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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터 섬
이상화 시인
1901년 4월 5일 태어남 / 1943년 4월 25일 죽음
이상화는 1920년대 한국문학 가운데 근대시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대구 출신으로 1919년 경성중앙학교를 수료했고, 1922년 프랑스 유학을 목적으로 도쿄[東京]의 아테네 프랑세에서 공부하다가 1923년에 일어난 관동대학살 때문에 귀국했다. 1921년 현진건의 추천으로 <백조> 창간호에 <말세의 희탄>·<나의 침실로> 등을 발표해 등단했다. 1925년경부터는 박영희·김기진과 함께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에 가입하는 등 사회적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26년 <개벽>에 발표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일제강점기에 민족의식을 표현한 수작으로 꼽힌다. 1940년 이후로는 <춘향전> 영역, 국문학사 집필 등을 계획했으나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오늘의 역사, 4월 5일]
♥식목일: 대한민국, 2006년부터 공휴일에서 폐지.
♥1588년 - 영)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 출생. Thomas Hobbes (1588년 4월 5일 - 1679년 12월 4일)는 근대정치철학자, 최초의 민주적 사회계약론자로 서구 근대정치철학의 토대가 된 <리바이어던, 1651>과 <시민론>의 저자.
가난한 술주정뱅이 목사의 아들이었으나 삼촌의 도움으로 공부.[1] 스페인 무적함대 아르마다가 영국에 상륙한다는 소문에 놀란 그의 어머니가 조산한 칠삭둥이. 1415년에 태어난 조선의 유명한 칠삭둥이 한명회가 163살 많은 형님. 당시 17세기 유럽은 프랑스의 종교전쟁, 영국의 시민전쟁 등에 따른 전통적 사회질서가 불안정한 상태였다. 특히 세 번에 걸쳐 발생했던 영국의 시민전쟁(English Civil War 또는 청교도 혁명, 1642 - 1651)을 지켜본 홉스는 국가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모든 개인들이 극단의 자유를 얻게 된 상태를 가정하고’ 그 경우 인간들이 본질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한없이 추구하며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을 하게 된다고 생각. 이런 투쟁은 내전, 전쟁, 국제관계에서의 갈등 등으로 보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개인이 자신의 자주권을 국가정부에게 스스로 이양하는 것이라고 믿어.[5] 그러다가 자신의 권리들을 보호하기 위해 양도하는 사회계약을 맺고 이 권한을 국가에게 넘겨주게 되는데, 국가의 이름을 <리바이어던, Leviathan, or The Matter, Forme and Power of a Common-Wealth Ecclesiastical and Civil>[2] 이라고 한 것이 책의 제목. 여기서 그는 국가정부와 사회계약 관계간의 일종의 논리적 필연성을 강조하였고, 이것이 실제로 계약을 한다는 것 보다는 내포적 합의를 가진다고 주장.
그는 “국가 정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국가정부는 어떻게 힘과 권력을 얻는가?‘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국가정부에 불복종 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들 다룬 최초의 정치철학자. 그의 ’사회계약론‘은 계몽주의 시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그는 모든 인간 개인과 평등, 그리고 강력한 법 제도의 중요성에 대해 연구,[5] 그리고 그 핵심은 전쟁과 투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평화롭게 살 수 있을지‘를 묻고 고민하는 것.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삶이 야수같이 위험하고 잔인하면서도 짧은 상태였던 ’자연상태‘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라고 보는 관점도 있지만, 또 다른 시각에서는 내전과 국제갈등을 겪고 있는 당시 영국의 상태를 자연상태로 보았다는 관점도 있다.[8] 어떻든 이런 자연상태는 사회를 분쟁과 충돌로 이끈다고 생각. 이런 자연상태를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나중에 존 로크와 장자크 루소로 이어지면서 사회계약론의 주요 흐름이 된다,[6]
하지만, 홉스의 자연상태는 로크나 루소의 그것 보다는 훨씬 더 현실적이다. 이런 혼란과 무질서는 요즘 온라인 게임에서도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무차별 적으로 상대를 다른 유저들의 아이템을 부수고 훔치는 것 그리고 배신(back-stabbing)하는 등의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7]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정부이고, 그는 이를 군주에 의해 다스려지는 ’복지공동체(common wealth)'라고 불렀다. 즉, 자연상태의 무질서나 군중의 폭력보다는 하나의 절대 권력을 인정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을 안전과 치안을 위한 논리로서 ‘치안논리’라고 부른다. 이를 위해서는 1) 개인들 간의 결합의 협약과 2) 주권자에 대한 종속 또는 복종의 협약의 두 가지협약이 필요하다. 개인의 권리를 주권자에게 넘겨주는 대신 치안과 안전을 보장 받는다.
홉스는 자연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상정하고, 그로부터 자연권 확보를 위하여 모두가 동의한다는 계약 즉, 사회계약에 의해서 리바이어던과 같은 강력한 국가권력이 발생하게 된다면서 책 표지를 다음과 같이 직접 도안.
"그림 상반부에 한 인물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그 사람은 머리에 왕관을 쓰고 손에는 힘의 상징을 들었고, 쇠사슬 갑옷을 입은 것같이 보인다. 하지만 갑옷을 자세히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의 머리며 어깨들이다. 이것은 통치의 대권이 무수한 작은 사람들의 자연적 권리를 통치자에게 위임함으로써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자연적 권리를 군주에게 바칠 때에 공민(公民)이 된다. 그 군주, 즉 '리바이어던'[1]이 손에 들고 있는 힘의 상징은 칼과 십자장(十字杖)이다. 홉스가 그것으로써 의미하고자 한 것은, 군주가 속세의 일뿐만 아니라 종교에 관해서도 전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종교도 본래 정권이 마땅히 전적으로 통제해야 할 여러 영역 가운데의 하나라는 것이다. 칼[4]과 십자장 밑에는 또 다른 상징들이 쌍을 지어 깊은 뜻을 암시하는 듯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쌍을 짓고 있는 것은 군주의 대권이 미치는 두 영역을 뚜렷이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이 상징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성(城)과 교회, 왕관과 사교관(司敎冠), 대포와 파문(破門)의 빗장, 전쟁 때 소용되는 갑옷과 변증법의 문서(文書), 그리고 무술 경기와 이교도의 재판 등이다. 홉스는 군주가 모든 인간사에 관하여 절대 권한을 갖기를 원했다. 그러나 종교적 분쟁으로 말미암은 혼란을 주목한 그는, 특히 종교의 교리와 교회 제도에 대한 군주의 통제를 강조하였다. <리바이어던>의 반은 가톨릭교회의 세속적 권리 주장과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의 정치에 관련한 외람됨을 공박하기 위하여 씌어졌다."[2]
하지만, 국가정부가 시민들이 근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방향으로 통치하게 된다면? 그래도 홉스는 저항할 수 없다고 생각. 왜냐하면 사회계약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계약이 아니고, 법적 강요가 뒷받침 된 사회적 규범이 부과된 것이라고 해석. 그가 이렇게 믿은 이유는 사실상 사람들의 양심이 곧 판단이자 심판이라고 믿었기 때문. 또한 그는 합의가 불가능한 곳에서 사람들이 같이 살 수 없다고 생각. 국가의 목적 중 하나는 그런 (양심으로 인한) 불일치를 끝내는데 있다고 본 것.[5]
근대적 사유의 출발점에는 개인의 탄생에서 시작된다. 전통적인 신분질서의 굴레에서 벗어난 새로운 신분질서에 대한 생각이 나타난다. 그러면서 사유의 출발이 신이나 왕권이 아닌 인간 개인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것. 인간을 의지나 이성을 가진 존재로 보는 것. 인간을 독립적인 개체로 본 것.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 전제된다. 여기서 서로 자유를 침해하여 생기는 싸움을 어떻게 조정할 것이며, 공동체적 질서와 평화는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17세기 혼란에 답을 주려고 했던 사람.[8]
[1] https://ko.wikipedia.org/wiki/%ED%86%A0%EB%A8%B8%EC%8A%A4_%ED%99%89%EC%8A%A4
[2] https://ko.wikipedia.org/wiki/%EB%A6%AC%EB%B0%94%EC%9D%B4%EC%96%B4%EB%8D%98
[3] 스털링 P. 램프레히트, <서양 철학사>, 김태길/윤명로/최명관 옮김, 을유문화사, 2008, 381-382쪽. in [2]
[4] 칼은 군주가 교회와 국가를 완전히 장악했을 경우에 달성하게 될 정의를 상징. in [2]
[5] https://video.search.yahoo.com/yhs/search?fr=yhs-adk-adk_sbyhp&hsimp=yhs-adk_sbyhp&hspart=adk&p=%ED%86%A0%EB%A7%88%EC%8A%A4+%ED%99%89%EC%8A%A4#id=4&vid=0d298f4f2a9b8e15f127b27146778435&action=view
[6] 로빈 더글라스. 킹스털리지 대학교수 in [5]
[7] 에스더 맥칼럼-스튜어트 in [5]
[8] https://video.search.yahoo.com/yhs/search?fr=yhs-adk-adk_sbyhp&hsimp=yhs-adk_sbyhp&hspart=adk&p=%ED%86%A0%EB%A7%88%EC%8A%A4+%ED%99%89%EC%8A%A4#id=5&vid=aed401b02e55bf45d7c68980b6712eb7&action=view
[9] 이기라. 토마스 홉스, ‘호모 호미니 루푸수’ 인류 문명을 만들어온 핵심개념 100.https://video.search.yahoo.com/yhs/search?fr=yhs-adk-adk_sbyhp&hsimp=yhs-adk_sbyhp&hspart=adk&p=%ED%86%A0%EB%A7%88%EC%8A%A4+%ED%99%89%EC%8A%A4#id=5&vid=aed401b02e55bf45d7c68980b6712eb7&action=view
♥1732년 - 프) 화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출생.
♥1764년 - 영) 설탕법이 통과. 이 법은 영국 총리 조지 그렌빌의 주도로 영국 의회에서 제정한 관세에 관한 법률. 영국은 7년간 미국에서 벌어졌었던 ‘프렌치 인디언 전쟁’(1754년 - 1763년)에서 입은 막대한 빚을 갚기 위해 설탕법을 활용하려고 했음.[1] 1701~1810년 사이 110년 동안 거의 100만 명의 아프리카 노예들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바베이도스와 자메이카로 팔려왔다. 16~17세기에 설탕은 산업의 중심에 있었고,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과 노예무역, 원거리해운, 도소매업, 투자금융이 서로 결합된 복합산업으로 발전했다.[2]
이로써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세 꼭지점을 잇는 삼각형의 무역이 탄생했고, 이는 당대의 전형적인 무역 형태였고 경로는 다음과 같다: ⓵옷감이나 철기구 등이 배에 실려 유럽을 떠나 서아프리카에서 금이나 노예들과 교환된다. ⓶서인도제도에 도착하여 이 노예들은 설탕과 럼으로 바뀐다. ⓷설탕과 럼은 다시 유럽에서 옷감이나 철기구 등으로 교환된다. 요약하자면,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공산품이 실려 가고,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노예들이 실려 갔으며,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설탕이 실려 갔다. 설탕은 흰 화물이라고 불리었고, 상품으로 전락한 노예는 검은 화물이라고 불리었다. 대서양은 흰 화물과 검은 화물을 가득 실은 배들로 분주했다.[3]
[1] https://ko.wikipedia.org/wiki/%EC%84%A4%ED%83%95%EB%B2%95
[2] 리처드 로빈슨, p. 413
[3] 설탕의 역사, http://seehint.com/word.asp?no=10748
♥1795년 - 주문모 신부에 의해 부활절 미사가 진행되면서, 조선 최초의 천주교 미사가 거행됨.
♥1827년 - 영) 외과의사 조셉 리스터 출생. Joseph Lister (1827년 4월 5일~1912년 2월 10일)는 무균수술법과 혈액, 염증 등의 응고에 관한 관찰을 통해 현대 외과수술에 혁명을 가져온 사람.[1] 19세기까지 의사들은 외과 상처의 감염이 세균때문이 아니라 미지의 독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다른 수술을 하다가 피와 고름이 붙은 일상복 그대로 손도 씻지 않고 다른 사람의 수술을 했고, 환자들의 30~50%가 감염이 문제가 되어 사망했다. 하지만 리스터는 문제가 독기가 아니라 공기중에 떠도는 어떤 물체 때문이라고 믿었고, 1865년에 석탄산으로 환부는 물론 수술에 사용되는 모든 것을 소독하고 수술을 하여 사망률을 급속히 낮추었다. 이 공로로 그는 의사로서는 최초로 남작이 되었고 1998년 Life지가 뽑은 “지난 1천년의 세계사를 만든 100대 인물“에 선정되었다.[2]
[1] 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A7%80%ED%94%84_%EB%A6%AC%EC%8A%A4%ED%84%B0
[2]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4113&yy=2010
♥1852년 - 독) 작곡가 프란츠 에케르트 출생.
♥1860년 - 최제우가 동학을 창설.
♥1879년 - 태평양 전쟁 (남아메리카): 칠레가 볼리비아와 페루에 선전포고. 세 나라가 아타카마 사막의 초석(질산칼륨, 화약을 만드는 재료)지대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어서 초석전쟁(硝石戰爭)이라고 한다. 볼리비아가 칠레의 초석 수출 회사에 과세를 강화하자, 칠레는 리토랄 주를 점령하면서 타라파카 주의 초석 자원 획득을 목적으로 페루에도 선전포고. 1880년 타크나 전투에서 칠레가 페루·볼리비아 동맹군을 패배시키고, 1884년 강화 조약을 통해 페루 땅과 볼리비아 땅을 점령.[2] 이 땅들은 아래 그림에서와 같이 1904년 칠레에 공식 양도된다. 페루 땅 아래와 볼리비아 좌측에 있는 현재의 조그마한 칠레 땅은 원래 페루 땅이었는데 이때 빼앗긴 것. 이 때문에 볼리비아는 바다로 이어지는 영토를 잃고 내륙국이 되고 만다. 전쟁에서 승리한 칠레는 광물 자원 수출로 높은 경제 성장률을 자랑하게 된다.[1]
아타카마 사막은 2003년에 발견된 15센티 크기의 초소형 인체미라가 발견되면서 다시 국제사회에 유명해진다. “아타(Ata)”라는 이름이 붙은 이 미이라는 2003년 발견된 이래 외계인이다, 원시인이다, 소형 원숭이라는 등 다양한 가설이 다양했었는데, 10년 후인 2013년 4월 23일 미국 스탠퍼드 의대의 세리 놀런 교수팀이 연구결과를 발표하면서 논란이 잠재워졌다. (놀런이 논란을 잠재웠대. ㅋㅋㅋ). 그에 따르면 아타는 6~8세의 남자 어린이. 이 미라가 인간의 DNA를 가지고 있었으며, 미토콘드리아 형질분석 결과 칠레 토착민과 같았다고 한다.[3][4]
[1] https://ko.wikipedia.org/wiki/%ED%83%9C%ED%8F%89%EC%96%91_%EC%A0%84%EC%9F%81_(%EB%82%A8%EC%95%84%EB%A9%94%EB%A6%AC%EC%B9%B4)
[2] 안토파가스타와 광물 자원이 풍부한 타라파카 주(옛 페루령), 리토랄 주(옛 볼리비아령)를 병합했다.
[3] Alien-Looking Skeleton Poses Medical Mysteryhttp://www.livescience.com/29176-alien-looking-skeleton-poses-medical-mystery.html
[4] https://youtu.be/0aIgPoFJ4c8 in 15cm 외계인 DNA 검사, "외계인 아닌 6~8살 된 사람에 가까운 생명체". 중도일보. http://m.joongdo.co.kr/jsp/article/article_view.jsp?pq=201304250054#cb
♥1901년 - 일제강점기의 시인 이상화 출생.
♥1908년 - 오)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출생. Herbert von Karajan (1908년 4월 5일 ~ 1989년 7월 16일)은 베를린 필하모닉을 35년간(1955-1989) 지휘한 20세기 음악의 황제이자 2차세계대전후 가장 유명한 지휘자.[1]
[1] https://ko.wikipedia.org/wiki/%ED%97%A4%EB%A5%B4%EB%B2%A0%EB%A5%B4%ED%8A%B8_%ED%8F%B0_%EC%B9%B4%EB%9D%BC%EC%96%80
♥1916년 - 미국의 배우 그레고리 펙 출생.
♥1923년 - 독일 출신의 지식인, 정치활동가 에르네스트 만델 출생.
♥1949년 - 식목일이 제정.
♥1951년 - 한국 전쟁 중 파괴된 한강 철교가 복구.
♥1951년 - 미) 로젠버그 부부가 핵무기 제조 관련 기밀문서를 소비에트 연방에 제공한 스파이 활동 혐의를 뒤집어쓰고 사형이 언도. 집행은 6월 19일 전기의자로 실행.[2]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스파이 협의로 미간인을 사형. 니키타 흐루쇼프는 이들의 간첩활동이 “원폭 생산을 앞당기는데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는 메모를 남겼다고 하지만, 실제 이들의 가치에 대해서 확인은 없다.[1] 그리고 그들이 사형을 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검사 측에 협조하기를 거부한 것이라고 한다. 다른 공모자들은 검사측에 협조하여 모두 구류형에 그쳤지만, 두 아이의 어머니를 사형시키는데 따르는 여론의 악화를 무릅쓰고 판사는 검사 편을 들어 사형을 언도 한 것.[2]
[1] https://ko.wikipedia.org/wiki/%EB%A1%9C%EC%A0%A0%EB%B2%84%EA%B7%B8_%EB%B6%80%EB%B6%80
[2] http://www.kamerican.com/GNC/new/secondary_contents.php?article_no=1&no=2765
♥1956년 - 쿠바) 혁명지도자 피델 카스트로가 바티스타 정권에 선전포고.
♥1969년 - 미) 많은 도시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대규모 반전 시위 발생. 1968년 3월 16일 발생한 미라이 학살이 폭로된 후 반전 운동은 점점 확산. 기억나시나요? 역사상에서는 1년 전이지만, 오늘의 역사에서는 불과 2주일 전인데요.
♥1964년 - 미국의 장군 더글러스 맥아더 사망.
♥1975년 - 중화민국의 총통 장제스 사망.
♥1976년 - 중공) 제1차 톈안먼 사태가 발발
♥1992년 - 페루) 대통령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무력으로 페루 국회를 해산.
♥1998년 - 일) 3800만 미국달러를 들여 혼슈와 시코쿠사이를 이은 아카시 해협 대교가 개통. 이는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로 기록.
♥2006년 - 식목일이 공휴일에서 처음으로 제외.
♥2008년 - 미) 배우 찰턴 헤스턴 사망.
♥오늘은 최제우에 의해 동학이 태어나고 시인 이상화가 출생한 날. 그런데도 다른 기사들이 많아서 ... 다음 기회에 모시지요. 칠삭둥이 토마스 홉스가 당시 영국과 유럽에 퍼져있던 혼란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쓴 책 <리바이어던>은 '치안논리'를 강조한다. <월든>의 작가 쏘로우가 쓴 <시민불복종>과 대비하면서 읽어봐야 할 책.
페루 이야기가 두 번이나 나온 날. 일본인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페루에 심어놓은 문제들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특히 그의 딸 아끼코 후지모리는 여전히 호시탐탐 아빠가 가졌었던 대권을 획득하고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한다는데... <리바이어던>은 후지모리 부녀의 정치활동과 페루의 결정을 뭐라고 설명할 것인지 궁금하다. 공공의 '치안'을 확보하기 위한 양심이 요즘도 존재할까? 17세기 영국과 유럽의 혼란과 요즘 우리가 겪는 혼란은 또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을까?[출처] 오늘의 역사, 4월 5일|작성자 산의로