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1월 기윤실은 ‘한국 교회 사회적 신뢰도 조사’를 진행했다. 한국 교회를 신뢰하느냐는 질문에 31.8%가 긍정적으로 답했고,
신뢰하지 않는다는 대답은 63.9%나 되었다. 더 심각하게 보이는 것은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고 대답한 사람이 32.4%나 된다는 사실이다. 굳이
이렇게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고 대답한 비율을 강조하는 것은 전 국민의 30% 이상이 한국 교회에 대해서 전적인 불신을 드러낸 부분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설문조사에 극단적인 대답을 하지 않는 편이다. 평소에 그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했거나, 어떤 혐오나 분노가 섞여 있지
않다면 굳이 이렇게 적극적인 응답을 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이 조사는 코로나19가 시작되기 전에 진행했다. 코로나19가 광풍처럼 지나는 지금
한국 교회에 대해 다시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요즘 교회발 집단 감염 기사에 대한 댓글은 정말 무서운 수준이다. 교회가 코로나19 전파의
매개지라는 이야기는 애교다. 더 심한 욕들은 옮길 자신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신뢰도를 묻는다면 필자는 20%에 이를 자신도 없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도 자신의 종교에 대해 부끄러움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한국 교회 구조는 기대할 것이 없다. 한국
교회를 대표한다는 기관들이 그 역할을 하지 못했고, 교단들조차 무기력했다. 한국 교회 전체 이미지를 좌우하는 기관들은 오히려 갈등과 반목으로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았다. 이들이 만들어 내는 한국 교회의 모습은 어그러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인 것은 지역 교회들의
선전이다. 교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혐오의 수준까지 내려간 상황에서 교회가 전도하는 것은 심히 어렵게 되었다. 이제 기존과 같은 전도
집회나 노방 전도가 사라진 지 오래다. 직접적인 전도는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교회들이 알게 되었다. 결국 교회의 전략을 선행으로
전환했다. 지역 사회에 봉사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것이다. 그동안 지역 사회를 대상으로 전도해 왔는데 이제 지역 사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예를 든다면 지역아동센터나 노인복지관 등을 운영하는 것, 또 사회복지관이나 주중 봉사 등이 있다. 큰 교회가 기관을 통하여 지역
사회에 자리하는 경우도 있고, 작은 교회가 지역 아동들을 돌보거나 지역 도서관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봉사를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교회의 이런 노력을 통해, 한국 교회를 볼 때는 불편함이 있지만 바로 자기 동네 교회에 대해서는 좋은 인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졌다. 교회에서 하는 문화센터나 노인대학 등에 다녀본 사람들이 늘면서 교회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제3자의 입장에서는
비판적인 이야기도 쉽게 하지만 이미 경험한 그 교회에 대해서는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한국 교회와 지역 교회에 대해서 상반된 인상을
가지게 된다.
지역은 새로운 선교지다. 무너진 복음의 터 위에 다시 새롭게 시작해 볼 수 있는 선교지다. 한국 교회가 아니라 바로
그 교회, 동네에서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우리 동네의 교회가 되면 가능성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글에서는 마을목회를 살펴보고자 한다.
교회는 일찍이 지역을 기반으로 시작했다. 서신서에 보면 모든 교회가 지역명을 따르고 있다.
예루살렘교회, 고린도교회, 데살로니가교회, 안디옥교회 등 중세에는 교회가 지역의 중심이었다. 모든 도시마다 교회는 가장 중심에 자리했다. 그런데
중세에는 교회가 권력이었다. 교회는 공동체라기보다는 지역의 지배자였다. 주교는 곧 성주와 같았다. 공지영 작가의 수도원 기행에는 재미있는 대목이
나온다. 한 수도원을 설명하면서 이 수도원은 선한 일을 행했기에 프랑스혁명 때 농민의 습격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 말은 이 수도원을 빼고는
모두 다 농민의 습격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혁명이 일어났을 때 수도원이 습격을 받았겠는가. 그것은 수도원이 그 지역의 지배자였기
때문이다. 농민들이 수도원의 땅을 붙여 먹고 사는데 그 수탈이 너무 심했던 탓이다. 그래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 수도원을 습격하고 불을 질러
버렸다.
이러한 구조를 바꾼 것이 바로 종교개혁이다. 개신교는 지방 군주들과 함께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루터의 두 왕국론은 바로
이러한 정황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복음과 사랑을 주고, 정부를 통해 율법과 채찍을 줬다. 교회와 정부는 대립이 아닌 한 뜻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다. 이 말이 당시에는 상당히 혁명적이었다. 그 전까지 유럽 역사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교황이 끊임없이 권력 암투를 벌인
역사였다. 그들은 직접 전쟁과 영토 다툼을 벌였다. 때론 교황이 황제를 굴복시켰고, 때론 황제나 국왕이 교황을 폐위하고, 새로 세우기도 했다.
그러한 세속 안에서의 다툼과 싸움은 종교개혁으로 끊어졌다.
루터교는 이러한 신학적 근거로 정부에 잘 협조한다. 정부를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그 안에서 교회 역할을 찾는다. 그러나 보니 루터교는 상당히 긍정적인 세계관을 가진다. 세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그 역할을 찾는다. 종교개혁 당시 교회규정집을 보면 단지 교회 내의 일만 다루고 있지 않다. 그 안에는 구제, 학교를 세우는 일,
호스피탈을 세우는 일 등 사람들의 도덕적 삶을 전반적으로 다룬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도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루터교가 주류를 이루는 독일이나
스칸디나비아 3개국, 즉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거기에 핀란드까지 포함해 루터교를 국교로 가진 나라들은 복지가 잘 되어 있다. 교회가
복지를 주도하며 공동체 중심의 복지국가를 이루었다. 이러한 전통에 따라 교회는 지역 사회에서 항상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이에
반해 칼뱅주의에 근거한 개신교는 정부와 친하지 않았다. 일부는 정부를 장악하기도 하고, 칼뱅과 같이 한 도시를 주도하기도 했지만 정작 세속
정부와 함께한 역사는 오래지 않다. 그러다 결국 청교도들은 새로운 삶의 정착지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로 넘어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집을 짓기 전에 교회부터 지었다. 마을의 중심에 교회를 짓고, 하나님이 그 나라의 중심임을 선포했다. 교회당은 단지 예배를 드리는 곳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회의가 열리고, 모임이 이루어지고, 실내 모임도 이루어졌다. 즉 교회는 신앙의 중심이면서,
동시에 삶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칼뱅주의는 신대륙에서 나라를 세우며 정교분리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 유럽의 안 좋은 경험에 근거했을
것이다.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지 않을 테니, 정부도 교회에 관여하지 말라고 했다. 한국은 이러한 칼뱅주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정교분리가 기본에
깔려 있다.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는 시작부터 국가적 차원에서나 지역적인 차원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개화기를 이끌었고,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일찍부터 한국의 개신교는 ‘애국애족’의 종교로 자리 잡았다. 그 배경에는 많은 엘리트 계층의
개신교 유입이 있다. 민족 지도자들이 기독교에서 나라의 운명을 보았다. 또한 개신교는 신식 교육을 통해서 많은 민족 지도자를 배출했다. 그러면서
개신교인들은 애국애족자들이 되었다.
당시 한국 교회는 지역 교회를 기반으로 했다. 잘 알려진 《상록수》의 ‘최용신’과 같이
기독교인은 농촌과 마을로 찾아갔다. 최용신은 만 22살의 나이에 지금의 안산에 있는 샘골로 찾아간다. 지금으로 보면 아직 앳된 대학생의 나이에
농촌 운동을 하겠다고 아가씨 혼자 나선 것이다. 거기서 4년을 활동하면서 많은 일을 이루었다. 결국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고 농촌 운동과 교육
운동, 그리고 여성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비단 최용신만이 아니라 수많은 기독 지도자와 청년들이 농촌으로, 마을로 찾아가 계몽운동을
펼치고, 마을 운동을 하며 교회를 세워갔다. 그래서 교회는 지역 교회였고, 교회는 지역의 리더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다.
한국이 산업화·도시화되면서 교회는 급속하게 성장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지역성을
잃었다. 과거 한국 교회는 전통적으로 교회에 지역 이름을 넣어서 교회명을 만들었다. 선교사들의 영향이기도 했지만 지역명에 교회를 붙이고, 이후에
생기는 교회는 번호를 붙였다. 그래서 신의주는 신의주제일교회, 신의주제2교회 등의 교회들이 12번까지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인천에는
인천제이교회가 있어서 그 흔적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도시화의 영향을 받고, 교회가 지역과 상관없이 성장하면서 지역 사회와 고리가 끊어졌다.
오늘날 도시인은 대부분 그 지역에 연고가 없다. 고향도 아니고,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활의 기반이 동일하지도 않다. 심지어 서울 근교는
잠만 잔다고 해서 베드타운이라고도 한다. 또 도시인은 생활 여건에 따라 자주 이사를 다닌다. 도시인이 한곳에 정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교회도 점점 지역 연고를 잃어버린다. 교인들도 지역을 떠나서 교회만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새로 오는 교인도 지역과는 상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지역과의 연관성이 떨어지고, 지역에 대한 부채감도 없어졌다. 교회가 성장하고 전도하기 위해서 지역 사회와 관계를 맺어야 하는
이유도 없어진다. 그러면서 교회는 성장하여 지역과 동떨어진 교회당을 지어 놓고 담을 쌓게 되었다.
이 부분은 한국 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지역과 연관이 없는 성장은 결국 지역 사회와 관계를 끊게 했고, 이것은 결국 교회의 세계관에도 영향을 끼쳤다. 즉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큰 틀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방주로 보게 한 것이다.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방주와 같은 교회로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로 보았다. 하나님이 지어 놓으신 이 세상을 악이 지배하는 악마의 소굴로 보고, 적으로 규정했다. 교회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성도 양육에도 영향을 미쳤다.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세상에서 도피하려는 성도들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동시에 경제적 성공과 같은
사회적 성공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었다. 한국 교회가 만들어 놓은 ‘적극적 사고’, ‘긍정적 마인드’, ‘할 수 있다’ 등의 의식이 그 예다.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태도는 교회가 사회에 대해서는 베풀지 아니하며, 자기 것만 챙긴다는 욕을 먹는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이것이 교회나
기독교인에 대한 이미지 조사에서 ‘이기적’이라는 대답이 항상 1위를 차지하는 이유다.
요즘 사회의 중요한 이슈는 마을 만들기, 내지는 지역 공동체 세우기 등이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 왔다. 초기에는 이러한 운동이 농촌이나 어촌, 또는 지방의 소도시 등에서 많이 지원되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마을 특성화 사업 등이다. 농촌체험마을이나 정보화 마을 사업 등이 마을마다 생겼다. 이에 근거해서 농어촌 예산이 많이 투입되었고,
이러한 사업이 가능하도록 건물을 많이 지었다. 그리고 지역마다 다양한 축제가 생겼다. 지역 특산물 이름으로 생겨난 축제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이렇게 정부 지원으로 각 마을과 각 지역마다 건물이 올라가고, 행사가 생겼는데 그렇게 성공적이지 않았다. 이러한 행사들은 지역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만들어졌는데, 공동체가 세워지기 전에 예산이 먼저 투입된 결과다. 정부가 주도하여 예산을 투입하면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활성화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공동체가 준비되기 전에 예산과 행사가 먼저 들어오니 오히려 분열이 일어났다.
필자가 조사한 한 농촌
지역은 공동체가 잘 형성되고 있었다. 지방정부가 힘을 보태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예산을 주었다. 그런데 큰돈이 들어오니 이권이 생기며 공동체가
무너졌다. 다양한 축제도 양상이 비슷하다. 눈에 띄기 쉬운 것이 축제다 보니 지역마다 만들었는데 특이점이 없다. 오히려 지역 주민은 이러한
행사에 구경꾼이 되기 쉽다. 적지 않은 축제들이 연예인들의 무대로 전락했다. 주객이 전도되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는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생각이 바뀌었다.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행사에 예산을 지원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에 지원한다. 즉 사람들의 모임에 지원하게 되었다. 특히 경기도의
경우는 지역 모임에 많이 투자한다. 취미활동이나 작은 활동, 그리고 지역에 의미 있는 모임 등에 소액 지원을 다양하게 한다. 그리고 경기도
교육청에서는 꿈의학교를 운영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교육을 지역을 기반으로 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들은 교회에
좋은 기회가 된다. 사람 중심의 공동체는 이미 교회에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교인이지만 사회로 보면 지역 주민이고, 시민이다.
더군다나 교회는 다양한 경험이 있다. 자발적 참여는 이미 교회가 축적한 노하우가 많고, 해당 훈련을 받은 사람들도 많다. 모일 공간도 있다.
여러 가지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여건이 된다. 그러면 이제 교회를 개방하면 된다. 공간도 개방하고, 사람들도 개방한다. 우리 교인뿐만 아니라
지역민들을 초청하고 함께하면 훌륭한 공동체가 형성된다. 교회가 그루터기가 되어서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 공간을 시민 공간으로 제공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사람들이 찾아오고 역사가 일어난다. 여기에 지자체나 교육청 등의 지원이 들어오면서 더욱 활성화된다.
일산의
행복한제자교회는 이러한 제도를 잘 활용한다. 작은도서관을 중심으로 다양한 취미 활동 동아리를 만들고, 아이들이 참여하는 꿈의학교도 진행하고,
공동 육아도 하고, 시민 교육도 진행했다. 교회에 일주일 내내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그들 중에 많은 사람은 교인이 아니다. 하지만 교회는 지역에
신뢰를 얻었다. 지역사회의 중심이 되었다.
서울 중구에 있는 문화교회는 지역 내 어린 자녀를 양육하는 엄마들에게 공간을 제공했다.
교인 중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건의로 시작했다. 엄마들 모임이 있어 공간이 필요했고, 교회에 요청한 것이다. 교회의 허락 아래 공동 육아 모임이
교회에서 이루어졌다. 이 모임이 활성화됐고, 교회는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결과적으로 교회에 지역 모임이 모여들었다. 교육 관련된 일에 교회가
중심이 되었고, 지자체와 동사무소에서 지원이 들어왔다. 물론 이럴 때 교회가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지역 공동체 안에 이루어지는 모임에
공간을 제공하고, 여러 가지 지원을 하고, 담당 목회자와 소통할 수 있게 배려했다. 어떻게 보면 교회가 지역 사회의 플랫폼이 되었다. 교회
공간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활동이 일어나고, 점점 중심이 되면서 지역사회의 구심점이 되었다.
서울 강동구의 오빌교회는 작은
교회다. 건물 지하에 교회당이 있고, 매주일 20명 정도 예배에 참석한다. 이 교회는 그 시작에서부터 지역 사회에 다 주는 교회를 표방했다.
지금은 예배 공간을 주중에는 작은도서관으로 활용한다. 그리고 지역 모임을 유치하고, 지역민 중에 강사로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교육프로그램을 유치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아이들과 어른 할 것 없이 다양하게 제공된다. 그래서 주중에는 매일 교회 각 공간마다 모임으로 가득
찬다. 더군다나 마을의 주민자치센터, 그리고 강동구와도 연계해 이제는 강동구의 유지다. 지역보장협의회 의장도 하고 강동구 문화재단 이사도 한다.
작은교회지만 지역에서는 큰 교회의 역할을 한다. 교회의 신뢰, 목사의 신뢰를 높이고 있다.
안산의 밀알침례교회는 경기도의 다양한
활동에 참여해 왔다. 따복공동체나 꿈의학교 등 공동체 활동을 다양하게 펼쳤다. 특히 지역 예술가들과 연계하여 공간을 내어 주고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그러면서 지역민들과도 연계가 생겼다. 속해 있는 동네에서 최근 마을재생사업이 진행되었다. 여기서 담임목사가 큰 역할을 했다. 지역의
리더로서 역할을 감당했다. 그래서 최종 선발 심사에서 목사가 사업 발표를 맡았다. 다른 지역은 공무원이 앞장섰는데 여기서는 목사가 주민 대표가
되었다. 은사를 충분히 발휘한 것이다. 이 동네는 결국 마을재생사업의 기회를 얻어 정부에서 400억 사업을 받았다. 현재 목사는 주민들과 함께
마을에서 꿈을 꾸며, 꿈을 만들어 주고 있다.
마을에서 목사가, 그리고 교회가 앞장 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이미 코이노니아의
공동체를 이루고 경험한 교회가 앞장서서 할 일이 많다.
필자는 교회가 지역 NGO와 연계하는 것을 제안하고 싶다. 지역을 살펴보면 다양한 NGO가 있다. 몇
년 전이지만 경기도 고양시 NGO들을 살펴보니 400개가 넘었다. 지자체를 감시하는 단체,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단체, 자원 봉사 단체, 환경
돌봄 단체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자칫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NGO나 시민 단체라고 하면 정치적 색채를 띤 곳으로 생각하는데 지역에서 보면
그런 단체보다는 지역민에게 실제적인 곳들이 많다.
교회들이 미전도 종족을 입양하듯이 이러한 지역 NGO들을 입양했으면 한다.
교회가 직접 사회를 만나는 것이 점점 어려운 때다. 그리고 교회가 그렇게 직접 사회로 들어가는 것이 좋지도 않다. 새롭게 무엇을 만들어서 사회를
찾아가는 것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지역 NGO들과 연계해 보는 것이 어떨까. 지역 현안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고, 사회 의식도 갖춘 곳이 지역
NGO다. 이들을 통해서 지역 사회 연대도 만들고, 겸손히 참여하면서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다.
많은 사회 단체가 실은 회원이 없고
재정적으로도 어려움이 있다. 뜻은 좋고 사람은 있는데 여건이 안 된다. 그런 단체들에 인적 자원이나 물질적 지원을 해 주면 시너지 효과가 생겨서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또 이런 통로를 확보하면 교회 입장에서도 교인 교육도 되고 의식을 일깨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기독교자살예방센터인 라이프호프를 운영하고 있다. 요즘 우리 단체에서 중점적으로 하는 일은 교회와 지역
사회의 보건소를 연결하는 것이다. 생명을 살리고, 생명가치를 세워가는 일은 교회가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정부에서도 민간 자원으로 종교 기관과
연계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는 분야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여러 지자체에서 교회와 연계해 캠페인 사업도 하고, 교회에서 생명보듬교육도
하고, 자원봉사자를 얻어 지역 사업도 하려고 한다. 실제적으로 파주의 거룩한빛광성교회에서는 파주시정신건강복지센터와 연계해 독거노인 결연 사업을
하고 있다. 가정을 방문해서 심리테스트를 진행하고, 일주일에 한두 번 전화해 안부를 묻는다. NGO와 교회, 그리고 정부기관과의 삼각연대를 통해
마을 목회를 해 나가는 모델이다. 만약 중간에 NGO가 없었다면 이런 연계가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생명보듬운동을 통해 신뢰 있는 NGO가
중간에 다리를 놓으면 이런 연대가 가능해진다.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관심을 가지면 지역 NGO와의 연대를 통해 다양한 활동이 가능할
것이다. 단순히 교회가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봉사가 아니라 지역사회와 함께 연대해 공동체를 세워 나갈 수 있다.
최근 미국에서는
미션얼 처치(missional chur ch)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미국이 더 이상 기독교 사회라고 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선교의
마음으로 교회를 새롭게 하자는 운동이다. 기존 기독교 사회에서는 교회가 좋은 건물을 짓고, 좋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좋은 주일학교를 구축하면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러나 미국을 선교지라고 생각하고, 목회를 선교 사역이라고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목회를 잘한다고 해서 교인이 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교회를 버리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야 한다. 봉사와 섬김, 그리고 사귐과 나눔을 통해서 교제를 먼저 해야 한다. 이것이
미션얼 처치의 기본적인 구조다.
한국은 기독교 사회는 아니었지만, 과거에는 교회에 대한 호감이 자리했고, 그 역할 덕에 전도가 어렵지
않았다. 덕분에 짧은 기간에 경이로운 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지금 한국 교회는 큰 위기에 봉착했다. 더 이상 ‘한국 교회’라는 이름이 주는
장점이 없다. 오히려 적대감이 충만한 사회를 마주하고 있다. 이 어려운 시기에 교회가 살 길은 마을에서 희망을 만드는 것이다. 미션얼 처치의
관점으로 사람들을 사귀고, 그들과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것이
이제 마지막 남은 한국 교회의 희망일지 모른다.
첫댓글 함께~희망을 만들고,함께~공동체를 만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