 기대 해야지
황한용 죽마고우의 어머님은 95세로 건강하게 지내고 계시며, 우리어머님보다 2살아래이시다.
죽마고우의 어머님 “태미떡” 어린시절에는 이름으로 알았으나 시집온 지역명으로 칭호하였다.
“태미댁”을 사투리로 “태미떡” 그렇게 불렀다.
죽마고우 황한용친구의 어머님이 건강하게 활동하시기를 조동화는 늘 기도하며 살아갈 것이다.
죽마고우 황한용 어머님의 만수무강 빕니다.
시골의 고향은 수백년동안 선조들이 조상대대로 살았던 삶의 터전이었지만 지금은 외지인이 상당히 들어와 고향의 향수가 많이 퇴색한 느낌이나, 죽마고우의 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제.
한번 왔다가는 인생의 길에서 부와 명예 혹은 자유와 쾌락, 행복 등등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서 모두들 악착같이 살고 있으나,
남은 삶의 여정 건강관리 잘하여 오래 오래 만나자구려.
죽는데에는 순서가 없다.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애써 죽음을 외면하면서 살 뿐이다.
그러고 본개 인생사는거 별것 아니여.
그냥 그려려니 다둑다둑하면서 남은 세월 잘 살면 되야.
고향의 한용 죽마고우여!
인자 우리시절은 누구 눈치보며 살 나이 아니여.
내말 명심혀.
인생 70 넘으면 가는순서가 없는거여.
농촌일이 바쁘기도 하지만 너무 일에 매몰되지 말고 쉬어가면서 천천히 하길 바래.
하루종일 밭에서 일한다고 누가 내인생 살아주는거 아니여.
술도 먹고 싶으면 술도 먹고 쉬고 싶으면 쉬고 그렇게 하여야 혀.
일도 쭐이고 쉬면서 일하그라.
알었는가.
70고개를 넘어서 인생이라는 것을 알만한 나이가 되얐지.
우리세월은 아름다운 것, 즐거운 것, 행복한 것, 맛있는 것, 추억할 것, 배려할것을 좇아 삶을 사는 것이 현명한 삶이여
다음 유사는 동화가 주관하여 2024년 8월 중 적일을 택해야 되겠구먼
건강관리 잘허고 다음 만나는 날을 기약하자구.
황혼의 계절에 열심히 활동하여 건강관리 잘 하시고 집안에 행운의 여신이 깃들기를 소망하나이다.
감사합니다.
<조동화의 손녀딸 혜윤이가 미열이 발생하여 유치원을 않보내고 김제 죽마고우모임에 따라왔다.
2020.11.19.에 출생하여 3년8개월째 되는데 나이는 다섯 살이 되어 유치원에 다닌다.
말도 잘하고 재롱도 많이 부리며 개성도 독특하다.
며느리가 군청에 공무원으로 출근하니 혜윤이가 초등학교 댕길때까지는 돌봐주어야 꿈을 펼치겠지.>
<옛시절 하링이 사람들의 사진첩>
<천주교 전주교구 김제 요촌성당 와룡공소 와룡공소장 최영범선생과 와룡신도들이 기념사진을 남기어 오래된 사진으로 보이는데 칼라사진이 있었구나.
나이드신 어르신분들은 저세상으로 가시고 한용친구 어머님만 살아계시구먼.
우리어머님 모습도 보이네.
와룡공소 역사는 요촌성당 관할로
71.8.15 신설(이때는 미사공간이 없어 아마 집에서 미사집전 했을거여)
77.9.21 성당기공식(요촌성당 박창신신부님 부임후 예산배정으로 기공식)
79.2.18 준공.
와룡공소는 공소장 최영범선생의 작고와 더불어 신도도 줄어들어 어느때 폐소하고 말았제.>
<옛날 옛적의 사진속 고향 어른들은 모두가 저세상 하늘 나라로 가시었으나 추억을 세기고자 회상해 보았다.
맨좌측에 서 계시는 안경쓰신 어른이 조동화의 아버지이시다.
시력이 좋으셨는데 아마도 멋이 있으라고 안경을 쓰신 것 같다.
아버님께서 이세상에 오시여 조동화를 만드시었다.
조동화의 아버지 조병옥님은 여느 아버지와 같이 큰아들 동화가 잘되라고 인도하고 기도하시었다.
키는 크지 않으셨지만 멋쟁이셨다.
늘 아버지는 양복차림에 넥타이를 메고 외출하시었다.
농촌에 사시면서도 일은 많이 하지 않으셨다.
이리도 한세상 저리도 한세상 즐거웁게 사시다 가시었으면 되얐지요.
인생이 100년도 못살면서 1000년어치의 걱정을 하고 살면 않되지요.
조동화의 아버지는 멋지신 분이었지요.
염문도 많이 뿌리시었으나 아들사랑은 극진 하시었지요.
사진속 와룡 동네 어르신들은 모두가 이세상을 떠나시었지만,
남원 광할루 구경을 가시었나 상상해 봅니다.
정구형 아버님도 우리아버님 옆에 서 계시는데 정구형 한번 알아맞추어 봐요.
정구형 아버님은 동네 세멘일을 하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네요.
하도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정구형 아버님 조남이 "점자 동자"가 맞으신지 모르겠네요.
내가 머리를 헤메이다가 기억을 되살려 보았네요.
그러고 윗줄 오른쪽 첫번째 서 계시는 윤상용(1935년생)고향 어른도 보이네요.
조동화보다는 15세 더 드시었다.
조동화의 아버님은 자식들에게 훌륭히 되라고 기대를 많이 하시었는데, 어디 자식들이 부모마음처럼 잘 따라줍니까.
양념딸 월선이를 많이 사랑해주고 아끼었다. 이세상에 아니계시니 잘 해드릴수 없네.
인생의 시계를 되돌릴수 있다면 아버지의 회한가를 부르지 않을텐데 조동화는 눈물로 참회하며 지극하신 아버님의 마음을 압니다.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은 아버지 존경합니다.>
아버지의 눈물
시인-이채
남자로 태어나 한평생 멋지게 살고 싶었다.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하며 떳떳하게 정의롭게 사나이답게 보란 듯이 살고 싶었다.
남자보다 강한 것이 아버지라 했던가!
나 하나만을 의지하며 살아온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위해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하지 못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 세상살이더라.
오늘이 어제와 같을지라도 내일은 오늘보다 나으리란 희망으로
하루를 걸어온 길 끝에서 피곤한 밤손님을 비추는 달빛 아래 쓴 소주잔을 기울이면 소주보다 더 쓴 것이 인생살이더라.
변변한 옷 한 벌 없어도 번듯한 집 한 채 없어도 내 몸 같은 아내와 금쪽 같은 자식을 위해 이 한 몸 던질 각오로 살아온 세월.
애당초 사치스런 자존심은 버린 지 오래구나
하늘을 보면 생각이 많고 땅을 보면 마음이 복잡한 것은 누가 건네준 짐도 아니건만 바위보다 무거운 무겁다 한들 내려놓을 수도 없는 힘들다 한들 마다할 수도 없는 짐을 진 까닭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울어도 소리가 없고 소리가 없으니 목이 메일 수밖에 용기를 잃은 것도 열정이 사라진 것도 아니건만 쉬운 일보다 어려운 일이 더 많아 살아가는 일은 버겁고 무엇하나 만만치 않아도 책임이라는 말로 인내를 배우고 도리라는 말로 노릇을 다할 뿐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울어도 눈물이 없고 눈물이 없으니 가슴으로 울 수밖에 아버지가 되어본 사람은 안다.
아버지는 고달프고 고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버지는 가정을 지키는 수호신이기에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약해서도 울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그래서 아버지는 혼자서 운다.
아무도 몰래 혼자서 운다.
하늘만 알고 아버지만 아는........................
조동화는 알어 아버지가 되어봐서 아버지는 아무한테도 말못하고 혼자서 울지.
아버지는 강해야 되니까..............................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고인이 되얐는데, 우리어머니는 솜리떡 양국떡 송방리떡도 보이는구먼. 떡이 뭐여 댁이 맞은데 사투리 떡으로 불리었지.
동네 어른들이 부부동반으로 놀러 나가시었는데 관망대 같기도 하다.
남자어른들은 여떫분인데 여자분들은 여섯분이여.
두분 어디갔어. >
<오래된 사진인데 정구형 어머님도 보이네.
순박한 시골 와룡의 아낙네들이여.
조동화어머님도 계시고.
흰저고리가 놀러가는데 외출복이었구먼.
어머님들은 거의 대부분 저세상에 가시었고 사진속 아가씨는 좋은 인연만나 어디엔가 시집가서 잘 살고 있으리라.
안고 있는 아기가 누구인지 장성하여 시집가서 자식 낳고 살고 있겠지.
석종이가 보이는데 가방을 메고 있구먼. 고인이 되였지만 선들아주머니(선들떡)도 보이고.>
<내가 어린시절 나의 할아버지가 비슷한 동네 어르신들과 사진을 찍어었구먼.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어디 금산사 가서 찍은 사진 같소이다.>
◐ 다섯 가지가 즐거워야 삶이 즐겁다 ◑
첫째, 눈이 즐거워야 한다.
눈이 즐거우려면 좋은 경치와 아름다운 꽃을 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행을 자주 해야 아름다운 경치와 아름다운 꽃들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가능하다면 해외나 국내 여행을 자주 하여야 할 것 같다.
외국 사람들은 돈을 벌어 어디에 쓰느냐고 물으면 여행하기 위해 번다는 사람이 많다.
여행은 휴식도 되고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는 기회도 되는 것이다.
꼭 여행만이 눈이 즐거운 것은 아니다.
개인에 따라 여행이 여의치 않는다면, 하루 시간 중 짬나는 대로 웃기는 글이나, 웃기는 사진을 보면서 맘껏 웃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것이 바로 즐겁게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둘째, 입이 즐거워야 한다.
입이 즐거우려면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먹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식도락가는 아니더라도 미식가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미식가는 맛있는 음식을 찾는다.
지방에 따라 그 지방의 유명한 향토 음식이 있다.
특별한 향토 음식점을 미리 알아보고 찾아가는 것이 현명하다.
셋째, 귀가 즐거워야 한다.
귀가 즐거우려면 아름다운 소리를 들어야 한다.
계곡의 물소리도 좋고 이름 모를 새소리도 좋다.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듣는 것도 귀가 즐거운 것이다.
조용히 음악을 감상하는 것이 정서에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음악을 즐기는 사람치고 마음이 곱지 않은 사람이 없다.
넷째, 몸이 즐거워야 한다.
몸이 즐거우려면 자기 체력과 소질에 맞는 운동을 하여야 한다.
취미에 따라 적당한 운동을 하면 건강에도 좋고 몸도 즐거운 것이다.
다섯째, 마음이 즐거워야 한다.
마음이 즐거우려면 남에게 베풀어야 한다.
가진 것이 많아야 베푸는 것이 아니다.
자기 능력에 따라 베푸는 것이다.
남에게 베풀 때 정말 마음이 흐뭇한 것이다.
마음으로라도 베풀어야 한다.
남을 칭찬하는 것도 베푸는 것이다.
마음이 즐거워야 진정한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좋은글 중에서-
임종 직전 '죽을 때 가장 후회되는 다섯 가지
◆내 뜻대로 한 번 살아봤었다면…
임종을 앞둔 환자들은 평생 내 뜻대로 살아보지 못한 것에 대해 가장 후회를 많이 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기대에 맞추는 ‘가짜 삶’을 사느라, 정작 사람들은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누리며 사는 ‘진짜 삶’에 대한 용기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말기 환자들은 자신의 삶이 끝나갈 때쯤에야 자신이 얼마나 많은 꿈을 이루지 못했는지를 뒤돌아보며 부끄러워했다.
◆일 좀 적당히 하면서 살 것을…
이 같은 후회는 대부분의 남성 말기 환자들 입에서 나왔다. 돈벌이에 매달려 직장에 파묻혀 사는 동안 자식의 어린 시절, 부인과의 따뜻한 가정생활을 놓친 것을 후회했다. 여성들도 일부 이 같은 후회를 했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만 했던 가장들은 대부분 쳇바퀴 돌듯 직장 생활에만 매진했던 것에 대한 후회가 컸다.
◆내 기분에 좀 솔직하게 살았다면, 화내고 싶을 땐 화도 내고…
다른 사람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으려고 사람들은 얼마나 자신들의 감정을 숨기고 살아가는가. 말기 환자들은 평생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표출해보지 못하고 살아온 것을 후회했고, 심지어는 분노의 감정을 너무 숨기고 살아 ‘병’으로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였다.
◆오래된 친구들과 좀 더 가깝게 지낼걸…
사람들은 자신들이 삶을 마감하기 고작 몇 주 전에야 ‘오랜 친구’들의 소중함을 깨닫곤 했다. 친구들이 보고 싶어 수소문을 해보기도 하지만, 정작 그때쯤엔 자신의 수중에 친구들의 연락처조차 없다는 점을 깨닫고는 좌절했다.
◆좀 더 내 행복을 위해, 도전해볼걸…
마지막으로 임종 직전의 사람들이 후회하는 것 중 하나는 놀랍게도 자신의 삶을 보다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평생 노력해 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은 현실에 안주하느라 좀 더 모험적이고, 좀 더 변화 있는 삶을 살지 못한 점을 아쉬워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척’ 하느라고 삶의 활력소를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못한 점을 후회하는 환자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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