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신묘한 술잔입니다. 잔 가운데 봉긋하게 솟은 꽃술 모양의 작은 기둥이 하나 있는 것을 제외하면 여느 술잔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술을 따르다 보면 놀라운 현상을 보게 됩니다. 잔의 7부정도까지 술을 채울 때는 평범하던 술잔이 그 이상으로 차오르게 되면 갑작스레 잔 속에 있던 술이 한 방울도 남김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술잔 가운데 있는 조그만 기둥에 있는 구멍을 통해 술잔 바닥으로 술이 다 새어나가는 것입니다.
이 술잔의 이름은 계영배(戒盈杯)입니다. 이름 그대로 경계할 계(戒), 찰 영(盈), 잔 배(杯) 즉 '넘침을 경계하는 잔' 으로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계영배의 유래는 춘추시대에 제환공(齊桓公)이 군주의 올바른 처신을 위해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경계하며 늘 곁에 놓아 마음을 가지런히 했던 그릇(欹器)이라 하여 유좌지기(宥坐之器)라 불렸다는 이야기에서 찾습니다. 후에 공자(孔子)가 제환공의 사당을 찾았을 때, 그릇에 구멍이 뚫려 있음에도 술이 새지 않다가 어느 정도 이상 채웠을때 술이 새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총명하면서도 어리석음을 지키고, 천하에 공을 세우고도 겸양하며, 용맹을 떨치고도 검약하며, 부유하면서도 겸손함을 지켜야 한다며 이 그릇의 의미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 도공 우명옥이 계영배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우명옥은 당시 설백자기(雪白磁器)를 만들어 명성을 얻은 인물로 명성과 재물을 얻자 주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에 빠집니다. 그러다 훗날 이런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이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담아서 정과 성을 다해 만든 것이 바로 계영배라고 합니다. 이후 이 잔은 조선후기의 거상 임상옥(林尙沃, 1779~1855)에게 전해졌는데 그는 이 잔을 늘 곁에 두고 인간의 과욕을 경계하면서 재물을 지키고 가난한 사람을 도왔다고 합니다.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財上平如水 人中直如衡) 임상옥이 남긴 명언입니다. 그는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거상으로 지금까지 이름을 남기고 있습니다.
사람이나 기업이나 어느 정도의 성과를 이루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과욕을 부리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공의 달콤함에 취하기 시작할 때가 중요합니다. 그때에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쌓아온 성과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것 인지 아니면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다 잃게 되는지가 판가름 나기 때문입니다.
많이 가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제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재물이나 권력은 아무리 많아도 늘 부족하기 마련이고 더 있어야 할 절박한 이유는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 또 더 늘이기 위해서 더 가져야 합니다. 외발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끊임없이 페달을 밟아야 넘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욕을 부리지 말라고 계영배는 이야기 합니다. 수천 년을 내려오며 쌓이고 삭힌 선인들의 지혜입니다.
벌써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이 되었습니다. 지난 일년을 되돌아 보고 새롭게 시작하는 2015년을 계획하는 송년회 모임도 많겠지요. 올 모임엔 잔이 철철 넘치도록 술잔을 돌리지 말고 계영배에 술을 담아보면 어떨까요? 남을 위해 나누는 마음을 되새겨 보기 위해서 입니다. 계영배를 기울이며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마시다 보면 새해엔 거상 임상옥처럼 존경 받으며 재물이 쌓이는 큰 복이 열리지 않을까요?
ⓒ김도영20131120
<7부 이상으로 술을 따르면>
<잔 밑으로 모든 술이 다 빠져나가 버립니다.>
<사이펀의 원리 때문이라고 합니다>
출처 : http://blog.naver.com/namu9988?Redirect=Log&logNo=150137133362
첫댓글 삶에 있어서 어디까지가 적정선인지 모른다는 게 문제인 것 같아요.
아차 하는 순간에 모든 걸 잃고만다는 계영배의 경고를 자주 잊고 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